好學의 교육 3/(국어사전)國語辭典

정묘호란 [丁卯胡亂]

好學 2012. 10. 10. 16:15

정묘호란 [丁卯胡亂]

 

1627년(인조 5) 1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약 2개월간 지속되었던 후금조선 사이의 전쟁.

 

정묘호란 때 후금의 조선 침입로
정묘호란 당시의 장수복, 강화역사관
인조반정 후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을 표방하던 조선에 후금(後金:淸)이 3만 명의 대군을 파견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후 만주의 여진족은 조선과 명의 국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흥기했으며,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차지하기 위해 남하함에 따라 명과의 무력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러던 중 1618년 후금의 누르하치(奴爾哈齊)가 '7대한'(七大恨)을 내세우며 명의 변경요지(邊境要地)를 공격하여 점령하자, 은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명의 원정군을 일으키고 조선에도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하여 조선은 1619년 강홍립(姜弘立) 등이 이끄는 1만 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당시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흥기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따라 강홍립에게 형세가 불리하면 후금에 투항하는 것도 주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강홍립은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심하(深河)전투에서 패배한 뒤 후금군에게 투항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의 출병요구에 부득이 응했다고 해명했다. 누르하치는 그러한 상황을 인정하고 조선에 친화적인 입장을 보임으로써 광해군 때에는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정권은 요동 등주(登州)의 명군과 연계하여 동남쪽 후금군을 괴롭히는 가도(椵島)의 모문룡(毛文龍) 군대를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정책을 내세웠다. 한편 후금에서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太宗)은 즉위 전부터 중국본토 침입 때 자신들의 배후를 칠 우려가 있는 조선을 미리 정복하자고 한 주전론자(主戰論者)였다. 따라서 조선과 후금의 충돌은 예상되는 것이었다. 또한 후금은 명과의 교전(交戰) 때문에 경제교류의 길이 막혀 야기된 심한 물자부족 현상을 타개해야 했는데, 마침 이괄(李适)의 난이 실패한 후 후금으로 도망간 이괄의 잔당이 조선의 병력이 약하고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지졸이라며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후금의 태종은 침략의 뜻을 굳히고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것 등을 구실로 1627년 1월 아민(阿敏) 등에게 3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했다.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부대는 의주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안주·평양을 거쳐 1월 25일 황주에 이르자 인조를 비롯한 조신(朝臣)들은 강화로,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피난했다. 한편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했는데, 정봉수(鄭鳳壽)·이립(李立)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런데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다가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점과, 명을 정벌할 군사를 조선에 오랫동안 묶어둘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강화(講和)의사를 표시했다. 이에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했던 조선의 조정은 후금의 제의를 받아들여 양국 사이에 3월 3일 화의가 성립되었다. 화약(和約)의 내용은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 화약이 성립되면 곧 군사를 철수시킬 것, 양국 군대는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조선은 금과 강화해도 명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 등의 내용이었다. 이 화약은 비록 형제의 국(國)을 규정하기는 했지만 후금군을 철수시키기로 한 것과 명과의 외교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후금군의 무력에 굴복한 일방적 조약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비록 군사적으로는 열세였지만 후금군이 장기적으로 주둔할 수 없다는 약점을 잘 활용한 협상이었다. 이후 조선은 친명배금정책을 계속 추진하면서 그것을 뒷받침할 군사력 배양에 주력하여 수어청의 창설, 어영청의 증강, 훈련도감의 증액 등에 힘쓰게 되었다. 그러나 후금은 군사를 철수시킨다는 약속을 어기고 의주에 군사를 주둔시켜 모문룡의 군대를 견제하면서 세폐(歲幣)·중강개시(中江開市) 등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으며, 1632년에는 '형제의 맹'에서 '군신(君臣)의 의(義)'로 양국관계를 고칠 것을 요구하면서 많은 세폐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경제적 부담이 되어왔던 세폐에 대해서는 절충을 시도했지만,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굴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군신의 의'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절화(絶和)의 태도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636년 다시 후금은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사신을 보내 태종의 존호(尊號)를 알리고 신사(臣事)를 강조했다. 조선이 청과의 싸움을 결정한 후 같은 해 12월 청나라의 침략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