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교육 3/(국어사전)國語辭典

국회프락치사건[ 國會──事件 ]

好學 2012. 9. 18. 22:59

국회프락치사건[ 國會──事件 ]

 

 

제헌국회에서 남조선노동당의 배후 조종을 받은 13명의 국회의원이 ‘주한미군철퇴’에 관한 연판장운동을 전개하고, 정부 각료들의 비행 조사에 나섰던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사건경위〕

세칭 ‘남로당국회프락치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으로 국회 부의장 김약수(金若水), 남로당원인 노일환(盧鎰煥)·이문원(李文源)과 북한공산당의 지령에 적극 동조한 박윤원(朴允源)·김옥주(金沃周)·강욱중(姜旭中)·김병회(金秉會)·황윤호(黃潤鎬)·최태규(崔泰奎)·이구수(李龜洙)·배중혁(裵重赫)·서용균(徐容均)·신성균(申性均) 등 13명의 국회의원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1949년 4월부터 7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국가보안법 및 형법 위반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1950년 3월 14일 노일환·이문원은 징역 10년, 나머지 전원도 유죄가 인정되어 2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남로당의 박헌영(朴憲永)은 1948년 제헌국회가 개원되자, 혁명정세의 퇴조를 감지하고 비합법투쟁과 병행하여 합법투쟁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회 내의 혁명교두보 구축에 전력하였다.

남로당 해주지도부의 조직책임자 이삼혁(李三赫)이 1948년 12월 하순경 남파되어 국회 소장파의 중심인물이던 노일환과 접촉, 그의 정부비판 논조를 고무, 찬양하면서 포섭하는 데 성공하여 1949년 2월 4일 남로당에 입당시켰다.

이문원은 남로당원 하사복(河四福)과 접촉을 갖기 시작, 그에게 포섭되어 같은 해 2월 남로당에 입당하였다. 같은 달 하순경 노일환은 이삼혁으로부터 서울특별시 중구 삼각동 소재 보원관(保元館)에서, 이문원은 하사복으로부터 자기 동료인 오관(吳寬)의 집에서, 각각 남로당의 지령을 받았다.

그 주요 내용은 ① 국회에 외국군철퇴안을 상정할 것, ② 외국군철퇴안 상정이 불가능하거나 부결이 될 경우에는 즉시 국제연합 한국위원회에 외국군철퇴를 주장하는 진언서(進言書)를 제출할 것 등의 행동지침 6개 항이었다. 그 가운데의 한 지침은 김약수 부의장실을 무대로 하여 총연판자 1백 명을 확보하라는 것이었다.

노일환과 이문원은 뜻이 맞는 13명의 의원을 중심 활동요원으로 규합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김약수도 포함되었다. 이들 13명은 사회자인 부의장 김약수의 재량권에 힘입어 발언대를 독점, 외국군철퇴문제를 거론하였다.

그러나 ‘미군철수안’은 이미 두 차례나 부결되었을 뿐 아니라 국내정세에 비추어 상정, 통과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국제연합 한국위원회에 진언서만을 내기로 하여 연판운동을 전개하였다.

배후에는 이재남(李載南)·박시현(朴時鉉) 등 남로당원이 있었다. 남로당으로부터 운동자금 명목으로 노일환은 10만 환을, 이문원은 5만 환을 각각 받고, 소장파의원 15명을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2가 청향원(淸香園)으로 불러 ‘외군조속철퇴서’를 작성하였다.

같은 해 3월 16일까지 62명의 동의를 얻은 연판장을 3월 19일 김약수를 대표로 하여 의원 7명이 덕수궁에 있던 국제연합 한국위원회를 방문, 사무국장 하이만에게 전달하였다.

3월 22일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소재 모 음식점에서 시내 10개 신문사의 기자들을 초청하여서 진언서 전달의 경위를 설명하고, “외국군 주재하에서는 진정한 민주적 통일은 있을 수 없으며, 외국군 주재하에서 되는 통일이란 새로운 분열을 내포하고 있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 미군의 즉시 철퇴를 강조하였다.

노일환과 이문원은 3월 21일경 남로당으로부터 제2차지령을 받았는데, 내용은 ①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직선제를 내각책임제로 바꿀 것, ② 북벌론을 반대하고 대미무기청구(對美武器請求)를 중지시킬 것, ③ 식량정책 규탄, ④ 예산안반대투쟁, ⑤ 내각 총사직 요구투쟁 등이다. 내각 총사직을 관철하기 위하여 업무를 각자 분담하여 정부 각 장관들의 비행 조사를 결의한 바 있었다.

정부 당국에서 국회프락치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되어 일부 의원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 가운데도, 1950년 6월 국제연합 한국위원회에 ‘미군사고문단 설치반대’의 서한을 보내기로 결의한 뒤, 6월 17일 하이만을 찾아가 “우리 62명의 의원은 군사고문단의 설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서한을 전달했다. 이와 같은 국회프락치사건은 그 활동상황이 북괴에 면밀히 보고되고 있었다.

서울특별시경찰국 사찰과 김호익(金昊翊)조는 같은 해 4월 18일, 개성에서 사건을 배후 조종하던 남로당원 박시현의 애인 정재한(鄭載漢)이 암호문서를 휴대하고 월북하는 것을 검거하였다.

이 문서는 북한 김일성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모래알보다 작은 글씨로 되어 있었는데, 38명의 대공형사에 의하여 완전히 해독되었다. 그리고 김호익은 1949년 8월 12일 남로당원에게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