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산가족고향방문[ 南北離散家族故鄕訪問 ]
남북적십자회담의 합의에 따라 ‘1천만남북이산가족찾기운동’의 시범사업의 하나로 이루어진 남북한간의 고향방문사업. 남북한 이산가족들의 고향방문사업은 1970년대 초 서울과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적십자회담에서 대한적십자사측이 제의한 시범적 사업방안의 하나이다.
당시 대한적십자사측은 북한측이 이른바 ‘남조선의 법률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을 시비하면서 이산가족문제의 실질적 토의를 거부하자 교착된 회담을 타개하기 위한 성의있는 노력의 일환으로 1973년 7월 평양에서 열린 제7차 본회담에서 ‘이산가족 성묘방문단 교류’를 북한측에 제의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대한적십자사측의 제의는 본회담이 중단된 이후에도 계속되어 1974년 7월부터 1977년 12월까지 판문점에서 진행된 남북적십자 실무회의 과정에서 ‘이산가족 성묘방문단 교류’, ‘노부모와 그 가족들의 상봉’ 등의 형태로 남북고향방문사업을 북한측에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1985년 5월 28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8차 본회담을 계기로 처음 그 실현을 보게 되었다. 제8차 본회담 제1일 회의에서 우리측 수석대표인 이영덕(李榮德)은 이산가족찾기사업 5개 항의 의제가 모두 타결되기 이전이라도 인도주의사업을 촉진하기 위한 시범사업으로 조국광복 40주년을 기하여 남북이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을 상호 교환할 것을 북한측에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날 북한측은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류에는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그 대신 남북적십자회담의 분위기 조성문제를 거론하면서 광복 40돌을 맞는 8월 15일을 기하여 쌍방 적십자사 책임자들이 각기 적십자회원들로 구성된 100명 정도의 예술단을 이끌고 서울과 평양을 상호 방문하여 전통적인 민속가무를 기본으로 하는 축하공연을 가지자고 제의하였다.
제2일 회의에서 대한적십자사측은 북한측이 제의한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사업을 수용하여 조국광복 40주년을 기하여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류와 함께 예술공연단 교류도 추진하며, 일정규모의 쌍방 기자들이 수행하도록 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것이 북한측에 의하여 수락되어 쌍방은 구체적인 절차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실무대표 접촉을 같은 해 7월 15일부터 판문점에서 진행하였다.
1985년 8월 22일 제3차 실무대표접촉에서 쌍방은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에 관한 합의서〉를 작성하고 이를 제9차 본회담에서 확정, 채택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합의서에서 쌍방은 방문단의 명칭, 방문단의 구성 및 규모, 방문단 교환방법, 방문시기, 방문지, 상봉의 주선과 범위, 예술공연단의 공연장소 및 공연횟수·공연내용·신변안전보장·통과장소와 통과절차 등을 다루었다.
이 가운데 주요 내용을 알아보면, 방문단의 단장은 쌍방 적십자사 중앙기관 책임자로 하였고, 규모는 단장 1명을 포함한 총 151명(고향방문단 50명, 예술공연단 50명, 취재기자 30명, 지원인원 20명)으로 하였으며, 방문지는 서울과 평양으로 하였다.
상봉의 범위는 직계 존·비속은 헤어질 당시의 가족과 그 이후에 출생한 가족을 포함하게 하였고, 친척의 경우 방계는 8촌, 처가·외가는 4촌으로 하되, 본인의 희망에 따라 생사·소재가 확인된 친척도 포함하였다.
예술공연단의 공연횟수는 총 2회로 하였고, 공연은 민속전통가무를 중심으로 하며, 상대방을 비방, 중상하거나 자극하지 않는 내용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 같은 합의서에 기초해서 각기 151명으로 구성된 쌍방의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은 9월 20일 오전 9시 30분, 동시에 판문점을 통과하여 서울과 평양을 방문하고 3박 4일간의 바쁜 일정을 보냈다.
이틀간 이루어진 가족상봉과정에서 평양에 간 우리측 고향방문단 가운데 35명이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41명의 그곳 가족·친척들을 만났으며, 서울에 온 북한측 고향방문단 가운데 30명이 숙소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51명의 이곳 가족·친척들을 만났다.
분단 40년 만에 꿈에 그리던 혈육들을 만난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은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며,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하여 그들의 상봉장면을 지켜본 온 겨레도 함께 눈시울을 적셨다. 한편, 예술공연단도 9월 21일과 22일 양일에 걸쳐, 서울예술단은 평양대극장에서, 그리고 평양예술단은 서울 중앙국립극장에서 각기 2회의 공연을 가졌다.
공연 내용은 쌍방의 합의에 따라 정치성을 배제하고 전통적인 민속가무에 국한되었다. 서울예술단의 공연은 2부로 나누어져 제1부는 ‘겨레의 맥박’, 제2부는 ‘2천년대를 향하여’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다.
제1부는 개막무용 〈북소리〉, 민속무용 〈태평성대〉·〈승무〉에 이어 창작무용 〈꽃보라〉, 가곡독창 〈사공의 노래〉, 창과 민속무용 〈강강수월래〉·〈봉산탈춤〉·〈부채춤〉, 재담 코미디 〈고향가는 열차〉 등이 공연되었다.
제2부에서는 현대무용 〈겨레의 갈망〉으로 시작되어 〈눈물 젖은 두만강〉·〈신고산타령〉·〈서울의 찬가〉·〈꿈에 본 내 고향〉 등의 대중가요와 가곡 〈그리운 금강산〉, 민속무용 〈농악〉 등 전통예술과 현대적인 내용들이 다양하게 소개되었고, 〈아리랑〉의 합창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서울에 온 평양예술단의 공연은 10명 내외로 구성된 집단무용이 반 이상을 차지하였으며, 주로 독창·중창·가야금독주 등이 연주되었다. 집단무용으로 〈금강선녀〉·〈칼춤〉 등이 있었는데, 여성무용수들의 의상은 무복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밖에도 가야금독주·장세납독주, 여성4중창 〈모란봉〉 등이 소개되었다.
또한, 이 사업기간중 빼놓을 수 없는 사항은 북한땅에서 최초로 우리측 일행의 주일예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평양 방문 사흘째인 9월 22일 일요일을 맞아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 단원 가운데 개신교 및 천주교신자 50여 명은 이날 새벽 6시부터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개신교 예배와 카톨릭 미사를 차례로 올리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기원하였다.
이들은 준비해간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주일예배(1985.9.22. 평양)’라고 쓰여진 현수막을 단상에 걸어놓고 의식을 거행하였다. 개신교 예배는 황준근 목사의 예배인도로 묵도, 찬양의 찬송, 사도신경 낭송의 순으로 이어졌다.
황준근목사는 ‘만남과 이별’이라는 주제로 이 땅에 하루빨리 평화가 내리기를 기원하였다. 이어 베풀어진 천주교 미사는 지학순 주교의 집전으로 103위의 한국순교인 시성1주년기념축일 미사로 진행되었다.
지학순 주교는 강론을 통하여 “광복 직후 많은 성직자들이 체포되어 목숨을 잃은 평양에서 역사적인 미사를 올리게 되어 무엇보다 기쁘다.”고 감회를 말하면서 “많은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이 땅에 머지않아 평화가 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하였다.
이 교환사업을 통해서 남과 북의 혈육이 만나고 예술단이 오가면서 40여 년의 긴 세월과 함께 분단의 벽이 얼마나 두꺼운가를 실감하게 하는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만남의 현장에서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북쪽 가족의 눈에서 통제된 생활을 볼 수 있었고, 북한 예술단의 공연에서도 전통민속이 적지않게 굴절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비록 제한된 규모와 지역의 고향방문사업이기는 하였지만 긴 세월을 참고 견디어온 이산가족의 재회는 온 겨레에게 남북한 관계개선과 통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 뒤 대한적십자사는 제2차 이산가족고향방문단 교환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대화를 북측에 꾸준히 제의하였다.
그 결과 북측은 1989년 5월 31일 우리측에 대해 제2차 고향방문단 교환문제를 협의할 것에 동의해 왔다. 그리하여 1989년 2월 27일부터 1990년 11월 8일까지의 8차에 걸친 실무대표 접촉에서 쌍방 각각 571명 규모의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서울·평양 교류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측은 처음부터 이산가족들의 고향방문이나 가족상봉 등에는 관심이 없었고 혁명가극 공연 등 정치사상 공세에 더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회담은 실패로 끝났고 제2차 고향방문단 교류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92년 6월 12일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 및 예술단 교환방문을 위한 제2차 실무대표 접촉(교환시기 및 기간, 공연내용 등에 대한 원칙합의)하였고, 이듬해 3월 19일에는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의 방북 허용(3월 11일)과 그를 입북 조치하였다.
그 뒤 1994년 8월 9일에는 국회외무통일위원회에서 이산가족 재회 관련 대북 결의문을 채택하였고, 1998년 4월 11일부터 4월 17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남북차관급회담을 개최하여 남측 이산가족문제 및 비료지원문제를 병행하여 협의하면서 그 해결을 촉구하였으나, 북측에서는 비료지원의 우선을 요구하였다.
이듬해 6월 22일에서 7월 3일까지 다시 중국 베이징에서 이산가족 문제해결을 위한 남북차관급회담을 개최하였다. 이어 2000년 3월 9일에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베를린 선언을 통하여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정상회담(6월 13일에서 6월 15일)에서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등 5개항의 남북공동선언의 발표로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0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하여 제1차로 남북 이산가족 각 100명씩을 포함한 고향방문단 각 151명이 반세기 동안 헤어졌던 혈육과 서울과 평양에서 상봉하게 되었다. 이어 3개월 뒤인 2000년 11월 30일 제2차 남북 이산가족 교환이 남북 각100명씩 서울과 평양에서 다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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