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丙子胡亂]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청(淸)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
발생배경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丁卯胡亂) 뒤 후금(後金)과 조선은 형제지국(兄弟之國)으로서 평화유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조선은 해마다 많은 액수의 세폐(歲弊)와 수시의 요구에 응하기 힘들었으며, 당시 집권층의 강한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으로 북쪽 오랑캐와의 형제관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후금은 조선침략의 다음해에 내몽골의 챠하르[察哈爾] 지방을 공격하고, 1632년에는 만주와 내몽골의 대부분을 차지한 뒤 베이징[北京] 부근을 공략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더욱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태종은 사신을 보내 '형제지맹'을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치려 했고 세폐도 늘려 금 100냥, 은 1,000냥, 각종 직물 1만 2,000필, 말 3,000필 등과 정병(正兵) 3만 명까지 요구했다. 이에 조선측은 세폐를 대폭으로 감액하는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했고, 그 다음달에는 후금으로부터 명나라 공격에 필요한 군량을 공급하라고 요구받았다. 이처럼 후금이 무리한 요구를 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절화(絶和)하는 한편 군비(軍備)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의가 격해졌다. 그러던 중 1636년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이 인조비 한씨(韓氏)의 조문(弔問)을 왔을 때 후금 태종의 존호(尊號)을 알리면서 군신의 의(義)를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은 부당함을 상소하며 후금의 사신을 죽이고 척화할 것을 주장했고, 인조도 후금의 국서를 받지 않고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후금의 사신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도망갔다. 정부에서는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의주를 비롯한 서도(西道)에 병기를 보내고 절화방비(絶和防備)의 유서(諭書)를 평안감사에게 내렸는데, 도망하던 후금의 사신이 그 유서를 빼앗아 보고 조선의 굳은 결의를 알게 되었다. 또한 1636년 4월에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개원하고 태종은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를 받았는데, 이때 즉위식에 참가한 조선 사신인 나덕헌(羅德憲)과 이곽(李廓)이 신하국으로서 갖추어야 할 배신(陪臣)의 예를 거부했다. 이에 청태종은 귀국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 국서를 보냈는데, 자신을 '대청황제'(大淸皇帝)라고 하고 조선을 '이국'(爾國)이라고 하면서 조선이 왕자를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大軍)으로 침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 국서에 접한 조정은 격분하여 나덕헌 등을 유배시키고, 척화론자(斥和論者)들은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했다. 이러한 정세를 살펴보던 청태종은 그해 11월 조선의 사신에게 왕자와 척화론자들을 압송하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거듭 위협했다.
청의 침입
병자호란 때 청의 침입도 |
항복과 강화
모든 정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항복할 결심을 하고 1월 30일 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때 항복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의 의를 맺고, 명의 연호를 버리며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청나라에 바칠 것, 인조의 장자와 다른 아들 및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할 것, 청나라의 정삭(正朔)을 받고, 만수·천추·동지·원단과 그밖의 경조사에 조헌의 예를 행하며 사신을 보내어 봉포하되 이들 의절은 명나라에 하던 것과 같이 할 것,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낼 것이며 청군이 돌아가면서 가도(椵島)를 정벌할 때 조선은 원병과 병선을 보낼 것, 조선인 포로가 만주에서 도망하면 다시 잡아가며 대신 속환(贖還)할 수 있다는 것, 통혼(通婚)으로 화호(和好)를 굳힐 것, 조선은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조선 안에 있는 올량합인(兀良哈人)을 쇄환할 것, 조선의 일본과의 무역을 종전대로 하고 일본의 사신을 인도하여 청나라에 내조하게 할 것, 매년 1번씩 청나라에서 정하는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 것 등이다.
이는 정묘호란 때의 조건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고 가혹한 것이었다. 화의가 이루어지자 청태종은 돌아갔으며,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 그리고 척화론자인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의 대신들이 인질로 잡혀 선양으로 갔다. 청군은 돌아가던 중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공격했고, 조선은 평안병사 유림과 의주부윤 임경업으로 하여금 병선을 거느리고 청군을 돕게 하여 동강진의 명나라 군대는 괴멸되었다.
전후의 대청관계
병자호란 후 조선은 청에 대해서 사대(事大)의 예를 지킴에 따라 조공(朝貢) 관계가 유지되었다. 중국에 가는 사신의 주요임무는 세폐와 방물(方物:황제나 황후에게 따로 보내는 조선의 공물)을 바치는 일이었는데, 이로 인해 조선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보았다. 사행(使行)의 내왕시 일정한 한도 내에서의 교역이 공인되어 개시(開市)와 후시(後市)가 행해졌는데, 이 또한 조선 정부에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 이외에 전쟁 때 청으로 잡혀간 백성들을 데려오는 데 드는 속환가가 비싸서 속환문제가 심각했다 (→ 색인 : 속환문제). 이와 같이 조선은 표면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추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숭명배청의 사상이 전쟁 전보다도 굳어져갔다. 그리하여 강화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청나라의 출병요구에 대해서는 1639년에 거절한 바 있으며, 이듬해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 임경업에게 전선 120척과 병사 6,000명을 주어 출전하게 하고 군량미 1만 포를 조운하게 했는데, 임경업이 중도에서 일부러 30여 척을 파괴하고 풍운을 만나 표류한 틈을 타서 명나라에게 청나라의 사정을 알렸다. 1643년에는 조선이 명나라와 통교한 사실이 드러나 최명길과 임경업이 선양에 붙잡혀갔다. 이듬해 청은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하고 1645년에 선양에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최명길, 척화론자인 김상헌을 돌려보냈다. 그러자 인조는 인평대군을 보내어 사의를 표함으로써 병자호란의 전후처리는 일단락되었고, 종전 직후 무리하게 책정되었던 조공품목들은 조정되었으나 조선에게 불리한 조공관계와 무역은 계속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1649년에 즉위한 효종의 주도 아래 강한 배청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북벌론(北伐論)이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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