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世界文學感想]

파트리크 쥐스킨트 - 좀머씨 이야기 9.

好學 2012. 3. 18. 07:35

파트리크 쥐스킨트 - 좀머씨 이야기 9. 


그 선생님의 이름은 마리아 루이제 풍켈이었는데 그것도 미스 마리아 루이제 풍켈이었다.
내가 평생 동안 그 선생님처럼 보이는 미혼 여성은 한 번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항상 그 <미스>라는 단어에 악센트를 주었다.
선생님은 꼬부랑 늙은이여서 머리는 백발이었고,
허리는 구부정하게 굽었으며, 피부는 쭈글쭈글하였고,
코밑에는 까만색 솜털이 조금 나 있었다.
더구나 앞가슴은 하나도 없었다.

어느 날 내가 착각하는 바람에 한 시간 일찍 갔을 때
선생님이 아직 낮잠을 주무시고 있던 중이어서 나는 그걸 볼 수 있었다.
낮잠에서 깨어나 그 대저택의 현관문을 열어 주었을 때
선생님은 고작 치마와 내의만 걸치고 있었고,
그 내의는 부인들이 입는 것 같은 보드랍고 폭이 넓은 실크 속옷이 아니라,
우리 같은 사내아이들이 체육 시간에 입는 것과 같은
소매 없이 몸에 짝 달라붙는 옷이었다.
그런 운동 선수 속옷 같은 내의 밖으로 잔주름이 많은
팔과 가죽처럼 보이던 여린 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그 안은 판판했고 가슴은 닭 가슴처럼 야위어 있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 이미 말했듯이 - <풍켈>이라는 이름 앞에 꼭 <미스>를 고집하였다.
그 이유는 - 아무도 물어 보지 않았는데도 늘 직접 해명해 왔듯이 -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아직 처녀이므로
여전히 임자를 만날 수 있는 처지인데도
남자들이 자기를 기혼녀로 생각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설명은 늙고 코밑에 솜털이 나 있고 젖가슴도 없는
마리아 루이제 풍켈 선생님하고 결혼하고 싶어할 남자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내게는 순전히 억지로 보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미스 풍켈 선생님이 설령 원했다 하더라도
선생님은 자기를 <미세스 풍켈>로 부를 수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미스 풍켈로 부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미세스 풍켈>은 이미 다른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으므로…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풍켈 부인이라고 불리던 또 다른 한 명의 여인이 존재해 있었던 것이다.
미스 풍켈 선생님의 어머니가 생존해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미스 풍켈 선생님을 꼬부랑 늙은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에
선생님의 어머니는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돌처럼 굳어 버린 노인, 다리가 뻣뻣한 노인,
뼈만 앙상한 노인, 고목나무 같은 노인, 호호백발 노인…
내가 보기에 그 할머니는 적어도 나이가 백 살은 넘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풍켈 할머니는
피와 살로 된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가구라든가, 박제를 해 놓은 나비라든가,
깨질 것 같은 얇은 구식 꽃병 등으로 생각할 만큼
지극히 제한된 의미에서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움직이지도 않았고, 말도 안했으며,
앉아 있는 모습말고는 한 번도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나 보고들을 수 있는 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앉아 있을 때도 여름에는 그물 모양으로 짠 명주옷을 온몸에 둘둘 말고 있었고,
겨울에는 거북이처럼 머리만 빼고는 온몸을 검은색 비로드로 칭칭 감은 채
피아노가 있는 방의 제일 구석진 곳,
벽시계 추 밑 안락 의자에 앉아 묵묵히 움직이지도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주의를 끌지 않는 모습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드물게, 아주 드물게 학생이 숙제를 특별히 잘해 오고,
체르니 연습곡을 아무 실수 없이 치면 미스 풍켈 선생님은
수업 시간이 끝날 때쯤 방 한가운데로 가서 안락 의자 쪽을 향해 소리치곤 하였다.
<어무니!> 선생님은 자기 어머니를 <어무니>라고 불렀다.
"어무니! 여기 좀 보세요, 쟤한테 과자 하나 줘요, 아주 잘 쳤거든요!"
그러면 학생은 방을 가로질러 그 구석으로 가서 안락 의자에 바짝 다가가
미라 같은 노인네에게 손을 내밀어야만 했다.
그때 선생님은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르곤 했다.
"걔한테 과자 하나 줘요, 어무니!"

그러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천천히
그물 모양의 명주 천이나 검은 색 비로드 천 어딘가에서
푸르둥둥하고 약간 떨리면서 가녀린 손이 나와 허공을 더듬거리다가,
눈을 뜨거나 거북이 머리 같은 머리를 돌리지도 않고
의자의 팔걸이를 지나 오른쪽 방향으로 손을 뻗어서
대개 안에는 크림이 들어 있고 사각으로 각이 진 비스킷으로,
의자 옆 작은 탁자 위 그릇에 담겨 있는 과자를 하나 집어들고,
다시 탁자와 팔걸이와 앞자락을 서서히 지나 내밀고 있는 아이의 손안에
뼈만 앙상한 손으로 마치 금덩어리라도 되는 양 건네주었다.

그때 아이의 손가락과 노인의 손가락이 아주 잠깐 스칠 때도 있는데
그러면 아이는 뭔가 단단하고 차가운 느낌이 들리라고 생각했다가
오히려 따스하고 차라리 뜨겁기까지 하며 믿기지 않을 만큼
보드랍고 가벼운 살갗의 접촉에 등골이 오싹해지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비록 짧지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는 새와의 접촉처럼 등골을 시리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고 - 맙 - 습 - 니 - 다, 미세스 풍켈>이라는 말을 더듬거리며
황급히 뱉어 내고는 그 방에서, 그 칙칙한 집에서 빠져 나와 서둘러 밖으로,
신선한 공기가 있는 곳으로, 태양이 내리쬐는 곳으로 달음박질치곤 하였다.

자전거 타기라는 기상천외의 예술을 익히느라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단지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그것을 하기 싫은 마음과
해내겠다는 오기가 뒤섞인 채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는,
약간 경사가 진 호젓한 숲길에서 우리 어머니의 자전거로 혼자서 배웠다는 것이다.

그때 그 길의 양쪽 끝이 갑작스럽고 경사가 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매번 넘어졌지만,
그곳에 낙엽이 쌓여 있거나 땅이 푸석푸석해서 나는 다행히 슬쩍 넘어질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수도 없이 실패한 다음
거의 기적적으로 갑자기 바퀴를 굴릴 수 있게 되었을 때
이론적인 내 모든 고민과 고집스러운 의심은 두 바퀴 위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당혹스럽기도 했고 자랑스럽기도 한 순간이었다

우리 전 가족이 보는 앞에서 우리집 앞뜰과 잔디밭 사이에
줄로 경계선을 그어 놓고 그 위로 시운전을 해 보였을 때
부모님은 박수를 쳐주었고, 형제들은 신나게 웃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 형이 내게 가장 중요한
도로 교통법을 설명해 주었는데,
무엇보다도 먼저 꼭 오른 쪽으로 다녀야 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각주 - 여기서 오른쪽이란 손잡이에 브레이크가 달린 쪽을 의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