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크 쥐스킨트 - 좀머씨 이야기 7.
그런데 어느 날 - 토요일이었는데 - 기적이 일어났다.
쉬는 시간에 카롤리나가 내게로 와서, 그
것도 아주 바짝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얘! 너 아랫마을로 맨날 혼자 가지?"
"응."
"있지,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
그런 다음 그 애는 자기 엄마의 친구가 아랫마을에 사는데
거기에 가 있으면 자기 엄마가 자기를 데리러 올 것이고,
그러면 엄마랑 같이, 아니 엄마 친구랑 같이,
아니 엄마와 엄마 친구랑 같이… 가겠다는 등의 말을 한참 종알댔다.
무슨 말이었는지 잊어 먹어서 생각은 안 나는데,
생각해 보면 그 애가 말을 하고 있을 때 이미 난 그것들을 다 잊어버렸던 것 같다.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라는 말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말들은 들을 수도 없었다.
다만 그 말만을 기억해 두고 싶었을 뿐이었다.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
그 순간 이후 그날 하루 종일,
아니 그 주일 내내 내 귓가에는 그 말만이 들려왔고,
그 말은 너무나 - 아, 어떻게 표현한담! - 달콤하게 들렸다.
그림 형제 동화책에서 읽었던 어느 것보다도 달콤했고,
<지금부터 내 음식을 먹어도 좋아, 내 침대에서 자도 돼>라고 말했던
'개구리 왕'에 나오는 그 왕자님의 약속보다도 더 달콤했다.
<오늘은 빵을 굽고, 내일은 고기를 굽고,
모레는 왕비님께 아기를 갖다 바쳐야지!>라고 말했던
룸펠스틸첸 요정처럼 조바심을 내며 날짜를 세었다.
마치 내 한 몸 안에 행복에 젖어 있는 한스와 루스틱 형과
황금 산의 왕이 다 들어 있는 기분이었다…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
나는 그 애를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가장 적당한 산책로를 골라 두려고 하루 종일 숲속을 헤맸다.
사람들이 보통 지나 다니는 길을
카롤리나와 함께 걷지 않으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작정해 둔 점이었다.
나만의 비밀 길을 알려 주고, 숨겨진 볼 거리들을 그 애에게 보여 줄 생각이었다.
내 계획은 아랫마을로 함께 걸어가면서 보게 될 모든 것들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카롤리나가 윗마을로 가는 길에서 본 것들을
카롤리나로 하여금 기억 속에서 모두 퇴색시켜 버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한참의 저울질 끝에 나는,
숲 가장자리를 돌아서자마자 큰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
소나무 보호 구역에 휑하게 뚫려 있는 길을 지나,
호수 쪽으로 꺾어 내려 가기 직전
활엽수림에 이끼가 잔뜩 낀 길로 돌아가는 코스를 하나 마침내 정했다.
그 코스에는 내 박식한 지식으로 설명하면서
카롤리나에게 보여 줄 볼 거리가 여섯 개나 포함되었다.
자세히 하나하나씩 설명하자면 이런 것들이었다.
1) 길 가장자리쯤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윙하는 소리를 내고, 출입구에는 빨간색 번개 표시 위에
<고압선 주의 - 위험>이라는 노란색 푯말이 걸려 있는 발전소의 작은 변전소.
2) 잘 익은 딸기가 달려 있는 일곱 포기의 산딸기 나무.
3) 사슴 구유 - 비록 볏짚은 없지만 그 대신 커다란 소금 덩이가 그 안에 들어 있다.
4) 전쟁 직후 어느 늙은 나치가 목을 매달고 죽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는 나무 한 그루.
5) 높이가 거의 1미터에 직경이 1미터 50으로서 산책로의 마지막 코스이면서
동시에 최고의 볼 거리가 될 개미굴.
6) 높이가 10미터쯤 되는 튼튼한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기가 막히게 멋있는 호수 풍경을 만끽하고,
그 애에게로 몸을 기울여 목 언저리에 가만히 입을 갖다 대기 위해서
함께 올라가기로 계획한 멋진 너도밤나무 고목.
부엌 싱크대에서 과자를 조금 훔쳐 내오고,
냉장고에서는 요구르트 한 병을,
또 지하실에서 사과 두 개와 딸기 주스 한 병도 꺼내 왔다.
먹을 것도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준비한 그것들을 모두
구두 상자에 넣어 가지고 일요일 오후에 한 나뭇가지 위에 숨겨 두었다.
저녁에 잠자리에 누워서는 카롤리나에게 들려 주어서 그 애를 웃게 만들 이야기를,
하나는 걸어가면서 또 하나는 너도밤나무에 앉아서 할 것으로 생각해 두었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다시 불을 켜고
다음날 그 애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작별의 선물로 줄 생각으로
서랍 안에 들어 있는 드라이버를 찾아 책가방 안에 넣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서 두 가지 이야기를 다시 연습해 보고,
미리 예정된 내일의 일정을 세밀하게 검토하였다. 수도 없이
1)번에서부터 6)번까지 거쳐가야 할 장소를 생각해 보았고,
드라이버를 건네줄 순간도 되뇌어 보았으며,
이미 바깥 숲 속 한 나뭇가지 위에서
우리를 고대하고 있는 구두 상자 안의 물건들도 머리 속에 떠올려 보았다.
그보다 더 철저하게 랑데뷰를 준비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런 다음에야 나는 달콤한 말을 기억하며 마침내 잠에 빠져들었다.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
월요일은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햇빛은 부드러웠고, 하늘은 물처럼 투명한 푸른빛이었으며,
숲에는 지빠귀들이 노래불렀고
딱따구리들이 나무에 홈을 파는 소리가 사방에서 메아리쳐 울렸다.
그날 학교로 가면서 그제서야 나는 만약에 비가 내린다면
카롤리나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되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1)번부터 6)번까지의 코스는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많이 분다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릴 것이 뻔했다.
마구 헝클어져 있을 딸기나무들, 눈으로 볼 수 없게 된 개미굴,
미끈미끈하게 젖어 있을 이끼 낀 길,
미끄러워서 올라가지도 못할 너도밤나무,
밑으로 떨어져 나뒹굴거나 물에 젖어 물컹물컹해졌을 간식들.
그런 참혹한 광경에 대한 상상이 내게 더없이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이
승리의 쾌감까지 주면서 나를 달콤한 행복감에 젖게 하였다.
눈곱만큼도 날씨 걱정은 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날씨가 내 걱정을 맡아서 해 준 셈이었다
그날 나는 단순히 카롤리나만 동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 아니라,
덤으로 그 해에 최고로 화창한 날을 선물로 받았던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그야말로 행운아였다.
내 위에서 마음씨 좋은 하느님이 따스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런 은총을 받은 처지에 그날 하루만이라도
경솔한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동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거만함과 자만심으로
실수를 범해 이미 간직하고 있던 행복마저도
무너뜨리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好學의 文學 > [世界文學感想]'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트리크 쥐스킨트 - 좀머씨 이야기 9. (0) | 2012.03.18 |
---|---|
파트리크 쥐스킨트 - 좀머씨 이야기 8. (0) | 2012.03.18 |
파트리크 쥐스킨트 - 좀머씨 이야기 6. (0) | 2012.02.24 |
파트리크 쥐스킨트 - 좀머씨 이야기 5. (0) | 2012.02.23 |
파트리크 쥐스킨트 - 좀머씨 이야기 4. (0) | 2012.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