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世界文學感想]

파트리크 쥐스킨트 - 좀머씨 이야기 6.

好學 2012. 2. 24. 19:59

파트리크 쥐스킨트 - 좀머씨 이야기 6. 


"어쩌면……"
나보다 다섯 살이 많고,
그림 형제 동화집 속의 동화를 이미 다 읽은 형도 대화에 끼여들었다.
"어쩌면 '여섯 사람이 사방에서 다 나온다'라는 옛날 얘기에,
하루에 전세계를 다 걸어다닐 수 있는 사람으로 나오는
달리기 잘하는 사람의 사정과 좀머 아저씨의 사정이 똑같을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집에 오면 다리 하나를 가죽끈으로 높이 붙들어매야 될 거예요.
그렇게 안 하면 몸이 자꾸 일어서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아버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좀머 씨가 발이 세 개나 있어서 그렇게 매일 걸어다녀야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 다리 가운데 하나를 높이 붙들어매라고 룩히터한트 박사님께 부탁드려야겠는걸."
"엉터리!"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그 사람은 밀폐 공포증이 있다니까요.
그것말고는 아무 병에도 안 걸렸고, 그 병에는 약도 없어요."

잠자리에 들었을 때 내 머리에는 그 길고 이상한 단어가 한참 동안이나 떠날 줄을 몰랐다.
밀폐 공포증……
나는 그 단어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서 외웠다.
'밀폐 공포증…… 밀폐 공포증…… 좀머 아저씨는 밀폐 공포증이 있어…..
그 말의 뜻은 아저씨가 방안에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것…..
방안에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것은 밖에서 돌아다녀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밀폐 공포증'이 있으니까 밖에서 돌아다녀야만 하고…..
'밀폐 공포증'이 '방안에 있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말이고,
'방안에 있지 못하는 것'이 '밖에 돌아다녀야만 하는 것'과 같다면,
'밖에 돌아다녀야만 하는 것'이 '밀폐 공포증'과 같은 말이지.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어려운 '밀폐 공포증'이라는 말을 쓰지 말고
'밖에서 돌아다녀야만 하는 것'이라고 쉽게 말해도 되겠지…..
그렇다면 '좀머 씨는 밀폐 공포증이 있기 때문에
밖에서 돌아다녀야만 한다'라는 말을 어머니가 하려면 이렇게 말해야겠지.
'좀머 씨는 밖에서 돌아다녀야만 하는 것이니까 밖에서 돌아다녀야만 돼…..'

거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나는 괴상한 그 새 단어와 그것에 얽힌 모든 것들을 빨리 잊어버리려고 애를 썼다.
그런 다음 나는 좀머 아저씨가 아무 병에도 걸리지 않았고,
어떻게 해야만 한다는 강요도 받지 않고 있으며,
단지 밖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내가 나무를 기어오를 때 즐거움을 느끼듯이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모두 자기 자신의 만족과 쾌락을 위해서 좀머 아저씨는
밖에서 걸어다니는 것뿐이고, 거기에 다른 설명은 필요치 않은 것 같았다.
머리만 복잡하게 만드는 어른들의 설명이라든가
라틴어로 이러쿵저러쿵하던 말은, 동화책에서처럼 다리를 높이 붙들어맨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와 똑같은 생각일 뿐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다가 다시 한참이 지나자 내 머리 속에는
내가 자동차 창문을 통해 보았던 반쯤 벌린 입과
공포에 질린 커다란 눈동자의 얼굴,
빗물로 범벅이 된 좀머 아저씨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쁜 일이 있을 때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짓지는 않아.
뭔가 만족이나 쾌락을 위해서 하는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는 없어.
그런 얼굴은 뭔가 겁에 질린 얼굴이었어. 아니면 몹시 갈증이 났다든지.
생각해 보면 그것은 빗속에 있으면서도
호수의 물을 다 들이킬 수 있을 것 같은 갈증을 느끼는 표정 같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다시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나는 좀머 아저씨의 얼굴을 잊어버리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가 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눈앞에 더욱더 또렷하게만 나타났다.
잔주름 하나 하나까지 보였고, 땀방울과 빗물방울도 보였으며,
마치 뭔가 중얼거리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입술의 가냘픈 떨림조차 생생하게 보였다.
아저씨가 중얼거리던 소리는 더욱 확실하고 커져서
간청하는 듯한 아저씨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나를 좀 제발, 제발 그냥……!"

그런 다음에야 아저씨의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 낼 수 있었다.
아저씨의 목소리가 나를 도와준 셈이었다.
얼굴의 모습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자마자 나는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우리 반에 카롤리나 퀵켈만이라는 여자 아이가 하나 있었다.
눈동자가 까맣고, 눈썹 색도 짙었으며,
이마 위 오른쪽에 흑갈색 머리를 핀으로 묶고 다니는 아이 였다.
목덜미와 귓불 밑에 작게 움푹 파인 곳에는 햇빛을 받으면 빛을 반짝 발하기도 하고,
바람결에 약간 흔들거리기도 하던 한 움큼의 솜털이 있었다.
그 애는 웃을 때 듣기에 너무나도 좋은 허스키한 소리를 내면서
목을 쭉 뽑아 올리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는
눈을 거의 감은 채 얼굴에 온통 환희의 표정을 넘쳐흐르게 하였다.
나는 그런 얼굴을 수업 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면 언제나 실컷 쳐다보았다.
사실 나는 그런 얼굴을 부끄러움을 많이 탄 탓에
아무도, 카롤리나조차 눈치채지 못하게 훔쳐보았다.

하지만 꿈에서는 실제보다 부끄러움을 덜 탔다.
꿈에서는 그 애의 손을 잡고 그 애를 숲으로 데려가기도 하고,
같이 나무에 오르기도 하였다.
나뭇가지 위에 서 그 애의 옆에 앉아,
아주 가까이에서 그 애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 애에게 옛날 이야기도 해 주곤 하였다.
그러다가 그 애가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을 때는
솜털이 많은 목덜미나 귓불에 가만히 입을 대고 숨을 들이마시기도 하였다.

그런 비슷한 종류의 꿈을 일주일이면 몇 번씩 꾸었다.
참 아름다운 꿈이었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꿈이었고,
대개의 꿈들이 그렇듯이 실제로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하였다.
카롤리나를 한 번만, 꼭 한 번만 실제로 내 곁에 앉혀 놓고
목덜미나 혹은 다른 어느 곳에 입을 대고
가만히 숨을 들이마실 수만 있다면 뭐든지 다 하고 싶었다
… 하지만 나 혼자만 호수 아랫마을에 살았고,
카롤리나는 다른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호수 윗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학교 문에서 나오자마자 길은 두 갈래로 갈라져
언덕을 다 내려올 때까지 계속 갈라진 채 뻗어 내려오다가,
들판을 지나 숲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그 두 길의 사이는
아주 많이 벌어져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가고 있는 카롤리나를
눈으로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단지 그 애의 웃음소리만은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남풍이 불어올 때만 웃음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들판을 가로질러 내게로까지 와서
집으로 갈 때까지 나와 함께 동행하였다.
그렇기는 하였지만 우리가 살던 동네에 남풍은 얼마나 드물게 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