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世界文學感想]

파트리크 쥐스킨트 - 좀머씨 이야기 5.

好學 2012. 2. 23. 21:13

 

파트리크 쥐스킨트 - 좀머씨 이야기 5. 


그런데 '그러다가 죽겠어요'라는 표현은
우리 아버지의 언어 습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한번도 아버지가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그러다 죽겠어요.'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어 본적이 없었다.
'그런 말은 틀에 박힌 빈말이다'라고 아버지는
우연히 '그러다 죽겠어요'라는 말을 듣거나 읽을 때면 우리에게 그렇게 설명하곤 했다.

"틀에 박힌 빈말이라는 것은 - 너희들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거야 -
어중이 떠중이들이 입이나 펜으로 수도 없이 많이 사용했던 말이라서,
그 말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야. 실제로 그렇단다."
그런 말을 우리들에게 할 때 아버지는 대개 좀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렇게 덧붙이곤 했다.

"그런 말은 차를 한잔 마시세요.
그러는게 몸에 좋을 거예요라든가 의사 선생님,
환자의 상태가 어떤가요? 환자가 이겨낼 수 있을까요?
등의 말들처럼 아무 의미도 없는 거야.
그런 말들은 인간의 삶에서 만들어진 말들이 아니라,
질 나쁜 소설이나 터무니없는 미국영화에서 생겨난 말들이니까
그런 말들을 똑똑히 기억해 두거라!"

그래서 '그러다 죽겠어요'라는 따위의 말들을 아버지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박이 떨어진 도로에 이슬비가 내리던 날,
좀머 아저씨 옆으로 차를 몰면서 그런 틀에 박힌 빈말을
아버지가 열린 창문을 통해 큰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그러다 죽겠어요!"
그 말에 아저씨가 우뚝 섰다.
내가 보기에 그는 바로 '죽겠어요'라는 말에서 빳빳하게 굳어지며 멈춰 서는 것 같았다.
그것도 너무 갑작스럽게 그렇게 해서
아버지는 그의 옆을 지나치지 않으려고 급브레이크를 밟아야만 했다.
아저씨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호두나무 지팡이를 왼손으로 바꿔 쥐고는
우리 쪽을 쳐다보고 아주 고집스러우면서 크고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나를 제발 그냥 놔두시오!"
그 말뿐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 말뿐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때까지 열려진 채였던 차의 앞문을 닫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앞으로 계속 걷기만 했다.

"저 사람 완전히 돌았군."
아버지가 혼자말처럼 내뱉었다.
우리 차가 그를 앞질렀을 때 나는 뒤 유리창을 통해 그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볼 수 있었다.
시선은 땅쪽을 향한 채 몇 발자국을 떼어놓을 때마다
자기가 걷고 있는 길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눈을 치켜 올렸고,
뭔가 두려움에 차 있는 것처럼 보이는 눈을 크게 뜨고서 잠깐씩 앞쪽을 쳐다보곤 했다.
빗물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콧잔등과 턱에서는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입은 약간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다시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였다.
어쩌면 걸어가면서 뭔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는지도 모른다.

"좀머 씨는 밀폐 공포증 환자야."
어머니는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하면서 지독히 나빴던 일기 변화와
낮에 좀머 씨를 만났을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그렇게 말했다.
"그 사람은 밀폐 공포증이 아주 심하단다.
그 병은 사람을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게 만들지."
"밀폐 공포증이란 엄격히 말하자면……"
아버지가 말했다.
그때 어머니가 아버지의 말을 끊었다.
"사람이 자기 방에 앉아 있지 못하는 거예요.
룩흐터한트 박사님이 자세하게 설명해 줘서 내가 잘 알고 있다구요."
"밀폐 공포증 (Klaustrophobie)이란 말은 원래 라틴어와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지."
아버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룩흐터한트 박사도 잘알고 있는 사실이었겠지만 말이야.
그 말은 실제로 (밀폐)라는 말과 (공포증)이라는 두 단어가 합해진 단어인데,
밀폐란 닫음 혹은 고립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서,
밀폐공간이라는 단어라든가 밀폐라는 뜻을 가진 도시 (클라우젠),
또는 이탈리아의 (키우사Chiusa), 프랑스의 (보클뤼즈Vauchluse)처럼
그 말에도 (밀폐)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거야.
너희들 중에 누가 (밀폐)라는 뜻이 숨어 있는 낱말을 말해 볼 수 있겠니?
"그런데요……"
누나가 말했다.
"리타 슈탕엘마이어가 말해 주었는데요,
좀머 씨는 항상 경련을 한대요. 온몸이 다 떨린대요.
리타가 그러는데 꼭 안달뱅이처럼 근육이 다 움직인대요.
의자에 앉으려고만 해도 몸이 먼저 떨린대요.
그런데 걸어다니기만 하면 몸에서 경련이 안 일어난대요.
그래서 자기가 떠는 것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고 항상 걷는 거래요."
"그런 점에 있어선 그 사람이 한 살짜리 말과 닮은 점이 있구나."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하기는 두 살짜리도 처음 경마에 나가게 되면
출발 신호를 기다릴 때 초조해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곤 하지.
그럴 때면 기수들이 고삐를 양손으로 꽉 잡아 주느라고 정신이 없단다.
그렇게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나아지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들이 눈가리개로 눈을 가려 주기도 하지.
너희들 가운데 누가 '고삐를 잡는 것'이 뭔지 내게 설명해 주겠니?"
"말도 안돼요!"
어머니가 다시 언성을 높였다.

"당신이 타고 있던 차안에서 좀머 씨는 아무 거리낌없이 경련을 해도 됐잖아요.
조금 떤다고 해서 어느 누구에게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요!"
"우려되는 것은……"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내가 틀에 박힌 빈말을 했기 때문에 좀머 씨가 차에 타지 않았다는 점이오.
'그러다가 죽겠어요'라는 말을 해 버리고 말았거든.
내가 도대체 그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소.
내가 만약 그것보다는 좀더 거칠지 않은 말을 사용했더라면 분명히 차에 탔을거요.
예를 들자면….."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게 아니라 밀폐 공포증이 있었기 때문에 차에 타지 않았던 거예요.
방뿐만이 아니라 문을 닫아야만 하는 차안에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거라구요.
룩흐터한트 박사에게 물어 보시구요! 밀폐된 공간에
- 자동차든 방이든 간에 - 들어가기만 하면 그 증상이 나타난다구요."
"증상이 뭔데요?"
내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