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世界文學感想]

파트리크 쥐스킨트 - 좀머씨 이야기 2.

好學 2012. 2. 22. 20:40

파트리크 쥐스킨트 - 좀머씨 이야기 2.  


아직 나무 타기를 퍽 좋아했던 시절에,
사실 나는 매번 떨어지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자주 나무를 탔으며 또 잘 탔었다!
어떤 때는 밑둥에 가지가 없어서
미끈한 줄기만을 잡고 올라가야만 되는 나무도 잘 탈 수 있었고,
한 나무 위에서 다른 나무의 가지로 옮겨 갈 수도 있었으며,
나무 꼭대기에 걸터앉을 수 있는 의자를 수도 없이 만들어 보았을 뿐만 아니라,
한번은 숲 한가운데에서 지상 10미터의 높이에
창문과 바닥과 천장이 있는 진짜 집을 직접 지었던 적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유년기의 거의 모든 시절을 나는 나무 위에서 보냈었던 것같다.
빵도 먹고, 책도 보고, 글씨도 쓰고, 잠도 나무 위에서 잤다.
영어 단어도 그곳에서 익혔고, 라틴어의 불규칙 동사라든가
수학 공식 그리고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낙하 법칙과 같은
물리학의 법칙들도 모두 다 나무 위에서 배웠다.
말로나 필기로 준비해야만 했던 숙제도 나무 위에서 했으며,
짜릿한 쾌감으로 잎사귀 위에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나무 위에서 오줌도 눴다.

나무 위는 늘 조용했으며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았다.
듣기 싫은 엄마의 잔소리도 없었고,
형들의 심부름 명령도 그 위까지는 전달되지 않았으며,
단지 바람이 부는 소리와 잎사귀들이 바스락거리던 소리,
나무 줄기가 약간 삐걱거리던 소리……
그리고 먼 곳까지 훤히 내다 볼 수 있는 탁트인 시야가 있을 뿐이었다.
우리 집과 정원만 보였던 것이 아니라, 다른 집들과 다른 정원들, 호
수와 호수 뒤편으로 산자락까지 이어지던 들판들을 볼 수 있었고,
저녁 무렵 해가 질 때면 땅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벌써 오래 전에 져 버렸을 해를 나는 나무 꼭대기에서
뒷산으로 넘어가는 모습까지 지켜 볼 수 있었다.

날아다니는 것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조금은 덜 모험적이고, 조금은 덜 우아하였을 수도 있지만
효과는 날아다니는 것과 거의 비슷하였다.
더구나 나는 차츰 나이를 먹게 되어 키가 1미터 18이 되었고,
몸무게는 23킬로그램이 되어서 바람이 제대로 불어주고
외투의 단추를 풀어 젖힌 다음 그것을 양쪽으로 쫙 펼쳐 보아도
날기에는 이미 너무 무거운 형편이었다.
하지만 나무에 기어오르는 것만큼은
- 그때 내 생각으로는 - 평생토록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이가 120살이 되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느릅나무나 너도밤나무나
소나무의 꼭대기에 마치 늙은 원숭이처럼 높이 앉아서
바람결 따라 살살 몸을 움직이면서
들판과 호수와 그 뒤의 산 등을 쳐다보고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서 지금 날아다니는 것이라든가
나무를 기어올랐다는 것 등을 얘기하고 있는 건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낙하 법칙 따위를 들먹이고,
나를 종종 혼란스럽게 만드는 뒤통수의 일기 예보용 혹 등에 대해 종알대고 있었을까!
그런 것들하고는 전혀 다른 좀머 아저씨의 이야기를 하려고 작정 했으면서도 말이다.
물론 그 이야기 속에는 내 인생의 여로와 몇 번 교차한 바 있는 인생 길,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방랑 길을 걸어간 한 이상한 인간만이 존재 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정상적인 이야깃감이 되지는 못할 것이므로
그냥 가능한 것들만 적어 보려고 작정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맨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직 나무 타기를 퍽 좋아하던 시절,
우리 동네인 호수 아랫마을이 아닌 다른 이웃마을
그러니까 호수 윗마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살기는 우리 마을에서 살았던 어떤 사람이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호수 윗마을과 아랫마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마을 간의 경계가 분명하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호수를 따라 한 쪽에서 반대 편 호수가 쪽으로
뚜렷한 시작도 끝도 없이 정원과 집과 마당과 배들로 엮어진
가느다란 끈이 이어져 있는 형태였다.

어쨌든 그런 동네에서 우리집에서 불과 2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좀머 씨라고 부르는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마을에서 좀머 아저씨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이름이 페터 좀머인지 혹은 파울 좀머인지 아니면
하인리히 좀머인지 혹은 프란츠 - 크사버 좀머인지 알지 못했으며,
좀머 박사인지 혹은 좀머 박사 교수인지도 모르는 채,
사람들은 그를 유일하게 좀머 씨라는 이름만으로 알고 있었다.
좀머 아저씨의 직업이 무엇인지 아니면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지
혹은 과거에 직업을 가지고 있기는 했었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사람들은 다만 좀머 아저씨 부인이 돈을 벌고,
그것도 인형을 만드는 일로 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날이 그날같이 그 아주머니는 세들고 있던
페인트 칠장이 슈탕엘마이어 씨의 집 지하실에 앉아서
양모와 옷감, 톱밥 등으로 작은 인형들을 만들어서
일주일에 한번씩 그것들을 큰 소포로 포장하여 우체국에 가서 부쳐 주곤 하였다.
우체국에서 돌아올 때면 언제나 똑같이
잡화상, 빵집, 고깃집, 야채상을 차례차례 들러
터질만큼 잔뜩 집어 넣은 시장 바구니 네개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
일주일 내내 집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인형만 만들었다.
좀머 아저씨네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사람들은 몰랐다.
언젠가 그들은 - 아주머니는 버스를 타고 아저씨는 걸어서 - 왔다.
그리고 그후부터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자식도 없고, 친척도 없었으며, 그들을 찾아오는 손님도 없었다.
사람들이 좀머 아저씨네에 대해서 특히 좀머 씨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지만, 사실은 근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좀머 씨를 제일 많이 알고 있으리라는 주장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호수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적어도 60킬로미터 내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심지어 개까지도 늘 걸어다니기만 했던
좀머 아저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른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좀머 아저씨는 그 근방을 걸어 다녔다.
걸어다니지 않고 지나는 날이 일년에 단 하루도 없었다.
눈이 오거나, 진눈깨비가 내리거나, 폭풍이 휘몰아치거나,
비가 억수로 오거나 햇빛이 너무 뜨겁거나,
태풍이 휘몰아치더라도 좀머 아저씨는 줄기차게 걸어 다녔다.
바다에 쳐 놓은 그물을 거두려고 새벽 4시에 배를 타고 일을 나가던 어부들이
해가 뜨기도 전에 집을 나서던 그를 만나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그렇게 나간 그는 달이 하늘 높이 떠있는 늦은 밤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가 돌아올 때쯤 그가 하루 종일 걸어다니는 길은 엄청난 거리가 되었다.
호수의 주변을 한바퀴 돌면 약 40킬로미터쯤 되었는데
그 거리를 하루에 걷는 것은 그에게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 두세번 군청 소재지까지 갔다오기도 하였는데
그러면 갈 때 10킬로미터, 올 때 1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가
좀머 아저씨에게는 아무 문젯거리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아침 8시에 여전히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학교에 갈 때면
벌써 몇시간 전부터 걸어다니고 있는 기운찬 모습의 그와 종종 마주칠 수가 있었다.
점심 때쯤 지친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해 갈 때면
어느새 그가 나타나 활발한 걸음으로 우리들을 앞서서 걸어가곤 하였다.
그리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창문 밖을 쳐다보면
호숫가에 그의 깡마른 모습이 그림자처럼 나타나
서둘러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