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人生/[우주만물]세상만사

[일사일언] 계약서의 허무함

好學 2010. 6. 29. 21:00

 

[일사일언] 계약서의 허무함

 

 

얼마 전 뉴스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올가을 신입생들부터 계약서를 받기로 했다고 한다.

내용은 별게 없다.

과제 잘 내고, 강의 빼먹으면 안된다는 일종의 의무사항 리스트를 주고받는 것이다.

대학 쪽 의무도 물론 쓰여있지만, 포괄적인 것들일 뿐 특별한 건 없다.

영국의 대학이 이런 쓰나마나한 면학계약서까지 받게 된 것은, 그 동안의 무상교육기간이 올가을부터 끝나기 때문이란다. 이제부터 낼 비싼 등록금에 상응하는 교육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소송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되는 속사정이 있다. 바야흐로 공부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회 생활까지 계약서로 규제하는 시대다. 모든 계약서는 미래의 전투를 대비한 가상시나리오다. 전쟁을 전제로 한 임시평화조약이다.

그런데 좀더 깊은 곳을 들여다 보면 가상이나 임시라는 말의 속뜻이 드러난다. 계약서로 미봉한 분쟁의 씨앗은, 더 큰 규모의 분쟁을 만나면 반드시 발아한다. 한판 붙기로 마음먹었다면 이전에 한 사소한 약속 따위는 안중에 안 들어온다. 친구관계가, 부부관계가, 심지어 국가간의 외교관계도 계약서나 혼인신고서, 조약서 한 장으로 영속적인 평화를 약속받지는 못한다. 중요한 건 신뢰지 문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엔터테인먼트업계도 마찬가지다. 이 분야의 원자재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계약서가 흘러 넘친다. 그 계약서 대부분은 결심만 하면, 또 두세배 위약금을 지불할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깨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드물게 끝까지 지켜지는 약속들도 있다. 문서는 커녕 말조차도 필요없는 무언의 약속들. 그런 약속들을 많이 만나고, 나누고 싶다. 진정한 신뢰는 결코 종이나 인주로 담보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