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人生/[우주만물]세상만사

[만물상] 저우언라이

好學 2010. 6. 29. 20:48

 

[만물상] 저우언라이

 

 

 

1946년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옌안(延安)에서 충칭(重慶)으로 타고가던 군용기가 갑자기 고장났다.

기장은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릴 채비를 하라고 했다.

혁명 전우 예팅(葉挺)의 11세 어린 딸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 좌석엔 낙하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우는 자기 낙하산을 벗어 건넸다.

“다른 일이라면 저우처럼 할 수 있겠지만 낙하산을 양보한 일만큼은 그처럼 할 수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저우의 일본인 친구 오카자키 가헤이타 얘기다.

▶”만약 저우가 내전 중에 우리 편이었다면 마오쩌둥(毛澤東)이 타이완으로 쫓겨나고 우리가 베이징에 있었을 것이다.” 닉슨이 타이완의 국민당 관료에게 들었다며 저서 ‘지도자들’에 인용한 말이다. 헤밍웨이의 아내로 1941년 저우를 인터뷰한 전쟁 전문기자 마사 겔혼은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공산당원 저우”라고 썼다. ‘2인자’의 대명사가 되다시피한 저우였지만 때로 마오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국내파였던 마오와 달리 저우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유학했다. 프랑스 유학파 덩샤오핑(鄧小平)과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나에게 저우는 언제나 형이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혁명의 길로 들어섰고, 그는 동지와 인민에게 커다란 존경을 받았다.” 두 사람은 훗날 귀국해서도 와인과 치즈, 크루아상을 즐겼다고 한다. 1970년대 중반 파리에 들른 덩은 일부러 크루아상을 사와 저우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문화혁명 때 저우는 생명을 걸고 숙청 위기에 몰린 혁명 지도자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개혁 개방의 설계자’ 덩과 주더(朱德)도 그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다. 저우가 보신(保身)에만 신경쓰고 마오에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문혁의 피해자였던 원로 펑전(彭眞)의 생각은 달랐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처럼 감옥에 갇혔을 것이다. 그는 잠시 몸을 굽혀 장기적인 국익을 추구했다.”

▶지난 8일로 저우언라이 30주기(周忌)를 맞은 중국에선 그에 대한 추도와 칭송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고 한다. 저우가 자신과 가족·친척들에게 요구했던 ‘생활규칙’도 공개됐다. ‘식당에선 줄을 서 밥과 반찬을 타야 한다’ ‘극장 갈 때 무료 초대권을 써서는 안 된다’…. 스스로에게 엄하고 남에게 관대했던 면모에서 그가 ‘인민의 총리’로 존경받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념 대결보다 안팎의 통합과 실리를 추구했던 저우의 삶은 지금 강대국 중국을 떠받치는 실용적 시대정신으로 이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