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정치·경제·사회·문화)

16. 신용만으로 돈을 빌릴 수 있을까?

好學 2010. 6. 28. 19:54

 

16. 신용만으로 돈을 빌릴 수 있을까?

 

이탈리아의 환전상(換錢商)들은 처음으로 어음을 돈처럼 사용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어음을 쓰고 환전상에게 돈을 빌려 장사를 해 이익이 나면 어음에 적힌 금액을 갚았다.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은 에스파냐에 엄청난 부(富)를 안겨 주었다. 에스파냐의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은 에스파냐가 부유하고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신대륙에서 배로 처음 실어 온 금을 교황에게 보냈다. 또 1497년에는 그때까지 사용하던 돈을 전부 없애고 새 돈을 만들었다. 새로운 돈은 베네치아 금화보다 두 배나 가치가 높아서 ‘두블론’이라고 불렀다.
 
아메리카대륙에서 가져온 금과 은은 에스파냐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 변화가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에스파냐 왕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지만 나라 경제는 매우 위험한 상태였다.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들어와 시장에는 많은 돈이 돌았지만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의 양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물가가 크게 올랐다. 가난한 에스파냐 국민들은 꼭 필요한 물건조차 구하지 못했다. 돈이 많은 부자들은 외국에서 물건을 사 왔다. 덕분에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에스파냐로부터 들어온 금과 은의 힘으로 경제규모를 빠르게 키워갔다.
 
신대륙 발견 이후 가격혁명과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유럽에서는 화폐가 발전했다. 1252년부터는 금화를 다시 찍어냈다. 금은 주로 독일 슈바르츠발트산맥의 하르츠 산지(山地)에서 캤다. 독일에서는 ‘굴덴’ 금화(金貨)가 널리 사용되었는데 금화와 함께 ‘탈러’라는 은화(銀貨)도 많이 쓰였다. 여기에 16세기부터 에스파냐인들이 아메리카대륙에서 금을 약탈해 오면서 유럽인들이 사용하는 돈의 양은 과거의 수십 배가 되었다.
 
돈의 양이 아주 적었던 사회에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 돈은 나라 안의 물건들을 이쪽저쪽으로 옮겨주는 액체 같았다. 오늘날 현금을 많아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해 ‘유동성(流動性)이 좋다’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돈의 양(量)이 늘어나자 돈을 빌리기도 훨씬 쉬워졌다. 돈을 빌린 사람이 갚아야 할 이자(利子)가 싸졌기 때문이다. 
 
돈이 많아지자 사람들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일들을 생각해 냈다. 그동안은 불가능했던 일들이 이제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왕과 황제와 귀족들의 사치는 점점 더 심해졌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독일에 세워진 성이나 관청, 저택을 보면 귀족들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의 생활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비싼 옷을 사 입었으며, 부유한 가정에서는 식탁보로 식탁을 덮고 냅킨을 사용하는 습관이 자연스러웠다.
 
영주들이 전쟁을 할 때 돈을 주고 군인을 모으면서 용병(傭兵)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돈을 쓰는 데 익숙해진 영주들은 점점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적보다 더 많은 군인과 무기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영주들이 돈을 빌려 전쟁준비를 했다.
 
돈을 빌린 사람은 이자를 지불해야 했고, 전쟁에 질 경우를 대비해 귀중한 재산을 담보(擔保)로 잡혔다. 빚을 갚지 못하면 돈을 빌려 준 채권자는 담보에 대한 권리를 빼앗아 갔다. 돈을 빌려주면 가지게 되는 권리인 ‘채권(債券)’은 커다란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사실 돈을 빌려 주고 빌려 쓰는 일은 수백 년 전부터 있었다. 흉년이 들면 농부는 먹을 음식과 농사를 지을 씨앗을 사기 위해 돈을 빌려야만 했다. 때로는 왕에게 바칠 세금을 내기 위해 돈을 빌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빌린 돈은 대개 이자가 너무 높아 도저히 갚지 못할 만큼 빚이 늘어나곤 했다.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은 하인이 되기도 하고 노예로 팔려가지도 했다.
 
돈을 빌려 주는 일을 처음으로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이탈리아 북부의 환전상(換錢商)이었다. 환전상들은 시장에 탁자와 벤치를 세워 놓고 돈을 바꿔주는 장사를 했다. 그래서 환전상을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방케리’라고 불렀다. 은행이라는 뜻을 가진 독일어 ‘방크’는 이탈리아어 ‘방케리’에서 나온 것이다.
 
방케리가 돈을 바꿔 주지 않으면 화가 난 사람들이 몰려가서 방케리가 앉아 벤치를 망가뜨렸다. 그래서 ‘부서진 벤치’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방카 로타’는 파산(破産)을 뜻했다.
 
중세 이탈리아의 환전상들에게 가장 주목할 만 한 점은 아랍상인들이 발명한 ‘어음’을 들여온 것이다. 당시 환전상들과 상인들이 어음을 거래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어떤 상인이 베네치아에서 100두카덴을 환전상에게 주면, 환전상은 100두카덴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는 어음을 써준다. 상인은 그 증서를 가지고 다른 도시로 가서 그 도시의 환전상에게 어음증서를 주고 그 도시에서 사용하는 돈을 100두카덴만큼 받아 장사를 했다.
 
어음제도는 빠르게 발전해 나중에는 미리 돈을 지불하지 않고도 신용(信用)만으로 어음을 쓰고 돈을 빌릴 수 있게 되었다. 돈을 빌린 상인이 사업을 잘 해서 이익을 얻으면 빚을 갚을 거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어음을 써주고 거래를 하게 된 것이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어음을 쓰고 돈을 빌려 먼 곳까지 가서 장사를 해 얻은 이익으로 어음에 적힌 금액을 지불했다. 처음에 어음을 발행한 사람에게 직접 돈을 주는 대신 거래처에 그 엄을 넘길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어음은 돈과 함께 지불수단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