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정치·경제·사회·문화)

17. 왕위를 흔든 유럽 최고의 자본가

好學 2011. 2. 3. 11:17

 

17. 왕위를 흔든 유럽 최고의 자본가

 

 16세기 푸거 가문(家門)은 은행사업을 통해 경제적·정치적으로 엄청난 힘을 가졌다. 야콥 푸거 2세는 돈의 힘으로 두 명의 황제를 신성로마제국의 왕위에 올리기도 했다.
 
신용이 얼마나 큰 위험인 동시에 기회인지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유명한 집안인 푸거 가문을 보면 알 수 있다.
 
푸거가의 역사는 13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한스 푸거는 방직공의 재자가 되기 위해 슈바벤에서 아우크스부르크로 나왔다. 슈바벤에 살던 다른 농부들처럼 한스 푸거의 집에서도 아마(亞麻)를 길러 베틀로 옷감을 짰다. 한스 푸거도 어머니가 하는 것을 보고 배워서 베틀을 잘 다뤘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방직공의 딸과 결혼한 한스 푸거는 싱을 뽑아 천을 짤 때 작은 병화를 시도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베틀에 마와 함께 목화솜을 넣어 옷감에 짜자 마로만 짠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고운 ‘베르칸트’라는 옷감이 만들어졌다. 원래 그런 옷감은 이탈리아에서만 생산되었는데 이제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도 똑같은 옷감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한스 푸거의 사업은 점점 번장했다. 그는 옷감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내다 팔았다. 목화는 별로 까다로운 식물이 아니어서 어디에서나 잘 자랐고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장사 수완이 좋았던 한스 푸거는 이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여윳돈이 생기자 한스 푸거는 다른 상인들로부터 물건을 사서 되파는 일을 시작했다. 아우크스부르크는 중개무역(仲介貿易)을 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다. 베네치아에서 파리로 갈 때나 빈에서 스트라스부르로 갈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곧 한스 푸거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다.
 
한스 푸거의 아들 야콥 푸거는 무역회사를 열어 유럽 곳곳에 지점을 냈다. 러시아의 보느고로트, 에스파냐의 세비아, 영국 런던, 이탈리아의 나폴리에 이르기까지 푸거가의 회사가 없는 곳이 없었다.
 
야콥 푸거의 아들 야콥 푸거 2세에 이르러 푸거가는 유럽에서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야콥 푸거 2세는 은행사업을 키웠고, 돈은 저절로 불어나 그를 큰 자본가로 만들었다.
 
야콥 푸거 2세는 열아홉 살 때부터 푸거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야콥 푸거 2세의 아버지는 그를 베네치아로 보내 공부시켰다. 베네치아는 당시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돈이 많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베네치아는 독일 사업가들을 위한 건물인 폰다코 데에 데데스키가 있었다. 그곳에는 물건을 쌓아둘 수 있는 창고와 침실, 회계정리를 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며 다른 독일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야콥 푸거 2세는 독일 사람들보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보다 아는 것이 많았고 일 처리도 능숙했다. 특히 그는 베네치아에서 은행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유심히 관찰했다.
 
스물여섯 살이 된 야콥 2세는 티롤 주의 인스부르크로 갔다. 당시 인스부르크의 영주는 지그문트 폰 합스부르크였다. 지그문트 영주는 베네치아와 스위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호화로운 건물들을 마구 지은 데다 여러 아내와의 사이에 자식을 마흔 명이나 두어 늘 돈에 쪼들렸다. 인스부르크에서 멀지 않은 카르벤델 산맥의 티롤 은광(銀鑛)에서 캐낸 은으로 엄청난 양의 동전을 만들었지만 늘 돈을 써야 할 곳에 너무 많아 고민이었다.
 
야콥 푸거 2세는 지그문트 영주의 약점을 철저히 이용했다. 야콥 푸거 2세는 장사로 벌어들인 돈을 자신의 은행에 맡긴 다음 은행을 통해 지그문트 영주에게 돈을 빌려 주고 티롤에 있는 은광을 담보로 잡았다. 세월이 흘러 지그문트 영주가 빚을 갚지 못하자 은광은 야콥 푸거 2세의 손에 넘어왔다. 결국 지그문트 영주는 사촌인 막시밀리안 1세에게 티롤 주를 가고 떠나야 했다.
 
야콥 푸거 2세와 막시밀리안 1세는 148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옛 독일 제국의회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막시밀리안 1세는 티롤 주를 사들인데다가 전쟁을 치르는 바람에 많은 돈이 필요했다. 1487년부터 1494년까지 야콥 푸거 2세는 막시밀리안 1세에게 62만 굴덴을 빌려 주었다. 당시의 경제규모로 볼 때 이것은 엄청난 액수였다. 당시 야콥 2세와 그의 형제들이 가진 재산이 공식적으로 5만 굴덴을 약간 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얼마나 큰 액수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504년에 막시밀리안 1세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왕가 사이에 두 쌍의 결혼을 성사시켜 합스부르크가(家)를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명문가로 만들려고 했다. 이 결혼이 성사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했는데, 합스부르크가에 현금을 대주고 결혼을 가능하게 한 사람이 바로 야콥 푸거 2세였다. 뿐만 아니라 야콥 푸거 2세는 1508년, 총 20만 9,000굴덴을 들여 막시밀리안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왕관을 씌워주기도 했다.    
 
야콥 푸거 2세가 막시밀리안 1세에게 그렇게 큰돈을 빌려주고 심지어는 그를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푸거가에서 운영한 은행 덕분이었다. 그는 은행을 통해 자기 돈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돈도 막시밀리안 1세에게 빌려주었다.
 
푸거가의 은행에 돈을 맡긴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재산에 대해 비밀로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티롤 주의 주교(主敎)는 개인적으로 재산을 모으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성직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재산을 야콥 푸거 2세의 은행에 맡겼다. 야콥 푸거 2세와 주교의 거래는 극히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다. 야콥 푸거 2세는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한편 저시 재산을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만났다.
 
그가 유럽에서 맺고 있었던 광범위한 인간관계는 양측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티롤 주의 주교처럼 자신의 재산을 숨기고 싶어 하는 고객들은 갑자기 돈을 찾아갈 걱정이 없었으므로 야콥 푸거 2세에게도 유리했다. 갑자기 큰돈이 필요한 귀족과 상인들은 푸거가의 은행을 통해 그런 부자들의 돈을 장기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런 은행 사업을 통해 야콥 푸거 2세는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야콥 푸거 2세는 막시밀리안 1세의 황제 즉위에 필요한 경비를 대 주고 그 대가로 키르쉬베르크 백작령(伯爵領)과 바이센보른 영지(領地)를 받았다. 돈으로 맺어진 푸거가와 합스부르크가의 인연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야콥 푸거 2세는 막시밀리안 1세가 베네치아와 전쟁을 치를 때도 평화협정을 맺도록 도와주고 양측에서 돈을 벌어들였다.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인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도록 도와주었다. 1519년 야콥 푸거 2세는 85만 2,000굴덴이라는 큰돈을 들여 황제 선거에 투표권이 있는 대주교와 기사들, 외교관들을 매수해 카를 5세가 황제로 당선되게 했던 것이다.
 
막시밀리안 1세와 카를 5세는 푸거가의 도움 없이는 결코 황제의 왕관을 손에 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푸거가 역시 막시밀리안 1세와 카를 5세의 황제 즉위 이후 여러 가지 이권(利權)을 손에 넣어 더 많은 이윤(利潤)을 남겼다. 그러나 1522년 야콥 푸거 2세의 죽음 이후 푸거가는 쇠락하기 시작했으며 푸거가와 합스부르크가의 관계에도 변화가 왔다.
 
카를 5세는 숫자계산에 어두운 사람이었고 그의 후손들은 더욱 심했다. 페르디난트 1세와 필리프 2세는 그때까지 왕실이 해왔던 역할을 푸거가에 해주지 못했고, 푸거가는 합스부르크가에 쓴 돈을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1557년과 1575년에는 에스파냐 왕실이 국고(國庫)가 완전히 비었음을 밝히고 파산(破産)을 선언했다. 에스파냐 왕실이 빌린 돈을 갚을 능력이 없음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에스파냐에는 아메리카대륙의 식민지에서 정기적으로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이 들어왔지만 국고는 늘 텅 비어있었다. 전쟁과 사치에 대한 욕구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에스파냐 왕실에 많은 돈을 빌려주었던 푸거가는 엄청난 재산을 잃었다.
 
17세기 중반까지 푸거가가 합스부르크가와의 거래에서 손해를 본 금액은 800만 굴덴이나 되었고, 에스파냐 왕실과의 거래에서도 400만 두카텐을 잃었다. 야콥 푸거 2세의 조카 안톤 푸거와 그의 아들 마쿠스 푸거는 황제와 거래를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시가가 끝났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안정성이 높은 토지(土地)에 투자(投資)했고, 이후 푸거가는 수백 년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대지주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사업가로서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았다.
 
푸거가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일에는 철저하게 이기적이었다. 신용을 막강한 도구로 사업을 키웠지만, 합스부르크가와 같은 권력에 기대 이권을 누리기도 했다. 사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개혁과 종교의 자유를 강력히 반대해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와 울리히 츠빙글리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야콥 푸거 2세는 역사상 최초로 사회빈곤층을 위한 주택을 새우기도 했다. ‘푸거라이’리고 불리는 이 건물은 지금도 아우크스부르크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