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정치·경제·사회·문화)

15. 노예제도는 경제에 도움이 되었을까?

好學 2010. 6. 28. 19:53

 

15. 노예제도는 경제에 도움이 되었을까?

 

 

18세기에 유럽 여러 나라들은 값싼 흑인 노예의 노동력을 이용해 엄청난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당시 흑인 노예는 흑색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며 비싸게 거래되었다.
 

처음에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인간으로 생각하기를 주저했다. 어떤 탐험가들은 인디언을 ‘개’라고 부르기도 했다. 교황이 인디언을 ‘벌거숭이 야만인’이라고 선언해 인간이라고 결론을 내린 뒤에도 인디언들은 오랫동안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인디언들은 노예가 되어 안데스산맥의 광산이나 사탕수수 밭에서 힘겹게 일해야 했다. 인디언 노예들은 형편없는 돈을 받고 하루 종일 끔찍한 노동에 시달렸다. 고통스러운 노동과 유럽인들이 옮긴 병 때문에 인디언들은 하루살이처럼 죽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인디언들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어 졌고, 아메리카대륙 곳곳에서도 원주민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노예로 부릴 수 있는 인디언의 수가 부족해지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사람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데려오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카나리아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흑인 노예들에게 강제노동을 시킨 적이 있었던 에스파냐 인들은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인디언들보다 힘든 일을 더 잘 견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거대한 민족이동이 이루어졌다. 16세기 초 ‘노예무역(奴隸貿易)’이 시작된 뒤 19세기 말까지, 최소한 1,500만 명의 노예가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처음에 유럽인들은 노예제도에 대해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소유물로 부리는 것은 과거의 잘못된 관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고대 로마에 있었던 것 같은 노예제도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것은 유럽의 크리스트교도들이 노예제도에 반대해서라기보다는 노예를 부려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낮았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에 노예가 하던 일을 중세에는 농노(農奴)가 대신했다. 농노는 노예처럼 사고팔 수 있는 재산은 아니었지만 영주(領主)에게 세금을 바쳤고 필요한 경우 노동력을 징발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도 노에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럽의 노예상인들은 주로 동부유럽 출신의 노예들을 거래했고, 비잔틴제국이나 이슬람 국가에서는 노예매매가 계속 이루어졌다.
 
고대의 노예들과 달리 근대의 노예들은 거의 아프리카대륙 출신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들은 검은 피부색 때문에 노예라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유럽인들은 1501년부터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들여오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7세기 무렵 아랍인들이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끌고 간 뒤 두 번째였다. 7세기 경 아랍과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노예매매가 매우 성해서 바그다드에 있는 이슬람교의 지배자 칼리프의 궁전에는 11,000명의 노에가 일했을 정도였다.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은 노예제도를 금지하지 않았고, 크리스트교의 바이블이나 유태인의 탈무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이슬람교도들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노예로 쓰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주로 동부아프리카나 사하라사막 너머에 있는 서부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왔다.
 
근대 유럽의 노예상인들은 보통 중앙아프리카에 있는 큰 제국의 왕이나 아랍상인으로부터 노예를 산 다음 아메리카의 대농장으로 보냈다. 그래서 많은 유럽인들이 노예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주로 콩고와 세네갈의 노예시장에서 노예를 사고팔았는데, 16세기 이후 아프리카대륙 서해안은 ‘노예해안’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카리브해 연안에 위치한 서인도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이 급속이 확대되고 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인의 식민지가 확장됨에 따라 흑인노예의 수요는 계속 늘어났다. 이에 따라 노예무역의 규모 역시 엄청나게 커졌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며 이루어진 노예무역에는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에서 온 상인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당시의 상인들이 단순한 상인이었는지, 아니면 해적이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아메리카대륙에 도착한 노예들은 주로 커피농장이나 사탕수수농장, 목화밭에서 일했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맞서는 노예들의 폭동이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매번 무참하게 짓밟혔다. 물론 성공적인 경우도 있었다. 1791년 프랑스의 식민지인 카리브해 연안의 산토도밍고에서는 노예들이 폭동을 일으켜 백인들을 추방하고 독립국가인 아이티를 세웠다. 다른 지역의 흑인들도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겨운 투쟁을 계속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계적으로 노예제도 폐지(廢止) 움직임이 일어났다. 1759년,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펜실베이니아의 필라델피아에서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인 퀘이커교도들이 노예상인을 사회적으로 배척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1777년 미국의 버몬트 주에서 세계 최초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이어 유럽에서도 1802년에 덴마크가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1808년 1월 1일, 영국도 노예제도를 폐지했고, 1860년 미국에서는 이미 노예제도를 폐지한 북부와 노예제도의 유지를 주장하는 남부 사이에 남북전쟁(南北戰爭)이 벌어졌다. 1865년까지 계속된 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함으로써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노예제도는 그야말로 아프리카대륙에 닥친 재앙이었다. 노예제도가 과연 노예를 부리던 나라의 경제에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경제적인 면에서 노예제도는 점점 그 의미를 잃게 되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신분이 자유로운 농부나 노동자들이 노예보다 더 오래, 더 열심히 일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민지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이 당시 유럽경제에 영향을 미쳤던 것은 사실이다. 값싼 흑인노예의 노동력을 이용해 유럽 각국은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며, 흑인노예는 흑색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며 활발히 거래되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포겔(1926 ~ )은 노예제도가 비인간적인 생산방법이기는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경제적으로 효율적이었다고 주장해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객관적인 통계자료를 통해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860년에 미국 남부 노예들의 생산력이 자유로운 농부들의 생산력보다 28퍼센트나 높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노예제도는 경제성을 따지기 이전에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마땅히 없애야 할 악행(惡行)이었다. 오늘날 농예재도는 전세계에서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도 몇몇 나라에서는 노예처럼 일하며 노동에 대한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