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정치·경제·사회·문화)

14. 가격혁명과 산업혁명은 왜 일어났을까?

好學 2010. 6. 28. 19:52

 

14. 가격혁명과 산업혁명은 왜 일어났을까?

 

신대륙의 발견으로 유럽에는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로 인해 일어난 가격혁명(價格革命)과 산업혁명(産業革命)은 근대자본주의(近代資本主義) 발달의 발판이 되었다.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는 아프리카대륙을 빙 돌아 인도로 가는 것이어서 시간이 많아 걸리고 위험했다. 그래서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가는 길을 발견하기 전부터 많은 뱃사람들과 상인들이 인도로 가는 좀 더 쉽고 빠른 길을 찾아 배를 띄웠다. 그들은 폴란드의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을 믿었다.
 
그때까지 유럽인들은 지구가 성경에 쓰여 있는 것처럼 반구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이 원반모양의 땅을 뚜껑처럼 둥그렇게 덮고 생각한 것이다. 중세 사람들은 지구의 끝인 원반의 가장자리까지 기면 밑으로 떨어져 지옥에 빠진다고 믿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는 별의 움직임을 관찰해 지구가 공처럼 생겼으며 태양의 주변을 돈다는 지동설을 발표했다.
 
중세 사람들은 성경에 쓰인 것만이 진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발표하기 위해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어쨌든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옳다면 유럽에서 서쪽으로 계속 가기만 해도 인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1476년 8월 13일, 포르투갈의 대서양 쪽 해안으로 제노바의 호송선이 몇 척 지나가고 있었다. 배에는 영국으로 가져갈 귀한 물건들이 실려 있었는데 갑자기 포르투갈의 함대가 길을 막아섰다. 곧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일어나 제노바 인 선원 수백 명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 그때 가까스로 죽음을 면해 나무판자를 붙잡고 바닷가로 떠밀려 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중에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젊은 청년 콜럼버스는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않고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남았다. 리스본은 아프리카의 해안을 따라 항해해 온 배들이 도착하는 곳이었다. 매일같이 뱃사람들이 코끼리의 상아와 금과 흑인 노예를 배에서 내렸다. 콜럼버스는 리스본에서 지도 제작자와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지리와 천문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그는 지구가 공처럼 둥글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일고 대서양을 항해해 인도나 중국까지 가기로 결심했다.
 
1484년 콜럼버스는 포르투갈의 왕을 찾아가 인도로 가는 새로운 뱃길을 찾아 나설 계획을 설명하고 배와 필요한 장비를 지원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때는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를 돌아서 인도로 가는 길을 발견하기도 전이어서 포르투갈의 왕과 신하들은 콜럼버스의 계획이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콜럼버스는 허풍쟁이, 사기꾼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궁궐 밖으로 쫓겨났다. 
 
콜럼버스는 이후 8년 동안이나 자시의 계획을 위해 싸웠다. 포르투갈을 찾아갔고 프랑스 왕도 찾아갔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결국 에스파냐의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이 콜럼버스에게 탐험에 필요한 장비를 지원해 주기로 약속했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 ‘핀타’, ‘니냐’라는 이름의 배 세 척에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아갔다. 얼마 가지 않아 콜럼버스는 카나리아 제도(諸島)에 도착했다. 카나리아 제도에서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10월 12일에 콜럼버스는 카리브 해의 한 섬에 닻을 내렸다. 콜럼버스는 그곳에 ‘성스러운 구원자’라는 뜻의 ‘산살바도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산살바도르가 인도 앞에 있는 섬이라고 생각했다. 10월 27일에는 쿠바를 발견했고 12월 6일에는 또 다른 큰 섬을 발견해 ‘에스파뇰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콜럼버스는 죽는 순간까지 자기가 인도로 가는 뱃길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탈리아의 항해사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콜럼버스가 발견한 곳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대륙이었음을 밝혀냈다. 독일의 지리학자 발트제뮐러는 베스푸치가 그 대륙을 발견했다고 보고 신대륙에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붙였다.
 
콜럼버스는 자기가 도착한 대륙이 에스파냐 왕의 땅이라고 보았다. 그때는 크리스트교도인 왕이 다스리지 않는 땅은 주인이 없는 땅이므로 처음 발견한 사람의 소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신대륙에서 금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금을 가져가서 에스파내 왕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고 새로운 탐험을 지원받으려고 했다.
 
당시 수많은 유럽의 탐험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콜럼버스가 항해에 나선 첫 번째 목적도 금이었다. 유럽에서는 13세기부터 화폐로 금화를 주로 사용해 금에 대한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유럽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금과 은이 갑자기 쏟아져 들어와 화폐가치가 떨어지고 물가가 올랐다. 15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유럽 각국의 물가는 두세 배나 올랐는데, 이를 ‘가격혁명(價格革命)’이라고 한다. 가격혁명으로 기업의 경영자나 상인들은 장사를 해서 많은 돈을 남길 수 있었다. 이들은 늘어난 이윤을 이용해 자본을 축적하고 경영규모를 확대해 근대자본주의 발달의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아메리카라는 넓은 시장을 바탕으로 유럽의 상업규모와 영역이 확대되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경제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바뀌면서 ‘상업혁명(商業革命)’이 일어났고 유럽의 상권(商圈)은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했다.
   
이렇게 아메리카대륙의 발견으로 유럽의 경제는 풍요로워졌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많은 고통을 받았다. 콜럼버스는 일기장에 ‘인디언들은 우리가 무기를 들이대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우리는 겨우 50명으로 인디언들을 모두 제압했고, 어떤 일이든 다 시킬 수 있었다’라고 썼다.

 
콜럼버스는 처음에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원주민들과 물물교환을 시도했다. 그러나 교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디언들은 물건을 소유한다는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고, 유럽 물건의 가격을 어떻게 지불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자기들이 가진 것을 모두 다 주고 유럽인들에게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자기들과 나누자고 요구했다. 인디언들은 에스파냐 선원들이 주는 시시한 물건들을 무척 고맙게 받았고, 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기꺼이 건네주었다.
 
나중에 콜럼버스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선원들이 유리조각이나 물건을 묶는 끈 같은 조잡한 물건으로 인디언들을 속이는 일을 금지했다.
 
인디언들과 유럽인들 사이에 무역이 평화롭게 이루어졌다면 양쪽 모두에 득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자신들보다 약한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죽였다. 카리브 해의 섬에 살았던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에게 거의 모든 것을 빼앗겼다.
 
선교사들은 에스파냐의 군대가 인디언들을 잔인하게 죽였고, 절망한 인디언들이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전했다. 유럽인들이 옮긴 질병인 천연두 때문에 많은 인디언 아이들 목숨을 잃자 인디언들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했다.
 
또한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페루의 잉카문명과 멕시코의 아스텍문명 같은 우수한 인디언 문명들을 짓밟았다. 제대로 장비도 갖추지 않은 유럽의 탐험가들은 아무것도 훈련받지 않은 군인 몇 명만 데리고도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아메리카대륙의 문명을 파괴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남아메리카대륙을 식민지로 만들고 인정사정 없이 약탈했다. 이때 유럽의 식민지가 된 국가들은 19세기가 되어서야 독립했다. 그러나 남아메리카에는 지금도 식민지로 고통(苦痛)받은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멕시코에서는 인디언 출신의 국민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에콰도르에서는 인디언과 백인 사이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정부가 바뀌었다.
 
그리고 당시 식민(植民) 지배(支配)를 받았던 많은 나라들이 아직도 경제적 후진국(後進國)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