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목 차
1. 바울의 시대
2. 바울의 활동
3. 바울의 신앙
4. 바울의 생애와 성격
1. 바울의 시대
1
바울은 로마 제국 길리기야 주(州 다소의 시민입니다. 지도를 펼쳐 보면 다소는 지중해의 동북 구석, 바로 소아시아가 시리아로 굽어지는 곳에 있으며, 해안에서 약 50 리쯤 들어가 위치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다소는 낮은 지대이지만, 거기서 1 리쯤 북쪽으로 가면 고지가 나오고, 15 리쯤 가면 타우르스의 준령이 솟아 있습니다. 북방 4-5 리의 고지에 상(上) 다소의 도시가 있으며, 이곳은 다소 시민이 여름 동안 보내는 도시였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상하 다소를 합쳐 인구 백만에 가까운 대도회였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다소에 입성(入城) 기원 전 334 년입니다. 대왕이 죽은 뒤 이 지방은 셀리우코스 왕국에 속했으나, 기원 전 170 년경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다소를 재건하고, 다수의 희랍인 및 유대인을 이곳에 이주시켰습니다. 셀리우코스 왕국이 쇠퇴하고, 로마의 세력이 동쪽으로 미치게 된 뒤 다소를 유명하게 한 사건은,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이 땅에 소환하였다가, 오히려 그녀의 미모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안토니우스는 다소에 자유시의 특권을 부여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이것을 확인했습니다. 폼페이우스, 시이저 안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 등이 다소의 주요한 시민에게 로마의 시민권을 준 일도 있었습니다. 바울의 집안도 아마 셀리우코스 시대에 팔레스틴에서 다소에 이주한 유대인으로, 조부의 대나 아버지 대에 로마의 시민권을 받은 것 같으며, 바울은 자기가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갖은 사람임을 자랑하던 일이 있습니다.
다소에서는 스토아 철학자 아테노도루스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기원 전 45 년에서 15 년에 걸치는 30 년 동안 로마에서 살며 아우구스투스의 고문으로 일했으나 만년에는 고향 다소에 돌아와 살았습니다. 그를 뒤이어 네스톨이라는 스토아 철학자가 나와 다소는 학문, 특히 스토아 학파의 중심지로서 로마 제국 안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도시가 사도 바울의 고향입니다. 인구로 보면 희랍인과 유대인의 두 요소로 구성된 도시, 문명으로 보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과의 병존, 접촉, 교류로 이루어진 도시, 정치적으로는 셀리우코스 시대 이래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도 자치가 인정 된 자유 시, 학문적으로는 아우스투스 계의 스승이 출생한 스토아 철학의 도시—이런 도시에서 바울은 태어나고 또한 자랐던 것입니다.
2
「일리어드」를 군대용 짐 속에 넣고 인도 원정을 떠났다는 알렉산더 대왕의 발길이 닿은 곳에 동서 문명이 융합하는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었지만, 이 세계는 로마 제국 아래에서 더욱 정치적으로 공고하게 되고, 지리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이 서쪽으로 옮겨지면서 지중해는 로마 제국의 내해(內海가 되었습니다. 바다로, 육지로 로마의 지배를 운반하기 위해 軍用路ㅎ렸으며, 그 길은 상업용의 여행에도 이용되었습니다. 팩스 로마나(로마의 평화)의 영향 아래, 동으로 서로 여객 및 상품의 교통은 빈번하게 되고, 소송을 하러 수도 로마로 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공통의 법률, 안전한 도로 외에, 공통의 언어가 새로운 “세계”의 결합을 도왔습니다. 그것은 희랍어입니다. 희랍어는 당시의 국제어로서, 상업 거래에도, 학문 및 사상의 전달에도, 또 일상 회화에도 널리 쓰여, 그 보급의 범위 및 정도는 오늘의 영어 이상이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로마인은 통치와 군사로 세계를 정복했지만, 언어와 사상과 종교에서 그들의 구실은 헬레니즘을 세계적으로 전파한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세계의 헬레니즘화에 대하여 이제 다른 하나의 세계적인 문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헤브라이즘입니다. 가나안 사람의 바알 신앙에서 로마인의 신들에 이르기까지 희랍 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는 가운데 홀로 유대인만은 그 일신교인 야웨 신앙을 집요하게 유지했습니다. 다만 팔레스티나의 토지와 이스라엘의 민족에 한정된 민족 신앙으로서의 유대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외부의 영향에 의하여 그 기초가 뒤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원 전 6 세기의 바빌론의 유폐에서 시작했지만, 페르시아 시대, 희랍 시대를 거쳐 로마 시대에 들어와, 유대인으로서 팔레스티나 이외의 땅에 이주하는 사람, 희랍인으로서 팔레스티나에 오가는 사람, 도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에서 유대인과 희랍인이 함께 사는 사람이 증가하여 유대인의 사상과 생활을ㄹ 세계적으로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희랍인으로서 유대교에 개종하고 유대인의 할례를 받은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으로서 희랍어를 말하고, 희랍식으로 리버럴한 사고 방식을 갖는 이도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시세의 필요에 응하여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70 명의 유대인 학자가 모여, 히브리 말의 구약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70인역」이라 불리우는 성서로, 그 완성은 기원 전 285 년부터 150 년까지의 사이로 측정됩니다.
그 이래 유대교에 들어온 희랍인은 물론 유대인 사이에도 성서는 「70인역」이 일반적으로 읽혀졌으며, 이 신약성서에서 인용되는 구약의 본문도 거의 이에 의합니다. 이 「70인역」은 단지 구약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했을 뿐 아니라, 희랍적인 해석과 풍격(風格 구약성서의 의미를 전했기 때문에 그만큼 헤브라이즘의 헬레니즘화, 바꾸어 말하면 헤브라이즘을 그 민족적 성격에서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하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3
헤브리즘은 유대인의 국제적 이주에 따라 헬레니즘의 세계에 퍼져가고, 동시에 헬레니즘은 헬브라이즘의 성격에 영향을 주어 이를 세계화하고 있었습니다. 헤브라이즘의 세계관의 중심은 하나님 본위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라고 한다면, 헬레니즘은 세계관의 특색을 인간 본위이고,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로마 제국 아래서 헤브라이즘은 헬레니즘에 접촉하여, 하늘과 땅과 하나님과, 인간은 입을 맞추려 하고 있었습니다. 세계는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세계는 격심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 격동 속에서 태어나 세계를 새롭고 일단 높은 수준으로 종합하고, 지양하고, 창조한 것은 기독교입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고 동시에 “사람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세계적으로 전하는 사도로 뽑힌 이가 다소의 시민인 바울이었습니다.
다소란 도시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지리적 위치로 보아도, 역사적 전통으로 보아도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과의 교류지이며, 새로운 세계 정신의 전파자가 태어날 가장 적지(適地입니다. 바울은 그 태생으로 말하면 순수한 유대인이고, 그 교양으로 말하면 자유스런 희랍 사상의 영향을 호흡한 사람이며, 그 언어는 알람 말을 말했으나, 또 희랍어를 읽고 쓰고 말하는 데도 자유로우며, 그 사회적 지위는 자유시 다소의 자유민이요 로마의 시민권으ㅡㄹ 갖는 자이고, 그 직업은 도시의 주민인 천막 제조의 수공업자였습니다.
이 최후의 점에 대해선느 특히 한마디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베드로나 요한과 달리, 어부가 아니고 수공업자며 시골 출신이 아니고 대도회의 시민이었습니다. 농민이나 어부는 대체로 보수적이지만, 상인이나 수공업자는 새 사상을 배우는 일에나, 도 여행 이주에 있어서도 비교적 자유롭고 적극적입니다. 바울의 신앙과 성격에 대해서는 뒹 말하겠지만, 환경적으로 보아 참으로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뽑혀, 그리스도의 복음을 팔레스티나 이외의 넓은 세계에 옮겨 널리 펴는 데 최적의 그릇이었습니다. 그가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세계에 전파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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