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바울의 生涯와 神學

3. 바울의 신앙

好學 2010. 5. 23. 00:17

 

3. 바울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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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 중에 바울의 이름으로 보내어진 편지 열 넷이 있습니다. 그 중 히브리서는 바울이 쓴 것이 아님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나머지 열 세 통은 과거에 학자들의 비판적 의견은 있었지만, 근대의 학자들은 대개 그 모두를 바울이 쓴 것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연대적으록 가장 오랜 것은 데살로니가 전후서(前後書)로 두 편지는 기원 52년이나 53년쯤 고린도에서 쓰여졌으리라고 추정됩니다. 그 다음이 갈라디아서, 고린도 전후서 및 로마서의 4대 편지고, 다시 로마의 옥중(獄中)에서 보낸 것으로 생각되는 ‘옥중 편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및 빌레몬서)가 있고 ‘목회(牧會) 편지’라 통칭되는 디모데 전후서 및 디도서의 셋은 바울 만년(晩年)의 작품으로여겨지고 있습니다. 내용으로 보면 로마서와 같이 정연한 논술도 있는가 하면 빌레몬서와 같이 인정미 넘치는 개인적 소품도 있지만, 어느 편지고 모두 바울의 발랄한 신앙과 개성의 발로를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이에 의하여 그의 사상과 인물을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이스만이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은 신학자형의 사람이 아니고, 예언자형의 사람입니다. 그의 편지는 신학 체계가 아니라 개인적 편지입니다. 예수의 자유스런 복음을 바울이 신학적으로 체계화했다는 비평은, 바울의 편지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정당한 태도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렬한 신앙과 자유스러운 희랍적 교양으로, 용감하게 신앙의 근본 문제 및 신앙에 입각한 실제 문제의 해석에 대해 논의하고 적에 대한 논박과 설복, 우리 편에 대한 계몽과 위로가 그렇게 빈틈 없을 수 없으며, 그의 논술 가운데 기독교 교의의 중요한 점은 모조리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 주요한 두세 가지 점에 대하여 얘기해 보겠습니다.

우선 첫째로 자유(自由)의 문제입니다. 그가 유대주의자에 대항하여 이방인의 신앙적 입장의 자유를 옹호한 것은 앞서도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신앙 자유의 문제를 단순히 민족적 무차별의 형태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 주장의 밑바탕에는 사람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도덕적 인식이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의식적(儀式的)인 것과 도덕적인 것이 있습니다. 할례 그 밖에 의식적인 율법에 의해서는 물론, 도덕적인 성질의 율법에 의해서도 사람은 의롭게 될 수 없다. 율법의 완전한 실행에 의하여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은 노력하면 할수록 사람에 그 실력이 없는 것을 알게 할 뿐이다.

 

이것은 비단 모세의 율법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어떤 민족이 갖는 도덕률에 의해서도, 예를 들면 플라톤의 가르침에 의하건, 세네카의 교훈에 의하건 도덕을 지키는 것으로 도덕가가 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능력에 대하여 고통의 원인이 될지언정, 구제의 길은 될 수 없다. 의문(儀文)은 사람을 죽이고 율법은 사람의 무력을 폭로시킬 뿐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전부 율법에 의해서는 의롭게 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죄의 용서를 믿는 것에 의해서만, 사람은 하나님께 의로 인정된다. 이 신앙에 의해서 비로소 사람은 마음에 자유가 주어지고, 생생하고 활발한 생명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는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석방하셨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 노예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이것은 인간의 혁명이고 비약입니다. 환경의 노예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도덕률의 노예도 되지 않는다. 이 근본적인 혁명에 의하여 사람은 참으로 능동적인 창조적인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체의 개인적 자유 및 사회적 자유의 근원입니다. 바울이 주장한 예수의 복음의 주요 내용의 하나가 이 자유의 부여(賦與)였습니다.



2

원시 기독교회가 예수의 부활의 사실 위에 성립하였음은 성서의 기사가 그럴 뿐 아니라, 오늘날에는 학자들의 일반적인 승인을 얻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믿기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제자들이 이것을 믿은 것은 사실이고, 그리고 그들이 이를 믿은 것이 지어 낸 것도 아니고, 환각도 아니고, 참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다는 사실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기술에 의하면, 예수는 죽어서 매장되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 다시 살아나, 베드로에게 나타나고, 뒤에 12제자에게 나타나고, 마지막에는 “아직 달이 차지 아니한 나 같은 자에게도 나타나셨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일컬음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요, 사도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15:3-10)”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애의 전환과 그 격심한 싸움과 그 활동과 용기와 인내와 희망의 근원을 모두 예수의 부활로 돌린 것입니다. 바울뿐이 아닙니다. 베드로 기타의 사도들도, 예수의 부활을 보기 전과 뒤에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을 띄었습니다. 전에 그들은 유대인의 박해가 두려워 숨어 지내며 집의 문을 닫고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예수를 본 뒤 그들은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의 복음을 증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중에도 바울은 가장 열심히 부활을 논증(論證)하였습니다.

그는 논하였습니다. 모든 생명은 그가 머무는 몸(體)이 있다. 몸에는 물질적인 몸이 있고, 또 영적인 몸이 있다. 땅에 속한 몸이 있고, 또 하늘에 속한 몸이 있다. 땅 위에 있는 생명에 혈기(血氣)의 몸이 있듯이, 영적인 하나님 나라의 생명에는 영적인 몸이 없으면 안 된다. 물질적인 혈기의 몸은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을 수 없고, 죽음에 의하여 썩어 없어지나, 그것으로써 죽은 사람은 몸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예수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각자 부활의 은혜가 주어진다. 죽은 사람은 부활하여, 썩지 않는 영체(靈體)가 주어지고, 그에 의하여 영원히 산다. 즉 바울이 전한 예수의 복음에 의하면 사람의 개성은 부활에 의하여 영원히 살고 각자가 완성한다. 이것은 결코 추상적이고, 막연한 영혼 불멸론이 아니요, 구체적-개별적인 신체 부활론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외치는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때, ‘죽음은 승리에 삼켜졌다.’고 기록된 말은 성취될 것이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네 가시는 어디에 있느냐.’ 죽음의 가시는 죄요, 죄의 힘은 율법인 것이오. 그러나 감사하리로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면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확고하고 동요함 없이, 항상 주의 일을 힘쓰시오. 그대들의 그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고린도 전서 15:54-58)

부활의 신앙은 죽음을 이기는 힘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신앙으로, 개인의 자유는 구체적으로 뒷받침됩니다. 이제는 땅 위에서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환난도 고난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칼도 예수를 믿는 사람의 자유를 속박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일 중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에 의하여 이기고 남음이 있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로마서 8:37). 이것은 바울 자신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경험과, 신앙의 논리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부활의 신앙을 “죽음을 이기는 사람”의 개가(凱歌)로 힘차게 노래한 것입니다.

3

그리스도에 의한 죄의 구속(救贖)과 신체 부활의 신앙은 바울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죄의 압박과 죽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양심의 가책도, 생활의 곤란도 병도 죽음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마음의 평안을 어지럽힐 수는 없습니다. 그는 죽음을 넘어 저편에 빛나는 나라를 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환난 속에서도 결코 절망하는 일 없이, 용기와 희망과 인내와 환희로써 생애를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에 의하여 가르쳐진 인생관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은 개인의 해방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에게 우수한 사회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즐겨, 때때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사회를 인간의 몸에 비유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일치를 권하여 “몸은 하나 영도 하나”라고 하며, 이는 우리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점에서 성장하여 으뜸이신 그리스도에 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를 바탕으로 하여 온 몸은 모든 마디들의 도움으로 굳건하게 맞춰지고 또한 연결되어 각각의 부분이 분량에 맞게 하고 그 몸을 성장시켜, 사랑 가운데서 육성(育成)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에베소서 4:4, 15-16).

그러나 실제로 지체(肢體)는 많지만, 몸은 하나요, 눈이 손을 보고, ‘너는 필요 없다’고는 말하지 않고, 또 머리가 발을 보고, ‘너는 필요없다’

고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몸 가운데서 다른 것보다 약하게 보이는 시체가 더 필요합니다. 그것은 몸 가운데 분열(分裂)이 없고, 각각의 지체가 서로 돌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의 지체가 괴로워하면, 다른 지체도 모두 함께 괴로워하고 하나의 지체가 존중되면, 다른 지체도 모두 함께 기뻐하오.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인 것입니다 고 논하고 있습니다.(고린도 전서 12:20-27)

이런 말 속에 사후의 통일성과, 유기적 연관성과 성장과 직능에 대한 고찰이 포함되고 있습니다. 곧 바울은 콩트 이래 근대 사회학자가 생각해 온 과학적 사회관을 1900년 전의 옛적에 이미 깊은 통찰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사회를 바울은 “에클레샤”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흔히 “교회”로 번역되고 있습니다만, 오늘날과 같은 제도 교회는 바울 시대에 아직 없었습니다. “에클레샤”는 제도 교회 같은 형식적인 개념이 아니라 좀더 넓고, 자유스럽고 탄력성이 있는 생생한 개념입니다. 이 에클레샤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유기적으로 결합된 신자의 몸이고, 그 몸을 순환하는 혈액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성령에 의하여 신진 대사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신선 활발한 사랑의 활동에 의하여 에클레샤는 성장 발달하여 그리스도의 완전에까지 도달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본 사회의 이상이었습니다.

4

에클레샤의 성원(成員)인 사람은 유대인, 희랍인, 노예, 자주의 구별 없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몽을 이룹니다(고린도 전서 12:`13). 그 안에는 인종, 민족, 빈부, 계급의 차별 없이 모든 성원이 다같이 자유고, 평등이고, 그 사이를 지배하는 법률은 “우애”입니다. 곧 근대 데모크라시의 기본 원칙은 바울의 사회관 속에 간결 명료하게 설파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바울을 떠나서는 데모크라시를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 시대의 사회에서는 아직 노예 제도가 일반적으로 실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회적 현실로서는 “노예, 자주인(自主人)의 구별”을 인정했지만, 신앙적 현실로서는 그는 “노예, 자주인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주 안에서 부름받은 노예는, 주에 의해 자주인이 된 사람이며, 또 부름받은 자주인은 그리스도의 노예인 것”이지(고린도 전서 7:22) 자주인, 노예는 인간의 본질적 구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자유를 얻었다는 뜻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주고, 생애를 바쳐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뜻으로는 모든 사람이 노예입니다. 자주인, 노예라는 사회적 신분은 제일의(第一義)의 문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억지로 계급적 해방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예는 석방할 수 있다면 석방하는 것이 좋고, 또 노예의 소유주는 그를 노예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대우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고린도 전서 7:21, 빌레몬서 16: ). 바울의 인간관과 사회관은 필연적으로 노예 해방의 사상을 낳습니다. 제도로서의 노예는 사회적 생산 관계가 일정하게 성숙할 때까지는 해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상으로서의 노예제는, 바울에 의하여 이미 해방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시대는 또한, 인종적-민족적인 차별감이 아직껏 강한 세상이었습니다. 특히 유대인은 전통적인 선민 사상을 자랑하여, 이방인을 멸시하던 때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에클레샤에서는 “유대인, 아랍인의 구별 없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혁명적인 의견이었던 것입니다. (“희랍인”이란 말은, 유대인 편에서 보아, “이방인(異邦人)”과 같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유대인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예며,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겉모습의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오, 또 겉모습의 육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다. 오히려 숨겨진 유대인이 유대인이오, 또 문자(文字)에 의하지 않고 영에 의한 마음의 할례야말로 참 할례로 그 자랑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라고 갈파했습니다(로마서 2:28-29).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는 참 선민은 혈통에 의한 유대인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어받는 사람이다. 곧 아브라함의 육의 자손이 아니라, 신앙의 자손이야말로 참 선민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어받지 않고, 율법과 의문에 의하여 의롭게 되려는 사람은, 인종적-민족적으로는 유대인이라도 하나님의 선민으로 되는 참 유대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방인이라도 참 의미에서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인종적 차별이나 민족적 우열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일소(一掃)되어, 참 국제적 데모크라시의 기초가 놓여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종래 이민족으로 서로 질시하고, 증오하던 상태에서 이제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서로 가까워져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두 민족 사이에 놓여 있던 “적의(敵意)의 장벽”을 헐고, 둘이던 것을 그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사 평화를 이루시고, 십자가에 의해 둘을 하나의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에베소서 2:14-16). 그리스도는 “평화”입니다. 그 안에서 세계의 여러 민족은 서로 원한이 소멸되고, 세계 평화는 실현된다고 바울은 외쳤습니다. 로마 제국은 무력과 법률에 의한 세계 통일을 시도했지만,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의한 세계의 일체화와 평화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5

바울의 세계관은 이와 같이 웅대했습니다. 그는 결코 관념적인 추상론의 허공 속을 떠다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인간관이 매우 현실적이었던 것 같이, 그의 세계관에도 물질적 기초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영 뿐 아니라, 육체도 가지고 있습니다. 영이 깃들지 않은 육체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육체를 갖지 않은 영혼도 또한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에는 영의 자유와 육체의 부활이 필요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세계가 자연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계를 떠난 자연은 무의미하고 자연을 떠난 세계는 공허한 개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계가 완성되려면, 아무리 해도 세계의 존재의 환경으로서의 자연, 곧 세계의 자연적 조건의 완성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현실의 자연계는 결코 완성의 상태는 아닙니다. 토지의 생산력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기상의 변조나, 지진이나, 해일이나, 천변 지재가 끊이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불화, 나라와 나라와의 쟁투도 주로는 물질적 이익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며, 물질적 이익에 관한 투쟁은 토지의 부족, 자원의 결핍 등에 의하여 일어나는 수가 많습니다. 지금 이대로의 자연에서는, 세계 평화의 물질적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인식한 바울은 어떤 유물론자보다도 더욱 철저한 리얼리스트였습니다.

그러면 인류 평화의 사상은 결국 하나의 공상에 지나지 않고,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환영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세계 평화 등은 생각하는 만큼 무모한 일이고 인류의 역사는 이기주의자의 위선에 그칠 것입니다. 역사는 목표를 잃고, 인류는 이상을 상실한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논하였습니다.

피조물(被造物)은 실로 절실한 소원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소. 왜냐하면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서가 아니라, 복종시키시는 분에 의한 것이고, 또한 피조물 자신도 멸망의 종의 상태에서 놓여나,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의 자유에 들어가는 소망이 남아 있기 때문이오. 우리는 알고 있소. 모든 피조물 전체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함께 신음하고 함께 해산의 고통을 계속하고 있음을.(로마서 8:19-22)

”피조물이라 함은 곧 자연계의 만물입니다. 자연계의 생산력이 속박되고 있고, 때로 “자연의 폭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그 원인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원래 자연은 사람의 생활 환경이고, 사람의 영적 상태와 자연의 물적 상태와는 밀접하고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은, 인간의 티없이 순진한 것에 적응하여 자연도 “낙원”이었습니다. 그렇던 것이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죄를 범하고, 영의 자유를 잃은 결과, 자연계에도 또 이에 의하여 위화(違和)와 변조가 생겨 멸망의 상태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죄가 구속되어, 하나님의 아들인 영광의 자유에 들어갈 수 있으면 자연도 또한 이에 따라 그 멸망의 상태에서 해방되어, 질서와 평화와 풍요한 생산력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에 이르러 개인의 평화와 사부의 평화와 자연의 평화는 서로 상응하고, 서로 연결되어 인류의 역사는 완성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땅 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우주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