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실)좋은 책 소개

4부 구원과 윤리, 이렇게 조화시킨다

好學 2010. 4. 25. 21:20

 

 4부  구원과 윤리, 이렇게 조화시킨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세상을 위하는 존재이다.  교회가 세상을 위한다 함은 교회가 세상의 진정한 소망이요 피난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오랜 세월 동안 한국목회자들은 세계를 이루는 두 축, ‘가정’과 ‘사회’를 너무나도 등한히 해왔다.  가정에 대한 무관심을 제자도의 표상인양, 사회 문제를 외면하는 태도를 복음주의인 양 꾸며왔던 것이다.  이런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는 목회자에게 목회를 동역동사(同役同使)로 인식하라는 주문이 먹혀들 리가 없다.  그간 목회를 독불장군식의 영웅적, 전설적 무용담쯤으로 치부하는, 인격과 신학적 전문성보다는 저돌성과 추진력을 덕목으로 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것도 다 이런 탓이다.

 

200. 교회 중심에서 가정 중심으로 전환하라


 미래가정 이렇게 바뀐다
  테크노피아를 꿈꾸는 미래의 가정은 최첨단 과학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고 기술이 가정의 면모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 놓게 된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우선 가정에서 세대간의 격차가 커지게 될 것이다.   흔히 우려하는 대로 가사(家事)의 80퍼센트 이상을 돌보게 될 로봇을 비롯한 첨단 과학 기술이 가정주부의 역할을 대신하므로 가정주부의 여가 이용이 미래의 큰 연구과제로 떠오를 전망이다.  이러한 미래적 예측이 현실로 다가오므로 가정의 새로운 가치관 정립과 가정에 대한 중요성의 비중이 가중되고 있다.
  21세기의 가정은 노령 인구의 증가로 노령화 가정이 많아진다.  이는 이전과 같은 대가족의 형태가 아닌 노인만 사는 가정을 말한다.  이와 더불어 현재 구미의 추세와 같이 독신 인구가 증가한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 사회는 개별화가 극대화되고, 또한 경제적 성장은, 더불어 사는 관계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경제적 여건의 변화가 함께 살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고 이러한 변화는 결국 독신자의 증가를 가져온다.  따라서 현재 구미의 추세와 같이 독신 인구가 증가하게 될 것이다.  특히 경제적 여건의 변화는 여성 독신자가 증가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또한 가정마다 자녀 수가 적으므로 자녀를 과잉보호하게 되고 이에 따른 자녀의 사회성 결여, 그리고 체격은 커지지만 체력은 약해지는 기현상이 발생한다.  동시에 자녀의 과잉보호는 왕자병, 공주병을 낳게 한다.  이러한 현상은 겸손을 미덕으로 삼던 과거와는 달리, 자기 과시와 정확한 자기 표현이 미덕인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극대화 된 개인주의를 초래케 한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미래 가정의 한 모습이다. 어쨌든 미래 사회는 가정 중심으로 이동할 것이기 때문에 가정은 미래 교회의 중요한 목회적 관심이 된다.  미래 사회의 변화 가운데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가정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현재의 구미 사회는 사회의 중심이 이미 가정 중심으로 전환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직장인의 생활 패턴이 바뀌며 직장과 일에 대한 개념이 전환됨으로써 생활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최근에 와서는 주 5일 근무제 직장이 점차적으로 증가되고 있으며 주말의 복장도 달라지고 있다.  주중에는 정장차림의 복장을 선호하지만 주말에는 캐주얼한 복장을 즐겨 입는 추세다.  실제로 고객을 상대하는 직장인들도 이전같이 딱딱한 정장보다는 부담없이 자연스러운 복장으로 고객들에게 편안함을 준다.
  이러한 복장의 변화도 직장이라는 경직된 개념보다는 가정이라는 부드러운 개념을 선호하는 현대인의 기호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직장에서도 가정과 같은 분위기를 느끼기를 원하는 젊은 세대들이 많아지고, 이전처럼 통제가 많고 기계적인 직장보다 화합적이고 가정적인 직장을 선호하게 된다.  그래서 직장도 가정과 같은 부드러운 이미지로 전환하려고 노력한다.

 

가정을 포용하는 교회
  이러한 추세를 감안한다면 교회도 가정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앤더슨(Leith Anderson)은 그의 책 「21세기를 위한 교회」(A Church for the 21st Century)에서 교회의 개념과 형태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가족농장(family farm) 형태의 교회이다. 미국의 대부분의 가족 농장 교회는 작은 교회이며 수적으로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둘째, 학교(school) 형태의 교회이다.  이런 교회의 예배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이 목사의 설교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배우는 것을 싫어하는 교인은 오래 머물지 못하는 교회이다.
  셋째, 가맹점(franchise) 형태의 교회이다.  교단에 소속된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대개 어디에 있든지 교단이 제공하는 교재와 커리큘럼으로 공부한다.
  넷째, 일반 상점(general store) 형태의 교회이다. 교인들에게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해주는 교회이다.  그래서 이런 교회를 공동체교회(community church)라고 부른다.
  다섯째, 쇼핑 몰(shopping mall) 형태의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대개 규모가 크고 잘 알려져 있으며, 성공적이고 때로는 상업적인 교회이기도 하다.
  여섯째, 전문점(speciality shop) 형태의 교회이다.  다른 교회에서 얻을 수 없는 필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어디에 위치하고 있든지 그 교회를 찾아간다.
  일곱째, 유령의 집 (haunted house) 형태의 교회이다.
  사람들이 호기심에서 한 번쯤 찾아보는 그런 형태의 교회이다.

가정을 중시하는 교회
  미래 교회는 어떤 형태의 교회이든지 가정 중심의 교회, 가족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미래 교회가 가정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할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미래 사회는 가정 중심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미래의 가정이 전통적인 가정의 모습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신세대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에 따라 미래 가정은 다세대의 가정보다 핵가족 형태가 많아질 것이고, 가족이 분열되고 이산되는 경우가 많아질 것이다.  또한 맞벌이로 인한 주말부부가 많아지고 부부는 자연히 함께 ‘우리의 삶’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나홀로 ‘내 삶’을 즐기는 새로운 풍습이 정당화될 것이다.
  가정 중심이 된다는 것은 가정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뜻이기도 한 까닭에 이에 대한 역작용으로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도 많아질 것이다.  여성들의 삶이 편리해지고 경제적 여건이 향상됨으로써 독신자들이 늘어날 것이다.  미국교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독신자를 위한 목회 (single ministry)가 일반적이 되었다.  가정에서는 가정 주부의 전통적 역할이 축소되고, 식습관에서도 인스턴트 식품을 많이 먹게 되면서 가정주부의 일이 줄어들 것이다.  이에 따라 가정주부의 새로운 역할이 자리하게 된다.
  위와 같은 이유에서 미래 교회에는 목회 패러다임이 가정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여기서 가정 중심이라는 것은 성경적 가정관과 가정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해주자는 의미이다.  우선은 가정이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하나님의 기관임을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가정은 작은 교회이고 교회는 큰 가정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처음 가정을 창조하셨고, 모든 가정을 창조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가정이 하나님의 기관이며 모든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는 것이 가정 중심 목회의 초점이다.
  가정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가치관과 가정 중심의 목회를 든든히 구축하기 위하여 교회는 가정에 대한 중요성을 가르치고 분산된 가정의 구심점을 다시 회복시켜 주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  일본의 가정들은 도꼬노마, 즉 다다미방에 찻상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앉아 대화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래서 일본의 가정의 중심은 도꼬노마라 한다.

 

교회 내 가정 사역
  내가 섬기는 교회는 최근 소그룹을 통한 가정사역학교를 개설하여 많은 열매를 거두고 있다.  가정사역학교의 거의 모든 내용은 가정에 대한 것이다.  이는 소그룹 운동의 효율성과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 가정의 중요성을 동시에 충족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그 내용을 보면 신혼 부부 혹은 결혼 예정자들이 함께 공부하는 ‘새가정교실’이 있고, “아버지가 변해야 가정이 변합니다.”라는 모토를 내세워, 일반적으로 교회의 성경공부 프로그램에서 제외되는 아버지들이 함께 모여 공부하는 ‘아브라함교실’이 있다.  오랜 가정 생활 가운데 무뎌진 부부의 사랑을 다시 느끼게 하고 부부간의 상처를 치유하며 상처를 주지 않는 대화기법을 공부하는 ‘부부 대화교실’, 시어머니들이 함게 모여 가정에서의 바람직한 역할을 공부하는 ‘나오미교실’, 며느리들이 모여서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는 중요한 미덕인 좋은 며느리, 좋은 아내, 좋은 어머니상을 배우는 ‘룻교실’이 있다.
  또, 자신의 성격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분노를 지혜롭게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는 ‘베드로교실’, 인생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인 배우자의 죽음을 맞은 이들이 그 슬픔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나사로교실’, 중년의 부모와 사춘기의 자녀간의 차이와 갈등을 해소하는 ‘이삭교실’, 그리고 최근의 사회적 문제로 비중이 커진 명예퇴직자들이 성경을 통하여 힘을 얻고 가정과 교회에서 할 일을 찾는 ‘모세교실’(모세는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일을 그만두게 하고 죽게 하신 명예퇴직자였다) 등이다.  나는 전체적인 미래 목회 패러다임의 전환에 맞추어 위와 같은 훈련 프로그램을 일치된 하나의 목회 구상으로 제공하는 방법을 취한다.
  이와 같이 미래 교회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전환하기 위해, 평신도를 교회의 중심 세력으로 끌어올려 오피니언 리더(opinion leader)로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미래 목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소그룹 훈련과 영성 훈련을 복합시켜 소그룹 영성 훈련을 개발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미래 교회의 목회자가 가장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가 바로 평신도를 양육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신도 소그룹 영성 훈련의 많은 부분들이 가정 사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미래 사회에서 가정의 중요성을 예측하고, 미래 교회에 가정 사역의 중요성이 커진다는 전망에 근거한 것이다.

 

201. 프로그램 목회에서 영성목회로 전환하라

 

기술이 아닌 철학
  현실적으로 우리 주변의 목회 상황을 살펴보면 수많은 목회 프로그램과 그 자료들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많은 성경공부 자료들, 설교집과 예화집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한 무한한 목회자료들과 CD롬에 저장된 목회 기술들이 목회자에게 도움이 되는 한편, 목회자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회 기능공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과연 이렇게 많은 목회 자료들이 목회자를 위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전 세대의 목회자들에게는 이런 유의 목회 자료가 없었고 이러한 것들이 없이도 훌륭하게 목회를 하였지만 이제는 이런 자료들이 없으면 큰 일이라도 나는 줄 알고, 목회 계획이나 설교, 성경공부를 포함해 거의 모든 목회를 자료에 의존한다.  자료가 없을 때의 목회는 기도와 명상을 통하여 이루어졌지만, 자료 시대의 목회는 기도와 명상보다 우선 자료에 먼저 손이 가게끔 목회 방식에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갖가지 기계며 자료들이 목회자가 목회의 본질보다는 기술에 의존하게 하고, 비본질적인 것에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게 한다.  실제로 이는 기술이 없다고 해서 목회가 안 되는 것도 아닌데, 기술과 자료를 알지 못하면 현대 목회에서 낙오되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목회의 자료와 기술을 이용은 하되 거기에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된다.  수단과 목적이 혼동되는 산업사회의 산물은 결국 목회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본말 전도
  한국교회도 외형적 성장을 추구하면서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처럼 중세풍의 형식과 거품, 깨뜨리기 힘든 두터운 껍질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교회는 과감하게 이러한 거품을 걷어내고 껍질을 깨는 각고의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중세 때 교회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영상의 회복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새롭게 거듭나고, 눈앞에 닥친 현실의 경제적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우선 교회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영성을 회복하는데 있다.
  기술이 발달하고 사회가 조직화될수록 인간은 영적인 것을 찾고 본질로 돌아가려고 하는 회귀본능을 갖게 된다.  인간의 삶이 기술화되고 조직화될수록 인간은 기술에 대해 초연해지고 조직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심리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해방의 돌파구로서 영성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미래인이 추구하는 영성의 제공자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는 영성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교회가 건전한 영성을 사회에 제공하지 못하면 사회는 엉뚱한 악령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래서 미래학자들은 21세기에는 이단과 사이비가 횡행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 말은 곧 영성을 추구하는 미래인에게 교회가 건강한 영성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성을 상실하지 말아야 하며 사회에 영성을 제공할 능력을 항상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독교 외에도 영성을 가진 종교가 있다는 사실이다.  불교나 동서양의 신비종교도 영성을 가지고 있으며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이나 ‘초월적 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도 나름대로 영성이 있다.  기독교는 이러한 비기독교적인 영성과는 다른,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영성을 가져야 하며 이 영성을 사회에 제공해야 한다.

훈련을 교육처럼
  최근의 심리학의 가장 큰 주제 가운데 하나인 ‘삶의 질(quality of life)'이라는 것은 인간이 고도로 발달한 과학 시대에 살면서 상대적으로 가장 결여된 인간의 문제이다.  기업에서도 기술향상이나 생산성의 향상면에서 상대적으로 빈곤을 느끼는 부분이 바로 ’노동 생활의 질(quality of work life)'이다.  개인의 성공이 곧 기업의 성공이듯이, 교인 각자의 영적 성장이나 삶의 질 향상이 곧 교회의 성장이며 교회의 질의 향상이다.  교회의 성장과 성숙에 중요한 요인이 되는 이 교회의 질 향상과 삶의 질 향상 문제는 곧 교인 각자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이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식 전달의 통로가 되는 학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세계적으로 지금 성장하고 성공한 교회를 보면 바로 학습과 훈련이 교회성장을 이룬 도구임을 알 수 있다.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고 이러한 급변하는 세계에 적응력을 키우는 훈련의 문제는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연구와 훈련을 하지 않고 사회 변화에 대한 적응을 자포자기 한채, 침체나 쇠퇴 원인을 사회탓으로만 돌리는 교회는 생존할 수 없다.  경쟁력뿐만 아니라 생존력마저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교회도 영적 생활습관을 갖도록 노력하고 이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면 결코 쇠퇴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 속에 복음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영성훈련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훈련 방식을 탈피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강제성이 부여된 훈련이었고 성도들도 억지로 받던 훈련이었다면, 이제는 스스로 참여하는 자율적 훈련으로 그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대를 위한 교회의 훈련도 참가자 학습으로 그 패턴을 전환하여 교인들이 자율적으로 훈련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훈련의 결과가 다양한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학습의 효과에서 타율과 자율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한국의 교육은 타율적이고 강제성이 있는 획일화 교육이었다.  전문성을 요구하는 세계화 시대에는 이러한 전통적 교육 방식을 속히 벗어나서 다양한 기능을 전문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훈련기회를 다양하게
  미래학자들은 미래 사회의 한 특징을 이단과 사이비의 출현이라고 단정한다.  물론 이전에는 이단과 사이비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에 접어들게 되면 상대적으로 이단과 사이비가 훨씬 더 증가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미래학자들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이다.  성경에 보면 말세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많아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마24:5,11). 이러한 미래 현상은 과학기술과 조직사회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사람들이 기계와 더불어 살고 조직사회에 살게 되면 자연히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영성을 추구하게 된다.  그런데 교회가 건전한 영성을 사회에 제공하지 못하면, 사회는 잘못된 영에 사로잡히게 되고 이단과 사이비가 나서서 혼란스럽게 된다.
  한국교회는 최근에 와서 교회가 가지고 있던 영적 기운을 서서히 상실해가고 있다.  한국교회가 통계적으로 침체하기 시작한 연도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침체하기 시작한 연도를 점검해 보는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침체하기 시작한 연도를 1996년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1996년은 이상하리만큼 사회가 그릇된 영적 분위기에 많이 사로잡히게 된 해이기 때문이다.
  우선 1996년은 환생과 전생 신드롬이 사회를 어지럽게 한 해이다.  터무니없는 환생이나 전생론에 대하여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급기야는 ‘환생 신드롬’이라는 신조어까지 나오게 되었다.  양귀자 씨의 「천년의 사랑」이라는 환생을 소재로 한 소설이 ‘은행나무 침대’라는 영화로 극화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고, 동시에 「퇴마록」이란 소설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외에도 ‘환생’, ‘깊은밤 깊으나 곳에2’, ‘귀천도’ 등의 영화가 줄줄이 흥행에 성공하고, ‘8월의 신부’라는 환생 주제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기도 했다.  26년 전에 죽은 남녀가 다시 환생하여 전생에 이루지 못한 사랑을 되찾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이 드라마는 사랑의 고리를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정신과 의사가 맡도록 극을 설정해서 설득력을 더했는데, 환생 신드롬 형성에 적지 않은 여파를 끼친 드라마였다.
 
현실을 피하여 피안(彼岸)으로
  드라마나 영화 외에도, 전생을 체험할 때에 잡귀의 침입을 막아주는 금강저라는 것이 유행하였고, 전생투시용 천연수정구, 문스톤 등이 1만원에서 40만원 정도하는 높은 가격으로 팔리기도 했다.  또한 ’96년 하반기에는 이런 전생용구들의 갋이 3배나 폭등했다.  당시에 한국갤럽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의 24.5퍼센트와 개신교 신자의 21.4퍼센트가 전생을 믿고 있다고 했다.  이는 잠시 유행한 일시적인 현상은 아니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환생에 대한 믿음은 불교의 교리 차원을 넘어 우리가 오랜 세월 동안 지녀온 혼합주의적 의식이라는 것이다.  한국인은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심성(mind-set) 깊은 곳에 불교라는 속옷을 입고 있다.  동시에 이러한 현상은 경제수준의 향상과 사회안정으로 여유를 갖게 된 신자들의 신앙적 관심이 공동선이나 사회적 책임보다 개인의 건강과 안락과 심리적 안정에 집착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 불안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잊어버리려는 현실도피에서 발전한 것이기도 하다.
  전생에 대해서 특히 젊은 세대들의 관심이 높은 이유를 교회는 주목해야 한다.  젊은 세대들이 전생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유는 신세대인 그들의 애정관 때문이라고 본다.  전생은 신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인스턴트식 사랑과 찰나적 사랑을 운명적 만남으로 결론 내려준다.  숙명적인 전생의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다는 자기합리화식 사랑 때문에 신세대는 전생 신드롬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환생에 대한 이야기의 대부분의 주제는 사랑이다.  이러한 사회의 환생 신드롬에 대하여 교회는 환생이 아니라 중생이 우리의 삶의 해답인 것을 가르쳐주고 건강한 영이 사회를 지배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즉 환생론이 왜 비기독교적이며 불건전한 사회를 만들게 하는지를 알리고 이에 대한 교회의 적절한 처방을 제시해야 한다.

 

교회의 영성 쇠퇴와 저급한 문화
  환생 신드롬이 만득이 시리즈와 같은 귀신 이야기와 무당 이야기가 사회를 풍미한 것은 교회가 건강한 영성을 가지지 못하고 사회에 건강한 영을 제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곧  교회가 영적으로 약화되었다는 의미인 동시에 교회가 사회를 구원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의미이다.
  이는 결국 전도의 능력이 약화됨을 뜻하며 교회가 쇠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성 회복은 교회를 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 다행스러운 일은 최근의 경제 한파 때문에 다시 교회로 발길을 돌리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제위기는 한국교회에 주어진 20세기의 마지막 성장 기회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이같은 좋은 기회를 양적 성장뿐만 아니라 21세기를 위한 영적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미래적 전망으로 볼 때 한국교회가 재성장할 수 있는 길은 건강한 영성의 회복에 있다.  이 영성의 회복은 성경 본래의 모습, 교회 본연의 사명으로 회귀하고 했던 종교개혁에 버금가는, 한국교회의 신종교개혁 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202. 교회성장에서 사회봉사로 전환하라

교회와 이타주의
  지난 6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온 한국교회의 고속 성장 추세는 차츰 둔화되어 오다가 최근 들어서는 침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한국교회의 많은 교단들 가운데 평균 1퍼센트 이상 성장한 교단은 하나도 없으며 많은 교회들이 침체되거나 쇠퇴하고 있다.  그동안의 한국교회 성장 신드롬의 기세가 꺾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시 한국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신드롬을 극복해야 한다.
  그동안의 교회성장기는 그 당시에 맞게 우리에게 필요했던 은총의 기회였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성장이라는 상향 중심의 목회관을 가지고는 교회 본연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인수와 건물의 크기를 가지고 교회를 평가하며 목회의 성공여부를 따지던 이전시대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새롭게 열린 창을 향해 사회를 목회적 관심 대상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최근 한국교회 침체 현상의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양적 성장은 이루었으나 질적 성숙에 미흡했다는 점이다.  어느 사회이든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25퍼센트 이상이면 기독교 문화가 형성된다고 하는데, 한국교회는 기독교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실패했다.  주일이면 교회에 나오는 교인은 많은데, 주일 말고는 사회에서 교인을 찾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래서 흔히 이러한 교인들을 ‘주일 크리스천’(sunday christian) 또는 ‘명목상의 크리스천’(nominal christian)이라고 한다.  분명히 교회는 성장했고 그리스도인도 많이 있지만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는 그리스도 문화와 거리가 멀다.
 
 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
  교회는 교회의 내용인 문화를 소유해야 하며 그 문화는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영향력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교회는 인간의 이념과 동기를 지배하는 데 원동력이 되는 문화를 사회에 심음으로써 사회의 문화를 기독교화할 수 있다.  나아가서 기독교는 사회의 바른 문화를 창출해나가는 원동력이 되어야 하며, 전통 문화의ㅣ 보존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세계민족사를 보아도 역사 속에서 소멸한 민족은 전통가치와 문화를 소홀히 여긴 민족들이다.  원나라, 청나라가 이런 나라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통 가치와 문화를 보존하고 동시에 건강하고 새로운 사회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 나라를 지배하는 문화가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또 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문화를 창조하고 있는지도 자문해보아야 한다.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교회 자신을 위한 성장 위주의 자세에서 벗어나 타인을 위한 성숙 위주의 교회로 탈바꿈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봉사하라
  이처럼 교회가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사회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한 자구적(自救的)인 것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교회의 거의 모든 구조는 성장구조 일색이다.  재정구조만 하더라도 많은 교회들이 총예산에서 사회봉사나 선교 등 대외적 사업을 위한 재정보다 교회의 관리비와 인건비 등에 상당히 높은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사회를 위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구조조정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교회는 산 위의 황홀경 가운데 산 아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초막 셋을 짓고 사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본당, 교육관, 기도원이라는 초막 셋을 짓고 산 아래의 어지럽고 복잡한 사회를 바라보지 않으며 하늘만 바라보고 살아온 교회가 한국교회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 위를 위하여 변화하신 것이 아니라 산 아래를 위해 산 위에서 변화하신 것이었다.
  물론 한국교회도 산 위의 황홀한 경험이 필요하다.  그러나 산 위의 경험은 산 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아래를 위한 경험이기 때문에 산 아래로 내려가기 위한 말씀의 외적 생동이 있어야 한다.  산 위에서 아무런 변화의 경험도 없이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위험하지만, 산 위의 변화만 추구하고 산 아래에서 기다리는 자들을 외면하는 것도 위험하다.  이것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자세이다.  교회는 교회 안에서의 영적 경험을 중요시할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의 영적 실천도 똑같이 중요시해야 한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 세 가지는 케리그마(말씀선포)와 코이노니아(교제)와 디아코니아(봉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교제하며 봉사하는 기능은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중요한 기능들이다.
 
 성경에서 본 사회봉사
  그러므로 교회가 디아코니아를 상실하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봉사이면서도 가장 큰 봉사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람에 대한 윤리적 봉사이다.  사람을 섬기는 수평적 봉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수직적 봉사의 결과이며 대가이다.  그래서 웨슬레(John Wesley)는 “하나님께 대한 최대의 예배는 인류에의 봉사이다.”라고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디아코니아를 가지고 있으며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살게 하셨다.  그러므로 디아코니아는 우리의 피할 수 없는 과제이며 사명이다.

 

환원의 원칙을 배운다
  최근에 관심을 갖게 된 교회의 구조조정은 그 인력과 재정과 기구가 교회의 안을 살찌우는 내수적인 구조에서부터 교회 밖을 섬기는 외향적인 구조로 조정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의 인력과 재정은 교회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한 부문에 지나치게 많이 소비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사회가 교회에 대하여 재산을 공개하라는 소리는 재산을 분배하라는 소리로 들어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성경이 비록 정당히 얻은 자신의 재물이라 하더라도 분배의 책임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아무리 정당한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재물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가진다.  성경이 가르치는 희년의 원리도 마찬가지이다.  정당하게 돈을 주고 구입한 땅과 재물이지만 희년이 되면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하신다.  교회는 이 원리를 알고 가르쳐야 하며 재산을 분배하라는 사회의 요청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교회의 본래적 모습은 소유기관이 아니라 분배기관이기 때문에 교회는 과감하게 소유 모델에서 분배 모델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이러한 교회 스스로의 개혁이 있을 때 교회는 사회를 위한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며 사회를 섬기는 교회로서의 책임을 수행하게 된다.

 

배부른 교회 태만한 선교
  교회의 배는 항상 조금은 곯아야 한다.  배가 너무 차고 불러서 움직이기조차 힘들다면 좋은 교회가 아니다.  건강법을 강의하는 의사의 말을 빌리면 사람의 위(胃)는 70퍼센트 정도만 채우는 게 건강에 가장 좋으며 과식하는 것은 굶는 것보다 더 해롭다고 한다.  그런데 욕심 많은 사람들은 위를 100퍼센트 이상 채운 다음 소화제를 먹거나 토하기도 한다.  교회도 모든 수입예산을 교회를 위하여 채우지 말고 다른 부문의 섬김을 위하여 비워놓아야 한다.  이것이 건강한 교회가 되는 비결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사회를 위하여 열려 있는 교회가 되어 필요할 때에 신속히 달려갈 수 있는 발이 되어야 하고, 동시에 빈 손으로 가지 않고 무언가 들고 갈 수 있도록 교회의 배를 채우지 말고 비워두어야 한다.

 

섬김 - 구원의 목적
  교회는 지금까지의 성장구조에서 성숙구조로 과감하게 구조조정을 시도해야 한다.  구조조정은 교회의 목적 변경일 수도 있고 목적의 확실성 강화일 수도 있다. 미국의 가장 큰 컨설팅회사인 멕켄지(McKenzie) 컨설팅에서는 미국에서 가장 건실하고 좋은 회사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연구하여 다음과 같은 ‘7S 법칙’을 발표했다.  관리 스타일(style), 관리 기술(skill), 전략(strategy), 구성원(staff), 제도나 절차(system), 구조(structure) 그리고 공유된 가치(shared value)가 그것이다.  한국교회도 사회봉사로 그 패러다임을 전환하려면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 자체를 사회성을 포함할 수 있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즉 사회봉사를 중심으로 교회 구조를 전환해야 특징적이며 효과적인 사회봉사가 가능하다.  나아가 아마추어의 수준이 아니라 프로의 수준으로 봉사하기 위해서는 스타일이나 기술, 전략과 제도, 절차나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또한 그 중에서도 특히 구성원이 중요하다.
  내가 섬기는 교회에는 사회봉사를 전담하는 ‘복지법인 연동복지원’과 이 일에 종사하는 전문가인 복지사가 있다.  이는 미래 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사회봉사를 전담하기 위해 착안한 것이다.  지금 전문가가 수행하는 사역은 이전에 아마추어가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수행할 때의 사역의 질과는 전혀 다르다.  새로운 구조와 전문가를 활용할 때 전혀 새로운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복지원에서는 두 곳의 어린이집, 노인정, 노인학교, 소규모의 양로원과 야학(연동청소년학교)등을 운영한다. 앞으로도 힘이 닿는 대로 복지 사업을 확충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교회 옆에 복지관이 건축되면 지역 주민을 위한 장례식장, 환경미화원을 위한 세탁실과 탈의 휴게실, 청소년을 위한 농구장, 청년을 위한 북 카페, 게스트 룸, 도서실, 지방학생을 위한 장학관, 노인들을 위한 게이트볼 시설, 문화공연을 위한 소극장 등을 마련할 계획이다.
  스코틀랜드 가정의 격언 가운데 “섬기기 위하여 구원받았다.”(Saved to serve)는 말이 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섬기기 위함이며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세상을 섬기기 위함이다.  교회는 세상을 섬길 때 비로소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교회가 된다.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며 사회가 인정하는 교회가 세상에 필요한 교회이다.  미래 사회에서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하여 남은 한 가지 일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봉사일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속히 섬김의 구조로 교회의 구조를 조정해야 한다.

 

203. 제자훈련에서 사도 훈련으로 전환하라


제자에서 사도로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그들이 성령강림을 체험한 다음에는 더 이상 제자가 아니라 사도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일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일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3년이나 가르쳤어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지만, 성령강림 후에 그들은 굉장히 능력있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능력 목회는 제자들의 몫이 아니라 사도들의 몫이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평범하다 못해 비천하기까지 한 사람들이었다.  당시에도 많은 귀족들이 있었고, 성경을 잘 아는 서기관들도 있었고,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인들도 많이 있었고, 제법 지위를 가진 자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보통 이하의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그나마 가장 나은 제자는 마태였다.  마태는 가버나움의 세리였는데 당시 세리는 돈도 많이 벌고 신변 보장도 받을 수 있는 상당히 괜찮은 직업이었다.  세리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교육도 받아야 하는데, 아람어, 헬라어, 라틴어 등을 할 수 있어야 세리가 될 수 있었다.
  탈무드에 따르면, 세리는 두 계층으로 구분되었다.  하나는 ‘가바이’라는 일반 세리로 술, 과일 등에 과세하는 세리이며, 또 하나 ‘미크사’는 밀수를 단속하는 세리로 길고 예리한 쇠막대기로 가방을 찔러보는 일을 하기 때문에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나은 위치에 있었던 마태 역시 세리로서 유대인의 공적(公敵)이며 경멸의 대상이 되었고, 직업 중에 세리는 가장 가증스러운 직업으로 취급되었다.
  당신의 기준으로 볼 때 이들 열두 제자는 시시하며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선택하여 제자로 삼으실 때에 산에 가셔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신 뒤 고귀하게 세우셨다.  사람들의 눈에는 시시한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선택하실 만큼 귀중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평범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동안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던 제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강림을 체험한 그들은 달라졌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관원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할 수도 있었으며,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였지만 매를 맞고 옥에 갇혔다가 천사의 이끌림을 받아 풀려날 정도로 신실한 예수님의 증인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사도들 가운데 요한만이 수명을 다할 수 있었다.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섬기며 오래 살았지만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섬에 유배당하기도 하는 고난을 당해야 했다.  구전에 따르면 맛디아를 포함한 다른 모든 사도들은 순교를 당했다.  제자일 때는 무기력한 무리에 불과했지만 사도가 되었을 때에는 큰 권능을 가진 일꾼이 되었다.  제자일 때가 아니라 사도일 때 그들은 놀라운 능력의 사람들이 되었다.

 

흩어져 나가는 교회상
  이제 한국교회에서 훈련을 받은 성도들도 제자에서 사도로 전환되어야 하며, 사도로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가 많아야 한국교회는 다시 성장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대형교회가 많다.  세계에서 가장 큰 50대 교회 가운데 한국교회가 23개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한국교회가 해외에 파송한 선교사의 수가 4,500명이 넘으며 밤이 되면 빨간 십자가 네온사인이 어두운 밤을 붉게 밝힐 정도로 교회가 많다.  주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예배당을 부수어버리고 다시 지을 만큼 경제력이 넉넉한 교회도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교회는 10년마다 교세가 배가될 만큼 급성장한 교회였다.  그 기간에는 양적 증가가 절대적으로 요구되었고 교회성장이 목회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교회는 제자훈련을 통하여 ‘배우는 자’인 제자를 많이 양육했다.  그러나 제자훈련은 교회 밖에서도 인정받는 좋은 그리스도인을 양성하는 데 약한 단점이 있다.  이제 한국교회에는 교회 안에서 배우는 자가 아닌 교회 밖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인 사도가 많아져야 한다.  그래서 제자훈련도 사도훈련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교회는 사회를 쳐다볼 겨를도 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달려왔다. 교회는 사회를 외면하고 교회를 살찌우는 데 급급했고, 그 결과 이제는 교회가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하며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사회를 돌보며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교회 내의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좋은 사회인을 많이 배출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교회는 사회의 문화를 창출할 영적인 힘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성찬의 정신으로 살자
  우리 교회에서는 여러 해 전에 “성찬의 삶을 살자.”는 캠페인을 한 적이 있었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온 교우들이 성찬의 삶을 이해하고 성찬의 삶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캠페인이었다.  나는 교인들에게 성찬을 사도의 방식으로 다시 해석해주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언약의 피다.”라고 하시며 먹고 마시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제자들에게 주시기 원하셨던 것은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몸과 피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라는 명령이 아니라 몸과 피를 주라는 명령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찬의 의미는 단순히 예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피를 제공하는 삶이다.  직접적으로 장기기증 운동을 통하여 몸을 주며, 헌혈을 통하여 피를 주는 것은 진정한 성찬의 삶의 한 모범이 된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온 교인을 상대로 장기기증 운동을 했다.  많은 교우들이 부분적으로 장기를 기증하기로 하고, 사후 시신 기증을 약속한 교우들도 상당히 있다.  헌혈도 한 해에 한 번만이 아니라 자주 한다.  그리고 전체 교인 수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교인이 헌혈에 참여하는 편이다.  이러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이 있는 신앙의 훈련을 나는 사도훈련이라고 해석하며 성도들을 그렇게 훈련한다.
  한국교회는 구원의 감격과 열정이 있는 로마서는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행함과 수고와 일치의 고통이 있는 야고보서는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  제자훈련에서 사도훈련으로의 전환은 바울과 야고보의 조화이며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조화이다.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이방 세계인 로마에 보낸 편지에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에게 신앙을 강조한다.  반면 야고보는 종교적인 전통과 우월감에 사로잡혀 살면서 유대주의의 비행과 외식주의의 형식을 일삼던 유대인에게 행위를 강조한다.
  이런 배경에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규정하며 행함을 통하여 믿음을 보이라고 한다.  바울과 야고보의 교훈은 교회와 교인의 성장에 중요한 양대 산맥이며, 이 교훈에서 강조되는 ‘신앙과 행위’는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건이다.
  한국교회는 110년의 개신교 역사 가운데 이방인 같은 처지에서 신앙을 배워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 제자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일깨워 행함이 있는 사도가 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제자훈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도훈련으로 전한해야 할 것이며, 교회의 삶의 자리인 사회를 위한 교회가 될 때, 비로소 사회가 교회를 요청하게 된다.

204. 생활 이야기에서 생명 이야기로 전환하라

  인간복제, 교회의 반응은 무엇인가
  생명복제의 가능성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93년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의 제리홀 (Jerry Hall)과 로버트 스틸먼(Robert Stillman)교수는 하나의 배자(胚子)를 48개의 새로운 배자로 세포분열시켜 인간 복제의 가능성을 열었다.  또 ’97년 2월 스코틀랜드의 로슬린 연구소가 복제 양 돌리를 공개함으로써 생명복제는 현실적 문제로 대두되게 되었다.  이로써 유전공학의 새 장이 열렸다는 환호성과 긍정적 평가에 더불어 복제인간의 탄생이 멀지 않았다는 우려를 낳게 됐다.  돌리는 생식세포를 이용한 복제가 아니라 체세포를 이용한 복제이기 때문에 이제는 대량 복제가 가능한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로슬린 연구소는 돌 리가 ’98년 초에는 어미가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고, 과학자들의 생명조작과 희롱은 계속되고 있다.  이로부터 얼마 안 되어 미국의 오레곤에서는 ’97년 8월, 복제 원숭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런 동물 복제가 잇달아 성공함으로써 이제는 인간의 복제가 가능한가 하는 질문은 유치한 질문이 되어버렸다.  언제나 그러했지만 과학의 발달은 순기능과 함께 반드시 역기능을 초래한다.  생명복제기술의 발달도 예외는 아니다.  노벨은 길을 닦기 위하여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지만 대량 인명살상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원자핵의 발견은 인류사회에 엄청난 변화와 이익을 가져왔지만 인류 자멸의 길이 되었다.  과학은 항상 인간의 문화와 삶의 진보를 가져옴과 더불어 파괴와 멸망을 동시에 가지고 온 도구인 것이다.  복제 양 돌리를 만든 유전공학 회사인 PPL사는 양의 복제 성공으로 계속 인간의 유익을 위한 계획들을 발표한다.  유전자 이식동물, 인간의 모유와 똑같은 성분을 가진 대용우유, 인간 이식용 장기를 가진 동물의 생산 등을 잇달아 발표하여 인류에 공헌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창조신비에 대한 인간의 이러한 도전은 결국 바벨탑을 쌓는 어리석음이 될 수밖에 없다.
  과학을 통한 인간복제의 가능성을 발표한 미국의 두 교수도 절대로 세포분열에 의한 생명복제를 인간에게는 적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미 그들이 실험한 복제술은 노출되었고 누군가가 이 방법을 이용하여 어느 날 복제인간을 세상에 내보낼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생명공학은 현대과학의 꽃이면서도 동시에 파괴자이고 축복과 재앙의 두 얼굴을 가진 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생명공학의 발달은 인간의 생명을 더 이상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조작되는 제품의 하나로 전락시키고 만다.  그러므로 미래 교회는 생명에 대한 윤리적, 신학적 해답을 제공해야 한다.
  실제로 지난 ’98년 초에 미국의 한 과학자가 인간복제 시도를 선언했다.  인간복제 이론이 이미 오래 전에 확립된 다음 복제 양과 복제 원숭이가 탄생되었는데, 이제는 인간복제에 대한 끈질긴 유혹이 드디어 그 가능성의 길을 열게 된 것이다.  인간복제는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어 왔지만 시카고의 리차드 시드 (Richard Seed) 박사는 과학의 이름으로 2년 내에 복제인간을 만들겠다고 호언했다.  나아가서 그는 과학의 발전은 누구도 막지 못한다고 전제하면서 전세계 20군데에 클론 클리닉(Clone clinic)을 개설하겠다고 했다.
  그는 돌리 복제에 성공한 로슬린 연구소의 연구 내용을 기반으로 불임 부부를 위한 인간복제를 시도할 예정이다.  그러나 로슬린 연구소 측은 세포분열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태아가 기형이거나 사망할 위험이 높다고 경고하였고, 돌리 복제의 경우도 무려 277마리의 양들이 희생된 뒤에야 탄생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시드 박사의 계획에 대하여 90퍼센트의 미국인이 도덕적인 이유로 반대하며 비난하고 있지만 그의 야심은 변하지 않고 있다.
 
 생명의 유니크니스
  미국에서는 인간 복제 금지법안이 아직 마련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이같은 시도를 막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곧 법안이 마련되어 미국 내에서의 연구가 불가능해질 경우, 과학자들은 멕시코 등 미국 밖에서 실험에 돌입한다는 계획도 검토중이다.  프랑스 등 유렵의 13개국은 이미 인간복제 금지협약에 서약했다.  인간복제에 대하여 시드 박사는 “이미 지금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자동차 기술 개발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늘 반대가 있어왔다.”면서 과학과 신기술의 발전은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과학의 발달은 교회가 생명에 대한 관심을 더 깊게 가져야 할 때가 되었음을 반증해준다.  교회는 그간의 생활이야기에서 이제 생명이야기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께서만 생명을 창조하신다.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빚으신 다음,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 있는 영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살아 있는 영이다.  사람은 죽어 있는 영이거나 살아 있는 육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생명으로 살아야 하고 영적으로 살아야 한다.  생명이 없으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이라는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 말이 안된다.  죽어서 생명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도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17:25)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이나 타인의 생명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경시하고 유희의 대상으로 냉대하는 것은 죄악이다.  생명은 절대로 유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실험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세계에서는 지금도 인간의 생명이 흥정의 도구로 변하고 사고 파는 상업의 도구로 변하여 희롱당하고 있다.  인질, 인신매매, 생체실험, 낙태등은 모두 인간의 생명을 볼모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가장 싫어하시는 흉악한 죄인인 것이다.
자살도 살인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사망사고가 점점 늘어난다.  포장마차에서 옆 사람과 시비를 하다가 칼로 찔러 죽이고, 동생이 술주정한다고 형이 그 동생을 때려 죽이고, 자신을 해고했다고 회사에 불을 질러 사장을 죽이고, 직장을 잃었다고 자동차로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이웃사람을 죽인다.  보험금을 타기 위하여 남편이 아내를 또는 아내가 남편을 청부살인하고, 아기가 심하게 운다고 어머니가 아기의 목을 졸라 죽이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사태는 결국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상실되고 경색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급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계획된 살인보다 충동살인이 늘어나고 있다. 생명경시로 발생하는 흉악범죄는 해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한다.
  최근 경제불황과 맞물려 성인의 자살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는 것도 생명에 대한 경시풍조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이다.  부도난 중소기업 사장의 자살, 아들의 대학특차입학 실패를 비관한 어머니의 자살,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장의 동반자살 등 우리 사회는 예측할 수 없는 자살 증후군에 휩싸여 있다.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 안전을 보장받으며 살던 사람들이 경제불황으로 말미암아 총체적 상실감을 갖게 된 결과이다.  근래 우리나라의 자살 건수를 보면 ’90년에 7,486명, ’91년에 6,593명, ’92년에 7,401명, ’93년에 7,608명, ’94년에 7,451명, ’95년에 7,709명, ’96us에 8,632명으로 나타났다.  한 해에 8,000명 이상이 자살한다는 것은 하루에 22명이 삶의 고통을 죽음에 떠넘기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물질만능이라는 시대의 조류에 인간의 존엄성이 크게 훼손되고 있으며 자신의 것일 수 없는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오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해 준다.  즉, 근본적으로 생명경시 풍조의 만연이 자살을 증가시키고 있는 셈이다.

 

청소년 자살의 구체적인 원인들
  실제로 청소년 상담실의 자료에 따르면, 중고생들이 자살하는 이유가 ‘성숙하지 못한 인간성에 의한 충동’ 때문이라는 조사가 나왔다.  열등감 및 소외감이 19.8퍼센트, 학업성적이 17.7퍼센트, 부모의 잔소리가 15.6퍼센트, 장래에 대한 불안이 10.2퍼센트, 학업부담이 9퍼센트, 부모의 다툼이 3퍼센트, 교사의 꾸중이 2퍼센트이다.  기성세대에게는 자살의 동기가 되지 않을 내용들이 청소년들에게는 자살의 중요한 충동 요인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더구나 청소년들이 자살 충동을 느낄 때 의논대상으로는 친구가 27.7퍼센트, 부모4.4퍼센트, 선생님 1.1퍼센트였고, 어느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겠다는 대답이 52퍼센트에 달해 근래의 청소년들이 얼마나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지를 보여준다.  개인주의적 성향은 누구와도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없으며 결국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할 때에는 자살이 유일한 마지막 카드가 된다.
  흔히 자본주의는 다윈주의(Darwinism)를 기초로 한다.  이는 적자생존(適者生存,Survival of the fittest)의 원칙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유로운 경쟁력을 통하여 힘이 있고 가진 것이 있으며 자유로운 경쟁력이 있는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력이 얼마나 생존에 필수적인가를 뼈져리게 체험한다.  세계화시대에 경쟁력이 없으면 국가도 외국의 자본에 의하여 여지없이 파산되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경쟁력이 생존을 좌우하는 요소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경쟁력을 갖지 못하고 낙오되는 사람은 생존하지 못하고 도태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사람들은 생존 자격을 상실한 사람으로 오인되고 결국 스스로 생존을 포기하게 된다.
  다윈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 사회는 선천적으로 경쟁력을 상실한 인간에 대한 강제 불임을 시술한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조처는 또 다른 인간성 상실이며 생명경시이다.  우성보존과 열성도태의 그럴 듯한 적자생존의 논리는 결국 존엄한 인간성 자체를 말살해도 된다는 당위성을 제공한다.  최근의 신문보도에 따르면, 일본, 독일 등의 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정신지체자들에 대해 불임시술을 시행했다고 하며, 이탈리아 정부도 ’85년부터 중증 정신장애인 여성 6천여 명에게 불임시술을 했다는 사실을 지난 1월에 국가생명윤리위원회가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경우 딸의 출산을 원치 않는 부모들의 요청과 동의에 의해 시술되었다고 하지만, 수술 결정을 내릴 능력이 없는 여성들에게까지 불임수술을 시행한 것에 대한 도덕적 의문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인명경시풍조의 또 다른 면은 사형제도의 존속이다.  사형제도도 교회가 생각해보아야 할 생명존중의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70년부터 ’90년까지 2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273명의 사형수가 처형되었다.  실제의 사형 건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아, 연평균 26명이 사형선고를 받는 형편이다.  실제로 ’97년 12월 30일에는 흉악범 23명의 사형이 한꺼번에 집행되기도 했다.  법무부 당국자는 문민정부 출범 이전의 범법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 이유를, 가중되는 경제난에 따라 늘어날 가능성이 있는 흉악범에 대해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것이며, 또한 다음 정부가 가질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한 목적 때문이라고 했다. 이날 사형을 당한 범법자들은 한결같이 흉악한 범죄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같은 날 명동성당에서는 사형제도 폐지를 부르짖는 성직자들과 변호사들의 시위가 있었다.

 

여권(女權)을 빙자한 살인행위
  그렇다면 이런 생명경시의 현실 앞에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바로 새로운 생명운동의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는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을 바르게 알게 하고 생명을 사랑하며 생명의 존귀성을 신뢰하는 정신을 사회에 확산시켜나갈 책임이 있다.  교회는 살인으로 점철되어온 인간의 역사에서 가인의 후예들이 가졌던 범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꺼져가는 작은 생명을 사랑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자세는 하나님의 소리에 귀가 막혀 있고 양심이 마비된 사회에 양심의 나팔을 부는 파수꾼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기독교 윤리학에서는 생명이 생성되어 지탱해나가는 과정을 다루는 생명윤리(bioethics)를 말하고 있지만, 기독교는 육신적이고 물리적이며 생물적인 생명 이상의 생명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생명윤리의 차원을 넘어서 생명의 본질을 깨닫게 해야 한다.
  교회가 이러한 생명운동의 중심이 되고 사회에서 양심의 소리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인들에게 생명교육을 시켜야 한다.  강단에서는 생명존중에 대한 가르침이 흘러나와야 하며 교인들은 생활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나는 여러 해 전부터 의도적으로 매년 생명에 대한 설교를 한 차례씩 하고 있다.  우리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서의 생명을 가르치며, 매년 생명에 대한 설교의 강조점을 약간씩 바꿔 교인들이 같은 설교를 반복해서 듣지 않도록 해주고 있다.  매년 낙태, 자살, 교통사고, 흉악범죄, 인질극, 사형제도 등으로 주제를 달리해서 하나씩 강조하여 생명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해질 미래 사회에 대응할 대비책을 나름대로 세우고 있다.
  이렇듯 교회는 생명경시의 문제가 목회적 과제로 떠오를 미래를 대비해 지금부터라도 준비하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르쳐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5. 나홀로 목회에서 네트워크 목회로 전환하라

독야청청보다 ‘팀’을
  팀은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모세는 자신이 어눌하다는 이유로 애굽에 가기를 하니님 앞에서 거절했는데, 하나님은 언어에 뛰어난 그의 형 아론을 모세의 사역에 동참하게 하신다.  아론은 모세의 팀으로서 애굽에 있던 백성을 이끌어 광야에 나오게 한 협력사역자가 된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좋은 팀의 모형이다.  신약에서 가장 두드러진 팀의 모델은 바울과 다른 동역자들의 관계이다.  바울은 디모데를 비롯한 여러 사역자들에게 동역자라는 칭호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바울의 팀 개념에서 비롯된 칭호였다.
  베드로와 마가의 관계도 좋은 팀의 모델이다.   바울과 누가도 좋은 팀사역자들이었다.  누가는 데마를 비롯한 다른 사역자들이 중도에 포기하고 떠나갈 때에도 바울을 떠나지 않고 함께 있었다(딤후4:10-11). 그리고 누가는 바울의 여정을 함께 한 좋은 협력사역자였다.
  전설에 따르면 누가는 바울의 순교 현장에까지 동행한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는 바울의 최상의 협력자였고 바울과 고난을 함게 나누는 동역자였다.
팀사역의 강점
  첫째, 자신이 실제의 자신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게 한다.  네트워크는 결국 나 자신의 증대이다.  만일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 있다면 내가 두 사람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네트워크는 나를 증대시키며 나를 풍요롭게 한다.
  둘째, ‘나 홀로 목회’가 성취할 수 없는 목표를 성취 가능하게 한다.  나홀로 목회가 가지는 약점은 내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과 개인의 능력으로는 현대 사회의 다양화를 좇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 사회의 다변화와 이에 따른 선교의 다양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협력을 모색하는 것은 미래 목회에서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미래 목회를 ‘팀의 시대’(Time to Team)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는 미래 목회를 ‘네트워크의 시대’(Time to Network)라고 부르고 싶다.

 

네트워크 목회의 실제
  지금까지의 한국교회의 목회는 개인주의적인 목회였고 개교회주의가 만연하였으며 교단주의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제3의 물결의 증후군인 에큐메니즘의 발달은 나 홀로 목회에서 네트워크 목회로 우리의 목회를 전환하게 한다.  이러한 전환이 있기에 교회가 하나되는 새로운 기능을 맡을 수 있는 것이다.  특별히 정보통신의 발달로 전자 네트워크를 통하여 정보의 교환과 정보산업이 활성화될 미래를 위하여 목회현장에도 네트워크 형성이 요청된다.  실제로 무궁화 1호가 통신기능을 시작하였고 무궁화 2호가 기능을 다하게 될 때쯤이면 목회 네트워크는 휠씬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올 것이며 목회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목회 네트워크는 목회자와 목회자, 목회자와 목회기관, 목회자와 일반 정보 기관 사이를 국내외적으로 연결하는 매체가 된다.  활성화된 네트워크 목회는 목회 전문화를 가능케 한다.

 

교회 네트워킹
  미래 교회에 가능한 네트워크는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목회자와 목회자의 네트워크이다.  목회자는 누구나 다양한 필요에 직면해 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성도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목회자는 항상 만능이 되어야 한다.  나 홀로 목회에서는 만능이 될 수 없지만 네트워크에서 목회자는 상보적(相補的)관계에서 만능이 될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와 몇몇 서구 나라와의 네트워크를 꿈꾸고 있다.  우리나라의 목회 현장에서 사회변동 요인으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문제들을 서구의 교회들은 이미 경험하여 알고 있을 것이며 네트워크를 통하여 그 해답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둘째, 목회자와 노회나 총회 등 상회기관과의 네트워크이다.  목회자 개인이 상회에, 그리고 상회가 목회자에게 필요한 공지사항과 자료를 전달하기 위해 언제든지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네트워크는 좋은 전달 수단이 된다.  모든 목회자가 동시에 네트워크를 통하여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셋째, 목회자와 정보 제공 기관과의 네트워크이다.  이 네트워크는 목회자의 정보 제공에 큰 공헌을 하게 될 것이고, 목회자는 이것을 통해 쉽고 빠르게, 다양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특히 신학대학교의 도서관이나 사설 정보제공기관에서 CD 라이브러리를 통해 정보를 제보 받으면 경제적으로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된다.
  넷쩨, 기관과 기관 간의 네트워크이다.  교단과 교단, 정보제공기관과 다른 정보제공기관, 그리고 국내기관과 해외기관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의 양을 극대화할 수 있다.  목회자 개인은 어느 한 기관을 통해 모든 기관의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기관과 기관 간의 네트워크는 목회자 개인에게도 많은 유익이 된다.
  네트워크는 유익한 점이 많이 있지만 장애요소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네트워크의 장애요소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일반적 차이다.  네트워크를 형성한 네트워커(networker) 들의 나이, 문화적 배경, 학력, 경험 등의 차이는 네트워크를 원활하게 하지 못하는 가장 큰 방해요인이다.
  둘째, 신학적 불일치 혹은 성경해석의 불일치이다.  목회는 신학에 기초하므로 신학이나 성경 해석이 다를 경우 네트워크를 통해 목회를 교환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는 컴퓨터 통신의 대화방을 통해 논쟁을 벌이다 실제로 만나 결투를 하듯이 신학적 논쟁으로 흐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셋째, 잘못된 전달이다.  구술 언어가 아닌 문자 언어만을 통해 전달할 경우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 동시에 단점이 된다.  왜냐하면 구술 언어이므로 완전한 전달이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넷째, 관계의 단절이다.  네트워크는 인간관계보다 이익관계를 중시하게 되므로 네트워크를 통해 관계를 형성하지만, 인간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확실한 관계 형성이 어려우며 쉽게 관계가 단절될 수 있다.
  목회에서 네트워크의 성과는 첫째, 목회자의 사기가 올라간다는 점이다.  네트워크를 통해 목회자는 효율적인 목회가 가능하게 되며 관리능력이 상승된다.  이러한 목회의 효율성 상승은 결국 목회자의 사기를 상승시키는 것이다.
  둘째, 업무의 생산성 향상이다.  네트워크를 통한 생산성은 효과적인 향상을 가져오는 것이다.  셋째, 네트워크로 개인적 훈련의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네트워크는 다른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보를 끊임없이 제공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정보를 제공받을 생각만 하면 네트워크는 반드시 실패한다.  그러므로 네트워크는 자신의 훈련과 향상에도 효과적이다.  넷째, 궁극적으로 하나님나라 건설에 기여한다.  하나님나라는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나 혼자만 하나님의 나라를 책임지려고 하는 생각은 금물이다.  네트워크를 통해 협력하여 하나님나라를 건설해나가는 것이 효율적이며 바람직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