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실)좋은 책 소개

초능력 목회자 신드롬

好學 2010. 4. 25. 21:30

 

초능력 목회자 신드롬

 

 

서 문

 

 목회에서의 성취(성공)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명력있는 목회 유지에 필요한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그에 대한 만족을 의미한다.
 목사와 평신도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잠재력을 조금밖에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이들이 좌절과 커다란 감정적, 영적 고통을 안겨다 주는 문제와 장애물들을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4,655명의 장로교 목사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 중 58퍼센트가 자신들의 교회사역이 효과가 없거나 비효율적이라고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행동과학자이자 목회자의 소진(burnout, 목회자가 목회에서 지쳐 거의 포기한 상태를 가리킴―역자주)에 대한 권위자인 오스왈드(Roy Oswald)목사는 모든 목회자의 25퍼센트는 소진 상태에 있으며, 또 다른 25퍼센트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짓눌려 소진 상태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교구 목회에서 이처럼 성취가 없는 것은 긴급한 주의를 요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운동의 힘은 교구 목회의 힘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구 목회에 힘을 부여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지금까지 내가 추구해 온 목적이었다.
 이 책은 목적을 이루려는 나의 시도들의 결과이다. 이 책에서 나는 목사들의 인격적, 직업적(vocational, 소명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음―역자주) 필요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째, 나는 목회자가 자신이 상처입는 영역들을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고 평신도가 목회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이러한 보다 큰 통찰력을 통해 평신도와 목회자는 목회자가 직면하는 몇몇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둘째, 나는 목사로서의 개인적 경험에 기초하여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문제들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셋째, 나는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를 위한 성취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를 위한 도움은 자연히 평신도를 위한 도움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1948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목회자로서의 나의 순례의 길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순례의 길에 대한 특별한 통찰력을 얻은 것은 목회자들의 인격적, 직업적 필요들에 대한 연구와 집필과 강연을 하면서 남침례교 신학교에서 목회 상담학 교수로 봉사했던 1972 - 1974년 사이의 기간 동안이었다.
[나는 목회자들이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물 위를 걸을 수 없으며, 다만 수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1. 성공 목회를 향하여

 목회자가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이것은 내가 목회자의 인격적, 직업적 필요들을 연구해 오는 동안 가장 많이 물었던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나는 다양한 대답들을 제시한다. 어떤 경우에는 외로움이라고 대답한다. 또 다른 때는 지원 제도의 결핍, 역할 갈등, 물 위를 걷겠다는 기대들과 같은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나는 똑같은 질문에 대해 그때마다 다른 대답들을 제시했다. 이것은 오늘날 목회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하나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답은 부분적으로 각 개인이나 그가 섬기는 교회의 상황에 따라 다르다.

 

2.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인간임을 이해했다. 루스드라에서 사람들이 그들에게 제사지내려 했다. 그러자 그들은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性精)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행 14:14-15).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이해를 가진 평신도와 목회자가, 너무나 적은 실정이다. 많은 평신도들이 목회자는 키가 10피트여야 한다고(완벽해야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목회자(목사)라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목회자도 또한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다시 말해, 그는 그 기대에 따라 살 수도 없으면서, 계속해서 그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스코틀랜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의 장로교 목사들에 대한 연구에서, 에디 박사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다른 직업군들보다 더 나은 육체적 건강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정신 건강은 전혀 달랐다. 45세 이하의 목회자들 중에 25퍼센트가 정신적, 심리적 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에디는 자신이 “목사의 인성”(parsonic personality)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묘사한다. 이것은 죄의식 노이로제 증후군(guilt- neurosis syndrome)으로 고통당하면서, “한편으로는 전능하고 전권적인 사람이 되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려는” 인성을 가리킨다. 에디는, 목회자가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없는 그와 같은 완벽함을 성취하지 못할 때에, 그 결과는 단순한 좌절감에서부터 강박관념으로 인한 성적 몽상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왜 목회자를 초인으로 보는가?
 평신도가 자기 교회 목사(목회자)도 똑같이 죄 많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성직자들은 초인처럼 보인다. 평신도는 지적으로는 그 목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는 “그(목사)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 주변에는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이에 대한 가장 유력한 후보가 바로 목회자이다.
 여러분이 교회와 관련된 직업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을 보는 초인으로 생각한다. 교회와 관련된 직업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을 보는 평신도의 태도를 지배하고 있는 분위기가 목회자들은 인간 이상이라는 이설(異說)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에서 그친다면 문제해결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를 배나 어렵게 만든다. 왜냐하면 평신도가 목회자를 대좌에 앉힐 때, 목회자는 도움의 손을 내밀고, 더 높이 올라가는 흥분을 만끽하며, 대좌를 그대로 지키려고 갖은 애를 다 쓰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그 자체로 반복된다.
 여기에 하나의 역설이 존재한다. 성경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망과 교만이 인간이 비극적인 실패를 경험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목회자로서 정확하게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빈번하게 넘어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우리를 유혹하는 뱀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목회자 청빙 위원회의 일원인 경우가 많다: “당신은 우리가 찾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문제 해결에 필요한 조건들을 모두 갖춘 사람입니다. ” 그리고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는 이 먹음직한 과실을 먹고 죽는다. 곧 우리의 인성(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해 죽고 인간보다 못한 것이 된다.
 그러나 단순히 교만(자존심) 때문에 목회자들이 물 위를 걸으려한다는 주장은 너무 지나친 것이다. 일반적으로 목회자의 인성에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양심적이다. 곧 가치들, 죽 자기 발전을 의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능한 최선의 사람이 되라는 중압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초인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왜곡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구체적으로, 초인이 되는 것은 우리가 이미 도달한 목표하고 믿어 독선의 죄에 빠져서는 안된다. 또한 그것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목표하고 믿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할 때 스스로를 미워하는 결과를 초래해서도 안된다.

 “우리(목회자)는 인간 그 이상이다”라고 믿는 죄에 이르게 하는 또 다른 것은 감수성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여 그들을 돕기 위해 애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에게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든다. 굶주린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몇 조각으리 떡과 물고기 몇 마리로 기적을 행하여 5,000명을 먹이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고 믿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성실해야 하고, 우리가 가진 다석 조각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시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너무 많다.

 “당신은 당신 주인의 일을 대신하려고 애쓰고 있지는 않은가?”
 물 위를 걸으려는 시도는 어떤 결과를 낳는가?
 물 위를 걸을려는 시도는 목회자에게 인격적인 면과 직업적인 면에서 모두 여러 파괴적인 태도를 낳는다.  부족하다는 느낌과 낮은 자부심
 목회자가 낮은 자부심을 경험하게 되는 데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이유들이 있다. 목회자에게는 “물 위를 걸으라”는 기대가 주어진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를 내게 된다. 많은 목회자들은 상담한 심리학자 로저 화이트(Roger K. White)박사는, 목회자는 그의 능력을 훨씬 넘어선 것을 성취하라는 압력을 계속 받고 있다고 말했다. 보통의 성도들은 그 교회 목회자에게 다음과 같은 몇몇 기대들을 한다.
  (1) 그는 완벽한 도덕적 귀감이어야 한다.
  (2) 그는 자신의 상황에 관계없이 언제나 도덕적, 감정적 지지(도움)를 주어야 한다.
  (3) 그는 교회와 공동체 모두에서 능력있는 행정가라야 한다.
  (4) 그는 모든 주제에 대해 능력있는 대중 연설가라야 한다.
  (5) 그는 배우처럼 행동해야 한다.―항상 사람들을 우겼다 울렸다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모든 상황에서 연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예를 들면, 장례식, 결혼식, 야유회, 세례식 등)
  (6) 그는 사람들이 미리 그의 듣지 않겠다고 모의했다 할지라도 철학자―가치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해야 한다.
  (7) 그는 상담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은 특별히 정신적으로 피곤한 역할이다.
  어떤 사람이 이 모든 일들을 성취할 수 있다면, 그는 물 위에서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한 개인이 훌륭한 정신 건강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일에선가 성공했다고 느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결코 물 위를 걷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실패자라고 생각하며, 형편없는 정신건강으로 몰고 가는 행동들을 한다.
 목회자는 자신의 목표들을 완벽에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완벽을 요구한다. 그는 자연적으로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실패자라고 자책하게 된다.
 마지막 결과는 자기증오(self-hatred)이며, 이것은 우월감이나 무오성의 태도로 위장되는 경우가 많다.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나는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들도 잘못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않고 평신도들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들은 어느 정도 신적 능력을 가지며 따라서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라는 의심이 생긴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지탱해 줄 수 있는 무오성의(자신들이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는)태도를 취해야만 한다. 이런한 자기 증오/무오성의 컴플렉스가 성도들과의 모든 갈등의 원인이 되며, 목회자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와 짐을 진정으로 나누기 원하는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분노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감정이라고 배운다.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분노를 억제함으로써 분노를 다스리라고 말한다. 아이였을 때, 우리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우리보다 더 크고 힘센 사람들에게는 화를 내지 말라고 배웠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를 억제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분노에 죄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우리는 분노의 감정과 분노에 기초한 파괴적 행동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의 잘못된 시각이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억제해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시각을 강화시키고 있다.
 목회자도 덕의 귀감으로서 냉정을 잃지 말라는 말을 항상 듣는다.
 목회자는 자신이 분노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른다. 그뿐만 아니라 목회자는 자신이 화를 많이 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는 사실도 발견한다. 달라스에 있는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 심리치료 교수인 로버트 글렌(Robert S. Glen) 박사는 스트레스는 분노의 원인이며, 목회자가 계속적으로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될 경우 그에게는 엄청난 양의 분노가 쌓이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풀리지 않은 채 엄청나게 쌓인 목회자의 분노는 신랄할 설교나 이따끔씩 좌절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분노가 조금 가라앉게 되면, 목회자는 그러한 설교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에 대한 호된 비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신랄한 설교는 자기증오를 낳으며, 그 후에는 물 위를 걸으라는 압력에 대해 더 큰 분노를 낳는다. 이렇게 해서 결국 악순환이 시작된다.
 어느 목사는 목회자를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으로 묘사했다.
 목회자는 사람들이 자신과 너무 가까워지면, 자신이 실제로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어느 목사직이든지 처음 몇 달 동안은 목회자에게 아첨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이러한 아첨은 꿀과 같이 달콤하다. 목회자는 이것을 즐긴다. 그러나 이것은 곧 쓴맛으로 변한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진정으로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아첨은 중독성이 있다. 목회자는 아첨이 파괴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는 그것 없이 살기란 쉽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 결과 목회자는 계속해서 아첨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교구민들(성도들)을 계속 멀리해야만 한다.
 목회자들은 또한 동료들과의 친밀감까지 두려워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목회자들은 동료를 동료로 보지 않고 오히려 경쟁자로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목회자들 사이에 이런한 경쟁의식이 존재하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개신교 전통에는 교구에 대한 지리적 제한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목회자가 성공하면, 두 세력들(거만과 질투)이 나서서 그를 동료들로부터 떼어놓는다.
첫째, 그 성공한 목회자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느낌들을 감추기 위해 거만해지기 쉽다.
둘째, 덜 성공적인 목회자들은 그를 질투한다. 거만함과 질투는 친밀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목회자는 자신이 언제 교회를 옮기게 될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목회자에게는 교회가 자신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면, 밀려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언제나 있다. 또는 좀더 큰 교회가 새로운 목회자를 원하는 경우에는 자신을 끌러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항상하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욱 확실하게는 자신들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더더욱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허상은 계속 유지되어야만 한다.
 외로움의 직접적인 결과는 전문가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가면을 쓴다. 왜냐하면 오랜 외로움으로 인해 이제는 더 이상 마음속에 진실된 감정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날 내가 직업인이 되어가고 있고, 내가 알기로 아주 오랬동안 목회를 해 온 목회자들까지도 역시 직업인이 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 그것은 나에게  참으로 고통으러운 충격이었다. 나는 몇몇 친구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나는 많은 목회자들처럼 그렇게 끝나고 싶지는 않아! 나는 더욱 구체적으로 이렇게 물었다. ”자네들이 알고 있는 목회자들 가운데 40년씩이나 목회를 해오면서도 여전히 진실되고, 솔직하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있는가?“ 동료들은 내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하기가 일쑤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내 친구들도 참으로 아름답고, 성숙한 인간인 목회자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낮은 자부심, 풀리지 않은 분노,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 직업주의(profession- alism), 이 모두는 형편없는 대인관계에까지 이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목회자는 권위의 인물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대인관계들에서 전횡적인 태도를 보일 우려가 있다.
 목회자가 전횡적이 되는 것이 설교하는데 몇몇 유익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목회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동역자들”로 남을 수 없게 만든다. 전횡적 목회자는 성도들로부터 비판과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목회자는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 때가 많다. 그리고 심각한 반대에 부딪힐 때 이러한 목회자는 자신의 판단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호되게 비난하기가 일쑤이다. 목회자의 이와 같은 행동은,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어떤 제안이나 생각들을 말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린다. 그렇게되면, 결국 교회의 목회는 침체된다. 왜냐하면 그런 목회는 “원맨쇼”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성도들의 영혼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의 의견 차이들을 터놓고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전횡적인 목회자는 또한 부교역자들(staff members)과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는다. 그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의 동역자들을 자신의 프로그램을 수행하도록 고용된 조력자로 본다. 이와같은 태도는 다른 목회자들을 낙담시켜 그들이 목회 현장에서 자신들의 은사를 개발하고 자신들의 기술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부 교역자들과의 형편없는 관계를 가속화하는 사실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많은 교회들이 목회자, 즉 담임목사(senior ministor)만을 유일한 진짜 목사로 본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시각은 오직 담임목사만이 특별한 직무에 참으로 교회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뿐이며, 다른 목회자들은 담임목사의 승인으로 교회가 고용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많은 교회들이 새로운 담임목사가 올 때, 부 교역자들이 사퇴할 것을 요구하거나 으레 그렇게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부교역자들이 팀목회를 발전 시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매우 어렵게 만든다.
 목회자는 사람들과 연합하는 법을 배우고,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촉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나는 평신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여러분들이 동료 목회자가 되어 여러분의 목회자를 돕지 않는다면, 목회자는 그 싸움에서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목회자가 물 위를 걸으려 한다면 결국 물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 위를 걸으려는 유혹을 어떻게 뿌리칠 것인가.”
 목회자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목회자는 먼저 자신을 인간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그렇게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고 있다.!)
 목회자가 다른 어떤 때보다 더 많은 성도들을 접할 수 있는 것은 예배 시간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의 설교는 그들이 인간임을 전할 수 있는 완벽한 통로이다.

 “고백적 설교”는 매주 자신을 영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인격적을 정직과 개방적 태도에 대한 책임을 말한다.
 이것은 어느 해인가 내 목회 기념일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서로 짐을 지라”는 바울의 권고에 대해 설교했다. 나는 그 설교의 적용의 한부분으로 성도들의 짐을 지려고 애 쓸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짐까지 지려고 애써야 하는 나에게도 성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고백했다. 나는 나자신의 나약함과 목회자도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해 말했다. 그결과 성도들은 그때까지 오랫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사랑과 관심을 내게 쏟아부어 주었다.

 평신도와 목회자는 함께 생명의 말씀을 가지신 그분(the one)께 나아가야 한다. 이때에만 거짓 메시야―설교자―를 섬기는 우상숭배가 극복될 수 있다.

 개신교 목회자들에게 있어 경제문제가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인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또한 목회자가 더 많은 봉급을 받게 되면, 자신과 가족에 대해 더 큰 책임을 받들일 수 있게 될이라고 믿는다. 목회자는 가족의 물리적 필요를 켤코 외면할 수 없으며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킬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 성도들의 선한 뜻, 그리고 상인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태도는 많은 목회자들을 허울 좋은 사기꾼들로 만든다. 그들은 소매상에서 물건을 살 때에도 깎아줄 것을 요구하고 의사와 치과의사에게는 진료비를 깎아 줄 것을 기대한다. 이러한 태도는 목사는 “다르다”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인간은 관계를 통하여 진정으로 인간이 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인간은 고립된 상태에서는 인간이 될 수 없다. 목회자가 친구들을 사귀지 않는다면 물 위를 걸으려는 유혹을 뿌리 칠 수 있는 진정한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러면 목회자가 어떻게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까? 친구관계에는 목회자 측에서의 주도적인 자세와 성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예수의 예를 생각해 보면, 자발적으로 주도적인 자세를 취하려는 마음이 고무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친구들이 필요했다. 그는 도움을 구했다. 그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그와 함께 깨어있어 기도할 것을 요구했다. 불행히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으며, 이것은 결국 예수에게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로렌 미드(Loren Mead)는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한 가지 특별한 문제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모두 목회자를 다른 사람의 지원을 받아야 할 사람(recipient)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지원할 근원(source)으로 본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감정적 필요가 충족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따라서 목회자는 자신의 필요를 인정하거나 진정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때조차도 그것을 받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목회자는 훌륭한 정신 건강 습관을 발전시키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육체적 건강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는 데도 주의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규칙적인 수면과 훌륭한 건강 습관들로 저항력을 기르라. 직장 일과 직장 밖의 일을 구분하라. 운동을 하라. 같은 직업을 가진 동료들과 일에 관애 털어놓고 이야기하라. 그리고 필요할 때는, 육체적으로 어떤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라. 증가하고 있는 스트레스에 대한 이러한 대응은 일에 대한 공격전략의 변경, 배우자와의 대화 그리고 직장 옮기기 등과 같이 보다 덜 효과적인 것으로 판명된 많은 방법들을 피했다.
 나는 목회자가―몇 시간, 며칠, 또 몇 달,―목회일에서 잠시 떠나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평가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필요의 충족을 보증하기 위해, 미국 장로교회(Presbyteroan Church U.S. and U.S,A.)와 미국의 연구단체들은 모든 목회자들에게 안식년을 제공할 것을 권해왔다.
 목회자가 참으로 인간이라면, 평신도는 목회자의 달력에 빡빡히 적힌 스케줄을 덜어주고 목회자에게 진정한 인간관계를 가질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은 온전한 사람보다 사랑하기가 더 힘들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으로 부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에게는 그가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사랑이 필요하다.


3. 목회자의 영적 미성숙

 

 영적 미성숙의 증거들
 목회자들의 영적 미성숙의 증거는 무엇인가?
 “목회에서의 직업주의(Professionalism)와 영성사이의 관계”라는 책에서 노웬은 이렇게 말한다. : “수많은 기독교 목회자들이 그들의 목회 생활 가운데서 많은 좌절과 고통과 실망을 겪고 있다. 그 주요한 이유들 중 하나는 여전히 증가하고 있는 직업주의와 영성의 분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 십 년 동안의 신학 교육의 발전을 살펴 본다면, 이러한 분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신비들에 대한 멋지고 만족스러운 생각들을 만끽하기 위해 우리의 눈을 감지 말자. 오히려 우리 주변 세상의 커져가는 필요들에 대해 우리의 눈을 열어두자. 우리는 우리가 동료 인간에게 진정한 봉사자가 될 수 있도록 위를 도와주는 필수적인 기술과 기교를 익히는 데 우리의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명상과 숙고(熟考)라는 지루하고 결실 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는가?“ 그러므로 신학생들은 병원, 교도소, 시의 특별한 계획 등에서 목회 훈련을 통해 더 큰 기술들을 발전시키는 동안 기도, 명상, 예배 참석이라는 전통적인 영적 훈련들을 등한시했다.

 전혀 다른 시각으로 조지아 주 아틀란타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있는 제임스 맬로리(James D. Mallory)박사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그는 미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 an Church U.S.A.)가 소집한 회의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목회자들을 상담한 자신의 경험에 의하면 신학적 혼란과 영적 미성숙이 목회자들의 사기 저하의 주요 원인임을 강조했다.

 영적 미성숙의 원인
 영적 미성숙의 한 가지 주요한 원인은 기도와 예배에 대한 성숙되지 못한 견해들에 대한 저항감 때문에 영적 훈련을 게을리 하는데 있다.
 영적 미성숙의 두 번째 원인은 영적 훈련의 결핍이다.
 영적 미성숙의 세 번째 원인은 묵회자들이 그들의 영적 문제들을 인정하여 도움을 구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한 목회자가 처음으로 임지에 부임하게 되면, 성도들은 그 목회자는 영적으로 성숙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중압감은 목회자로 하여금 영적 문제들에 직면했을 때 속히 도움을 구하지 않게 만든다. 자신들의 영적 삶에서 위기에 직면하면,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스스로 그 위기를 극복하려 한다. 일시적 단체인 연합 장로교 교육 연속 위원회(Commission of Continuing Education of the United Presbyte- rian Church)가 행한 한 연구에 따르면, 연합 장로교의 목회자들 중 적어도 50퍼센트가 그들의 신앙에서 심각한 위기를 맞았었다고 한다. 이들 중 83퍼센트는 외부의 도움없이 스스로 그 위기를 해결했다고 한다.
 영적 미성숙의 또 다른 원인은 단순히 우리 사회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색적인 생활양식은 우리 문화의 성격과 배치된다―우리 문화는 행동주의를 강조하는 문화이다.
 윌리엄 훌름(William Hulme)이 말하듯이, “교회가 은혜에 의한 칭의를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행위에 의한 칭의로 결속되어 있다.”
 우리는 영적 미성숙의 심각한 장애물에 대한 한 가지 중요한 경고를 20세기 초 목회의 거장이었던 존 헨리 조웨트(John Henry Jowett)에게서 들을 수 있다. 그는 “설교자의 위험들”(The Perils of the Preacher)에 대해 감동적인 글을 썼다. 거의 80년 전에 쓰여진 그의 언어들은 조금도 손댈 곳이 없다.
 여러분이 목회생활을 하면서 성소(Holy Place)에 대해 정신없이 바쁜 나머지 거룩한 주님(Holy Lord)에 대한 경외감을 잃어버릴 수 있다. 우리는 종교와는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 종교적이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길을 가르쳐 주면서도 정적 자신은 그 길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말에 너무 집착한 나며지 그 말씀(the Word)을 잊어버리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진정한 본질이 피해버린 비본질적인 것들을 부여잡고 있으면서도, 멋진 말은 멋진 삶이며, 설명하는 기술은 깊은 경건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이 설교자의 삶에서 가장 끈덕지며, 가능하게는 가장 팽배해 있는 위험이라고 생각한다.

 영적 성숙에 대한 또 다른 가공할 만한 장애물은, 윌리엄 훌름이 “멋진 기도”라고 부른 것이다. “멋진 기도”는 간소한 저녁 초대에서, 가족연회에서, 로타리 클럽에서, 그 외 다른 많은 공동체 모임에서 목회자들에게 기대된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한 “멋진 기도”가 목회자들의 개인 기도생활에도 그대로 옮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의 기도생활도 피상적이고 정직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훌름은 이렇게 말한다 : “우리들 대부분은 하나님께 대한, 또는 적어도 그분의 섭리에 대한 적대감들을 쌓아왔다. 그러나 우리의 선한 기도는 이를 거의 표현하지 않는다. 공중 기도에서 주의깊게 선택된 단어들과 부드러운 음성을 속에서 적대감을 표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선지자들과 시편 기자들의 정직함이 그들을 영적 거장들이 되도록 도와준 한 요소였다고 주장하고 싶다. 개인적인 기도들에서, 우리는 성경 저자들과 똑같은 정직함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목회자의 영적 성숙의 중요성
 목회자에게 영적 성숙이 필요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목회자는 무었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둘째, 목회자는 성도들의 요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성숙함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영적 성장의 의미를 아주 통찰력있게 해석했으며, 『목회자의 소명』(Call to Commitment)의 저자이기도 한 엘리자베스 오코너(Elizabeth O'Connor)는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 시대에 교회를 위한 새로운 구조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차적으로 섬김의 계획이나, 꿈을 꾸거나 비전들을 가지도록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구원자이자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며, 우리의 삶을 그분의 삶의 심장속에서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 소명을 받은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을 안으로 인도하여 꿈을 꾸고 비전을 가지도록 해줄 새로운 구조들과 섬김의 계획들을 만들어 낼 불꽃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지 않고 어떻게 사랑의 명령을 성취할 수 있으며, 우리가 기도하며, 그분의 말씀 아래서 살고 그분의 세계를 지각하지 않고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영적 성숙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한 목회자로 섬기겠다는 희망을 버려야한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채워질 때 목회는 이루어진다.
 다음은 노웬의 글이다.
 목사안수는 한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과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찬을 가능하게 하기 원하는 목회자(목사)는 기도의 사람이다. 오직 기도의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칭찬으로 이끌 수 있다. 왜냐하면 그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사람이, 그들이 쉽게 자리할 수 없지만 강하고 깊다고 알고 있는 근원으로부터 그의 능력을 이끌어 낸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영적으로 성숙해야 하는 두 번째 중요한 이유는 성도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월터 와거너(Walter Wagoner)는 이렇게 쓰고 있다: “예배와 헌신에 대한 그의 습관들만큼 교구 목회의 장래 지속력과 성장을 드러내주는 경험들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습관들이 신학교 시절에 다져지지 않는다면, 목회자로서의 성공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영적 성숙이 요구되는 첫 번째 면은 목회자의 시간관리와 관계된다. 목회자는 매일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해 우선 순위들을 매길 필요가 있다. 팔방미인으로서 목회자는 많은 역할을 행해야 한다. 곧 다르침, 설교, 위기 상담, 심방, 전도, 행정, 상담, 공동체 활동, 교단 활동인데 이모든 것들은 가자가 전임 사역이 될 수 있는 것들이다.
 여러 해 전에, 나는 폴 튀니어(Paul Tournier)가 매일 한 시간씩 기도와 명상들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곧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인도와 지혜를 받아 자신의 하루 일과의 우선 순위를 정하고 거기에 따라 자신의 시간과 힘을 분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영적 성숙이 요구되는 두 번째 국면은 성공의 증거가 전혀 없어 열심을 계속 유지하기가 어려울 경우이다. 목회의 본질상 주어진 직무의 완수라는 의미에서의 성공을 기대하기란 실제로 불가능하다. 목회자가 사람들과 일을 할 때에, 설교, 상담, 또는 심방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일상적이며, 가시적인 만족이 없이도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영적 성숙을 통해 힘을 찾아야만 한다.
 해리 메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은 목회에서 요구되는 영적 성숙의 본질을 지적했다. 그는 로마서 8:28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들 중 하나라고 썼다. 목회자가 종으로서의 삶을 살고 성공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고 계속해서 섬길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을 위해 일하신다”고 믿는 영적성숙을 가질 때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에서 일하신다면, 성공은 보증된다. 그러므로 교인 수, 예산, 교회 건물 수의 증가와 같은 성공의 증거를 계속해서 요구할 필요가 없다.
 목회에서 영적 성숙이 요구되는 세 번째 목회자의 섬김(목회)의 능력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는 능력에 달려 있다.
 목회에서 영적 성숙이 요구되는 네 번째 국면은, 여러분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실망시켰을 때 느끼는 비관론(Pesimism)의 극복과 관계가 있다. 남을 도와주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소진” 증후군(burnout syndr- om)에 익숙하다. 비관론과 냉소주의(cynicism)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쌍둥이 함정이다. 인간들은 때때로 무책임하고 남을 속인다 그렇게 때문에 여러분이 삐뚤어진 눈으로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는데까지 이를 수도 있다.
 사람들에 대한 신뢰의 결여와 어떤 직무를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의 결여로 야기되는 좌절감이 계속적으로 목회자를 괴롭힌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다름아닌 죄와 도덕적 확신에서 비롯되는, 자기 교인들에 대한 어떤 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힘의 원천들은 교회의 의무들에 우선 순위들이 부여되지 않거나 교회 구성원들이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상황들을 바로잡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소진 증후군에 대처하기 위해서, 목회자들에겐 영적 성숙이 필요하다. 그들은,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이며, 자신은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만한다. 그는 역사의 통치자요 주이시다. 궁극적 결말의 문제들은 그분의 손안에 있다. 하나님은 궁극적인 승리자가 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직무를 행하고 궁극적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이르는 몇가지 단계
 우리의 첫 번째 단계는 예수의 모범을 진지하게 취하며 날마다 그 모범을 따르려고 애쓰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영적 성숙에 이르는 우리의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우리의 기도생활에서 예수의 모범을 따를 때 성취된다.
 영적 성숙에 이르는 두 번째 단계는 인내이다. 어떤 육체적, 음악적 재능들도 몇 시간, 몇 주, 몇 달 그리고 몇 년 간에 걸친 부단한 준비 없이는 발전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이다.
 인내가 요구되는 것은 감정이 변하기 때문이다. 감정들에 대한 한 가지 지속적인 사실은 감정들이 결코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기도와 명상은 우리의 감정들을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영적 훈련을 등한시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이기는 한 가지 공통된 해답은 인내였다.
 신앙 서적들의 이용이 사색적 생활의 성장에 필요한 세 번째 단계이다. 당장 마음에 떠오르는 첫 번째 책은 성경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그들의 영적 성장에서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자료임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나를 위해서도 참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내게 있어서 문제점은 ,성경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설교 제목들과 신앙적인 이야기를 위한 아이디어들을 찾는다는 것이다.
 기도에 관한 책도 빼놓을 수 없는 신앙 서적이다. 이러한 책들은 영혼의 자극제일 뿐만 아니라 지적인 이해를 도모하는 자료들이기도 하다.
 영적 성숙에 이르는 네 번째 단계는 기도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섯째 단계, 즉 평신도를 목회자의 영적 성숙 프로그램에 참여시키는 단계이다.
 모든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방문함으로써 얻은 힘을 증명 할 수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쓰라린 시련과 고난을 겪었으며,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신앙으로 이를 극복한 남녀들이다.
 평신도를 목회자의 영적 성장 프로그램에 참여시키는 또 다른 방법은 교회 예배에서 평신도를 독려하고 참석시켜 평신도가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담임했던 한 교회에서는, 수요일 저녁 기도회 때 교인들이 인도를 했다. 그와 같은 예배는 나에게 영적으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평신도를 목회자의 영적 성장에 참여 시키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이유에서 중요하다. 첫째, 목회자에게는 더 많은 배움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는 가르치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모한다. 둘째, 목회자는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간에 참으로 하나님께 의지하여 인도와 힘을 간구하는 모든 사람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때때로 목회자들은 성직자가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 약점이 있다는 믿음의 먹이가 될 수 있다.
 나는 영적 성장에 이르는 여섯째 단계로 영적 일기를 쓸 것을 하고 싶다.
 영적 성숙과 관계된 마지막 제안은 각 목회자들이 자신의 신앙생활을 개인화라는 것이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방법론에 얽매이지 않는 것)
 그러므로 각자는 하나님과 접촉하는 자기 자신의 방법을 진지하게 찾아야만 한다.

 

마틴 루터의 기도문
 오 주 하나님이여, 당신은 나를 목회자로 만드사 교회에서 가르치게 하셨나이다. 당신은 재가 이 큰 책임을 다하기에 얼마나 부족한지를 아시나이다. 그리고 당신의 도움과 충고가 없다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멸망했을 것입이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이 사역을 위해 내 마음을 기꺼이 복종시키고 집중하기를 열망하나이다. 회중을 가르치기를 열망하나이다. 당신의 말씀을 언제나 배우고 내 곁에 두며 열심으로 묵상하기를 갈망하나이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쓰소서, 나를 버리지만 말아 주소서. 주께서 나를 버리시면, 나는 멸망할 수밖에 없나이다. 아멘.

 

4. 잘못 선 줄


 부르심(소명)과 성직수임(안수식)에 대한 성경적, 역사적 가르침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는가?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에로의 부르심이다. 둘째는, 섬김에로의 부르심이다. 그리고 셋째는, 특별한 직무와 역할 수행을 위한 부르심이다.
 예수께서는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 부르심의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기 위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베드로전서에서, 섬김에로의 부르심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되며, 그리스도의 지체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된다.
 벧전 2:9에 부르심이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또 다른 성경적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제안의 수행을 도울 특별한 역할을 행하도록 개인들을 부르셨다. 구약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노예상태에서 불러내어, 그들에게 율법을 주며, 그들이 한 나라로 형성될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 이와 유사하게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그 외 다른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직무를 행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경우들에서, 특별한 직무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교회의 특별한 의식을 통해 지명 받았다. 예를 들면 안디옥 교회는 사울과 바나바를 안수하여 선교 여행을 보냈다.(행13:1-3). “일곱”을 세운 일도 똑같이 안수를 통해 이루어졌다(행 6장)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라고 훈계했다.(딤전4:14)

 

목회 성공을 위한 암시
 성직자의 부르심과 평신도의 부르심 사이에는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는가? 성직자와 평신도는 서로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개신교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동역자라고 확신있게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부르심을 입었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는 어떤 신분의 차이도 없다. 레이스(Leith)는 이렇게 말한다 : “교회가 되라는 부르심보다 더 높은 부르심은 전혀 없다. 그리고 이 부르심에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은 동등하다. 그리스도인들은 동등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존재에 있어서 더 높은 직제란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등하게 부르심을 입었다. 다시 말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역자이다. 이러한 입장의 수용은 성직자로 하여금 그들의 대죄에서 내려와 그들의 은사를 휠씬 더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도록 허용한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건강한 관계는 성직자로 하여금 평신도들이 가진 은사를 인정하고 교회 생활에서 모든 직무를 혼자서 수행하려는 노력을 그만둘 수 있게 해준다.
 게다가 평신도들도 스스로를 책임있는 목회자로 보기 시작할 수 있다. 그 결과 평신도들은 자신의 독특한 은사들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역에서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등하다는 이러한 견해 속에서 평신도의 목적은 이상적인 목회자의 복제품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은사를 발전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이상적인 평신도는 “작은 성직자”가 아니라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전시킨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교회와 관련된 직업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사람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는지를 결정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시금석이 있는가? 또는 “전임 사역”에로의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문제는 객관적인 기준들이 적용될 수 없는 주관적인 경험인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교회와 관련된 직업에로의 부르심을 제시하고 그 진정성을 밝히는 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자신이 교회와 관련된 직업에 부르심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분명히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진정한 부르심이 있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칠 때에도 지속력이 있다.
 성직자의 소명이 거짓된 것이거나 기껏해야 의심쩍은 것일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는 즉시 자신의 성직수임과 목회를 그만두어야만 하는가?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친구들 그리고/또는 숙련된 상담자들의 도움으로, 그러한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도모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려야만 한다.
 사랑이 있고 그 결과 교회와 관련된 하나님의 부르심을 시험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 잘못된 길(wrong line)로 접어들 가능성은 더욱 줄어든다. 공동체는 사랑 가운데서 진리를 말할 것이며, 따라서 죄의식,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열망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자주 오인되는 다른 거짓된 동기들에서 비롯되는 결정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잘못된 동기들로 행동해 온 사람들에게 치유와 용서의 가능성이 있다. 사랑은 실패한 사람들을 구해주고 회복시켜 줄 수 있다.
 
남동부 신학교(Southeastern Seminary)의 신학 교수인 모리스 애쉬크래프트(Morris Ashcraft)는 이렇게 말했다 : “‘전임사역’(Full-time Christian Service)은 신약에 없는 용어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언어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노동시간을 목회에 모두 쓰고 그 대가로 봉급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람들을 특별한 사역들로 부르신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와 능력 아래 그들의 사역을 수행한다. 그러나 신약에는 ‘파트 타임’의 반대로서 ‘전임’(full-time), ‘수임받지 않은’(unordained)의 반대로서 ‘평생의;(life-long) 등에 관한 것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신교 전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관례를 재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존 레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목회가 평생 직업이라는 기대는 오늘날 사람들을 얽어맬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루터가, 로마 교리가 16세기에 사람들을 얽어맨 것과 같다고 말한 것과 같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와 관련된 직업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을 너무 경솔하게 여겨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자신들의 소명을 포기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내 경험에 따르면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나는 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이 한 직업에서 다른 직업으로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열어놓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물론 실제로 성직 수임을 그만두는 것에 대해 쓰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행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 문화는 성공을 숭배한다. 전직 목회자가 되는 사람들에게는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실패자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그러므로 다른 직업으로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관련된 직업에 그대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다.
 목회 성공의 열쇠들 중 하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똑같이 평등하게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는 더 높은 신분이란 없다. 평신도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이러한 평등의 신분을 성취하는 데 주도 적인 역할을 해야만 한다. 성직자는 인간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평신도의 도움이 없는 자신들의 우위의 신분을 금방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 위는 하나님께서 개인들을 교회와 관련된 직업들 안으로, 그리고 밖으로 부르실 수 있고 또 부르신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성직자와 평신도가 모두 이러한 진리를 따라 살 수 있을 때 ,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과 관련된 충격들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화해의 목회자들로 섬길 때에 평신도와 성직자 모두에게 더 큰 성공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5. 구겨진 메모지


 목회자 가정의 스트레스
 목회자의 가정에 존재하는 어떤 문제와 압력은 독특한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문제와 압력은 모든 가정이 공통적으로 겪는 것들이다. 불행히도 목회자는 다른 사람들만큼 그러한 문제들을 자발적으로 인정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목회자가 자기 가정에 문제가 있다고 스스로 인정한다면, 이로 인해 그의 직업에 위험이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염증들이 목회자의 가정에서 증식되어 왔으며, 큰 고통을 일으켰고, 또 많은 상처 자국들을 남겨 왔다.
 『사라지는 목회자』(The Vanishing Parson)의 저자인 라일리 바틀렛(Laile Bartlett)은 이렇게 말한다 : “연합 교회(United Church)의 연구에 따르면, 전직 목회자의 아내 중 54.9퍼센트가 남편이 교회를 떠나는 쪽을 선호했거나 심지어 열망했으며, 12.2퍼센트만이 교회에 계속 남아 있기를 원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Unitarian Universalist Survey에 따르면, 교회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목회자 가정의 스트레스 원인

 
1]. 성공적인 가정에 대한 교회의 계속적인 요구
 목회자는 고도로 성공적인 가정 생활을 꾸리라는 압력을 받는다.
 그와 같은 중압감은 목회자와 아내에게 항상 엄청난 긴장감을 더해 준다. 그러나 특별히 어려운 상황은 그들에게 문제가 있을 경우에 일어난다.
 목회자 가정이 완벽해야 한다는 교인들의 요구 때문에, 목회자와 그의 아내는 결혼문제 상담소를 찾기 어려워진다. 도움을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목회가 가정에 무엇인가 잘못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때문에 목회자는 자신의 문제가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기만 하는 경우가 있다.
 완벽함에 대한 기대는 목회자와 그 배우자에게 스트레스르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목회자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아버지의 직업에 책임이 있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스트레스이며, 어린아이들일 경우에 특히 더심하다. 이럴 경우 목회자 자녀들은 움츠러들게 되며, 자기 가족에대해서는 무엇이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PK, 즉 “목회자의 자녀”(Preacher's Kid)는 침묵하고, 아무것도 반복하지 않으며, 아무도 공유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이것은 그들이 잘못된 것을 공유하거나, 무의식 중에 가족을 당황하게 만들거나, 교회의 힘 있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이들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교인들로 부터 자신들의 행동을 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들은 부모, 즉 목회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속임수를 발전시킨다.

 

2]. 모범 가정을 위한 목회자의 필요성
 목회자는 “자신이 설교한 것을 행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 그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의 가족들에게 교회의 모범이 되라는 압력을 행사한다.
 목회자의 압력이 더 큰 손상을 남기는 것은, 목회자가 자신의 가족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는 자신의 가족을 체면 유지를 위한, 다시 말해 위선자로 보이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 또한 목회자의 압력이 더욱 세밀하다는 것은, 목회자는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을 믿으며, 자기 가족의 참여가 교인들에게 가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자기 가족에게 하는 요구들에서 비롯되는 압력은 배우자와 자녀들의 분노를 일으킬 수 있다. 분노는 다시 대화를 막아 버리며, 서로의 관계를 더 깊은 긴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3]. 정체성의 추구
목회자의 가정이 스스로 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까? 목회자의 배우자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까? 목회자의 자녀들은 특별한 역할들을 하라는 부당한 압력을 받지 않고, 그들의 장점에 따라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특별한 역할에 순응하라는 압력은 교인들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이러한 압력은 목회자와 평신도 양쪽 모두로부터 주어진다. 목회자는 때때로 아내가 부교역자이거나 교인들 가운데서 모든 행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압력은 아이들에게까지 확대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협력 속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목회자 아내의 정체성은 목회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 즉시 보고하기를, 아내 될 사람은 다른 부류의 인간으로 취급된다.
 목회자 아내에게 있어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마치 이름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목회자 아내는 특별한 일들을 하도록 기대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들에 부합하는 생활을 하지 못할 때, 그녀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목회자 아내는 잠재적인 비난에 노출되기 쉽다.
 또 다른 기대, 즉 목회자의 아내는 부목회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교회 일에 대한 목회자 아내의 참여는 다른 모든 교인들과 똑같은 근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즉 그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있는 경우에 한정되어야 한다. 그녀의 은사가 부목회자(associate pastor)에 적합한 것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조용히 남편을 돕는 아내의 역할에 적합한 것이든지 간에,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역할을 선택할 자유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더욱 어려운 것은 목회자 자녀들의 정체성 추구이다. 아이들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몇몇 중압감들과 맞서 싸울 만큼 성숙하지 못하며, 그럴 만한 기술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들의 정체성은 아버지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PK's(목회자의 자녀들)이다. 한 PK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너희들은 DK's(의사의 자녀들)나 TK's(교사의 자녀들)은 아니잖아”
 그리고 PK라는말은 여러 가지 기대를 동반하는 것 같다.  PK's의 정체성 추구는, 목회자의 가정이 주로 아버지 없는 가정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어려워진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이해는 아버지가 다른 직업을 가진 가정들에서도 공감되기는 하지만, 약한부자(부녀) 관계의 문제를 불식시키지는 못한다. 많은 PK's가 아버지를 대신할 인물을 주일학교 교사, 학교 선생님, 또는 그들에게 지곳적인 영향을 미쳐 온 모든 남성들에게 찾는다.
 PK의 이러한 정체성의 문제는 청소년기와 청년기 사이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 한 PK는, 자신은 두 “얼굴”을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이분법을 쉽게 받아들였다고 말했다.―하나는 교회를 향한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또래 집단을 향한 얼굴이었다.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은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잘못된 경향들이, 불행의 잠재력이 휠씬 더 큰 중년에도 계속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예를 들면 교인들의 기대에 따르는 것이 한결 쉽다고 느낀 “전형적인 미국 젊은이”는 중년이 되면, 자신이 그때까지도 인격적 가치 체계를 확고히 규정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순응에 대한 중년기의 반항은 가정과 직업적 책임에서 기인하는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PK가 청년이 되어 집을 떠날 때, 정체성의 문제는 다시 한 번 재기된다. 어떤 PK's는 대학에 들어가서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 왜냐하면 친구들에게 자기 아버지가 목사라고 말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은 아버지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은 아버지의 역할에 의해 방해을 받지 않는 정체성을 찾으려는 열망이다.

4]. 태만
 목회자는 자신과 교인들로부터 가족을 무시하라는 압력을 받는다. 무수한 요구들이 그의 일정표에 빽빽이 기록된다. 그리고 당연히 가족들과 함께해야 할 시간을 달리 사용하려는 미묘한 유혹들이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아내와 자녀들을 잘 돌봐주실 것이라는 성숙되지 못한 믿음 때문에 실패할 수 있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해 줄 어떤 성경적 증거도 없다. 그러나 목회자가 “주의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가족에게 특별한 보호의 방패, 그리고/또는 교제를 제공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이러한 생각이 바로 태만이다.
 
5]. 사람, 사람, 사람..
목회자의 가정은 끊임없이 사람들로 둘러 싸인다. 이러한 상황은 복일 수도 있고 그렇기 않을 수도 있다. 가장 큰 이점들 중 하나는, 목회자의 가정은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갈 때마다 “이미 만들어진”(read-made)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가지 불편은 사생활이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불편은 교회와 관련된 수많은 사회적 모임들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들은 이중적이다.―부분적으로는 흥미로울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일의 연장이다.
 목회자의 가족은 구성원 개개인을 위해, 그리고 한 연합체로서의 가정을 위해 사생활을 보호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이러한 사생활은 사람들로 둘러 싸인 상황에서 살아 남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다.

 

6]. 외로움.. 목회자의 가정이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움으로 고생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위리스 덴톤(Wallace Denton)은 “현대 목회의 가정 갈등”(Family Conflicts of Modern Minister)이라는 글에서 임 문제를 가장 긴급한 문제로 보았다. 그는 목회자의 가족들을 상담한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서 이렇게 썼다.
 지도자로서 목회자와 그 아내는 그들이 인도하는 교인들과 지나치게 “친해지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목회자와 그 아내의 사회적 접촉이 대부분은 교인들을 상대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친밀감에 대한 필요성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에 대한 진정한 문제가 생겨난다. 그들이 누구와 더불어 그들 속에 있는 관심, 의심 그리고 고통을 나눌 수 있을까? 목회자가 과연 어디에서 다른 인간 존재와 관련된 자신의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목회자들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주로 아내의 도움에 의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목회자들에게 한마디 조언을 하고 싶다 : 여러분의 배우자를, 무보수로 일하는 여러분의 정신과 의사로 만들지 말라. 그렇게 하는 것은 그(그녀)에게 과중한 짐을 지우는 것이며, 그 결과 여러분의 결혼 관계에 엄청난 긴장이 초래될 것이다.
 목회자와 그 배우자 양쪽 모두에게 절친한 친구, 즉 전적으로 정직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때때로 교인들이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가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교회 밖에서 절친한 친구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상담자나 정신과 의사나 다른 목회자, 즉 외로움과 관계된 문제들을 기술적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 절친한 친구가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7]. 권위적인 인물로서의 목회자/부모
목회자라는 직업만큼 직업의 권위와 부모의 권위가 결합되어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직업은, 있다 하더라도 거의 없을 것이다.
 부모로서 목회자는 자신도 인간임을 단언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 잘못을 인정하고, 자녀들에게 조언을 구하며, 그들의 필요에 귀를 기울이며, 가족들에게 자신의 필요를 말하며, 집에 있을 때 자신의 “성직자의 깃”(카톨릭이나 성공회 신부들이 하는)을 벗어놓을 수 있는 목회자의 능력은 몇몇 중압감들을 해소하고 여러대화의 장을 마련해 줄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이유로 목회자는 또한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방법, 구체적으로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목회자이자 “기독교 목회”(Christian Ministry)의 편집자인 로버트 켐퍼(Robert Kemper)는, 목회자는 일을 줄이고 즐거운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일에 너무 중독되어 있으며, 즐거움에 대한 열망은 아주 낮다고 말한다. 은혜에 의한 구원을 설교하면서도, 그들은 행위에 의한 구원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즐거움과 휴식을 위한 여지를 거의 남겨두지 않는다.

 

8]. 성적 탈선
목회자들은 계속적으로 여성 교우들과 감정적, 육체적을 긴밀한 관계 속에 놓이게 된다. 목회자와 함께 일하는 교회 자원이꾼들 대부분이 여성들이다. 더욱이 상담, 목회적 권고, 위기 상담 등에서의 책임들 때문에 목회자는 강한 성적인 분위기를 가질 수 있는 상황들에 놓이게 된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높은 도덕적 기준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기록에 의하면 이들도 성적인 탈선에 전적으로 면역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목회는 훌륭한 결혼 생활에서도 긴장된 것이다. 내가 목회자가 아니었으면, 우리 가정이 더 강했을 것인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내 가족이 좋은 점들뿐만 아니라 상처 자국들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상처들은 내가 일어나고 있었던 일에 대해 좀더 잘 알았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것들이다. 어떤 상처들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나로서도 그것들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장에서 필자의 목적은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목사관에서의 생활의 실체들을 직시하여 목회자의 영역과 함께 찾아오는 파괴적인 압력들을 바꿀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느 것이다. 목회자가 가정의 상처 자국들이 적을수록 목회의 성공은 더 커진다.

 

6. 어디에서 도움을 구할까?


 목회 성공의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는 어려움이 있을 때에 도움을 구하고 또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밀스(Mills)와 코발(Koval)의 연구에 의하면, “목회자들 중 삼분의 이가 스스로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조치들을 취했으며, 삼분의 일만이 동료, 선배, 평신도, 가족에게 비공식적으로 도움을 구했다고 한다.” 이들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 “목회자들은 스트레스가 쌓일 때 서로에게 도움을 구하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이 분명하다.(그러나…서로에게서 기꺼이 두움을 받으려는 경항은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도움이 자연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강한 지원 관계를 형성할 기회들을 제공하는 데 강조점이 두어져야 한다..”
 에드가 밀스(Edgar Mills)는 목회자의 지원 체계(support system)에 대한 탁월한 정의를 내렸으며, 그 중요한 역할들에 대해서도 열거했다.
 목회자가 자신의 일이나 자신에 대해 흔들림을 느낄 때, 그를 지원하고 그에게 힘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특별한 자원들이 있다. 가장 강력한 지원 체계는 그 사람이 특별한 스트레스에 직면했을 때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체계가 발휘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들이 필요하다. 첫째, 목회자가 자신의 목회의 스트레스 항목들을 인지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하며, 셋째,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필요한 목회자의 처지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주어야 한다.….

 나는 목회자들이 그들의 인간 지원 체계들에서 이용할 필요가 있는, 적어도 세 가지 기능들이 있다고 확신한다. 첫째는, 머리 쓰다 듬기(head-patting)기능이다. 이것은 낙담해 잇는 목회자를 위로 하고 그에게 용기를 불언넣는 것이다. 둘째는, 문제해결(prtblem-solving)기능으로 이것은 스트레스로 분석하고 그에 대처할 수 있는 전력들을 개발하도록 목회자를 도와준다. 셋째는, 순환(feedback)기는으로, 이것은 목회자에게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한 정확하고, 절대적인 믿을 만한 자료들을 제공한다.

 

전문 조력인들의 도움
 최근에 목회자들이 전문 상담자들을 찾는 일에 대한, 목회자들과 평신도 양쪽 모두의 태도들이 변하고 있다.
 목회자들이 정신과 치료를 기피하는 이유들 중에는, 교인들이 그들의 목회자가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구했다는 사실을 알고 이에 부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데 대한 두려움도 포함된다.
 정신과 치료는 밀스(Mills)가 열거한 세 가지 기능, 즉 머리 쓰다듬기 기능, 문제 해결 기능, 순환 기능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 나는 상담을 통해 나 자신을 귀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강해졌음을 발견한다. 그것을 통해서 나는 많은 교인들의 행동과 태도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얻으며, 이러한 통찰력은 갈등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준다. 그리고 나는 교인들의 몇몇 문제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정신과 의사를 가지는 것이 너무나 귀중한 일임을 발견한다. 내가 받은 정신과의 도움의 결과로 대인 관계들을 통한 내 목회는 더욱 민감해졌고 교인들도 내게서 더 큰 유익을 얻게 되었다.

 

성도들의 지원
 해리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은 언제나 예배를 드리기 전에, 하나님께서 최소한 한 사람을 돕는 데 그의 설교를 사용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의 기도는 100배의 응답을 받았다. 이것은 비단 하나님의 능력 때문만이 아니라 포스딕 박사가 말씀(the word)의 양심적인 사역자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목회자는 규격화된 칭찬들에 심취하거나 냉소적일 필요가 없다. 목회자가 포스딕 박사처럼 양심적인 설교자라면, 그는 적합한 칭찬(머리 쓰다듬기)이 담긴 진정한 감사의 표현을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들 성도들로부터 더 많은 칭찬(머리 쓰다듬기)을 받는다면, 더 큰 성취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문제 해결은 회중 안에서의 권력 구조들과의 허심탄회하고 정직한 논의에서 시작될 수 있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 목회자는 먼저 교회 내에 존재하는 정형적권력구조(formal power structure)와 비정형적(informal power structure)권력 구조를 분명히 규정해야만 한다. 비정형적 권력 구조(예: 지도적인 가정, 여전도회장, 기독교 교육 위원회, 재정 위원회, 주일학교 학급)가 가장 강한 경우가 빈번하게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 비정형적 권력 구조가 정형적 권력 구조보다 다루기가 더 힘들다. 이러한 비정형적 권력 구조들은 무시될 수 없다. 이러한 비정형적 권력 구조들이 목회자로부터 과도한 관심을 받음으로써 공식적인 집단의 위치를 가져서는 안된다.
 오랫동안 목회를 해온 한 유명한 목회자에게 그의 성공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는 결코 집사들의모임(제직회)에 빠져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훌륭한 실제적 충고일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이 제사장이라는 의미와도 상통한다.
 
 교단의 민감성
 목회자의 지원 체계에서 없어선 안될 부분이 교단 대표들의 민감성이다.
 교단이 목회자들에게 소홀한 또 다른 핵심 이슈는 목회자들을 위한 교단의 적극적인 관심(사랑)과 교단에 대한 목회자들의 적극적인 관심이다.
 교단 임원들은 지원 체계의 모든 세 가지 기능들에서 훨씬 더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다.

 머리 쓰다듬기
빈약한 자부심은 많은 목회자들이 실제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그 다음으로 이러한 낮은 자부심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섬기는 교회와 그들이 속한 교단에 대한 분노와 분개심을 낳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단들은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놓어줄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작은 교회와 이행(移行) 지역(transitional area)에서의 교회 목회자들을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

 

문제해결
 첫째, 교단은 자신의 갈등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목회자들을 인도하는 상담자들을 임명하고 훈련시킬 수 있다.
 둘째, 교단은 중간 훈련소들(halfway houses) 그리고 또는 재훈련 센터들을 건립할 수 있다. 목회자들이 사퇴하지 않을 수 없을 때, 많은 목회자들이 있을 곳이 없다. 이것은 목사관에서 살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있어 특히 어려운 문제이다.

자기점검
회중과 목회자의 기대들에 대한 정기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이러한 검토는 목회자와 회중 양쪽 모두에게 탁월한 자기점검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검토가 제3의 단계가 개입할 때 그 성공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지는 것은 확실하다. 교단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교회와 목회자를 인도할 능력있는 사람들을 양성함으로써 도울 수 있다.
목회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지원 체계가 필수적이다. 좋은 소식은 이러한 지원 체계가 동료들, 회중(교회, 성도), 전문 조력인들 그리고 교단의 도움으로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7. 파리나 잡자고 목사가 된 건 아닌데 

역할 혼동과 역할 갈 등의 문제는 얼마나 심각한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 해답은 무엇인가? 여기에 이 장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세 가지 질문들이 있다.

 

문제의 심각성 
역할 혼동과 역할 갈등은 직업과 관련된 목회자의 고도의 긴장감, 낮은 직업적 만족, 낮은 자신감의 원인이 된다. 그 다음으로 이러한 목회자의 성격들 때문에 혼동된 상태로 남겨진 평신도들은 한걸음 물러나거나 또는 공개적인 갈 등에 휩싸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교구 목회의 효용성에 환멸을 느끼게 되고, 그들의 섬김의 장으로 다른 조직들을 찾기에까지 이른다.
 스미스(smith)는, 왜 이러한 문제들을 검토하고 그 해결책들을 찾아야 하는지에 대해, 다소 분명하고 확신있는 논증들을 제시한다.
역할갈등은 역할 부여자가 초점인물과 지나치게 가깝고, 그에게 의존하며, 그에게 강한 권한을 가지며, 그에게 강한 압력을 행사할 때 가장 큰 해를 가져다 주기 쉽다. 갈 등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이러한 갈 등의 대부분이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 직원들 사이의 관계에 팽배해 있다. 칸(Kahn)은, 이러한 상황들 하 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보이는 반응은 행동으로나 심리적으로 한 발 물러서는 것임을 발견한다. 이러한 반응은 스트레스를 일시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물러섬은 자기 패배로 판명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물러섬은 갈 등을 미해결 상태로 남겨 두며,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이와 연관된 일련의 다른 갈등들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역할혼동과 역할 갈 등의 원인
첫째, 목회의 성격에 대한, 서로 다르고 빈번하게 갈 등을 일으키는 기대들이 있다.
둘째, 역할 혼돈의 또 다른 원인은 기독교 목회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성경 모델은 다음을 포함하는 여러 가지 역할들을 제시한다. 선지자, 제사장, 전도인, 목자, 교사, 목회자에 의해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두 가지는 선지자와 제사장이다-다시 말해 도전을 주고 위로를 주는 것이다. 목회자들에 대한 혼돈은 그들이 어느 때, 어떤 상황하에서 도전을 주고/주거나 위로를 주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더불어, 이러한 직무들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가를 결정할 때에 일어난다.
 목회자들은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필요가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목회자들은 한 가지 입장에 얽매여 있어서는 결코 안된다. 목회자들은 계속적으로 회중의 필요를 평가하여, 언제 그들을 위로하고, 언제 그들에게 도전을 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셋째, 제도적 교회의 요구와 우리 사회의 필요가 성경이 제시하는 역할 모델에 부가되어 왔다는 점도 역할 혼돈의 한 원인이다.
제임스 스마트(James Smart)는 이렇게 표현한다.
목회자란 무엇인가? 그는 복음 전도자이다. 그는 설교자이다. 그는 제사장이달. 그는 종교 행정가이다. 그는 사회 개혁자이다. 그는 공도체를 위한 가치있는 사업들의 감독자이다. 아마추어 정신과 의사이다. 교육자이다. 삶의 해석자이다. 공동체의 양심의 소리이다. 그는 민주주의 문명의 가치 수호자이다. 그는 매주 사람들에게 더 지혜롭고 덕스럽게 사는 방법을 보여주는 임무를 띠고 있는, 높은 지혜와 덕을 겸비한 사람이다. 몇몇은 그렇게 젊지 않지만, 그래도 젊은 목회자들이 목회의 요구들을 충족시키려 노력할 때에 십수 가지의 서로 다른 방향으로 끌려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는가?

역할 갈 등의 또 다른 원인은 교회의 성격에 대한 목회자와 평신도 간에 서로 갈 등을 일으키는 견해들이다.

제프리 헤이든은 교회에서의 위로-도전의 대립을 목회자-평신도 갈 등으로 규정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것이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갈 등의 기초다. 목회자는 자신의 새로운 신학에 근거해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이해 교회의 네 벽 밖으로 나간다. 반면에 평신도는 위로를 구하고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의 성소 안으로 들어온다.
 평신도들이 하나의 교회, 즉 그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하나의 교회를 가지다. 이것은 주로 네 벽들, 그들의 친구들 그리고 봉급을 받는 위로자(목회자)로 한정되는 교회이다. 이 교회로부터 그들은 사랑과 지원을 이끌어 내며, 이에 대해 현금으로그 대가를 지불하며 필요할 때에 이를 소비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는 좌절감을 증대시키는 근원이 되었다. 점차적으로 그들의 위로자는 그들에게, 이제 규칙들이 변했으며 따라서 그들도 사랑의 소비자이기보다는 생산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목회자도 똑같이 큰 좌절감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옛 교회가 새 교회로 들어가도록 그를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헤이든의 이러한 말은 내가 목회자로서 느껴온 압력들을 규명하는데 있어 내가 읽은 다른 어떤 글보다 더 큰 도움을 주었다.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위로-도전의 대립은 교회의 정책, 프로그램, 목회, 할당되고 사용되는 돈의 액수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진다. 권위와 통제는 일반적으로 돈주머니 끈에 의해 세워진다. 빈번하게는, 교인들은 그들의 개인적 바람들을 확증해 주는 결정들이 나지 않는 한, 각자의 은사를 발휘를 보류한다. 교회는 자원적인 모임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평신도의 요구와 바람들에 약하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틈이 넓어지면, 그 결과는 대체적으로 갈등으로 나타난다.

다섯째, 목회자와 교단 관계자들 사이의 견해 차이도 있다. 국가적 지도자들은, 교회가 세계 지향적이 되어야 하며, 사회 문제들에 깊이 관여해야 한다는 데 관심이 있다. 교회와 더욱 가까운 교단 행정가들은 교회의 조직적 성공과 그리고 더 많은 돈과 구성원들의 필요를 의식한다.
 목회자는 전국적, 지역적 교단 관계자들의 관심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의 우선 순위들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조직으로서의 교구의 성공, 그리고 교구의 개별 구성원들의 필요의 충족과 위기의 극복, 그러므로 갈등은 불가피하다.
 교단 관계자들은 목회자의 임지 배정에서부터 기존의 위원회에 대한 인정에 이르기까지 교단적 보상의 분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보상의 차이들도 목회자들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불안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여섯째, 목회자가 처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내면화된 규범과 외면화된 압력 사이의 갈등은 문제를 유발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다.
일곱째 원인은 목회자나 평신도 어느 한쪽에서 이루어지는, 상호간에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가치들과 기대들의 내면화이다. 전형적인 목회자는 성도들의 개인적 요구들에 대한 목회와, 자신의 가족에 대한 목회 사이의 갈 등을 경험 할 것이다. 또는 회중은 성장을 바랄지는 모르나, 어떤 청지기, 복음주의, 전도 프로그램들은 회중의 높은 영적 기준들을 저하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문제는 이러한 기대들이 옳지 않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각각의 경우에 각각의 기대가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는 데 있다. 여러분이 절대적인 것들에 반대하려 하면, 여러분은 갈 등을 겪게 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양립할 수 없는 내면화된 기대들 속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곤 내적 갈등, 죄의식, 자기 가치의 결여뿐이다.

 

역할혼동과 역할 갈 등에 대한 해결책
 역할 혼돈과 역할 갈 등에 대한 이와 같은 간단한 개괄만 보더라도, 이것이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있어 성공목회를 가로막는 가장 큰 두 위험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핸진다. 그러므로 해결을 위한 몇 가지 제안들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선 모든 역할 혼돈을 제거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못하다는 점을 먼저 지적해 두어야 하겠다.  불행히도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갈 등을 나쁜 것으로 보며, 따라서 그들의 반응도 소란을 가라앉히려는데 집중된다.
 갈등이 파괴적인 것은 사실이다. 무관심이 갈등보다 더 나쁘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갈등은 생명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무관심은 결국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갈 등에 성공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 많은 회중들은 무관심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목회자와 평신도 양쪽 모두가 적극적인 대응에서 물러나게 되며, 이것은 결과적으로 건설적인 대화와 문제 해결에서 물러나는 것이 되고 만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목적은 그들의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장 적절히 나타낼 역할을 찾아내어 함께 협동함으로써 창조적인 긴장 가운데 사는 것이다.
역할 혼돈과 역할 갈 등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러한 실제들이 더 이상 계속해서 성공 목회의 가장 커다란 두 위험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가?
첫째, 목회자는 스스로 목회의 성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하자면 목회자는 역할 정의에서 피동자(reactor)가 아니라 능동자(actor)가 될 필요가 있다.

 어네스트 모슬레이는 목회자의 역할을 다음과 같은 세가지 기본적인 기능을 포함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선포, 돌봄(care) 그리고 지도력,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로서 사람들 앞에 선다. 그리고 그는 교회 성장과 선교에 대한 지도력을 제공하면서 사람들 가운데서 일한다.

 목회자로서의 나의 역할에 대한 필자의 정의에는 설교-가르침,위기 상담, 변화의 대리자, 확장, 행정의 다섯 가지 영역들이 포함된다. 더욱 최근에는 나는 “레지던트 신학자”라는 제목하에 내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목회자는 피동자가 아니라 능동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네 자신을 알라”는 모든 목회자들에게 훌륭한 충고이며, 역할 혼돈과 역할 갈 등에 대한 둘째 해답이다. 똑같은 사람은 전혀 없다는 것이 너무나 자명한 진리이다. 게다가 우리가 우리의 다양한 은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은사들의 성격을 분명히 파악해야 할 책임이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할 책임이 있다.
 목회자가 어떻게 자신을 알 수 있을까? 가장 가능성 있는 세 가지 방법은 개인적 성찰, 친구들과 동료들로부터의 자기점검(Feedback) 그리고 전문 상담인들의 도움이다.
 불행히도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알아보는 일에는 선뜻 나서기를 꺼린다.
 예를 들면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 것인가를 물어 볼 다른 전문가가 주위에 없을 때 목회자는, 자신에게는 심리적으로 보상을 주며 회중도 받아들일 수 있는 바쁨이라는 동기를 취하는 것이 한결 쉽다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오래된 많은 문제들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자신의 교구 교회의 성격을 규명하는 일이다.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시작한다면 갈 등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와 회중 사이의 계약들을 발전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해답은 정기적인 목표 설정과 재검토이다. 교회와 목회자 양쪽 모두의 역할 기대들을 분명히 하고 그럼으로써 갈 등을 최소화하며 불협 화음을 피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회중이 목회자를 초빙할 때 상호간의 계약(문서화된 약속)을 맺는 것이다. (진정한 동반자 관계 확립)
 처음 계약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처음 계약에서 회중의 은사와 목회자의 은사의 성격을 정확하게 기술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평가와 목표설정이라는 형태로 그 계약에 대해 정기적으로 그리고 자주 재검토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조직적 발전에 대한 특별한 기술을 가진 교구 상담자들을 이용해야 한다. 역할 혼돈과 상이한 역할 기대 때문에,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외부 전문가의 도움이 갈등 해결의 유일한 해결책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목회자들은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서 상담과 협상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갈 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목회자는 평신도를 동역자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만인 제사장 교리를 이행해야 한다. 서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이처럼 권위를 똑같이 공유하는 자세는 상담과 협상의 분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나는 바울의 말을 빌어 이러한 자세를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기”(speaking the truth in love)라고 부르고 싶다.

 역할 혼돈과 역할 갈등은 목회 성공을 가로막는 불경한 동맹을 형성할 수도 있다. 그럴 필요가 없다. 고통스러운 경험들이 목회자와 평신도 양쪽 모두에게 잠재적으로 더 커다란 성취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그런 감정이 이런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들인 것이다.

8. 주차장 포장하기

 

 야망과 성공의 신학
 사전은 야망이란 말을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 “지위, 명예, 또는 권력에 대한 열망” 그리고 “특별한 결과를 성취하려는 열망”이 그것이다.
 성공도 또한 두 가지 기본적인 정의를 가진다 : “바라는 목적(desired object)이나 결과의 성취 정도”와 “투기의 호의적인 결말, 특히 부, 호의, 또는 탁월함의 성취.”
 이러한 정의들은 그리스도인의 딜레마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바라는 결과들”(desired ends)을 가지고 계셨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바라는 결과는 사전에 나타나는 간절한 결과, 즉“부, 호의, 또는 탁월함의 성취”와는 다르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과 삶은 그분의 제자로서 우리가 성취하려고 힘써야 하는 목적을 보여 준다.
 바라는 결과들이 성취되려면, 야망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야망이 “지위, 명예, 또는 권력에 대한 열망”으로만 보여진다면, 그 야망은 의심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알고 있다. 즉 우리는 섬김을 간절히 원해야 한다.
 나는 야망과 성공이 목회에서 성취(fulfillment)의 중요한 요소들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목회자들은 스스로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목회를 떠난다. 교회들도 목회자들이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목회자들을 해고 한다. 우리는 성공의 중요성을 과소 평가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당한 정도로 역사를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창조의 대상들이 아니다. 우리는 창조 과정의 능동적인 참여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잠재력을 부여받았다. 그 잠재력을 성취하고 실현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우리의 창조자이며, 따라서 우리의 지혜로 우주의 주권자를 폐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죄이다. 하지만 휴지에 싸 묻어 버림으로써 그분의 은사들을 거부하는 것도 죄이기는 맟나가지이다. 그러므로 창조 교리의 도덕적 귀결은 그리스도인의 겸손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야망,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우리 안에 두신 가능성들을 수용하고, 이러한 가능성들을 썩혀 두지 않겠다는 결의이기도 하다.”(엑스포체는 필자가)
 야망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이다. 그러나 야망은 양쪽을 노리는 칼이 될 수도 있다. 야망은 평신도뿐만 아니라 목회자까지 거짓말하고, 훔치고,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게 만든다. 사실 목회자들에게 있어 야망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며 파괴적인 표현들 중 하나는, 목회자들이 자아의 만족을 위해 사람들을 교묘히 이용한다는 것이다.
 야망은 결코 저주가 아니며 하나님의 선물(은사)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들 각자로부터 우리의 최선을 끌어내시기 위해 미끼로서 자극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야망의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의 야망의 목적들과 느낌의 수준에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성공적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우리의 능력은, 우리가 이 은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데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종으로서 성공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것을 반드시 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공의 기준을 분석하고 부적절한 모델들을 거부해야만 한다. 둘째, 우리는 교구 목회의 일상 직무들에도 적용될 수 있는, 종으로서의 성공에 기초한 지침들(guidelines)을 찾아야만 한다.

 

부적절한 모델
 지상 명령(Great Commission)도 세일즈와 관련이 있다.―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수를 늘리라는 소명을 받았다.
 게으름은 전통적으로 일곱 가지 악한 죄들 중 하나로 열거되어 왔다. 나는 이 게으름이 목회자들이 한 가지 죄라고 주장했다. 목회자는 어떤 조직적인 감독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일 중독자가 되기 쉽고 반면에 게으른 사람이 되기도 쉽다. 불행히도 나는 후자의 경우를 많이 보고 있다. 이것은 결코 덕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바쁜 경우에는 ― 빡빡한 달력을 가진 경우에는―게으름의 유혹에 넘어갈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다.
 동료 헐뜯기(Professional Grssip)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비밀을 지켜 주지만 동료들을 헐뜯지 않고는 못 참는 것 같다.
 이것은 불신을 조장하고 고립을 증대시키는 미묘하고, 개인적인 경험들 중 하나이다. 나는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만큼이나 무의식적인 것이라고 확신한다.
 헐뜯기는 또한 전임(前任)목회자들을 상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새로 부임한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길 원한다. 이를 위해 그는 성도들에게 전임 목회자의 약점에 대한 몇 가지 암시들을 흘린다. 그는 전임 목회자의 약점에 대한 몇 가지 암시들을 흘린다. 그는 전임 목회자가 정확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거나, 병 등으로 인해 집에만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부주의했다거나, 설교 준비를 하지 않았다거나, 다른 목회자들과 협력하지 않았다는 등과 같은 말을 한다. 어떤 것들은 상당 정도도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의 알맹이가 없는 말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 목회자의 목적은 전임 목회자를 희생시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목회자는 회중을 두 분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한쪽은 자신이 말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들로, 다른 한쪽은 자신이 성도 길들이기 계획들을 지지한지 않거나 감히 이 계획들에 반대하는 사람들로 구분하고 싶어한다. 시기심―쓰라림―과 분노의 독은 목회자로부터 회중전체에게 퍼지며, 가능할 수도 있을 모든 효과적인 목회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기 가치의 결여 - 자기 가치(self-worth)가 성공과 관계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자신이 성공하고 있지 못하다고 느낄 때, 그 사람은 낮은 정도의 자기 가치를 가지고 있다. 자기 가치의 결여는 그 사람의 섬김의 능력을 약화시키기도 한다.
 회중의 크기와 세일즈의 수가 성공의 결정 요인이 될 때, 작고 힘겨운 교회의 목회자들은 실패자로 여겨져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 다음으로 실패의 감정은, 목회자가 효과적인 목회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가로 막는다.
 목회자의 고립- 목회자의 고립이라는 악령은 “성공적이지 못한” 목회자와 “성공적인” 목회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성공적이지 못한” 목회자는, 백만 달러짜리 탁자 모델에서 구명된 것처럼 출석 교인 수가 줄어들고 있는 교회의 목회자이다. 그는 출석 교인 수가 현격히 많아지고 있는 교회의 목회자들에 대해 위협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로 취급될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용기를 심어 주며, 교회 발전에 대한 가능한 몇 가지 제안들을 해 주고 싶어하는 다른 목회자들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킨다.
 “성공적인” 목회자도 자신을 고립시키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목회자들 사이에 팽배해 있는 경쟁 심리를 알고 있으며, 따라서 “성공적인” 사람들을 향한 부러움과 헐뜯기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은 성공 때문에 동료들에게 소외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도 자신을 소외시킨다.
 불건전한 경쟁 - 이러한 모델들은 교인들을 확보하기 위한 비윤리적인 행동들로 이러지는 경우가 빈번한, 불건전한 경쟁들을 야기시킨다.
 경쟁은 시간과 노력의 낭비를 가져온다.
 무엇이기보다는 무엇이 되기를 원함 - 실행자 모델과 세일즈 모델은 목회자로 하여금 자신의 목적을 무엇(being)이 되기(becoming)에 맞추도록 만든다. 그는 성공을 그리스도인의 성장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수적인 성장과 교회 조직의 성장으로 본다.
 무엇이 되기보다 무엇이기가 우선 순위를 갖는다는 원칙은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평신도에게도 적용된다. 목회자가 회중들에게 그 사회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되라고 다그칠 경우, 많은 회중들은 고린도 교회와 똑같은 특징들을 발전시키게 된다. 그렇게 될 경우 교인들에게는 밥이 아니라 여전히 우유를 먹여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의 성정이란 항목은 한 회중(교회)의 모든 성공 기준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질은 측정하기 어렵지만, 한 회중을 섬김 공동체(servant community)의 목적을 기준으로 평가할 때에 분명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목회 목적은 섬김이다.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을 사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있는 사람들,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을 상담하고 위로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교회 옮기기 증후군 - 한 목회자가 한 교회에서 평균적으로 3년 간 목회를 한다. 이렇게 목회 기간이 짧은 한가지 이유는 목회자들은 언제나 보다 큰 교회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이에 대해 냉소적으로 말하고 싶다면, 그는 다른 교회로 옮겨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때는 보다 큰 교회로 옮길 경우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칭찬과 찬사의 추구 - 목회자가 모든 교인들을 기쁘게 하려고 이렇게 정신없이 달리게 되면, 목회자는 지쳐 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는 누군가가 행복하지 않다는 모든 말을 들으면 먼저 두려움부터 느끼게 된다.
 회장 모델에서, 회중들은 자신의 성공과 실패가 그들의 전문 지도자들에게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모든 일이 잘 풀려 갈 때, 목회자는 가능한 한 많은 칭찬과 찬사를 받기 위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 모델을 조장한다.
 
 야수화(Brutalization) - 한 목회자가 청중의 반응에 지나치게 민감하면 자신의 감수성, 즉 하나님의 뜻을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없게 된다.

 성적인 무분별 - 대부분의 경우 문제는 여자 쪽에서 진정한 관심과 우애를 표시하는데서 시작된다. 서로의 좌절과 문제들을 나누는 것을 계기로 감정적 지원의 표현들이 점점 더 커지고, 마침내는 성적인 관계까지 이를 수도 있게 된다.

 목회에서의 성공을 측정하는 몇 가지 지침
 나다나엘 굽틸(Nathanael Guptill)은 신약이 “맘몬”(mammon)이라고 불렀던 우상이 오늘날에는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썼다.
 이 우상에 대한 숭배는 우리 문화에 대한 모든 것들을 위조요, 얄팍하고 공허하며 비인간적인 것으로 상징화한다. 텔레비젼 상업광고에서 화장품, 맥주, 담배, 비누, 간이용 아침 식사를 소비하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멋진 옷을 입고 근사한 차를 타고 다니며 삶에서 “앞서가는”사람들을 숭배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큰 거짓 종교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목회자들이 이러한 종교의 비밀 지지자들이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심적으로 찢겨진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은 기독교의 감상적인 형태를 고백하고 시인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젊고, 부유하고, 아름다우며, 강하고 매력적이기를 진정으로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 성공의 열쇠는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한신 말씀 가운데서 발견될 수 있다. 예수께서 반대하셨던 것은 야망이 아니라 그야망의 목적이었다. 야고보와 요한은 능력과 탁월함을 원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야망이 힘과 탁월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섬김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위대함과 심지어 첫째가 되기를 구하라고 까지 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위대함은 섬김이었고, 첫째가 되는 것은 종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위대함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발견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셨기” 때문이다.
 첫째 지침은,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가 교회와 목회의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다. 목회자와 평신도가 모두 동의할 수 있는, 분명하고 명확한 정의가 꼭 필요하다.(7. “역할 갈등”을 보라). 이것은 오늘날 교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견해들을 그대로 두고는, 모든 목회자와 희중이 목회에서 성공을 찾는 일에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둘째 지침은 목회자들이 스스로 성공을 규명하는 것이다.  셋째 지침은,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목회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의 빛에서 측정될 수 있는 목표들을 세워야 한다.
 그 다음 우리는 회중들을 서로 비교하는 데 아주 조심스러워야 한다. 어려움이 발생하는 가장 큰 원인들 중 하나가 바로 한 교회와 다른 교회를 비교하는 데서 비롯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성공 측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장애물은 회보, 교단이 작성한 연간 통계표, 그리고 목회자들의 자랑 늘어놓기 모임들을 통해 서로 교환되는 교회 정보들이다. 이러한 비교들은 모임들을 통해 서로 교환되는 교회 정보들이다. 이러한 비교들은 실행자 모델이나 세일즈 모델에서만 평가될 수 있으며, 각 회중의 독특한 특징들과 목회자와 평신도의 은사를 무시한다. 목회는 일정한 지역 사람들의 절실한 필요들에 대한 반응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세일즈를 늘리는 데 목적이 맞추어져 있는 프로그램을 이행하는일이 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예수께서 섬기러 오셨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목회자와 회중의 자아 만족을 위해 이용당하는 대상이 되고 만다.
 우리는 또한 영적 목표들도 세워야만 한다.한 교회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들은 과연 성도들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롸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에서 자라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목회자와 함께 노력해야 한다. 성령의 열매라는 빛에서 성도들의 성장을 측정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다.
 교회들과 목회자들은 영적 목표들뿐만 아니라 조직의 목표들도 세워야 한다. 교회는 조직(institution)이다. 믿는 자들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가르치고, 제자 삼고, 세례를 베풀 책임이 있다. 그러나 하나의 조직체로서 교회는 건물, 예산, 구성원들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예배 출석 인원의 증가, 교인 수의 증가, 재정의 증가 등의 목표를 세우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지침은, 교회 내에서 축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다시 말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계속적인 섬김에 대한 다짐을 표현하는 예배들을 드리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최선을 다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성도들을 섬기는 일로 인도하셨다는 증거들과 성도들이 이에 응답했다는 증거들을 발견할 때, 하나님께 마땅히 감사드려야 한다.
 축하 예배들은 특별한 일이 끝났을 때, 연례 기념일에, 세례식 때, 선교사 방문 시, 새 건물 봉헌 시, 여름 선교 여행 후에 그리고 목회가 잘 이루어졌다는 분명한 증거가 보이는 모든 경우들에 드려 질 수 있다.
 마지막 지침으로, 나는 매일 일지를 쓸 것을 권하고 싶다. 일지는 자신의 성공 여부를 알아보려고 애쓰는 목회자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목회자에게는 시간을 요하는 다양한 요구들이 주어진다. 그 때문에 일주일이 지날 때마다 돌이켜보면, 많은 중요한 일들이 때로는 반, 어떤 때는 전혀 손도 대지 못한 채로 남겨져 있는 경우들이 흔히 생길 수 있다. 이시점에서 지난 주의 일지를 살펴보면, 시간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여러분이 보다 덜 중요한 일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중요한 일들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랫동안 일지를 기록하면, 목회자는 혼자서 또는 동료들과 함께 이르 검토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실패와 성공의 타당한 그림들을 그릴 수 있다.
 야망 그리고 그 목표인 성공은 인간의 성(性)에 비유될 수 있다. 양쪽 모두는 남용되고 더러워질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물이다. 교회는 이 두 은사들을 분명하게 해석하지 못해 왔다. 그러나 나는 교회가 인간의 성과 관계된 문제들을 다루는 것보다 야망과 성공을 다루는 일에서 더 무책임해 왔다고 믿는다.
 우리가 이러한 지침들을 무시했기 때문에, 목회자와 평신도가 똑같이 목회에서 불가능한 목표들을 성취하려고 애쓰는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이다.


9.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거나 교회가 파면시킬 때까지

 “자발적인 목회에 대한 협의” 이말은 목회자와 평신도 양쪽 모두에게 성취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목회양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목회는 존 비어스돌프(John Biersdorf)가 편집한 『자발적 목회의 창조』(Creating an Intentional Ministry)에 나타나 있다. 그 이론적 근거와 정의는 다음 말에서 발견된다 : “우리는 목회에서의 효율성과 충성이 자발적 목회에 대한 협의의 결과라고 믿는다. 협의란 그에 따라 목회가 수행되는 관계와 일처리의 질을 말한다. 그리고 자발성(intentionality)이란 믿음의 양태와 효과적인 목회의 중심을 이루는 전행적(前行的, pro-active)행동을 말한다.
 나는 이러한 목회 형식을 내가 보아 온 두 문제들에 적용하고 싶다-그 두문제들이란 목회자의 능력 부족, 그리고 회중과 목회자가 파괴적인 갈등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 분명할 때 직면하게 되는 딜레마이다.

 

불필요한 실체―무능력
 바틀렛은, 목회에서의 무능력은 목회적 경향들과 재능들 사이의 차이점이 분명히 인정될 때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교단들에게 목회자들을 모집하고, 훈련하고, 배정할 때에 성경의 “은사의 다양성”을 이용할 것을 요구한다.

 왜 목회자들은 무능력한가.
 첫째, 많은 목회자들이 그들의 소명 경험에 기초하여 목회에 뛰어들었으며, 그들의 은사들에 대한 철저한 검토를 등한시해 왔다.
 무능력의 둘째 원인은 전문적 성장(fessional frowth)의 결여이다.
 셋째 원인은 둘째 원인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동료들의 감독 결핍이다.
 이러한 감독 결핍은 무능력을 낳는 두 가지 문제들이 커져 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게 된다. 첫째는 사역 습관들에 대한 훈련의 결핍이다.
 무능력의 또 다른 원인은 능력과 발전 그리고/또는 효과적인 배정 사이의 관계의 결핍이다. 능력에 대한 주요한 자극체는 발전이 아니라 섬김이 되어야 한다.
 한 교회로부터 다른 고회로의 손쉬운 이동이 무능력을 조장시켜왔다. 설교자의 “물통”이 비워지기 시작하면, 설교 준비를 위해 연구해야 한다는 어려운 일에 직접 부딪히는 것보다 교회를 옮기는 것이 더 쉽다.
 한 곳에서 단기간 목회를 하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경우, 그 목회자는 한 곳에서 오래 목회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기술들을 발전시킬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런한 목회자들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쉽다. 첫 번째 목회지에서 몸에 밴 나쁜 습관들은 제2, 제3, 제4목회자에서도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무능력을 조장하는 또 다른 요인은 제임스 글래스(Hames Glasse)가 “불평―순응 증후군”(complain-conform syndrome)이 라고 부른 것이다. 목회자들은 한곳에 모이게 되면, 실제적으로 자신들이 회중들로부터 겪는 고충들을 늘어놓으면서 자기 연민의 눈물로 서로를 적신다. 대부분의 자기 연민의 표현들에는 상당한 과장이 있기는 하지만, 목회자들이 너무나 많은 요구들을 안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목회자들이 이러한 요구들에 대해 거의 아무런 대웅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평을 늘어놓은 후에, 그들은 계속해서 비현실적인 기대들에 순응한다. 이러한 식의 숙명론적인 사고는 무능력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이 적합하지 않거나 훈련받지 못한 영역들에서 계속해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은 비현실적인 기대들을 바로잡는 데 있어 보다 주도적인 행동을 취해야 한다.
 왜 무능력이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자발성과 협의에 기초를 둔 목회 양식”은 무능력의 극복에 그 방향을 맞춘다. 이러한 양식의 목회에는 목회자와 평신도가 포함된다. 양쪽은 모두 교회와 그 목회에 대한 방향 감각을 가져야만 한다. 양쪽은 모두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려고 애쓰며, 서로간의 차이점들이 나타날 때 협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목회자와 평신도 양쪽 모두가 무능력을 극복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조치들이 있다.
 첫째, 목회자의 직무를 적절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책임을 받아들여라.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적용된다.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내가 보기에 우리들 중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직무들이 어렵다는 이유로 행동하지 않고서 그에 대한 변명을 늘어 놓는다. 우리는 목회의 직무들이 너무나 과다하다는 이유로 우리의 개인적 책임을 회피한다. 그러나 개인적 책임과 주도권은 기도와 하나님께 대한 의지(依支)와 마찬가지로 목회의 한 부분이며, 우리는 이를 인정해야만 한다.
 둘째, 적절한 자기 점검 통로들을 개발하고 이용하라. 모든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여러 다른 방법들로 자신의 능력을 평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목회자에게 많은 요구들이 주어지기 때문에, 목회자는 행동보다는 반응이라는 덫에 빠지기 쉽다―즉 삐그덕거리는 바퀴에 기름칠이나 하는 잘못을 범하기 쉽다. 목회자는 우선 순위들을 정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회중도 이와 똑같이 해야 한다. 그런 다음 협의를 통해 목회자와 평신도는 공동의 목표(목적)들을 세우기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다.
 해결책의 또 다른 부분은 목회자를 위한 연장 교육(continuing education)에 달려 있다.
 캐나다 연합 교회(United Church of Canada)는 모든 목회자들에게 매년 3주씩 연장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을 것을 요구한다.

 

 피할 수 있는 실체―파괴적인 갈등
 첫째 양상은 공개적인 갈등을 피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목회자는 교회를 떠나게 된다. 갈등의 원인들은 인정되지만 결코 다루어지거나 해결되지는 않는다.
둘째 양상은 편들기와 관계있는 것으로 서로에 대한 비난에 비난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이다. 공개적인 갈등이 일어나기 전에, 많은 교인들이 자신들의 시간, 재능, 재물을 교회에 드리는 일을 중단한다. 반면에 이웃 교회들로 옮겨가는 교인들도 있다.
 이러한 양상들이 “피할 수 있는 실체”일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파괴적인 교회 갈등의 원인들 - 파괴적인 교회 갈등의 일차적인 원인들 중 하나는 목회자의 무능력이다.
 무능력이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부족함을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이와 유사하게 성도들도 또한 목회자의 한계들을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목회자들이라면 모든 부분에서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사실이 그렇지 못할 때 실망하게 되고, 결국 이러한 실망이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목회자들이 그들의 무능력한 부분들이 목회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교회 갈등의 두 번째 원인은 역할 갈등이다. 방금 제시한 예에는 무능력뿐만 아니라 역할 갈등도 포함된다.
세 번째는 빈약한 대인 관계이다.
네 번째는 목회자의 성(性)적 부정(不淨)이다.
 교회 갈등의 다섯째 원인은 성도들이 목회자의 역할에 대한 부적절한 모델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목회자를 한 회사의 사장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회사의 영업 실적과 이윤이 떨어질 때 (즉 교회의 출석 인원이나 헌금이 줄어들 때)사장이 반드시 물러나거나 해고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여기에서 목회자들과 다른 성도들은 목회자의 역할을 회사 사장의 역할로 보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갈등이 일어난다.

 파괴적인 교회 갈등에 대한 해결책 첫 번째 해결책은 목회자와 교회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목회자와 평신도 양쪽 모두가 자신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협의에 대한 열린 자세로 대화를 나눔으로써 파괴적인 갈등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에서는, 목회자와 평신도 양쪽 모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항상 고려되어야 한다.
 또 다른 해결책은 교회에서 적범한 권력 구조에 의해 이루어지는 권위의 시행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거나 교회가 나를 해고할 때까지”라는 수동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수동성은 믿음이 아니다. 이것은 괴로운 망집(妄執)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한 목회자를 해고하는 데 2, 3년씩 걸리는 교회들은 자신들이나 그들이 해고한 목회자들에게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대인 관계에서의 성장이 셋째 해결책이다.
 목회자는 동료들이나 전문가들과의 상담을 통해 더 큰 자기 이해를 추구해야 한다. 그는 열린 마음으로, 그리고 그가 새로 얻게 될 위치에서 요구되는 기대들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통해 재배정에 접근해야 한다. 그는 갈등과 상담에서 규명된 필요들에 기초한 연장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그는 재배정을 3개월에서 6개월 가량 연기해야 한다.

 

10. 배정이란 두 글자
 배정이란 말이 회중에게 의미하는 것
 첫째, 한 사람의 메시야(a Messiah)를 찾는 일을 중단하라.
 불행히도 보통 교회들이 목회자를 찾는 데 1년에서 2년을 보내는 것은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닌 것처럼 되어 버렸다.
 한 사람의 메시야를 찾아다님으로써,목회자 청빙 위원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회자들을 파멸로 이끈다. 어떤 목회자에게 “당신이 우리 교회가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분(the one)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나는 “하나님과 같다”(like God)고 생각하도록 유혹하기 위해 그에게 금단의 열매를 주는 것과 같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목회자들은 금단의 열매를 맛보고 파멸에 이르고 만다. 그들은 메시야가 되려고 애쓴다. 그들은 물 위를 걸으려고 애쓰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성공적인 목회자가 발견될 때마다. 많은 교인들이 진정한 메시야를 잊고 그를 숭배하는 경향이 생겨난다.
 둘째, 성령께서는 55세라는 한계를 따지지 않으신다.
 “젊은이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목회자를 찾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이 일에서 젊은 목회자로 그 대상이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어떤 연령층이든지 자신의 나이와 더 가까운 사람에게서 편안함을 더 많이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경험의 가치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젊은 목회자들을 요구하는 이유는, 젊은 사람일수록 늙은 사람에 비해 더 큰 정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교회의 필요들과 관련된 목회자의 은사이다. 한 회중의 필요들은 35세의 목회자의 은사들에 의해서보다 65세의 목회자의 은사들에 의해 더 잘 충족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