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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상처를 드러내라. - 1부 교회 구조조정, 이렇게 정착시킨다.

好學 2010. 4. 25. 20:57

 

숨겨진 상처를 드러내라 - 이성희

 

 

1부  교회 구조조정, 이렇게 정착시킨다.


 교회 구조조정의 당위성은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manda)는 명제 때문이다.  개혁정신을 가진 교회는 그 교회가 존재하는 시대에 가장 순결하고 또한 적실하게 복음을 살고 전하기 위한 모습으로 존재해야 한다.  둘째는 사회의 격변 때문이다.  변화의 물결, 그것의 유속(流速)과 강도가 그 어떤 시대보다 거세고 예측 불변인 시대를 살고 있다.  어물쩡거리다간 우리의 알량한 전통과 함께 복음 그 자체가 외면당하는 비극을 맞을 수도 있다.  구조조정, 서둘러야 한다.

 

11. 중앙집권적 목회구조에서 지방분권적 목회구조로 전환하라
중앙집권적 목회구조는 미래 교인들에게는 설득력을 상실한다.  개교회에서도 당회보다 부서나 자치기관 중심으로 목회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 분권적 지방화 사고구조로 굳어진 교인들을 중앙집권적 사고구조로 다스리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총회와 노회 중 노회의 기능이 극대화되는 미래 교회에서는 당회의 기능보다 각 기관의 기능이 극대화될 것이 분명하다.

 

총회 기능을 지방회로
  세계화와 지방화의 역설적 발전이 교회 구조의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제는 교회도 중앙집권적 구조에서 지방분권적 구조로 전화해야 한다.  교단의총회보다 노회나 지방회나 속회가 강화될 것이 필연적이다.  교회정치도 중앙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회에 의존하게 될 것이며 지방회의 기능이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지교회도 지방회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될 것이며, 중앙회의 기능은 상징적이며 정책적인 면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미 한국의 많은 교단들이 그간의 총회 기능을 지방회로 이관하였으며, 지교회는 총회라는 한 단계 먼 기구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기구인 지방회를 통하여 기능적으로 연결되어갈 것이다.
  필자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도 1996년 제81회 총회에 제출된 ‘기구개혁안의 당위성’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 기구 개혁안의 당위성


  1. 세계화와 지방화의 시대
세계화란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라는 미래적 개념이며 지방화란 언어, 문화, 인종, 종교에 따라서 원심적 분권을 초래하게 될 지구의 미래적 개념이다.  우리나라도 이미 세계화의 영향을 체감하고 있으며 동시에 작년 지방정부의 출범으로 지방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제 세계는 국민 국가가 가졌던 통제력은 상실하고 지방공동체의 연대로서 역할과 기능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지방화라는 국지적 변화는 중앙집권화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사용된다.  동시에 세계와 지방화의 세계는 하나의 세계이다.  이러한 지구의 변화는 교회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도 총회라는 중앙집권적 기구보다 노회라는 지방분권적 기구가 강화될 수밖에 없다.  국민의 정서가 점차 실생활에 영향을 주는 지방 정부에 집중되듯이 교회도 총회보다 노회가 동질성이 강한 공동체로서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2. 총회와 노회의 역할 구분
  지방화 시대를 맞이하여 노회의 기능을 활성화하고 사업수행능력 강화를 위하여 총회와 노회의 역할을 구분한다.  총회나 노회의 역할 구분의 대명제는 총회는 정책 결정기관, 노회는 총회가 결정한 정책 집행기관이며, 다음과 같이 총회와 노회의 역할을 구분한다.

 
(총회)
총회는 정책을 수립하고 교단적으로 대처해야 할 일을 수행한다.
1) 신앙과 신학의 방향수립
2) 교리와 각종 예식의 제.개정
3) 헌법, 규칙 등 각종 예식의 제. 개정
4) 복음선교를 위한 장. 단기 정책 수립
5) 교회교육 정책의 수립 및 각종 교재 출판
6) 신학교육 정책 수립
7) 사회문제 대응에 필요한 정책의 수립
8) 교회 연합사업의 정책 수립 및 조정
9) 해외 동역교회와의 협력 증진
10) 노회간의 협력 증진 및 조정
11) 교단의 홍보정책 수립


(노회)
노회는 교회와 교역자 관리 및 총회의 정책결정에 따른 전도, 봉사사업을 관장한다.
1) 총회가 결정한 정책의 집행
2) 파송 선교사의 지원 및 관리
3) 지교회의 지도자 양성
4) 교회개척과 미자립교회의 지원
5) 지역사회 봉사의 특수선교 지원
6) 교회학교 교사의 양성과 훈련
7) 목사후보생의 추천, 지도, 관리
8) 해외 동역교단 산하 노회와 교류 및 협력
9) 교역자의 생활비 지원 및 은퇴목사의 위로

 


 당회보다 부서 중심으로
  개교회에서도 당회보다 부서나 자치기관 중심으로 목회가 이루어질 것이다. 중앙집권적 목회구조는 미래 교인들에게는 설득력을 상실한다.   총회와 노회 중에서 노회의 기능이 극대화되는 미래 교회에서, 의당 당회의 기능보다 각 기관의 기능이 극대화될 것이 분명하다.
 이전에는 당회의 권위에 복종했지만 이후에는 이같은 권위를 상실하게 되고 당회원은 각 기관과 부서와의 대화를 통하여 교인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또한 당회가 지교회를 운영하는 일도 민주적 대의정치 형태를 반영하여,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힘에 의하여 교회 전체가 좌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더욱이 한국교회의 당회는 폐쇄성이 큰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상회기관인 노회나 총회도 언권회원을 두고 있고 방청을 허용하는 데 비해, 당회는 일반적으로 언권회원도 방청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언제까지 비밀로 합시다.”, “이 말은 나가지 않도록 합시다.” 하고 지켜지지 않을 비밀을 결정한다.  하지만 그 비밀은 누가 그 제안을 했다는 말과 함께 새나가는 것이 상례이다.  교인의 대표자들이 모인 당회에 교인이 몰라야 하는 비밀이 있을 수 없고, 비밀은 당회에서 논의되어서는 안 된다.  당회가 교인의 알 권리를 막지 않는 것이 당연하며, 많이 알게 하는 것이 오히려 당회 운영에 필요하다.

 

가끔 공개 당회도 열자
  더구나 미래 사회는 열린 사회이므로 당회도 열린 당회가 되어야 미래인의 호응을 받을 수 있다.  오히려 교인들에게 당회가 얼마나 정당하게 민주적으로 진행되고 안건이 처리되는가를 보여주어서, 신뢰하고 결정에 따를 수 있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제안을 한다면 일년에 몇 차례 정도는 공개 당회를 열어야 한다.  당회원들이 가운데 앉고 교회 각 기관과 부서의 대표자들을 초청하여 당회원의 둘레에 앉게 하여 당회의 운영과정을 보게 하고, 가능하면 언권을 주어 그들의 의사를 수렴하면 여러모로 유익한 점이 많다.  그러나 결정은 당회의 몫으로 남겨 놓아야 한다.  미래 사회의 모든 회의는 합리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22. 개교회주의에서 교회연합으로 전환하라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세계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하나가 아닌 여럿이고, 우리는 ‘하나이며 하나가 아닌 세계’를 동시에 살 뿐 아니라, 하나인 세계와 여럿인 세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미래적인 시각이다.  이러한 세계적 삶은 현실적 삶뿐만 아니라 미래인의 사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나인 세계와 여럿인 세계는 다양성(diversity)과 통일성(unity)이 동시에 강조되며 양립하는 세계이다.  미래사회는 이 둘의 조화를 철저하게 요청한다.

 

일회성의 발달
  여러 가지 미래 현상 가운데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로 일회성(dis-posability)의 발달을 손꼽을 수 있다.  미래 사회는 가능한 모든 것을 일회용으로 만들 것이다.  이미 우리 주위에 일회용품이 갈수록 보편화, 다양화하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생활용품만 일회성이 되는 게 아니라 생활방식과 사고유형 자체가 일회성으로 발달한다.
  일회성의 발달은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사교유형에도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다.  특히 교회관에도 상당히 변화를 몰고 온다.  지금까지 지녀왔던 교회 건물에 대한 소유개념이 임대 혹은 일회성개념으로 전환될 것이다.  전통적 교회관이 사라지고 미래형 교회관이 발달하면서, ‘내 교회’라는 소아(小我)적 의식 대신 ‘우리 교회’라는 생각이 두드러질 것이다.  ‘우리 교회’ 개념이 강해질 때 내 교회를 고집하지 않고 아무 교회나 편의에 따라 찾게 될 공산이 크다.
  미래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인 이동성 (mobility)의 발달로 개교회주의가 퇴조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대도시 교회들은 지역교회 개념을 이미 상실했다.  교회의 중심 구성원이었던 지역주민이 도시화 현상으로 흩어지고, 흩어진 교인들은 점차 지역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어느 임상실험 보고서에서는 원거리로 이사한 교인이 첫해에는 기쁜 마음으로 본 교회에 출석하고, 둘째 해에는 의무감에서 출석하고, 셋째 해에는 마지못해 출석하게 되고, 이후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지역교회로 옮기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동성의 발달로 개교회주의가 퇴조하고 아무 교회에나 편의에 따라 나가는 편의성이 부각될 것이다.

 

연합, 교회의 생존방식
  일회성과 이동성의 발달 그리고 제 4의 물결이라는 변천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전반적 흐름이었던 개교회주의가 크게 퇴조하고, 자연히 교회연합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교회가 쇠퇴하면 모든 교회가 함께 쇠퇴하는 도미노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연합은 한국교회 전체가 사는 생존방식이다.
  교회가 연합하기 위해서는 우선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럴 때 교회는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의에 의해 적극적으로 다양성을 포용하고 변화해야 한다.  다양성 속의 통일을 추구하고 변화를 당위로 받아들이는 미래 사회에서 교회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변화해야 사회를 위한 교회가 될 것이다.  물론 이때의 변화는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거나 변질시키는 것이 아니라 적응을 위한 변형이다.  교회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영성과 사회성을 동시적으로 보존해야 교회일 수 있다.  한국교회가 교회연합을 이룬다면 선교와 교회행정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될 것이다.   21세기를 앞두고 한국교회도 하나의 보편적 교회를 추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일치와 연합은 시대적 요청
  한국교회의 연합을 저해하는 요인으로는 신학적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보수와 혁신의 갈등, 교파와 개교회 중심의 교회이기주의, 기득권을 담보로 한 당파성과 폐쇄성을 꼽을 수 있다.  우리는 교회의 우주적 보편성에 근거를 두고 이런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또 ‘일치와 연합’이 시대적 요청이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실제로 한 교단 내에도 진보적 성향의 교회나 목회자, 보수적 성향의 교회나 목회자가 공존하고 있는 점을 인정한다면 교회연합은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최근 한국교회에는 교회연합에 대한 관심이 부쩍 증가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협의회(KNCC)에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가 회원교회가 되고, 한국장로교협의회와 대한예수교장로회협의화가 통합하는 등 새로운 흐름이 감지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시간을 앞둔 한국교회의 당면 과제는 교회의 연합이다.  이는 한국교회가 급변하는 시대 가운데서 살아남는 생존수단이고,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고 주일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적 교회에 대한 믿음의 재천명이다.

 

33. 세대중심에서 간 세대 중심으로 전환하라
  95년 11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종교 인구 가운데 개신교인은 전체 국민의 19.7퍼센트, 천주교는 6.6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기독교 인구 가운데 천주교는 30대 이하가 67.5퍼센트, 개신교는 72펴센트의 비중을 차지해서, 기독교는 젊은 종교인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유교는 신자의 절반 이상인 53.2퍼센트가 50세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필자가 섬기는 연동교회의 경우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교회라서 ‘늙은 교회’ 라고 속단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30대 이하가 55.7퍼센트를 차지하는 ‘젊은 교회’이다(’97년 4월 현재). 신입교인의 비율을 보면 이 현상이 더욱 두드러져 30대 이하가 66.5퍼센트로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한국교회는 대체로 젊은 교회의 추세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0대 이하의 젊은이들이 교회의 주류일 뿐 아니라 70세 이상도 8.1퍼센트로서 적지 않은 노인층이 교회 내에 공존하고 있다.

 

신세대와 탈구조주의
  간 세대 목회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목회적 관심의 대상은 역시 신세대들이다.  흔히 X세대라고 부르는 신세대들은 탈근대주의와 탈구조주의라는 사조의 공간에 사는 별종들이다.
  최근의 10대들은 20대와 차별적으로 대우받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서슴없이 자신을 Y세대라고 칭한다.  20대는 이미 구세대로서 자신들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10대들은 헐렁한 힙합 스타일을 주로 입으며 “편해서 좋다.”고 한다.  반면 20대들은 몸에 착 달라붙는 복장을 선호하고 스스로 “멋있어서 좋다.”고 한다.  최근 신세대들은 X세대라고 불리던 여러 해 전의 신세대와 구별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Z세대라고 부른다.
  신세대들은 탈(脫)구조 속에 살기 때문에 기성세대의 것들을 거부하고 기성세대에 종속되기를 싫어한다.  요즘은 다르지만 몇 해 전만 해도 대학생들이 교수의 차 시중을 들지 않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또, 기성세대의 독단적인 결정을 따르지 않았다.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여러해 전 장로회신학대학교(서울 시내 광장동 소재)의 이전 계획이 논의된적이 있었다.  어느 건설회사에서 상당한 땅을 교외에 주고 필요한 교사를 건축해주며 100억원을 발전기금으로 내놓겠다는 조건이었다.  상당히 좋은 조건이었으므로 이사회는 검토 끝이 이전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사회의 결정 사항이 학생들에게 알려지자 큰 소요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교사(校舍) 이전을 반대했다.  결국 학교 이전 계획은 백지화되고 말았다.
  이사회가 학생들의 반대를 무릎을 끓고 교사 이전의 호기를 놓친 것은 젊은 세대들의 의식을 제대로 읽지 못한 까닭이었다.  학생들이 이사회의 일방적인 결정을 수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기성세대의 기득권 행사를 마치 불의처럼 여기는 까닭이다.  그때 나는 어느 이사에게 이런 수순으로 일이 처리되었어야 한다고 말했다.
  “먼저 건설회사의 제안을 그대로 전한다.  그리고 이전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 즉 통학 버스나 기숙사 확보안을 발표한다.  또한 발전기금 100억원 전액을 장학기금으로 확보하겠다는 약속을 공표한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통학 거리가 너무 멀다는 문제로 이사회가 이전 결정을 부결했다고 발표한다.” 이렇게 일 처리를 했다면 아마 학생들이 이전하자고 데모를 벌였을 것이다.

 

천 원짜리 라면에 오천 원짜리 커피
  탈문화의 공간에 사는 신세대는 기성세대가 이해하자고 힘든 면모를 가지고 있다.  호출기를 몇 푼이라도 싸게 사기 위해 전자상가를 빠짐없이 한 바퀴 돌면서도 유행하는 신발이나 옷을 사기 위해서는 비싸도 두말 않고 산다.  군소리 없이 천 원짜리 라면을 먹어도 커피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오 천 원씩이나 내고 마신다.  기성세대는 영양을 위해 식사는 비싸게 하고 커피는 적당히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젊은이들은 이래서 다르다.
  신세대의 삶의 문화는 기성세대가 가진 삶의 형태와는 전혀 다르다.  자동차공업협회의 분석에 따르면 ’97년 6월 말 우리나라의 자동차 수는 1,000만 대를 돌파했다.  그 가운데 약 절반이 승용차인데,  승용차의 소유주 가운데 30대가 40.4퍼센트로 가장 많고 다음은 40대로 22.6퍼센트, 20대 15.5퍼센트, 50대 13.6퍼센트 순이다.  이와 함께 10대가 소유한 승용차도 전체의 0.6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즉 승용차 소유자의 55.9퍼센트가 20,30대인 것은 자동차의 대중화 추세와 함께 집은 없어도 차는 있어야 한다는 신세대의 풍조를 반영하는 것이다.  새로운 세대드리은 기성세대와 차별성을 가진 그들만의 문화를 창출해나가고 있다.

 

팬츠 신드롬
  일반적으로 신세대를 논할 때 그 특싲을 ‘PANTS 신드롬’이라고 한다.  이 말을 풀이하면 개인주의적 (personal)이며, 흥미본위(amusement)이며, 자연스러움을 좋아하며 (natural), 성별 구분이 모호하며 (trans border), 극단적인 자기 사랑(self-loving)에 빠진 세대라는 뜻이다.  신세대는 우선 형제가 적기 때문에 자신이 최종 결정자가 되어야 하며, 친구에게는 경쟁자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고민을 털어 놓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결정은 자신의 몫이며 가정에 대한 책임감도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이 신세대가 지닌 개인주의적인 특성이다.
  극단적으로 자기 사랑에 빠져 있는 신세대는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인색하지 않지만 남을 위해서라면 손에 물 한 방울도 안 대려고 한다.
  신세대는 외적 특성으로도 구분할 수 있지만 90년대 이후 신세대는 나이보다도 의식과 태도로 구분한다.  장종철 교수는 신세대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논한다.  첫째, 신세대의 개인주의는 근세 서유럽에서 강조되어온 이성에 근거한 개인주의가 아니다.  신세대는 인간의 합리성보다는 상황의 현재성이 강조되고 자신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는 자신의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감각적 개인주의이다.
  개인주의적인 신세대는 자살을 미화하고, 이 때문에 자살율이 급격하게 증가한다.  우리나라의 최고학교라고 하는 과학기술원생도 공부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쉽게 목을 매어 자살하고 어떤 고등학교 학생은 컴퓨터가 없어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고 비관하여 자살한다.  신세대의 자살증후군은 가정에서 과잉보호로 신세대들의 심성이 나약해진 데다 과잉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풍조와 입시만능의 교육 부담이 빚은 결과다.  지난 ’96년 교육부 국회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중고등학생 자살이 매년 크게 늘어나고 있다. ’94년에는 96명이었으나 ’95년에는 188명으로 배 이상 늘어났고 ’96년 1학기에만 115명이 자살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자살율은 앞으로도 증가될 추세다.
  둘째, 신세대는 획일주의나 권위주의, 전체주의를 배격한다.  전통적, 유교적 농경문화는 더 이상 신세대에게 강요할 가치가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의 합리적 가치를 원한다.  그들은 상사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업무에 집중하며, 눈치 보지 않고 퇴근한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에는 부교역자들이 휴가기간이라도 자신의 교구에 초상이 나면 모든 상례를 담당했다.  그러나 이제는 휴가기간에는 초상이 난 것을 알아도 나타나지 않는다.

 

가치관의 충돌
  셋째, 신세대는 소비지향적인 생활 습관을 갖고 있다.  급속하게 우리 사회에 상륙하여 뿌리를 내린 외국 외식업인 티지아이 프라이데이스 (TGI Friday's), 코코스(Coco's), 데니스(Denney's), 씨즐러(Sizzler), 베니건스(Bennigan's)등은 음식값이 상당히 비싼 편에 속한다.  그러나 그 음식점들은 저녁마다 만원을 이룬다.  주고객은 젊은 신세대들이다.  신세대에게는 불황도 없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기업은 20대를 겨냥하라고 한다.  20대를 잡아야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세대의 소비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적 규범인 근면, 절약, 검약한 시민생활을 강조하였지만, 신세대에게 근검절약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넷째,  신세대에게 컴퓨는 언어의 확장이요 신체의 일부다.  신세대들은 컴퓨터를 자유롭게 다루고 이를 이용하여 사회적 관계를 유지한다.  이들은 컴퓨터를 통하여 자신들의 언어를 구상하며 새로운 정보를 수집한다.  최근에는 컴퓨터 통신에서 유행하는 언어가 일반 언어보다 더 함축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컴퓨터 세대를 사이버 펑크(cyberpunk)라고 부른다.  인공두뇌를 의미하는 사이버테틱스(cybernetics)와 반항아를 의미하는 펑크(punk)의 합성어인 이 말은 신세대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다섯째, 신세대는 기성세대의 시각에서 볼 때에 반항하는 세대이다.  우리의 전통문화로는 이해할 수 없는 국적 불명의 문화를 무분별하게 받아 들이는 그들은 기성세대의 사고를 무시하는 불순종과 부정도 서슴없이 표현한다.
  실제로 새로운 세기, 새로운 세계관의 시대를 대비하려는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먼저 새로운 세대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기성세대의 눈에 신세대는 불건전한 가치관과 문화를 가지고 있고 전통적 정서와 너무 거리가 먼 세대로 비쳐져 이러다간 우리나라에 미래가 있을까 하고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21세기의 우리나라와 교회의 주역이 될 것이 틀림없으므로 교회는 신세대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신앙과 문화를 건전하게 순화(純化)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특히 교회는 사회의 도덕적 규범을 마련해주고 가치관의 기준을 설정하는 곳이므로 기성세대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러면 신세대가 미래 교회를 건강하게 이끌어갈 힘을 기를 기회를 얻게 된다.

 

‘나 홀로’ 노인들
  동시에 교회는 노년층 목회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가 급속도로 노령화되고 있으며 노년층이 점점 두터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환갑잔치를 하는 어른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칠순이 환갑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흔히 노인이라고 하면 65세 이상의 연령의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록 인구고령화가 진행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100세 이상의 장수자가 1,000명이 넘었으며 장수자의 수는 점점 늘어날 전망이다.  우리나라의 100세 이상의 장수자는 ’96년 1,151명을 시발로 1,000명 선을 넘었으며, 지역에 따라 65세 이상의 노인이 30퍼센트를 넘는 곳도 상당히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96년 보건복지부 통계).  이러한 인구의 고령화 추세는 계속될 전망이다.


노인문제와 사회적 요인
  노인들은 일반적으로 가장과 직장에서의 역할 상실로 인해 소외감과 고독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런 감정이 노년기의 대표적 정신질환인 우울증(depression)을 유발하기도 한다.  또한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자신을 관여시키는 자아 에너지 투입이 약해지고 소극적이 된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는 데 적극성과 지구력이 약해지며,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를 주저한다.  노인 특유의 수동적 성향, 즉 경직성과 조심성이 자연히 증가하여 분명한 자신감과 보장이 없는 한 매사에 주저하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따라서 노인에게는 과거 회상과 추억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성향은 자신에게 친근한 사물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의 강한 집념을 보이는 편집증적 증세로 나타난다.  노인들이 낡고 유행이 지난 물건에 애착을 가지는 것은 그 물건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 속에 추억이 담겨 있고, 그것이 삶의 실재와 접할 수 있는 매개가 되기 때문이다.  고장난 재봉틀을 닦고 소제하며, 날고 유행 지난 한복을 입지도 않으면서 장롱 속에 간직하는 것도 다 이런 심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노인의 심리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건강한 자아상을 갖게 하기 위해, 세대가 함께 사는 삶의 자리를 마련해줌으로써 노년기 최대의 적인 소외감과 자신감 상실을 극복케 할 수 있다.  노인문제는 이제 노인들만의 고민이 아닌 우리 사회의 문제이다.  오늘의 신세대가 내일의 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주역인 신세대들에게 관심을 갖듯이 노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의 관심을 두어야 한다.  노인들이 가장 시급하게 여기는 문제는 경제활동 참여와 경제적 빈곤 해결이다.  물론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인간으로서의 소외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서부터 노인 스스로가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교회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나아가서 교회는 노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그들을 독특한 개성을 지닌 존재로서 대우하여 인격적으로 친밀감을 주고,  노인들의 활동과 참여의 기회를 넓혀야 한다.


누구에게나 열린 교회
  미래 목회가 세대 중심에서 간 세대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첫째,  미래 사회의 중심은 특정 세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 간 한국교회는 기성세대 중심의 성장 지향의 목회를 해왔다. 어린이, 청년, 노인틍은 교회 성장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기에 목회적 관심에서 고만고만한 등거리에 있다.
  최근에 와서는 기성세대와 더불어 교회학교 목회를 중요시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21세기의 주역으로 자라지 않으면 교회가 쇠퇴한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 교회는 간 세대 중심의 목회가 되어야 한다.  모든 세대가 중요한 목회적 자원이고 품어야 할 목회 대상이기 때문이며, 이제는 모든 연령층의 편차가 고르게 분포되고 있는 까닭이다.
  둘째, 세대 중심의 목회는 간 세대의 문화와 전통의 단절을 초래한다.  최근 들어 청년을 중시하는 청년 예배 등 청년을 위한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교회가 늘어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 목회자는 기성세대로부터 “목사님은 청년밖에 모른다.” 는 비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우려는 기성세대가 청년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지니고 있고 그 동안 쌓아온 교회의 전통이 단절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표시이다.  문화와 전통의 단절은 교회의 덕이 되지 않는다. 전통을 버리고 새로운 것만을 수용한다고 해서 개혁이 일어난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통과 새로운 조류를 취사선택해서 조화시키는 것은 지혜이며 중요한 작업이다.
  셋째, 목회는 보편적이어야 하며 목회자의 관심이 어느 한 세대에 국한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보편성을 지닌다.  교회는 특정 집단의 교회이어서는 안 되며 누구에게나 열린 교회이어야 한다.  아주 특수한 여건 아래서 보편성보다 특수성을 가지며 특정 집단을 위한 교회가 되기도 하지만, 이런 교회는 교회의 일반적 의미에서는 벗어난 교회이다.  군인교회가 대표적인 예이며, 그 외에도 체육인들이 모인 교회, 공장 교회, 대학 교회, 병원 교회, 연예인 교회 등이 그렇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교회의 내면적 모습은 보편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어느 한 세대나 한 집단을 목회의 대상으로 삼아선 안 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보편적이어야 하고 누구나 다 들어올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특수성과 개연성을 강조하려는 미래 사회에서 교회의 보편성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며 이러한 과제를 위하여 간 세대 목회에 지대한 중요성이 부여된다.

 

44. 예전적 예배에서 축제적 예배로 전환하라


예배 변혁이 시급하다.
  예배의 내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예배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대에 따라 인간의 사고와 문화가 변천하고 이에 따라 새로운 형식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구미의 많은 교회들이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축제적 예배를 강조하는 교회들은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한 교회들은 “모이면 축제적 예배, 흩어지면 소그룹을 통한 성숙”을 표어로 내걸고 성장하고 있다.  이 교회들은 예배의 축제성을 중요한 목회적 관점으로 다루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교회의 전통적 예배는 경건과 회개는 강조했지만, 기쁨과 성결한 삶을 퇴조시켰다.  오래 전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던 몰트만 (Jurgen Moltmann) 박사는 “한국교회에는 십자가의 신학은 있으나 부활의 신학이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한국 교회가 고통과 아픔은 강조하지만, 기쁨과 즐거움을 상실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현재 한국교회의 예배는 100년 전 선교사들이 가르쳐준 서구예배의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한국교회 예배의 한 특징은 예나 지금이나 묵도로 시작해서 축도로 마친다는 것이다.  왜 언제부터 이러한 예배 형식이 한국교회 예배의 매뉴엘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최근까지도 묵도로 시작하지 않고 축도로 마치지 않으면 잘못된 예배로 여기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런 예배 형식을 지키지 않으면 이단 소리를 듣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묵도로 시작해서 축도로 마치는 순서가 성경에 예시된 예배 형식도 아니고, 더욱이 개혁주의적인 예배 형식도 아니다.  단지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형식이 굳어졌고 여기에 우리의 신앙적 경직성까지 겹쳐 이를 절대화하게 됐다.
  예수님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강림의 증인들이 된 제자들은 가정에서 예배하기 시작하였고, 가정뿐 아니라 성전이나 회당에서 예배하시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랐다.  오랫동안 그들에게 친숙하였던 예배 형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예배는 두 가지 단어로 표기된다.  하나는 ‘하스타하바’(histahabah)로서 존경과 겸손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꿇어 절하다(bowing down)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아보다’(abodah)로서 섬김(service)의 의미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존경과 겸손을 표시하여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이다.  나아가서 진정한 예배는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그를 섬기는 것이다.  섬김의 삶은 강요나 억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과 그의 자녀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 때문에 자발적으로 기쁘게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왜 바꿔야 하는가
  구약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구약이 가르치는 예배는 철저하게 구원하시는 하나님 중심이며, 하나님만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인간 최고의 행위이다.  구약의 예배는 형식과 내용이 엄격하게 규정되었다.
  신약에서 예배는 ‘경배’라는 단어에서 그 의미가 잘 나타난다.
  신약이 가르치는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예수님께 적용하므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일체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배의 장소는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며, 예배의 시간은 예수님과 함게 하는 때이며, 예배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된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예배를 통하여 예배 갱신의 내용들을 검토해야 한다. 

첫째, 예배 갱신이 성경적이며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인가 물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예배의 인간 중심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하여 성경적 예배로 돌아왔다.  사제들의 예배놀이가 아닌 회중 모두의 경배로 전환했던 것이다. 

둘째, 예배의 내용과 형식이 충실하고 우리 시대에 적절한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묵도로 시작하여 축도로 마치는 순서가 성경적인지, 이 순서가 예배에 필수적이고 적절한 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셋째,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몸으로 드려지는 예배인가를 물어봐야 한다.  예배 인도자와 참여자가 함께 예배자로 서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또 듣는 예배에서 보는 예배, 나아가서 온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넷째, 예배에 공동체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신앙고백이 있는지 물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예배에는 그들을 출애굽하게 하신 하나님의 구속행동에 대한 신앙고백이 항상 있었다. 우리의 예배에도 이러한 구원의 감격과 고백이 흘러야 한다. 

다섯째, 우리의 예배가 예배시간만의 예배인지 일상생활의 예배인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이다.  그러므로 일상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인 삶과 영적인 예배를 구분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에서 몸으로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전같이 시간적인 여유가 있던 때에는 수요일 저녁 기도회가 당연하고 불편이 없었지만, 요즘과 같이 여유가 없는 직장인들에게는 상당한 무리와 불편이 따르고, 참석하지 못한 데 대한 죄의식까지도 겹쳐 괴로움을 더한다.  농경사회, 산업사회, 정보사회의 생활은 각각 다르다.  교회는 이같은 생활의 차이에 따라 예배 형식과 집회 횟수를 조정해야 한다.

 

예배관도 발전해야
  요즘에는 예배학적인 분류에 따라 예배 순서를 조정하기도 한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일반적으로 설교 중심의 예배이다.  말씀을 강조하는 장로교회 예배의 특징이기도 하고, 종교개혁 전통을 전승한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설교 중심의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전이나 예배의 다른 요소에서 발견하려고 하지 않고 단지 설교에서만 얻으려 한다.  그래서 설교와 예배를 동일시하고 목사의 역할 가운데도 설교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한국교회 예배의 또 다른 특징을 꼽으라면, 은사 경험을 중심으로 한 예배이다.  성령의 체험을 예배의 요소로 강조하며 이런 경험들이 예배의 특징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예배에서는 방언 사용과 병자 치유를 위한 성령의 역사를 예배 순서로 도입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주관적 경험을 객관화하거나, 회중의 주관적이고 자발적인 표현들이 성령의 역사와 동일시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따라서 은사 중심의 예배를 강조하는 교회들도 이제 예배 갱신을 신중하게 논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배 참여자들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예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 예배이후 예배경직된 형식에서
설교 중심에서
은사 중심에서유연성 있는 형식으로
전체 예배 내용 중심으로
균형잡힌 예배 갱신으로

 

 새벽기도회를 재조명한다.
  한국교회 예배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은 새벽기도회이다.  새벽기도회는 한국교회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사회가 산업화되면서 야행성문화로 탈바꿈하고 있다.  더구나 신세대들은 조기문화보다 야행성문화를 확실히 더 선호한다.  이런 문화 변천으로 새벽기도회가 점점 힘들게 되고 실제로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교인 수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
  어쨌든 예배에 관한 한국교회의 관행들은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그 내용에서 너무 딱딱할 정도로 예전적이다.  기계적이고 예전적인 데 익숙지 않고 오히려 그런 형식성을 탈피하고자 하는 신세대는 당연히 예배를 낯설어 한다.  이런 면에서도 한국교회의 예배는 갱신되어야 한다.  예배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참여하는 사람들이 공감하고 은혜받도록 형식에 전환을 가져와야 한다.  여기서 갱신이란 무조건적인 탈피나 변혁이 아니라 예배회복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신세대 출현은 우리 사회의 미래형 증후군이며 교회는 그들의 독창적 문화를 읽어야 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낭 뚜렷한 특징은 자연스러움 (naturality)을 좋아하는 경향이다.  이러한 성향은 미래 교회에 많은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신세대는 캐주얼한 복장을 선호하고 캐주얼한 삶을 원하며 캐주얼한 예배를 즐긴다.  그들에게 딱딱하고 기계적인 예배가 강요되어서 안 되는 이유는, 이런 예배 형식을 통해서는 더 이상 기본적인 영성 제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배, 어디가 취약한가
  랑게(E. Lange)는 예배 유형의 3단계론을 제시하였는데, 그가 말한 3단계란 말씀 중심 예배의 기본적 구조로서 사면 (absolutio), 언약 청취 (promission), 그리고 세상으로서 파송(missio), 이렇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사면부는 예배의 첫부분으로서 하나님께 경배하려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첫부분은 참회와 죄용서의 확인이 우선되어야 한다.  언약 청취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되는 구원의 말씀과 언약의 성취를 확인하는 부분이다.  한국교회에서 항상 가장 강조되는 것이 이 부분이며, 설교가 그 중심에 자리한다.  세 번째 부분은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하나됨을 확인하고 위로, 약속, 삶의 과제를 인식하고 새로운 결단과 헌신을 통하여 세상으로 나아가는 준비를 다지는 부분이다.  위에서 랑게가 말한 3단계는 예배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들이며 예배에서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요소들이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예배 갱신은 예배의 요소가 아니라 예배 형식을 갱신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아 상실한 것들을 다시 회복하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예배 갱신의 초점은 오늘날 당면한 예배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갱신과 회복의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오늘날 예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목적의식과 감격의 상실이다.  무감각한 예배는 비단 오늘날만의 문제는 아니다.  아모스를 비롯한 구약 선지자들이 백성을 책망한 것도 예배에 대한 무감각 때문이었다.  예배는 인도자나 참석자들이 함께 책임을 느껴야 하는데, 준비와 관심이 부족할 때 무감각함이 잉태된다.  이런 문제는 철저한 예배 준비로만 극복할 수 있다 
예배 참여자들에게 다각도로 예배의 감격을 느끼게 하며 감동이 깃든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는 노력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예배에서 축제성을 회복하고 감격을 되살리는 노력이 예배 갱신 정신의 요체라고 하겠다.

 

신세대를 사로잡는 예배
  요즘 미국교회에는 마케팅이론이 발달하고, 전통 예배 형식을 파괴한 예배가 확산되고 있다.  예배 형식도 예전에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축제적 성격의 예배로 탈바꿈하는 추세에 있다.  이런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미래 교인들이 대화와 찬양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으로 전망한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세 교회가 있다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존 윔버(John Wimber)의 빈야드 교회, 빌 하이벨스 (Bill Hybels)의 윌로우크릭 커뮤니티교회, 릭 워렌(Rick Warren)의 새들백교회일 것이다.
  위의 세 교회는 청중의 흐름을 파악하고 새로운 세대를 위한 과감한 예배갱신을 통하여 미국의 신세대들을 사로잡은 대표적 교회들이다.
  위의 교회들은 흔히 구도자 예배 (Seekers' Service)라 불리는 새로운 예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구도자 예배는 현재 한국교회에서도 새로이 시도되고 있는 젊은이들을 위한 예배의 형태이다.  믿지 않는 젊은이들을 주요 대상으로 한 열린 예배는 그들을 위해서 ‘불편한 의자,’ ‘어색한 용어와 주제,’ ‘형식적인 복장과 순서’등을 과감히 바꿨다.
  구도자란 영적 갈급함을 지닌 사람들로서 이들이 목회의 주요 대상이 된다.  구도자 예배는 결국 그들을 위한 예배를 지향한다.  구도자 예배에서는 예배의 대상에 대해 이해하고 그것을 토대로 음악이나 비디오등 미디어를 많이 사용한다.  환희와 기쁨, 축제의 요소가 많으며 예배 진행이 음악과 더불어 빠르게 된다는 특징을 갖는다.  늘 변화를 추구하며 따뜻한 분위를 제공하는 구도자 예배에 대해 심도있게 배우되, 중심을 잃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현대 미국의 신학자 하비 콕스 (Harvey Cox)는 교회를 세 가지 유형으로 설명하면서, 자유와 정의를 지향하는 출애굽기의 교회, 감사와 축제가 있는 시편의 교회, 그리고 새하늘과 새땅을 지향하는 계시록의 교회가 있다고 했다.  예배에는 구원의 감격, 감사와 축제 그리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함을 언급한 그는 나아가서, “예배에서 축제성이 상실된 다음부터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死神神學)이 나왔다.”고 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미래 교회의 예배는 예전적인 데서 축제적인데로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미래인들에게 영감과 의미를 주게 될 것이다. 현재의 엄숙한 예배에서 재미있는 예배로 탈바꿈해서 살아있는 예배, 열린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를 열리게 하는 요소들
  반면 예배의 원래적 모형을 상실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예배 갱신이다.  갱신이란 본질의 회복을 포함하기 때문에 예배가 가져야 할 본질을 상실하지 않도록 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따라서 축제성을 중시한다고 해서 본질을 상실한 축제만 벌여서는 안 된다.  모든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의 표현이어야 하고, 예배의 전체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배의식의 바탕을 이룬다. 또 말씀은 성례전을 조명해주는 빛이다.  말씀의 빛이 없으면 성례전은 하나의 환상이 되어버리고 만다.
  예배 갱신은 단순히 예배 스타일을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예배 때마다 예배의 감격과 기쁨을 누리게 하고, 회개와 영성을 재충전하도록 하는 것이다.  흔히 예배 갱신이라면 각광을 받고 있는 몇몇 외국 교회의 예배 형태를 모방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예배의 중요한 요소인 말씀과 의식, 성례의 말씀, 말씀과 찬양이 조화된 예배로 돌아가는 것이 갱신의 초점이어야 한다.  예배의 설교, 기도, 성찬, 찬송, 친교 등의 요소 요소가 회복되어 모든 예배의 요소가 참여자들에게 의미를 주고 축제적 기쁨을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예배 갱신의 요점이다.

 

55. 산업사회 구조에서 정보사회 구조로 전환하라


두 가지 사회 패턴
  「디지털이다」(Being Digital)의 저자 네그로폰테 (N. Negroponte)는 이전의 시대는 아톰의 시대였지만 정보시대는 비트의 시대라고 했다.
  비트란 색깔도 무게도 없이 빛의 속도로 여행하는 정보의 DNA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원자적 요소를 말한다.  아톰 시대에는 도서관의 책을 한 사람이 빌려가면 없어지지만 비트 시대의 도서관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정보를 빌려가도 없어지지 않는다.  책은 부피가 있고, 운송과 보관이 필요하다.  더구나 교과서의 경우 전체 가격의 45퍼센트의 비용이 운송 및 보관, 반품에 들지만 디지털 책은 그럴 필요가 없다.  또 책은 절판될 수도 있지만 디지털 책은 절판되지 않고 항상 남아 있다.  디지털화는 책에서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으로, 그리고 그 외의 모든 미디어에 신속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산업사회 패턴에 너무나 익숙해 있기 때문에 정보사회에 살면서도 산업사회의 사고구조를 버리기를 주저한다.


생산 중심에서 지식 중심으로
  이어령 교수는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의 전환을 개미 시대에서 거미 시대로의 전환이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20세기를 종점으로 사라질 산업사회는 개미의 시대로서 개미처럼 열심히 일한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던 시대였다.  종전 이후의 일본, 한국과 같은 나라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다가올 정보사회는 거미 시대다.  거미는 허공에 집을 짓고 사는 유일한 생물로서 허공에서 먹이를 잡아먹고 산다.  WWW(Word Wide Web)는 비유적으로 전 세계에 뻗어 있는 거미줄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에 거미줄을 쳐놓고 있으면 누군가가 와서 걸리게 되어 있다는 뜻에서 정보사회를 거미의 시대라고 재미있게 표현했다.
  산업성장의 원동력은 토지와 자본, 그리고 천연자원이었지만, 미래의 신산업은 기술이 원동력이다.  앞에서 말한 거미줄은 결국 정보가 오가는 곳이다. 이때 정보란 구체적으로 과학기술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신기술이다.  비트 시대의 산업은 컴퓨터, 전자 자본재, 소프트웨어, 장거리 통신, 광섬유, 로봇, 세라믹스, 데이터 베이스, 정보 서비스, 유전공학 분야에서 눈부시게 발달하며, 정보산업이 모든 산업을 주도하는 새로운 형태로 발달한다.
  그러므로 교회도 산업사회의 사고 틀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정보사회의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미래 교회는 정보사회의 사고에 걸맞게 목회 정보나 새로운 방법을 독점할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가 공유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정보 공유를 통하여 결국 내 자신이 활기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가 함께 살 수 있다.  미래 교회는 다른 교회와 공생하지 못하면 공멸한다.

 

정보화, 그 속뜻은 이렇다
  교회는 물질적 형식과 그 자체의 목회적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에 따른 인간의 사고와 정신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며 새로운 정신세계에 응답할 수 있는 목회 패러다임을 창출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정보화를 대변하는 용어로 멀티미디어라는 말이 회자(膾炙)된다.  멀티미디어 시대에는 기술이 새로운 가치로 떠오르고 고도의 기술 (hightech)을 가진 세력이 사회를 주도하게 된다.  그래서 토플러(Alvin Toffler)는 기술이 제3의 물결의 원동력이라고 말하고, 벨(Daniel Bell)은 기술의 무제한적 지배가 풍요의 기초라고 했다. 기술은 분명히 미래 사회를 지탱할 힘일 뿐만 아니라 정보사회의 원동력이며 세계를 지배하게 될 새로운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기술 개발이 멀티미이더 사회의 생존방식이며 인간도 결국 기술적 인간, 도구를 만드는 인간 (homo faber)으로 변하고 나아가서 엘룰(Jacques Ellul)이 말한 대로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정보시대에 정보는 자산이고 힘이며 중요한 가치이다.  정보를 많이 가진 자가 이기는 시대이다.  정보의 중요성은 국가적으로 정보체계를 확보하기 위하여 엄청난 재정을 투입하여 정보공급을 서두르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보 초고속도로(Information super highway) 건설을 위하여 44조 8천억 원을 투입하고 있으며, 2015년에 완공되면 모든 국민들이 초정보의 혜택을 받게 된다.  이미 세계 선진국들은 그보다 앞선 2,000년대 초반에는 완공하게 된다고 한다.  아시아권에서는 일본과 싱가폴이 우리나라보다 앞서 완공할 예정이다.
  지난 ’97년 10월 25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는 미국의 세계적인 정보 통신 관련 시장조사 업체인 IDC사가 세계 55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서 우리나라의 정보화지수는 세계 22위로 나타났다.  정보화지수는 21세기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각국의 위상을 나타내는 주요 지표이다.

정보화 순위국  명정보화 순위국  명1위
2위
3위
4위
5위
11위미  국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일  본…
15위
13위
14위
21위
22위…
독  일
상가포르
홍  콩
대  만
한  국
세계 55개국의 정보화지수 (미국 IDC사 조사)

 

정보화와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
  멀티미디어 시대의 공동체는 인격적인 만남이 가능한 공동체는 아니다.  긴장관계에서 만나는 이익사회이며, 사랑과 책임이 어우러진 게마인샤프트를 기대하기 힘든 곳이다.  유기체(organism)가 아닌 하나의 조직(organization)에 불과하다.  우리는 주변에서 실제로 이러한 공동체의 탄생을 목도하고 있다.  그 한 실례가 PC통신의 ‘채팅’이다.  PC통신에서 운영하는 만남의 방은 인격적인 만남이나 스킨십이 없는 말의 만남이다.  이러한 만남은 결국 책임없는 말의 잔치에 불과하며 반사이익에 민감한 인격없는 인간이 되게 한다.
  정보사회의 신산업을 주도할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컴퓨터와 로봇으로 이 두 요소가 새로운 비트 시대를 이끌어간다.  컴퓨터는 소위 미디어 혁명을 일이킨 주역이다.  이제는 사회 구석구석에서 컴퓨터 없이는 하지 못하는 일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컴퓨터가 저장하고 기억하여 처리하는 데이터나 정보의 양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나다, 현대를 지식사회라고 하는데, 이 많은 양의 지식과 정보를 인간의 두뇌로는 저장이나 기억이 불가능하겠지만 컴퓨터로는 가능하다.  우리가 체감하는 정보사회로의 변화는 국가의 기간산업에서부터 작게는 가정생활에까지 이미 우리 속에 들어와 있다.
  오래 전에는 원고를 청탁할 때 ‘200자 원고지 50매’라고 원고분량을 명시했지만, 얼마 후에는 ‘A용지 8매를 팩스로’ 보내라고 했고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컴퓨터 디스켓’을 보내라고 했지만 이제는 ‘E-mail로’ 보내라고 한다.  정보사회로의 도약은 교회에도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다.  이 시대에는 멀티미디어 시대에 걸맞는 목회 프로그램과 설교 패턴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산업사회의 목회 프로그램과 설교 패턴은 그 자체가 정보사회의 정서에 뒤떨어지기 때문에 현대인, 그리고 미래인에게는 더 이상 매력을 주지 못한다.

 

정보화, 작용과 반작용
  정보화가 교회에 주는 또 다른 영향은 기독교 신비주의의 확산과 은사 중심 교회의 성장이다.  정보와 기술의 극단적 발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정신의 세계를 제공해주며 과학과 기술이 인간에게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미래는 과학과 이성에 대한 애착보다는 감성과 초과학적인 데 가치를 두는 신비주의가 부흥하게 될 것이라고 나이스비트(John Naisbitt)는 말한다.  결과적으로 많은 기독교의 종파들이 동양적인 신비주의 혹은 열광적인 신비주의 경향을 따르게 될 것이며 자연히 은사 중심으 교회 (Charismatic church)가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통계적으로도 지난 ’81년에 9천만 명이던 은사 중심의 그리스도인(charismatic Christian)이 ’94년에는 4억 명으로 증가하였고 지금도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  이 통계는 은사 중심의 그리스도인이 전 기독교인의 24퍼센트에 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97년 10월 미국의 잡지 「미니스트리 투데이」(Ministry Today)지에 따르면 ’96년 현재 전체 기독교 인구 19억 5천만 명 중 24.5 퍼센트인 4억 7천9백만 명이 오순절파 교인들이며, 이 수치는 2000년이 되면 전체의 26퍼센트인 5억5천4백만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산된다.  또한 2025년에 이르면 약 30억 명의 전체 기독교 인구 가운데 37퍼센트인 11억 4천만명으로 증가하여 오순절 교단이 세계기독교계의 중심세력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1900년에 전체 기독교인의 0.66퍼센트에 불과했던 오순절 교단의 교세와 비교해볼 때에 괄목할 만한 증가세이다.  사회의 정보화가 교회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지만, 이러한 흐름에 대해서 교회의 보수화, 은사 중심적 신앙 회귀 현상 역시 반작용으로 왕성하게 나타나게 됨을 잊지 말하야 한다. 
 

정보바다의 격랑, 교회는 어디로?
  무자비하게 다가오는 정보의 물결 속에서 교회는 적극적으로 이 물결을 수용하여 사회에 이바지할 길을 찾아야 한다.  교회는 정보사회에서 해야 할 새로운 사명을 체계화해야 하는데, 우선 정보사회에서 윤리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어떤 이의 말대로 기독교는 마르크스 이래로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생명문제, 섹스문제, 가정문제 등 가장 근본적인 윤리적 가치들이 도전을 받고 있다. 이제는 인터넷이나 CD롬 등을 통하여 음란물들이 아무런 여과없이 안방과 아이들의 공부방을 잠식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보를 다루는 일에 전력을 다하여 정보 정의를 이룰 수 있도록 하고, 성경적 환경 조성으로 이런 윤리적 도전을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회는 어떤 기관보다도 건전하고 도덕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정보를 대해야 한다. 인터넷 등을 통하여 제공되는 정보는 공유되어야 한다.  우리 교회 인터넷 자료도 얼마든지 다른 홈페이지에서 연결하여 (link) 사용할 수 있으며 우리도 그렇게 쓰고 있다. 이것은 정보사회는 공유사회라는 또 다른 특징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미래학자들은 정보를 ‘숨은 설득자’(hidden persuader)라고 부른다.  정보야말로 미래사회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기에, 정보를 많이 소유한 사람이 결국 미래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산업사회와 정보사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산업사회가 제품을 강조하는 데 비하여 정보사회는 서비스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미래사회의 구조적 특징이 전환됨에 따라 교회도 그 구조적 특징을 전환해야 한다.
  그러므로 미래 교회는 제품의 제조에서 점검까지 한 공장에서 처리하는 새로운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인터넷이나 국내 정보통신망, CD롬을 통한 정보확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현재 전 세계 인구 중 약 1억 명이 인터넷에 가입하고 있지만, 금세기가 가기 전에 10억의 인구가 인터넷의 ID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앞으로는 인터넷ID가 없으면 소외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이것은 인터넷이 하나의 생활도구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시대를 전망할 때 교회는 인터넷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정보를 쉽고 빠르게 얻고 정보를 순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66. 지배윤리에서 공존윤리로 전환하라

 
  지배의 이면
  우선 미래교회는 환경에 대한 시각을 전환하여 지배가 아닌 ‘환경과 인간의 공존윤리’를 정립해야 한다.  교회가 환경에 대해 갖는 관심은 단순히 인간적인 차원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 즉 하나님의 명령 차원에서 살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 주신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창1:31) 하나님의 나라였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소서.”(마6:10)라는 주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처음 하나님이 만드셨던 보시기에 심히 좋은 그 나라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환경보존을 가르칠 수 있는 곳은 교회이며 환경보존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지배윤리에서 공존윤리로의 전환은 목회, 특히 선교정책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국내 개척교회 정책이나 해외선교정책에 지나치게 지배논리를 가지고 대응했음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경제력이 대도시에 편중되어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도시 교회들은 인력 (manpower)이나 경제력을 가지고 있지만 소도시나 시골의 교회는 그렇지가 못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교회의 성장은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도시 교회의 성장은 지방 교회를 희생시킨 대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화 현상으로 말미암아 도시 인구는 지속적인 성장을 보인 반면 지방 인구는 상대적 감소를 보였다.  도시 교회는 지방 교회에서 이주하는 교인들로 성장하였지만 지방 교회는 쇠퇴했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에 와서는 도시 인구와 지방 인구의 비율이 60년대 초반에 비하여 완전히 반대가 되었고, 도시 교회 교인의 수와 지방 교회 교인의 수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게 되었다.

 

교회의 지배논리
  도시 교회의 성장이 지방 교회의 쇠퇴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도시 교회는 지방 교회에 대해 상당히 지배적인 성향를 갖고 있다.  흔히 개척교회를 세우며 미자립 교회를 지원할 때에 도시 교회는 지배적 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선 ‘지원 교회’라는 용어 자체가 일방적이며 지배적이다.  도시 교회가 경제력이 있어 지방 교회를 지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도시화 현상에 따라 도시 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해준 지방 교회의 간접적 도움 때문이었고, 한국 경제력의 신장,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
  일반적으로 도시 교회가 지방 교회를 지원할 때 고압적이라는 인상을 씻기 어렵다.  도시 교회는 지방 교회를 지원할 때에 완전히 경제적으로 자립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지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보고 요청이 지나치게 많다.  이것 때문에 지방 교회 목회자는 목회보다는 지원 교회에 대한 보고에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된다.  지원 받는 교회가 지원하는 교회에 대해 행정 보고를 철저히 하지 못하면 다음 해에는 지원을 중단하는 사례도 허다하다.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이런 폐단을 없애려고 지원 정책을 바꾸었다.  지방의 한 교회가 도시의 여러 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겪는 고충을 덜어주기 위하여 다른 교회로부터 지원받지 않아도 될 수준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현재 상황이나 전망을 볼 때 지방 교회가 3년 혹은 5년 후에 자립하리라는 기대는 극히 힘들기 때문에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지속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온라인으로 송금하기 때문에 영수증을 보낼 것도 없고 선교 보고에도 신경 쓰지 말고 목회에 열중하라고 했다.  연말이 되면 다음 해에도 계속 지원해달라는 청원서를 쓰지 않아도 되도록 하려고 애썼다.  또한 지원 교회라는 말 대신 ‘협력 교회’라고 부르기로 했다.  지원하고 지원받는다는 일방적이며 지배적인 개념보다는 양자가 함께 협력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런 협력의 한 방안으로 지방 교회는 좋은 먹거리와 향토 특산품을 보내고 도시 교회는 교인들에게 이를 연결시켜주는 농촌. 도시 교회 협력 장터 개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원하는 도시 교회는 지원 받는 지방 교회가 동반적인 관계에서 동등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어가기 위하여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밖에서 배워 안을 살찌운다
  한국교회는 겸허한 자세로 세계교회로부터 선교를 배워야 한다.  선교는 사람을 보내는 일이 아니라 복음을 보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선교에는 정책이 있어야 하고 축적된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규모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이제 한국교회는 겸허한 자세로 세계교회로부터 선교를 배우고 물량적, 지배적인 선교가 아닌 공존적이며 협동적인 선교로 자세를 전환해야 할 때가 되었다.  지배적인 자세에서부터 공존적인 자세로 하루 속히 선교관을 전환해야 세계교회로서의 책임을 수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