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실)좋은 책 소개

숨겨진 상처를 드러내라 - 2부 목회부가가치, 이렇게 높인다.

好學 2010. 4. 25. 21:08

 

숨겨진 상처를 드러내라 - 이성희

 

 

2부  목회부가가치, 이렇게 높인다.


  미래 경제는 ‘저비용 고효율’을 지향하게 될 것이고 미래 사회 변혁을 주도하는 경제 영역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변화의 파장을 볼 때 목회에서도 거품을 빼는 일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다.  심방으로 대표되는 한국목회의 전래적 패러다임은 미래사회의 이동성, 편의성, 임시성 등을 따져볼 때 결코 효율적인 목회 방법만은 아니며, 오히려 근거없는 자부심과 가르치는 사역을 소홀히 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아울러 덩치만 컸지 자기정체성과 사역자원의 가용성(可用性)이라는 면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메가교회도 빨리 기민한 사역단위인 소그룹으로 돌아서야 한다.

 

77. 심방목회에서 교육목회로 전환하라


  가지 말고 오게 하라
  ’97년 4월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에서 발표한 ‘한국장로교인들에 대한 의식 조사’에 따르면 목사 역할의 우선순위는 설교(67.2퍼센트), 기도(12.1퍼센트), 성경연구(8.07퍼센트), 심방.상담(4.04퍼센트)의 순으로 나타났으며, 장로의 역할에 대하여는 치리(29.15퍼센트), 심방.상담(19.28퍼센트), 전도(8.52퍼센트), 재정.모금(8.3퍼센트)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아직도 한국교회 교인들의 의식은 상당히 보수적이며 재래적 목회를 요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인들의 목회자에 대한 기대 변화와 사회의 질적 변동은 목회 패러다임에 가장 큰 변화 요인이 될 것이고, 목회 패러다임 변혁을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미래 사회의 한 특징은 이동성(mobility)의 발달이다.  명절의 대이동을 비롯한 주말 이동은 이동성을 가중시키고 이동성이 생활애 한 패턴으로 자리잡게 했다.  도시화현상과 사회변동으로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온 심방목회가 무력화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심방목회의 한계
  심방은 상당히 소모적인 활동이다.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으로 볼 때 심방목회는 투자한 시간에 비하여 성과가 그다지 높지도 않고 명시적이지도 못하며, 상대적으로 목회자가 탈진하는 비생산적 요인을 지닌다.  특히 대도시에서는 날로 도시 교통 사정이 악화되기 때문에 심방에 치중하기가 갈수록 힘이 든다.  만일에 심방 중심의 목회를 한다고 가정하면, 일주일 중 월요일은 쉬고 토요일은 설교준비를 한다고 할 경우 심방할 수 있는 날은 나흘간이 된다.  나흘에 다섯 가정씩을 심방하면 스무 가정을 심방할 수 있는 셈이 된다.  일주일에 스무 가정을 심방하기 위하여 목회자의 거의 모든 시간을 소모해야 하며 이 외에도 새벽기도회의 인도나 수요기도회를 인도해야 한다면, 독서나 목회자 개인의 영성을 위한 시간은 전혀 얻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영성적 재충전이나 목회의 효율성을 위해서라도 목회의 패러다임은 변혁되어야 한다.  최근에 와서는 예전과 달리 심방을 원치 않는 추세가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서서히 증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심방의 대안으로서 목회 방법을 연구하고 개발해야 할 때가 되었다.
 
시간의 전략적 사용
  또 다른 의미에서 심방은 자위(自慰)적 목회이다.  목회자는 심방을 하면서 자위한다. 교인들을 위하여 종일 섬겼다는 생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목회자가 교인을 위하여 종일 뛰어다녔어요 그게 반드시 선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광야에서 모세는 백성들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하여 아침부터 밤까지의 모든 시간을 소모한다.  그러나 이 일로 모세의 지도력은 약화되었고, 우선순위(priority)를 잃어버리는 결과만 초래했다.
  지도자의 우선순위가 뒤집히면 지도자 개인에게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위기가 온다.  모세는 백성들을 위하여 종일의 시간을 소모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 권위를 확립할 때에 백성들에게 지도력을 얻었다.  하루 종일 짬없이 백성을 위하여 시간을 소모한 탓으로 탈진한 모세를 방문한 그의 장인 이드로는 “내가 보니 네가 하는 일이 선하지 못하다.”고 했다.  아무리 백성을 위하여 종일의 시간을 소모한다고 하더라도 이로 인해 목회자의 진정한 영적 지도력이 세워지지 못한다면 선하지 못하고 현명치도 못한 일이다.
  교육목회가 심방목회의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교육목회를 통하여 비로소 구비된 그리스도인, 온전한 양으로 양육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목회는 가장 힘든 목회 스타일이지만 목회자 자신에게 가장 유익하며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목회이다.  교육목회는 교인 양육의 결과보다 과정에 관심을 두는 목회이므로 가장 진솔한 목회이며, 유동적이며 미래 교인들에게 교인의 정체성을 가지게 하는 목회이다.  그리고 교육목회는 미래 사회의 변동과 목회자의 목회관을 가장 쉽게 교인들에게 전달할 수 있으므로 목회자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심방 중심의 목회는 교육 중심의 목회로 전환되어야 하며, 이렇게 전환할 수 있도록 목회자 자신이 교인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해 나갈 의지가 필요하다.
 
88. 대중 목회에서 소그룹 목회로 전환하라

  토플러는 「제3의 물결」에서 산업사회는 소비자가 생산자를 위해 존재하던 시대였지만 앞으로의 시대는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가 하나가 되는 프로수머(prosumer)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교인들은 예배의 단순 참여자가 아니라 예배 순서의 동참자가 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가 대중을 중심으로 한 목회에서 소그룹을 중심으로 한 목회로의 전환을 요청한다.

 

왜 소그룹인가
  근래에 와서 기독교교육학을 중심으로 소그룹 운동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교육적 효율성을 위하여 소그룹을 도입하는 목회 방식이 발전하고 있다.  특히 제자훈련을 목회에 도입한 교회들은 소그룹 운동을 실시하고 있다.  대형교회 중심의 한국교회는 교인 관리나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이미 소그룹을 도입하여 구역(속회)활동이 발달하였고, 중.대형 교회들 가운데도 소그룹을 통한 상담과 교육이 효과를 보고 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도 최근에 와서 소그룹을 통한 상담학교를 개설하여 많은 목회적 효과와 보람이 있었다.
  예수님은 대중 목회와 소그룹 목회를 겸하셨지만 기본 목회는 소그룹이었음을 성경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모세의 능력과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웠다. (출18:13-27)  예수님도 사람을 세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친히 제자를 세우심으로 보여주셨고, 나아가서 예수님의 제자 모델은 소그룹 목회의 근거가 되었다.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명단을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사도행전에 기록한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네 사람을 첫째 그룹으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를 둘째 그룹으로, 야고보, 다대오, 시몬, 가룟유다를 셋째 그룹으로 나누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베드로, 빌립, 야고보는 각 소그룹의 리더로 세우시고 나머지를 그룹 멥버로 만드신 것이다.
 

그룹핑 (Grouping)
  열두 제자를 세 그룹으로 나눈 것은 예수님의 ‘소그룹 만들기’였다.  예수님께서 소그룹을 만드신 이유는 서로 다른 재능을 가진 다양한 부류의 사람을 제자로 삼으시기 위한 의도였다.
  첫째 그룹의 제자들은 상당히 재능이 많은 자들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첫째 그룹은 재능도 많을 뿐 아니라 갈릴리 출신이었고, 둘째 그룹은 재능이 많지만 적지도 않은 보통 인물들이었고, 셋째 그룹은 재능이 없는 인물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제자로 선택하여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측근에 두셨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는 특정한 재능을 가진 자만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이다.  만일에 베드로와 같은 재능 있는 인물만 제자로 삼으셨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더 효과적이었을까?  오히려 예수님의 사역은 덜 효과적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의 사역은 모든 부류의 사람을 다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소그룹은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제자 훈련의 방법이었고 초대교회 구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재능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가 차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를 선택하실 때에 세 그룹에 차별 없이 자격과 은사를 공통적으로 주신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달란트 비유도 소그룹의 모델이다
  제자 모형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소그룹에 대한 예수님의 의도
  1) 소그룹은 가장 좋은 제자훈련 구조이다.
  2)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달란트에 따라서 네 사람씩 세 그룹으로 나누셨다.
  3) 예수님께서 세 그룹으로 나누신 것은 재능에 따른 분류이다.
  4) 제자 모형은 재능에 관계없이 제자의 자격이 있음을 의미한다.
  5) 제자 소그룹은 재능에 따른 분류일 뿐만 아니라 효율적 훈련 방법이다.
  6)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로의 재능은 다르지만 주신 권능에는 차등이 없다.
  7) 실제로 이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사도)들이 순교자가 되었다.
  8)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다른 점은 재능을 극대화한 것과 극소화한 것의 차이이다.
  9) 예수님의 제자 삼으심은 소그룹 만들기와 일치한다.
 10) 예수님이 만드신 소그룹은 제자훈련이나 인사관리의 효율적 방법이다.
 11) 소그룹은 효율적 제자훈련의 방법이지 소외나 차별의 의미가 아니다.

 

소그룹을 받쳐주는 사회적 변화들
  미래교회가 대중 목회에서 소그룹 목회로 전환해야 하는 당위성은 소그룹 그 자체가 전문성을 제공하며 효율성을 증진시키고 전인교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근래에 와서 우리 사회에 크게 유행하고 있는 노래방 문화는 정보사회의 또 다른 가치 이동을 설명한다. 다른 사람이 부르는 노래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가수가 되어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의 변천은 생산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개인 모두가 연기자(performer)가 되는 방식이다.  소비자 중심 시대,  청중 중심 시대에는 개인이 직접 해보기 원하는 새로운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하는데, 이러한 욕구 충족은 소그룹을 통하여 가능하다.

 

스몰 이즈 뷰티풀
  세계는 산업사회 구조에서 정보사회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산업사회에서는 규모가 큰 기업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정보사회는 규모가 큰 기업이 아니라 작고 전문성을 가진 기업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언표(言表)는 실로 정보사회에 적합한 구호인 바, 실제로 작은 것이 아름답게 보일 때가 오고 있다.  거대한 미국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 같지만 세계에서 가장 개인 소득이 높은 나라는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스위스 순으로 결코 큰 나라가 아니다.  이들 나라의 주요 생산품은 꽃, 시계 등 아주 작은 것들이다.  정보사회는 모든 사회 구조가 큰 것이 아닌 작은 것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작은 것의 가치를 재고해야 한다.  교회도 작은 알찬 교회가 많아져야 하고 대형교회라 할지라도 내적으로는 작은 그룹들이 많아져야 한다.
  미래교회는 소그룹을 가진 교회가 아니라 소그룹의 교회 혹은 소그룹적인 교회로 바뀌어야 한다.  비록 대형교회라 하더라도 소그룹 교회는 공룡처럼 비대하거나 둔하지 않기 때문에 세포가 제대로 활동하여 교회의 모든 사역이 말단 신경조직까지 스며들 수 있다.
  결국 소그룹 교회는 사이즈가 대형이냐 소형이냐가 아니라 훈련을 통한 소그룹을 가진 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소그룹은 미래 교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회의 경쟁력과 세계화를 가능하게 할 중요한 요인이다.  소그룹 중심의 교회라고 할 때의 소그룹은 교회의 액세서리 프로그램이나 목회 수단이 아닌, 교회의 본질로서 이해해야 하며 교회의 소그룹화를 의미한다.
  미국의 윌로우 크릭 교회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는 대표적 소그룹 교회인데 2,000개의 소그룹을 가지고 있다. 윌로우 크릭 교회의 훈련 책임을 담당한 도나휴 (Bill Donahue) 목사는 “소그룹 모델을 교회에 도입하는 이유는 교회의 중요한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소그룹은 많은 교인을 가진 대형교회에서 목양과 돌봄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모델이다. 성도를 제자화하고 새 교우들을 교회에 글어들여 연결시켜준다.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하여 사역할 수 있도록 능력을 키워주며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예수 안에서 서로 격려할 수 있도록 해준다.
 윌로우 크릭 교회 소그룹의 다섯 가지 유형
 ① 제자양성 그룹 : 잘 짜여진 제자훈련과정을 찾는 신자들로 구성되며, 영성훈련, 성경 외우기, 다른 사람들을 제자로 삼기 강조.
 ② 공동체 그룹 : 신자와 비신자로 구성되며, 공동체 형성, 새 그룹원 초청을 강조.
 ③ 봉사 그룹 : 신자와 비신자로 구성되며, 사역의 완수, 새 그룹원의 초청을 강조.
 ④ 구도자 그룹 : 신자와 비신자로 구성되며, 전도, 새신자 훈련을 강조.
 ⑤ 후원 그룹 : 그룹원들이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을 강조.

 

소그룹, 교회의 본질
  이 소그룹은 단순히 성경공부 모임을 넘어서는 친밀한 가족관계를 이루고, 일상의 삶 속에서 말씀을 철저히 적용하는 데 존립 목적을 둔다.  또 삶 속에서 경험한 자신의 간증을 함께 나누고 좀더 효과적으로 서로를 돌보는 사역을 감당하도록 서로 용기를 북돋워주고 권면하는 한편, 복음 전도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의미 있는 봉사를 적극 권장한다.
 

소그룹의 특징
  첫째, 성도의 교제가 결여되어 있는 현대교회, 특히 대형교회에서 소그룹은 친밀한 교제를 가능하게 해준다.
  둘째, 실천신학자 힐트너(Seward Hiltner)는 목회의 세 가지 기둥을 전달 (communicating), 목양 (shepherding), 조직 (organizing)이라고 했는데, 전달의 하나인 설교는 질문이나 토의 등이 불가능하지만, 소그룹을 통한 훈련은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셋째, 일반 목회에서는 목회적 관심에서 소외되는 교인들이 많이 있지만, 소그룹 목회는 개인에게 목회적 관심을 기울일 수 있고 양질의 목회를 제공할 수 있다.
  넷째, 소그룹은 상호 격려와 후원을 통하여 교인 상호 간의 신앙 성장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다섯째, 소그룹은 목회자 자신이 개인의 신앙성장을 관찰할 수 있으므로 소그룹 훈련뿐만 아니라 설교나 심방 등 목회 전반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여섯째, 소그룹은 인간관계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전도할 수 있게 하고, 피전도자도 소그룹을 통하여 빠른 시간에 친숙함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일곱째, 임상적으로 볼 때에 소그룹에 참석한 교인들이 소그룹에 참석하지 않고 예배에만 참석하는 교인들보다 성장이 훨씬 빠르다.
  여덟째, 소그룹은 모든 교인들을 목회자의 목회 지침대로 양육할 수 있다.
일반 목회소그룹 목회교제 결여
질문, 토의 불가
소외되는 교인 발생
협력 부족
적응에 오랜 시간 소요
목회 지침 전달에 장애친밀한 교제 가능
질문이 가능해서 말씀 실현 도움
개개인에 관심 가능
상호 격려와 후원으로 교인간 신앙 성장에 도움
정착 및 성장이 훨씬 빠름
목회자의 목회 지침대로 양육 가능
  이렇게 소그룹의 특징과 장점들을 이해하고 소그룹으로 목회의 방법을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그룹 활동은 교회성장의 중요한 요인임에 틀림없다.  이미 임상적으로 소그룹의 중요성이 확인되었으며, 목회자에게는 앞으로 더욱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며 발전시키는 자세가 요청된다.  예디 깁스(Eddie Gibbs)는 소그룹의 존재 그 자체가 교회성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교회는 미래 사회의 급진적 변화를, 소그룹을 통한 교인의 훈련을 통하여 극복하고 지속적 성장을 꾀할 수 있다.


99. 주일교회에서 매일교회로 전환하라
 
목회 중독증
  한국은 전통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민족이다.
  한국인들이 일을 많이 하는 이유는 첫째, 전통적으로 채식을 주로 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육식 동물들은 한번 먹이를 잡아 먹으면 사흘씩 먹지 않아도 아무 지장이 없다.  그러나 초식동물들은 쉴새 없이 우물거리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채식동물과 같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런 연유도 무시할 수는 없는 듯, 채식을 주로 하는 민족은 열심히 일하고 많은 일을 한다.
  둘째, 우리의 농사는 주로 벼농사이다.  벼농사는 기후에 상당히 민감하고 기후에 쫓겨 쉴 새가 없다.
  셋째, 우리나라는 기독교나 회교와 같이 일주일에 하루를 쉬는 안식의 종교관행을 갖지 못했다.  쉬는 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일만 하는 노동 중독증(workaholic)이 많은 편이다.  노동 중독증은 목회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목회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일하는 목회자이다.  우리나라 목회자들이 일을 많이 하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는 교인들의 의존성이다.  한국 기독교는 샤머니즘의 영향을 상당히 받고 있기 때문에 교인들도 목회자에 대하여 상당히 의존적이다.
  샤머니즘에서는 샤만(무당)이 있어야 신과 사람이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중간매개자가 없으면 종교행위 자체가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샤머니즘에서는 샤만에 대한 의존이 상당히 심하다.  이러한 의존성이 목회자를 분주하게 만들고 노동 중독에 걸리게 한다.  외국 목회자들은 한국 목회자처럼 새벽부터 밤까지 목회하는 목회자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노동관의 격변과 교회
  노동관과 노동시간의 변화는 주일 예배에도 상당히 변화를 가져왔는데, 미래 사회에는 변화 폭이 더욱 커지게 될 전망이다.  노동시간 변화로 인한 주일 예배 참석 행태 변화는 이미 구미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실제적 문제이며, 한국교회로서도 강 건너 불 구경은 아니다.  이미 주말이면 야외로 여가를 즐기러 가는 행렬이 행락철 구분없이 연중 이어진다.  사람들은 연휴나 징검다리 연휴를 어떻게 하면 잘 즐길까 고심한다.  교회는 이러한 여가 이용 추세를 어떻게 극복하며 활용할 것인지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되었다.
  대체로 국민 개인소득이 5천 달러를 넘어서면 종교적 관심이 둔화되기 시작한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이어서 사회적, 심리적 여유가 생긴다.  종교사회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종교적 박탈감이 강할수록 종교를 찾고 종교성이 강해진다.  요즘은 그 반대로 경제 성장 탓에 박탈감이 줄어들어서 종교회귀 의지를 약화시킨다.  종교 의존성이 약화되면 교회성장이 둔화되고 주일성수를 소홀히 하게 된다.  경제성장에 따른 사회적 안정감이 종교 의존감을 둔화시킨다.   한편 내적인 요소로서 교회의 영적 능력 쇠퇴와 신뢰감 저하가 교회에 대한 관심과 아울러 주일성수를 소홀히 여기도록 만들었다.
  도그마(Dogma)는 변하지 말아야 하지만 방법(Method)은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  새로운 세기를 앞둔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변화는 도그마가 아니라 방법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본질은 결코 변해서는 안 되지만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시대에 적응할 수 있고 시대를 선도할 수 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기본 신앙의 자세에 대하여는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다.
  그러나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사회 여건이 날로 다양하게 늘어나면서 교회에 새로운 주일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주일에 대한 도그마는 변하지 말아야 하지만 주일 준수 방법은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한다.

 

주일성수, 새시대의 새요구
  우선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대전제를 확인해야 한다.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여건이 늘어남에 따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철저한 훈련이 필요하다.  철저한 신앙훈련을 통해서만이 미래 사회의 변동에 유연하고 적극적으로 대비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은 거룩과 경건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거룩은 ‘구별되다’라는 의미로 구별된 삶의 형태를 말하는데, 주일성수와 연결시켜 보자면 주일을 다른 날과 구별하여 사는 태도를 뜻한다.  주일을 다른 날과 구별하기 위해서는 다른 날과 같은 자세로 살아서는 안 된다.
  현대인은 조금의 여유도 없이 각박하고 분주하게 살아간다.  이런 형태에 성도의 교제 운운하는 것이 배부르게 느껴질 지경이다.  주일에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삶이 거룩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다.  더욱이 주일 예배에 참석한 다음 가족들과 나들이를 하거나 집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일, 아니면 자녀들과 야구장에 가는 것은 괜찮고 성도들과 함께 등산을 하고 야유회를 하는 것은 거룩하지 않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모임을 갖는 것이 훨씬 거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건 개념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경건을 모양만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모양만 있는 경건은 오히려 바울에 의하여 배격되었다(딤후 3:5). 경건은 모양이 아니라 능력이어야 한다.  경건의 능력은 역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인데, 야고보는 그 내용을 고아와 과부를 환난중에 돌아보는 일과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다 (약1:27). 경건은 모양이 아니라 능력이고 역동적인 삶이다. 경건에 대해 바른 이해를 지니면 주일성수에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진보 지식인 바울에게 배운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시선을 모으고 있는 가장 큰 교회 가운데 하나인 윌로우 크릭 공동체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에서는 토요일에도 주일 예배를 드려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못할 교인들에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오래 전 내가 섬기던 교회에서는 목요일 예배를 실시한 적이 있었다. 주일에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근무해야 하는 지역의 특수 직종 종사자들을 위한 조처였다.  당시 서울 중구의 이용사, 미용사들은 목요일이 휴무일이고 주일은 근무일이었다.  주일에 근무해야 하는 직업인들을 위하여 목요일에 주일과 같은 예배를 개설하여 예배 드리도록 도왔다.

 

예배자를 위한 다양한 선택권
  이미 가톨릭 교회에서는 주일 미사 외에도 매일 미사를 통하여 주일 미사에 참석하지 못한 교인들과 참석하였지만 매일 미사에 참석하기를 원하는 교인들을 위하여 다양한 미사 참석 선택권을 제공한다.  또한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주일에 다부(多部)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많아지게 되었다.  여러 번의 낮예배분만 아니라 낮예배를 마치고 얼마 후에 다시 저녁 예배를 드린다.  목회자가 다부 예배 때문에 극도로 지치고 주일은 종일 예배만 드리는 날이라는 인상을 주게 되었지만, 다부 예배가 단지 예배 참석자에 비하여 예배당 크기가 작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이런 의도의 배경에는 교인들에게 예배 참석의 다양한 선택 기회를 주기 위한 배려가 깔려 있다.  주일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예배할 수 있도록 다양한 선택권을 제공하는 것은 교인에 대한 배려이다.
  어쨌든 예배 시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버리고 유연성을 가지는 것은 필요한 일이며 예배드리는 날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유연한 대처가 필요하다.
  여행인원의 증가와 주말의 대이동등 사회현상을 고려할 때 주일예배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주일예배에서 매일예배로 전환하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주일예배에서 매일예배로의 전환은 주일예배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주일예배를 강조하되 매일예배를 개설하여 예배 참석의 기회를 확대하자는 취지이다.
 
흩어지는 교회
  이와 더불어 미래 교회가 강조해야 할 일은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기능이다.  한국교회의 당면과제는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상대적 기능 약화이다.
  알멘(J.J.von Allmen)은 “평일에 흩어지는 교회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의 지적처럼 참교회는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이다.
  이전에는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는 개념을 주지시켰지만, 이제는 교인들이 원하는 편리한 시간을 만들어 제공하는, 그야말로 판매에서 마케팅으로의 사고 전환이 요청된다.  시대의 요청에 부응할 때 주일예배를 넘어서 매일의 예배, 그리고 예배시간 선택권을 제공하는 고객관리 개념의 교인관리가 부수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주일에만 북적거리는 주일교회가 아니라 날마다 활기가 넘치는 매일교회로 전환해야 한다.  거액을 들여 정성스럽게 지은 예배당이 잘 활용되고 있지 못하다.  많은 시설들이 주일 하루에만 사용되고 있으며 주일에도 오전에만 북적대고 오후에는 한가한 것이 현실이다.  많은 비용을 들여 적은 효율을 얻고 있으니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교회는 시설들이 주간에도 사용될 수 있도록 각종 프로그램을 개박하고 사회와 다른 기관에도 개방할 수 있어야 한다.

 

100.  노동의 주일에서 안식의 주일로 전환하라


주일, 어떻게 제정됐나
  신약의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다.  이 날은 주의 날이라 하였고 부활 이후 안식일에 모이던 공동집회가 주일에 모이게 되었다.  성경에는 유대인들이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켰던 안식일인 제7일이 기독교의 주일인 제1일로 변경된 연유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다.  그러므로 주일은 분명히 안식일이 아니다.  그러나 주일은 안식일의 의미를 계승한 주의 날인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에도 주일은 안식의 개념을 보존해야 한다.  유대주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초기 기독교의 역사 확립에 영향을 주었다.  성경 전수, 회당예배의 본을 통한 교회예배의 틀 형성, 일주일에 하루를 예배와 안식의 날로 정한 것 등이 유대주의의 영향이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주의의 전통 안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유대교의 안식일 관행이 기독교의 ‘주의 날’ 관행으로 변형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안식일의 유대교적 의미는 하나님의 창조와 안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유대인들은 천지 창조를 유대인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로 보았으며 그런 의미에서 안식도 유대인을 위한 안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안식일은 모든 일을 놓는 날이었다.  초기 기독교가 그 틀을 형성하면서 유대교의 안식 개념이 그대로 기독교의 주일에 전수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첫째 날이 주일이 된 또 다른 이유는 이교의 영향이다.  초기 기독교가 커가고 있던 로마제국에는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동양의 신비종교들이 있었다.  페르시아에서 발전한 미드라교(Mistrials)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로마인을 매혹시킨 이방 종교였다.  미드라교는 태양신 미드라를 숭배하는 종교였다.  미드라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날은 태양의 날인 일요일(Sunday)이었다.  이런 풍습이 이어져 주의 날을 일요일에 지키게 된 것이라고도 한다.
  이교적인 전통을 기독교적으로 새롭게 해석하면서 그것이 새로운 교회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주일의 안식 개념이 초기 교회에 일반화되었다.  그후 4세기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이 점은 바울의 서신에서도 나타나는 바, 제7일이 아닌 제1일에 예배를 위하여 모임이 시작되었고 이 날에 안식과 예배가 시행되었음을 기록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고전16:2)고 했다.  바울이 드로아 방문 때도 안식 후 첫날 저녁 떡을 떼기 위하여 성도들이 모여 있었고 제1일에 떡을 떼는 예식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제1일은 예배하는 날이었고 떡을 떼는 교제의 날이었으며 안식의 날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의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다음 안식하신 날을 기념하여 쉬는 날이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 개념은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의 역사를 마치고 안식하셨다는 의미 이상으로 다양한 의미를 포함한다.  요단강 동편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에서 구속받은 일을 생각하고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다(신5:15). 하나님의 창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때문에 하나님은 이레에 하루를 안식하라고 하신다.

 

구속과 안식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 주위를 칠 일 동안 돌았다.  제7일에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돌았을 때에 성벽이 무너졌다.  여리고성 정복은 하나님의 백성이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칠십 년 동안 약속의 땅은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했다(대하36:21).  그러므로 구약의 안식은 단순히 창조 이후에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미래에 메시야를 통하여 이루어질 구속을 기대하고 사는 삶을 의미했다.
  구속을 대망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구속으로써 안식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은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단번에 성취되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창조가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이 사건을 이루신 다음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이 사건을 이루신 날을 부활의 날이며 구속에 들어간 안식의 날로 지키게 됐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구속이야말로 가장 큰 안식의 조건이며, 실제로 안식은 구속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일에 안식의 개념을 강화한 공헌은 역시 청교도의 몫이다.  청교도들은 주일성수 개념을 확고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주일 개념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청교도들은 주일에 구약의 안식일 원리를 철저하게 적용하여 안식일 엄수주의(Sabbatarianism)를 낳았다.  청교도들은 주일에는 오락을 금하고, 아무리 바빠도 뛰어 다니는 것을 금하였다.  이 날에는 아무리 웃을 일이 있어도 이빨을 드러내어 웃지 못하게 하였고, 장사나 여행 등 자신을 위한 어떤 행위도 금지했다.  이렇게 주일 전체를 예배와 친교 및 선행을 행하는 데 사용하도록 엄격한 주일성수 사상을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들은 결국 기독교 역사상 신구약 밖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하게 성경적인 사람들이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칼빈의 주장을 이어받아 구약의 안식일을 그리스도 안의 은혜와 교제 가운데서 누리는 영적 이스라엘의 복으로 간주했다. 또 청교도들은 안식일 개념이 모세의 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창조 때에 하나님이 친히 보이신 안식 모범에 근거를 둔다고 했다.  그들이 안식일을 크게 강조한 것은 안식일이 창조의 기념물이며 도덕률의 한 부분으로, 모든 인간은 안식의 의무를 가지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하면 엿새 동안은 부지런히 일하고 일곱째 날은 안식해야 한다.  일곱째 날에 안식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한 사람이고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한 사람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는 것은 권리일 뿐 아니라 책임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과 노동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노동은 안식을 동반해야 하며 안식은 노동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안식, 새로운 어프로치
  성경은 노동과 더불어 안식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시간을 주신 것은 노동에 사용하라는 것이다.  인간이 타락과 함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과제는 일이다.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땀흘려 수고해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경작 (히브리어라 아바드 〔abad〕; 번역하면 ‘섬기다’라는 뜻)의 과제는 경배와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지 못하게 된 타락한 인간을 섬김의 경작으로 회복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타락한 인간이 땀흘려 수고할 수 있는 것은 죄지은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노동은 창조의 동참을 함축한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축복을 주신 하나님은 이 계약이 파괴되었을 때에 다시 일하는 축복을 주셨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나타난 예수님의 노동관은 노동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며 또 누구나 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성경의 노동관은 바울서신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강조된다.  바울은 스스로 장막 깁는 일을 하여 자비량(Tent-making)선교를 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고 했다(행20:33). 그는 다른 서신에서도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고(살후3:10).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을 책망했다(살후3:11).
  성경은 철저하게 안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일이 복되다고 하시지 않고 안식이 복되다고 하신 이유가 있다. 원래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벌이었다.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노동의 벌을 내리셨고 하와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주셨다.  그러므로 벌인 노동이 복일 수 없다.  죄의 대가인 노동이 끝난 후 찾아오는 안식이 복인 것이다.

 

노동, 새로운 조화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과 안식을 조화시켜야 한다.  인간에게 노동은 필요한 것이지만 인간은 노동만으로는 살 수 없고 안식만 가지고도 살 수 없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은 나름 대로 일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다양한 생존방식이 있는데, 그 방식의 하나가 노동이다.  노동은 인간이 건강하고 깨끗하게 살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또한 안식해야 한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은 쉬어야 한다.  안식은 낭비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이다.
  ‘80대 20 법칙’ 이라는 것이 있다. ‘라이킨의 법칙’이라고도 하는 이 법칙은 상품 매출의 80퍼센트는 20퍼센트의 고객이 담당하고, 은행 예금고의 80퍼센트는 20퍼센트의 고객이 예탁한 거시이며, 결근의 80퍼센트는 20퍼센트의 종업원이 도맡아 놓고 하고 있으며, 전화통화량의 80퍼센트는 통화량이 많은 20퍼센트의 사용자에 의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일의 능률도 마찬가지이다.  1시간을 능률적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한 시간의 20퍼센트인 10분은 쉬어야 능률적이다.  노동과 안식의 조화가 잘 되어야 양질의 노동, 양질의 안식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양질의 노동과 양질의 안식인데,  양질의 노동과 안식을 위하여 근면하게 일하는 습관과 안식의 날을 엄수하는 습관을 함께 길러야 한다.  교회는 노동의 의무와 안식의 권리를 균형 있게 가르쳐야 한다.
  교회 중직자들의 경우 주일은 평일보다 더 많은 일을 감당해야 하는 날로서 과중한 스트레스를 느낄 때가 있다.  일상 생활이 분주한 현대인들에게 주일 봉사가 근로나 노동이 되어서는 안 되며 봉사도 안식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봉사가 안식이 되지 못하고 노동이 되면 주일성수의 의믄 희석되고 말 것이다.
  영락교회 행정복사로 섬길 때의 일이다.  주일에는 예배 외에는 어떤 회의도 하지 말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주일 하루에 예배는 고작 1시간정도 드리고 나머지 여러 시간은 회의하면서 주일을 보내야 하는 교인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직책상 관여해야 하는 회의 여럿이 있었기 때문에 예배보다 회의에 더 큰 비중이 쏠리기 일쑤였다.  주일은 회의 때문에 피곤한 날, 한두 번은 회의 때문에 아침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저녁예배를 드려야 했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회의가 그러하듯이 예배 때 받은 은혜를 회의에서 다 반납하고 돌아가기가 십상이다.  그러므로 주일이 예배의 날, 안식의 날이 되게 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다.  더구나 인간의 기본적 삶이 구조적이며 기계적이 될 미래 사회에서는 안식할 수 있는 하루를 제공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교회는 바로 이 일을 해야 한다.
 
사회구조와 안식 개념의 차이
  주일성수는 결국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하느냐를 따져야 할 문제이다.  똑같은 일이라 하더라도 평일에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주일에 하는 것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것이며, 평일에 할 시간이 없는 사람이 주일에 하는 것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주일성수에 대해 선한 일과 부득이 할 일을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주일에 무엇을 한다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모든 주일의 행위가 안식의 개념에서 해석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평일에 가족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시간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주일은 가족을 찾아주는 날로, 평일에 안식할 수 있는 시간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안식을 찾아주는 날로 만드는 것이 미래교회의 한 기능이 되어야 한다.
 
110. 구멍가게 교회에서 전문점 교회로 전환하라

 
저효율의 근본원인
  최근 우리 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마다 입에 올리는 용어는 고비용 저효율(高費用低效率)이다.  이 용어는 한국 경제의 치명적 약점을 지적한 용어로서 높은 비용에 비하여 효율이 낮은 현상을 짚어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 지표를 보면 노동임금은 미국 수준이지만 노동효율은 일본의 삼분의 일에 해당한다.  높은 임금에 비하여 노동력의 효율은 떨어지기 때문에 국제 경쟁력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우리 경제의 약점은 과다한 물류비용이라고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미국이나 일본 등 경제 선진국의 물류비용은 전체 생산 원가의 7퍼센트 선인데 비하여 우리나라의 물류비용은 11퍼센트를 상회한다.   과다한 물류비용은 결국 생산 원가의 상승을 유발하며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이런 논리는 목회에도 적용되며 많은 일치점을 가지고 있다.  목회가 목회자의 높은 사례금 지불, 교회의 예산에 비해 볼 때에 효율적인지 주시해야 한다.  목회자의 사례금이나 목회에 투자하는 예산은 높은 반면에 효율은 상대적으로 낮은 것이 저효율 목회이다.  저효율 목회는 일반적으로 지나친 시간 소모에서 비롯된다.  심방시 차량 정체, 교인의 원거리 이사, 목회자의 업무과중 등의 요인으로 많은 시간이 비효율적으로 낭비되어 발생하는 것이다. 
고비용 저효율 목회의 원인을 좀더 자세히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 목회자의 임금 상승과 목회 예산의 과다한 지출
  2) 목회자의 노동력 저하
  3) 목회자와 교인과의 협력관계 저하
  4) 사회변동으로 인한 도시화현상에 따른 교인 이탈
  5) 이동성의 발달로 인한 지역교회의 탈피
  6) 임시성의 발달로 인한 교인의 교회에 대한 애착심 결여
  7)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목회 패러다임 개발의 실패
  8) 교회의 보수적 경향으로 인한 개혁의 실패

  저효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저비용 고효율의 목회 효율성을 연구해야 하며, 목회자 스스로 목회 효율성 상승작용의 매개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 스스로가 저비용 고효율을 위한 의지와 신념을 가질 때에 경쟁력을 갖춘 목회가 이룩된다.  앞으로의 목회, 경쟁력은 목회자끼리의 경쟁이나 교회나 교파 간의 경쟁이 아니라, 대(對) 사회적인 경쟁력이며 나아가서 대 세계적인 경쟁력을 높여나가는 데 요점이 있다.  이렇게 경쟁력 있는 목회로써만이 사람의 영혼을 얻게 될 것이다.

 

목회 전문화
  저비용 고효율의 목회는 결국 전문화 목회이다.  목회자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만능 탤런트가 아니라 하나를 잘 할 수 있는 전문 탤런트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교회가 있는 자리의 의미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교회는 사회를 위한 존재이어야 하는데,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교회의 상대적 역할은 다르다.  그래서 미국의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는 도시 중심에 있는 교회의 전문점이 되고, 도시 주변에 있는 교회는 편의점이 되라고 했다.  참으로 뼈 있는 말이다.
  최근 기업개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데,  개선은 급격한 전환이 아닌 저 효율의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일본 도시바 사의 반도체 생산 공장에서는 일정율의 불량품이 나왔다.  회사에서는 불량품 발생 원인을 파악하였고 기계나 설비로 인한 것이 아닌 불량패턴 때문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느 순간에 생산된 제품에 특히 불량품이 많다는 것이었다.  원인을 세밀하게 검토해본 결과 공장의 위치 때문이었다.  그 공장의 옆에는 철도가 있었고 기차가 공장 옆을 지날 때에 땅을 울리는 진동이 있기 때문에 불량비율이 높았던 것이다.
  문제점의 발견과 함께 그 해결점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공장 주위에 해자(垓字: 도시나 성곽 둘레에 수로를 파고 물을 넣어 적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를 파서 진동이 건너오지 않게 하여 불량품을 줄였다.  현장에서 작은 원인을 발견하여 생산을 개선한 것이다.  불량원인 해결방법은 그 공장에서 일하던 현장 여직공이 제안한 것이었다.  현장주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웅변하는 사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도시바 사의 예를 통하여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 진급과 인정의 잣대는 연공서열이었다.  도시바 사는 한 여직공의 제안을 통하여 회사의 중요한 문제점을 해결했지만, 우리는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늦게 입사했으면 인정을 받지 못하고, 현장에서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행정직원이나 고위간부에 의하여 거의 모든 정책이 결정된다.
  실제로 생산성과 무관하게 연공에 의해 지급되는 급여, 서열 위주로 편성된 업무 체계는 기업이나 일반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미래는 서열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서 정책이 결정되어야 하며 현장의 능력이 인정될 수 있어야 한다.  즉 전문성이 인정받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둘째, 생산성은 간단한 개선을 통하여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개선은 갑작스러운 혁신에 비해 충격을 최소화하며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서 문제 해결을 찾도록 한다.

전문화 목회를 위한 몇 가지 요건
  미래 교회는 현재의 목회구조로는 지속적 성장이나 보존을 하기가 힘들다.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해결책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적절한 해답을 찾더라도 우리 정서에 부합하지 않으면 해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래교회의 목회에서는 급진적 혁신이 아니라 점진적 개선으로, 이미 체질화한 목회 내용을 하나씩 전문화하는 방법을 택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현재의 목회 방법을 활용하고 점진적 개선을 시도함으로써 임상적으로 미래목회를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미래교회와 미래목회를 전문화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
  첫째, 현장 중심이다.  현장은 세 가지가 있는데, 교인, 목회 생산, 조직 내부 직원이다.  목회가 변하고 전문화되게 하기 위해서는 현장을 중시하여 현장을 만족시켜야 한다.
  둘째,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개선도 중요하고 미래 목회를 위하여 무엇인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나, 목적을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 경영적 관점에서 목회자가 유의해야 할 것은 개선은 항상 교인의 입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교인의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에서 목회가 개선되어야 한다.
  셋째, 보상체계가 확립되어야 한다.  물론 성도의 보상은 영원한 나라에서의 면류관이겠지만, 교회 조직에서 보상은 더 나은 봉사와 효율성의 증진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넷째, 평가방법의 전환이다.  일반 직장에서의 평가방법은 월급이나 승진이다.
  다섯째, 의사전달방법의 전환이다.
  여섯째, 조직 내의 변화과정을 제도화하고 정착화하는 것이다.
  세계화시대를 특징짓는 단어는 개방, 자율, 경쟁, 효율이다.  세계화는 모든 것이 개방되어 이제는 문을 꼭 닫아놓을 빗장도 없는 시대가 되는 상태를 말한다.
  미래 사회의 목회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도 이제는 개방적이어야 한다.  교회를 유익하게 할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이나 사업들은 개방적으로 함께 나누어야 한다.  우리 교회만 그 프로그램을 고집하고 홀로 수행하게 되면 연대성이 상실되어 잘 안 되지만, 함께 개방하면 오히려 우리교회와 다른 교회가 함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그리고 항상 고효율의 목회를 창안해야 한다.  저효율의 목회는 목회자의 탈진의 요인이 되고 교회의 쇠퇴를 앞당기게 된다.  이러한 경쟁력 있는 목회, 고효율적인 목회가 전문성 목회이다.
 
목회 전문화와 리더십
  미래 사회는 교회에도 전문화를 요구한다.  교회가 구멍가게가 아니라 전문점이 되기를 요청한다.  무엇이든지 다 얻을 수 있는 구멍가게가 아니라 교회도 이제 전문성을 갖춘 전문점이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교회는 모든 다양성을 동시적으로 포함해야 하지만, 이와 더불어 개교회가 개별적인 전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교회가 복음전파라는 일치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목표는 교회마다 차이가 있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목표의 차이가 곧 개교회의 전문성일수 있다.  교회들은 목적성취를 위하여 제자훈련, 영성훈련, 사회복지, 가정사역, 찬양사역, 청년선교 등의 전문성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전문성을 귿대화하는 것이 미래교회에는 필요하다.  전문성은 매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문어발 망발
  근래에 와서 우리나라의 대규모사업집단인 재벌들 사이에서는 빅딜(Big Deal)이 성행된다.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빅딜을 통하여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업의 전문성이다.  대기업들이 소유하고 있는 기술과 산업을 전문성에 따라 서로 교환하게 되면 쌍방이 전문적 기술과 산업을 육성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미래 사회는 전문성의 사회이기 때문에 전문성이 결여된 기업은 전문성을 갖춘 경쟁력이 있는 기업에 의하여 자연도태되고 경쟁력이 있는 전문점만이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살아남는 것이다.
  전문성의 시대에 교인들은 교회가 전문성을 가지기를 기대한다.  교회의 전문성은 교회의 개성이다.  신세대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중요시한다.  그들의 의상이나 사고의 표현에도 개성이 뚜렷하게 반영된다.  교회도 전문성을 가진 교회는 개성을 표현하고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다.  우선 모든 교회는 영성에 대한 전문성을 가져야 하며 사회로부터 그 전문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고 개교회는 각자의 개성이 분명히 표현되는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목회자와 신학교육도 전문화되어야 한다.
  미래 목회를 위하여 신앙과 영성을 겸비한 ‘인간형성’이 어떤 차원에서든 보완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전문직 양성’이 지금까지보다는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현장의 필요성에 따라서 교회의 전문 지도자의 양성이 요구되는 이때에 아직도 모든 신학생들의 최종 목표는 담임목사이고, 목회자 양성은 당회장 양성이라는 등식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의 신학대학교에는 ‘당회장과’밖에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다.  이러한 근시안적이고 전세대적인 사고를 미래를 위한 사고로 전환하는 것이 필수적 과제이다.  나아가서 한국신학은 미래 목회의 전문화를 위해 전문목회에 대한 부전공제를 보다 광범위하게 개발해야 한다.  현재 신학대학교 신대원의 ‘선교학 부전공’과 같은 부전공을 사회복지학, 교육학, 상담학, 행정학, 영성학, 여성학, 음악 등으로 확대하여 목회자의 최종 목표가 담임목사가 아니라 전문화 목회를 지향케 하고 자신의 전문성을 통하여 목회에 보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신학 교육은 결국 목회자의 전문화를 가능하게 할 것이고, 목회자의 전문화 교육이 전문화된 목회, 전문성 있는 교회로 전환할 수 있게 할 것이다.

 

120. 예배당 중심의 교회에서 주차장 중심의 교회로 전환하라

자동차, 주거공간의 확대
  광복 당시 고작 6,337대이었던 우리나라의 자동차 등록대수가 광복 50여 년이 지난 ’94년에는 7,925,500대로 늘어났다.  해방 당시에는 13만 명당 1대이던 자동차가 이제는 8명당 1대로 늘어났고,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자동차 수가 1천만대가 넘었다.  이것은 경제의 성장에 따라 가장 신속하게 성장하는 것이 자동차임을 말해주고 있다.  ’97년 1월 현재 서울에서 하루 305대의 자동차가 증가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우리 사회 변화의 추세이다.  이와 더불어 교통사고 사망자 수도 세계적인 수준으로 상승했다.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교통사고 사망자는 자동차 1만 대당 22.14명으로 상당히 높은 사망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추세는 경제의 발전으로 인한 자동차 문화의 정착과정에 따른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승용차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가진 세대이다.  최근의 보고에 따르면 30대 이하의 젊은 층이 전체 자가용 승용차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전체 자동차 수의 절반을 차지하는 승용차 가운데 30대가 소유한 승용차가 40.4퍼센트로 가장 많고, 다음은 40대로 22.6퍼센트이며, 다음이 20대로 15.5퍼센트, 그 다음이 50대로 13.6퍼센트이다.  즉20대, 30대가 소유한 승용차가 전체의 55.9퍼센트이며, 이와 함께 10대가 소유한 승요차도 0.6퍼센트로서 30대 이하의 젊은 층이 소유한 승용차는 전체의 절반이 넘는 56.5퍼센트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비율은 자동차의 대중화 추세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와 함께 집은 없어도 차는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젊은 층의 새로운 풍속을 반영하는 것이다.  신문에는 호출기를 가지기 위해서 강도 짓을 했다는 젊은이의 기사도 난다.  호출기가 더 이상 호출이라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문화이듯이 자동차도 이제는 단순히 교통수단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문화로 변해가고 있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문화를 즐기기 위하여 강도 짓을 해서라도 호출기를 가지며, 집은 없어도 빚을 내어서라도 자동차를 타게 되었다.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들은 까다로운 고객으로 변한다.  자동차는 그들의 신체의 일부이기 때문에 어디에나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주차장이 편리한 곳을 선호하고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곳은 반드시 주차장이 있다.  또 주차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주차원이 있어서 주차를 도와준다.  주차장이 없는 곳에는 가기를 꺼려하고 만날 약속 장소를 정할 때에는 주차장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이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풍속이며 미래를 향한 트렌드이다.

 

자동차 문화와 생활양식의 변화
  그러므로 교회는 젊은이들의 공간을 제공해주어야 하며, 그들의 공간인 자동차를 세워둘 공간을 준비해야 한다.  이러한 세대들에게 자동차를 타지 말라고 하든지 아니면 자동차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지 않으면 더 이상 그곳은 그들의 자리가 아니다.  이제 주일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말이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캠페인보다 차를 타고 올 수 있도록 주차장을 마련해주자는 캠페인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주일에 아무 불편 없이 주차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두고 자동차를 얼마든지 타고 오라고 광고한다.  그리고 차를 타고 오되 주차를 질서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오토모빌리티 시대, 교회의 과제는?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님이 현재의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를 건축하기 이전 그 자리에서 드라이브 인 교회를 설립하여 한참 드라이브 인 문화가 휩쓸 때에 많은 교인들이 차를 탄 채로 예배를 드렸다.  교인들은 차를 타고 내리는 번거로움에서 해방되고 주차 걱정을 덜 수 있어 한때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예배당에 들어가지 않고 차에 앉아 드리는 예배의 한계 때문에 현재의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수정교회가 지속되어올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충분한 주차장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이렇듯 자동차 문화는 전혀 새로운 인간의 삶의 형태를 창조하고 인간의 의식까지도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변하는 삶의 형태와 의식에 따라 교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전환해야 이에 익숙한 사람들이 교회를 편안하게 찾을 수 있다.
  영락교회는 한경직 목사님께서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에 월남성도를 중심으로 설립하신 교회이다.  현재의 영락교회 예배당은 1950년 6월에 헌당하였고, 그 직후 한국전쟁을 맞게 되었다.  그후 1975년에 예배당을 증축하며 양쪽 날개를 달아 현재의 십자가 모형이 되었다.  양쪽 날개가 없는 원래의 예배당도 당시로서는 굉장히 크고 웅장한 건물이었다.  이것은 한경직 목사님의 미래 전망과 목회 비전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그 건물을 헌당하실 당시에 다음으로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힘써야 할 것은 주차장 시설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우리나라의 전체 자동차 수는 7,000대를 넘지 못할 때였는데,  한 목사님은 미래를 예견하시고 주차장난을 예언하셨다.

 

주차장에 주목하라
  주차장은 이제 우리 생활의 주변환경이 아니라 중심환경으로 서서히 자리를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와 이동은 교회의 목회 구조의 변화를 종용하는 요소가 된다.  주차장 걱정은 더 이상 배부른 걱정이 아니다.
  주차장의 구비란 반드시 교회의 전용 주차장을 가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전용 주차장을 갖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교회에 따라 형편의 차이가 있다.  구비할 수 있는 주차장 용지가 교회 주변에 있을 수도 있고, 재정이 확보되어도 용지가 없을 수도 있다.  최근 대도시를 비롯하여 중소도시에서도 지가(地價)가 엄청나게 비싸기 때문에 반드시 교회가 전용 주차장을 소유하기보다는 가까운 학교나 사설 주차장등을 이용하도록 유도하며, 이와 같은 시설을 이용하는 대가는 교회가 지불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개인에게 있어서 자동차가 사치품이 아니고 필수품이듯이, 교회의 주차장 확보도 교인이 교회를 선택하는 데 있어 선택사양(option)이 아니라 필수장착(requisites)이다.

130. 오는 교회에서 가는 교회로 전환하라


교회의 중심이동
  최근 한국교회는 심각한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성장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많은 교회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한다.  이러한 추세는 전반적인 출생률의 감소로 인한 교인의 감소에 기인한 것이며, 나아가서 교회가 수행하던 위로, 도움, 안정, 긴장해소의 기능들을 대신해주는 기능적 대행물(functional alternatives)의 발달 때문이다.  기능적 대행물의 발달은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 밖으로 나가게 만들며 주일성수의 개념까지 바꾸어놓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전의주일성수는 반드시 자신이 적(籍)을 둔 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는 의미였지만, 이제는 자신이 적을 둔 교회가 아니라 주일에는 어디에 있든지 예배는 드려야 한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한국교회는 가장 급속하게 성장한 교회이다.  동시에 가장 급속하게 쇠퇴하고 있는 교회이다.  외국의 교회들과 선교기관들이 한국교회가 급속 냉각되는 모습을 염려하며 한국을 위해 기도하고 있고 관심을 보내고 있다.  한국교회의 급속 냉각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급속성장으로 인한 연륜의 부족이 가장 큰 이유다.  교회가 외형적 규모는 크지만 내면적인 성품이 채워지지 못했다.  한국교회는 그 역사나 문화나 삶이 기독교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 침체, 요인과 문제점
  교인이 흩어지는 요인 중 또 한가지는 교회가 젊은 세대를 수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최근의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인구 가운데 젊은 세대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20세에서 24세까지의 인구가 전 국민의 10.1퍼센트, 25세에서 29세까지의 인구가 10퍼센트, 30세에서 34세까지의 인구가 9.7퍼센트, 35세부터 39세까지의 인구가 7.4퍼센트로서 20대와 30대 인구가 전체 국민의 37.2퍼센트였다.  지난 ’97년 12월 대통령선거 당시에도 20세 이상의 선거인 가운데 절반 이상이 20대와 30대인 것을 감안할 때 교회의 선교전략이나 관심도 젊은 세대를 수용할 수 있도록 전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놀이에 익숙해져가는 교인들에게 새로운 목회 프로그램의 패러다임을 제공해야 한다.  또한 이 새로운 패러다임은 사람들이 예배당으로 모여오는 지금까지의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교회를 전제로 한 것이어야 한다.

 

흩어짐과 모임
  이민 교회에는 예배나 교육의 기능뿐만 아니라 친교의 기능이 강하게 나타난다.  포로지의 회당과 같이 그들이 이민 생활에서 오는 갖가지 어려움과 심리적 갈등과 스트레스를 교회에 와서 서로 만나며 해결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오면 한국말로 서로 의사전달이 가능하고 복잡한 그들의 생업에 대하여 조언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이민교회는 그냥 들르기만 해도 좋은 곳이다.  그래서 이민 교회는 친교를 강조하고 예배가 끝나면 커피와 빵을 함께 나누며 주일 점심식사에도 온 교인들이 함께 한다.

 

주말이동을 포착하라
  최근에 와서 가장 뚜렷한 대이동의 하나는 명절 대이동이며, 다른 하나는 주말 대이동이다.   이제는 주말만 되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어디로든 가야 하는 습관적 이동이 국민적 버릇이 되었다.
  레저의 발달로 교회 출석하지 않는 교인들이 증가하게 되지만, 교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교인의 정체성은 잃지 않을 것이다.  관광지에 있는 한 교회의 목사는 필자가 그 교회에 갔을 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우리 교회는 관광철만 되면 좋습니다.  한 주일에 200명 이상의 교인들이 더 출석하기 때문에 교회가 가득차고 헌금도 많이 해주니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관광철만 되면 철새와 같이 빠져나가는 교인이 많은 대도시 교회와는 상반되는 현상이 이미 우리나라에도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지금까지 교인을 오게 하던 교회에서 교인을 따라가는 교회로 전환할 필요성이 있다.   이러한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전망하면서 교회는 삶의 현장에서의 목회 패러다임을 신속하게 변혁해나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실제로 늘어가는 주말과 행락철의 대이동을 교회는 현대의 필연적 현상으로 바라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교인을 찾아나서는 관광목회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앞부분에서 밝힌 대로 미래 사회의 교회는 개교회라는 좁은 의식보다 우리 교회 혹은 모든 교회라는 넓은 의식으로 발전해갈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금까지의 모이는 교회에서 교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