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실)좋은 책 소개

3부 강단과 선포, 이렇게 리폼한다

好學 2010. 4. 25. 21:16

 

3부  강단과 선포, 이렇게 리폼한다


  지난 시절 한국교회 강단은 교리가 본문을, 신학이 실제적 적용을, 설교자의 편의가 엄숙한 의미를 포수(浦囚)하고 왜곡하는 현상으로 얼룩져왔다.  설교자들은 이제라도 본문을 탐색, 발견, 적용할 수 있는 설교구성법을 개발하고, 명언적 선언에서 이야기로, 노변정담(爐邊情談)에서 주제의식이 치열한 생명 내러티브로 설교 초점을 전환해야 한다.  본령이 바르면 전달 형식이야 어떠해도 좋다는 식의 설교자 본위적인 발상을 전환하여, 영상시대를 살아가는 교인들을 위하여 영상 문법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전달하는 연습을 쌓아야 한다. 맹목적 수구(守舊)는 진리 파수와는 거리가 멀다.

140. 제목설교에서 강해설교로 전환하라


 설교자는 재창작자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면 더 이상 설교가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한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기 위하여 강해설교를 권한다.  21세기 설교는 주제 설교에서 강해설교로 전환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80년대에 접어들면서 강해설교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그러나 강해설교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설교의 방법이다.
  로빈슨(H.W. Robinson)은 강해설교를 “성경 본문의 배경에 관련하여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으로 연구하여 발굴하고 알아낸 성경적 개념을 전달하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그 개념을 우선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하시며 설교자를 통하여 다시 청중들에게 적용하시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강해설교란 오래 전에 기록된 성경 구절의 뜻을 현재적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중의 요청과 환경에 따라 설명함으로써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오늘날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깨닫게 하는 말씀의 선포이다.
  그러므로 강해설교는 오늘의 사건과 사실을 이야기하지만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기 위한 수단이지 이야기 자체는 아니다.  강해설교는 성경의 특정한 구절의 단어와 상황을 설명하지만 성경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찾는 것이지 설명 그 자체는 아니다.  강해설교에는 설교자의 독서와 학식과 배경이 배어 있지만, 모든 개념은 성경본문에서부터 나오며 전개 그 자체는 아니다.  강해설교는 설교자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본문의 정확한 전달이며, 결국 칼빈이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게 하라.” 고 말한 것처럼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주는 것이다.
 
설교하면서 듣기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자신의 말을 전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다.  나는 나름대로 이런 표현을 가끔 사용한다.  “설교자와 청중은 설교를 통하여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설교자는 설교를 하면서 듣고, 청중은 들으면서 듣는다.”
  지금은 목회를 은퇴하신 필자의 부친도 오래 전 “설교 준비가 언제 끝납니까?”라는 질문에 “설교 준비는 강단에서 설교가 끝나는 순간에 끝난다.”고 하셨다.  설교자는 설교가 진행되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며 듣는 것을 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들어야 하나님의 말씀의 충실한 봉사자가 될 수 있다.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님은 설교할 본문을 몇 번이나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새벽5시부터 9시까지 본문을 읽으라는 대답을 했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의 본문이며 성경의 본문에 충실한 설교가 강해설교이다.  제목설교는 설교의 재료를 찾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소모하지만 강해설교는 성경을 읽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소모한다.  강해설교는 성경이 가진 신적 능력을 훼손하지 않고 가장 완전하게 전달해주는 장점을 가진다. 
  결국 강해설교란 성경의 귀중함을 알게 하고 성경이 모든 가르침의 기초가 되게 하며 성경의 단어뿐만 아니라 성경의 맥락을 알게 하고 생활화 하게 해 준다.  강해설교는 청중에게뿐만 아니라 설교자에게 권능과 감화력을 갖게 해준다.  설교자의 권위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해답을 얻게 하며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또한 강해설교는 청중의 욕구와 접촉점을 가지며 신자들을 튼튼하게 양육시킨다.  강해설교는 설교자의 삶에 충격을 줄 뿐만 아니라 청중의 삶에 강한 충격을 주어 마음으로 깨닫고 심령을 움직여 뜻을 정하게 해준다.
  강해설교가 가장 좋은 설교라고 하는 것은 설교의 결과가 설교자에게나 청중에게 가장 감동적이고 영적 감화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좋은 설교를 분별하기 위한 감동적이고 영적 감화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좋은 설교를 분별하기 위한 가장 좋은 실험은 청중의 반응을 통한 것이다.  첫째, 청중들이 하나님을 경험하였는가?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고 더 잘 이해했는가?  셋째, 그 내용이 청중들의 삶과 분명히 연결되었는가?  이런 질문들을 해보아야 한다.  설교는 단지 듣는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와 청중의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설교자에게 항상 이러한 접근이 요청되기 때문에 설교자에게 설교는 항상 힘든 것이다.

 

현대적 적용과 창의성
  앤더슨(Leith Anderson)은 “21세기의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 피해야 할 두 가지 함정이 있다.”고 하면서 “첫째, 성경 본문에 대한 부적절한 이해이며, 둘째, 성경 본문에 관한 지나치게 많은 정보이다.”라고 했다.  설교자의 준비는 성경 본문의 가르침에 관한 연구 조사, 질문, 대답, 근본적 이해와 더불어 그 본문과 관련된 근본 문제 연구를 포함시켜야 한다.  그러나 설교준비를 위하여 얻은 모든 정보를 공개석상에서 모두 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설교자는 성경을 지나치게 영해(靈解)함으로써 오는 본문의 그릇된 이해를 피해야 한다.
  또 너무나 많은 자료가 범람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잘못된 정보를 인용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설교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를 설교하면서 강도 만난 자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는데, 거룩한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세속적 도시 여리고로 갔기 때문에 강도를 만났다는 데 설교의 초점을 두어 거룩한 자리를 이탈하지 말고, 교회를 잘 출석하라고 강조한다.  또 데마와 같이 교회를 잘 섬기다가 세상으로 가면 강도를 만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본문이 가르치는 바는 강도를 만난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해석은 아주 부적절한 본문 해석이다.  또한 때로 지나치게 많은 정보와 자료에 의존하다보면 본문의 비중이 감소될 우려가 있다.  이러한 불필요한 정보를 과감히 버리고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내 경우를 보면, 설교를 위하여 준비한 모든 자료를 설교에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 많은 자료를 다 사용하려는 욕심이 앞서면 성경 본문의 해석이 빗나가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5,000명을 먹이신 기적을 설교하면서 제목을 ‘다시 거두라’로 정하였는데,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해주기 위함이었다.   강해를 하면서 초점은 남은 음식을 다시 거두게 하신 예수님의 의도에 두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기적의 해석보다 재활용의 중요성을 해석했다.  그리고 본문에 충실하게 단어를 해석하면서 현대에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지적했다.  그 첫째는, 다시 거두게 하신 예수님의 뜻은 그 나머지 음식이 버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얼마든지 모든 사람이 먹고 한 톨도 남지 않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를 만드신 것은 나머지라고 해서 버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당면한 한 가지 문제는 너무 많이 버린다는 사실이다. 재활용, 재생산은 중요한 현대적 의미가 있다.
  둘째는 예수님은 작은 것에 대한 소중함을 가르치셨다는 점이다.  바구니란 음식을 운반하는 작은 용기이다.  적어도 만 명이 먹고 남은 나머지 음식이 12바구니에 가득 찼다면 아주 알뜰하게 먹었고 나머지 음식도 지극히 작은 분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거두게 하신 것은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기 위한 교훈이다.  우리 사회는 작은 것을 소홀히 하고 큰 것만 선호하다 경제적 위기를 맞았다.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알면 경제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셋째는 주위를 깨끗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먹는 것만 가르치면 동물적이 된다.  먹는 것 때문에 주위가 더러워지는데, 예수님은 음식을 먹은 후에 주위를 깨끗하게 하는 것도 가르치신 것이다.  환경 보존을 가르치신 교훈이다.  성경 본문의 뜻을 해석하면서 오늘의 현실에서 그 말씀을 재해석하는 것이 설교의 중요성이다.
  21세기를 바라보면서 한국교회의 강단을 다시 살리는 것은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개혁이다.  종교개혁이 중세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교회를 깨웠던 것같이 한국교회는 신종교개혁을 통하여 깊은 잠에서부터 교회를 깨워야 한다.  교회를 깨우기 위해서는 먼저 강단이 깨어나야 한다.  강단이 깨어나지 않으면 다른 무엇으로도 한국교회는 깨어나지 못한다.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이 교리 중심의 교회에서 성경 중심의 교회로, 의식 중심의 교회에서 말씀 중심의 교회로 다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던 것처럼 한국교회도 교회의 원형으로 다시 돌아가는 운동이 필요하다.  새로운 세기의 설교가 주제설교에서 강해설교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은 새로운 형식을 도입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잊고 있었던, 성경이 가르치는 본래의 성경적 설교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150. 선포 설교에서 이야기 설교로 전환하라


  자연스러움과 부드러움
  내가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공부할 때는 설교란 서론과 세 가지 대지로 구성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며, 여기에 이어 마지막으로 짧은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최근의 좋은 설교의 추세는 대지가 셋이 아니라 하나이다.  현대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제공하여 복잡하게 하는 것은 효과적이 아니다.  그래서 한 가지만을 제공하여 한 주간 동안 기억하며 전해 들은 설교대로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복잡하고 조직적이며 기계적인 사회에 사는 현대인들은, 교회에서 다시 복잡하고 많은 양의 실천하기 힘든 설교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미래인들에게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증폭될 것이 분명하다.
  설교는 그 내용에서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의 일방적 선포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현재적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달 방식(delivery), 즉 전통적 선포의 방식에서는 이야기체(narrative)로 전환해야 한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미래인들에게는 딱딱한 문어체의 설교보다 부드러운 구어체의 설교가 호응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21세기의 교회은 피곤하고 지쳐 있으며 낙담하고 외롭고 힘든 세대를 목회의 대상으로 한다.  더구나 최근의 경제적 위기는 교인들로 하여금 의기소침과 절망으로 몰고 갈 것이다.  이러한 교인들은 그들이 죄인임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고함을 듣는 것보다 죄와 여러 가지 삶의 문제들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위로받기를 더 원한다.  이것이 21세기를 위한 이야기 설교의 근거이며 그 접근방식을 찾는 단서이다.

 

단순함과 감동
  설교란 상호적 커뮤니케이션이다.  아무리 내용이 좋고 분명하고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면 설교의 내용은 무가치하게 된다.
  청중의 습관도 다양하여 대부분의 성도들은 설교자의 메시지의 내용을 단순화하고 세부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작고 짧은 이야기체의 설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자신에게 호감을 주는 메시지에는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렇지 못한 메시지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 수많은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설교자의 메시지를 자신은 이미 다 알고 있으며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21세기의 설교란 단순하면서도 감동이 있는 이야기체의 메시지이어야 한다.  21세기 설교의 중요한 형태는 단순함이다.  설교를 단순하게 한다는 것은 설교자에게는 어려운 일이지만 청중이 설교를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설교자는 어려운 작업을 해야 한다.

알려주고 맡기는 설교
  일반적으로 청중은 설교의 내용이 주관적으로 재미가 없다고 느끼면 청취를 중단해버리고 만다.  재미있어야 은혜를 받고, 때로는 재미와 은혜를 혼동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은혜(charis)의 어원은 기쁨(Chara)이므로 재미있으면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으면 기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 생활이 그러하듯이 설교도 재미있어야 한다.  재미있는 설교는 교인들의 청취에 효과적이며, 또 설교가 재미있어야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는 청중들에게 집중력을 키워줄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이야기체의 설교는 청중들에게 재미를 공급할 수 있고 집중력을 통하여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청중의 또 다른 특징은 자신이 이해하기 쉬운 말에 집중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일반 대중들은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청취활동을 피하려는 경향이 점점 짙어진다.  신세대들은 심각하고 의미있는 인생 이야기보다 쉽고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다.  이런 경향은 비단 신세대뿐만 아니라 기성세대에게도 확산되고 있으며, 이들은 더구나 교회에서 들려주는 메시지에서까지 심각하고 어려운 말을 듣게 되길 원치 않는다.  사람들은 교회만큼은 복잡한 세상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가 되기를 원하며, 설교는 쉽고 용기를 주는 것으로서 삶의 분석이 아닌 대답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딱딱한 명제들로 구성된 설교보다 쉬운 이야기를 원한다.
  이전의 연설가들은 천편일률적으로 모두 웅변가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연설가들은 웅변가가 아니라 이야기꾼이다.  텔레비젼에서 시청자를 사로잡는 연설들은 웅변이 아니라 시청자와 교감을 이루는 이야기들이다.  설교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의 교인들은 일방적 설교자보다 교환적 설교자를 더 좋아한다.  오늘날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강의보다 대화이다.  이러한 경향은 미래교회에서는 더 두드러진다.  미래교회의 성도들은 강의식, 웅변식 설교보다 대화식, 이야기식 설교를 원하게 된다.
  이전의 설교가 “해야 한다”, “마땅하다”, “당연하다”와 같은 어투를 많이 사용하였고, 강요적이며 지시적인 내용들을 사용하였던 데 반해 미래의 설교는 문제를 설명해주고 그 대안을 제시하며 그 다음으로 설득을 추구하는 형태를 취한다.  그리고 강요적인 결론이 아니라 모든 결정을 청중 스스로가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맡긴다.  현대인들은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강요적인 목사들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지시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들에게 알려주기를 원하고 결정은 그들 스스로에게 맡겨주길 바란다.  또 그들에게 일러준 대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목사를 원한다.

 

160.  언어 중심에서 미디어 중심으로 전환하라


커뮤니케이션의 상호작용성, 비동시성
  우리는 이미 정보통신의 혁명을 경험했다.  장거리 통신수단은 세계화의 한 요인이며, 세계화와 지방화가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글로벌 패러독스의 동인이 된다.  또 장거리 통신수단은 멀티미디어 시대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다.  정보통신혁명은 미디어 간의 기술적 수렴 곧 디지털화(digitalization), 영상화(visualization), 종합화(integration), 융합화(donvergency), 상호작용화(interactivity), 탈대중화(demassification), 비동시화(aynchronity) 등의 과정을 통해 정보유통 과정에 사용되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발생한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사회변동이다.
  이러한 정보화 기술의 발전은 우리 사회로 하여금 이미 케이블 텔레비전 시대를 열게 하였으며 위성방송을 가능케 했다.  이미 가정에 들어와 있는 고질화 텔레비전(HDTV)이나 비디오텍스 등은 지금까지의 미디어 형태가 아닌 다매체와 통신과 컴퓨터가 이루어놓은 전혀 새로운 방식의 미디어 형태이다.  이러한 영상혁명은 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전문화가 가능하도록 정보 내용의 변화를 일으켰다.
  최근에 와서 책이나 신문과 같은 활자매체나 라디오와 같은 음성매체가 상대적으로 쇠퇴하며, 대조적으로 시각적인 매체가 선두 매체로 부각되는 이유는 정보사회에서 시각화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보사회를 맞아 단순한 음성매체, 활자매체 등을 통한 일방적인 정보전달에서 시각적인 매체로 복음선포와 생활양식이 변혁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의 방식이나 설교도 언어 중심에서 미디어 중심으로 이동해야 한다.

 

속도감있는 액션 영상
  이제는 영상이라고 하더라도 움직이지 않는 영상은 별 효과를 얻지 못한다.  젊은 세대들은 움직이는 영상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비디오를 즐겨보며 비디오가 친숙한 문화의 한 부분이 된 젊은 세대에게는 컴퓨터의 자료들도 이제는 움직이는 영상으로 나타나며, 노래방 기계들도 움직이는 영상과 반주를 들으며 노래할 수 있도록 완전한 멀티미디어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들에게는 영상이 움직이되 빠른 속도로 움직여야 흥미를 일으킨다.  한 조사자료에 따르면, 50대 이상의 기성세대들에게 가장 감동적인 영화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고 한다.  그들에게는 당시 작가의 메시지와 배우들의 연기가 잊혀지지 않는 감동으로 남아 있는데, 20대의 신세대들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었더니 끝까지 앉아서 보는 젊은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끝가지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나가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너무 전개 속도가 느려 지루해서 못 보겠다.”고 했다.  요즘의 젊은이들에게는 사건 자체가 빠르게 움직이고 빠르게 진행되어야 한다.

위성 중계되는 예배
  이제는 컴퓨터를 통한 화상정보가 가장 혁신적이고 효율적인 정보매체가 되었고 실제로 우리는 화상정보를 매일 접하며 살아가고 있다. 영상은 이제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며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에 영상이 주는 영향은 엄청난 것이다.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통하여 매일의 뉴스와 오락을 접하고 있으며, 서울의 큰 네거리마다 대형 전광판이 있어서 짧은 뉴스와 광고를 본다.  그때그때의 기온과 교통사고 현황, 오존발생율, 먼지발생율 등을 화상을 통해 보면서 지나가는 것이다.
  많은 나라들이 의회의 토론 장면을 의사당 밖에서 영상으로 볼 수 있게 하여 열린 의회를 시도하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노래방도 영상의 역할이 크다.  이제 동영상(動映像)은 우리 곁에 있는 실재이며 삶이다.  그러므로 이미 주어진 환경인 멀티미디어를 활용하여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멀티미디어가 삶의 환경인 세대들에게는 멀티미디어가 아니면 말씀의 전파가 어렵고 또 비효율적이다.
  멀티미디어를 통한 예배의 시도는 단지 젊은 세대들을 위한 배려만은 아니다.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교육적 효과가 높으며, 보는 것보다 보고 듣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도 효과적으로 드리기 위해 멀티미디어화 해야 한다는 논리가 등장한 것이다. 예배의 멀티미디어화는 교인에 대한 교회의 배려이기도 하다.  한국의 많은 중. 대형 교회들은 이미 예배당 외의 부속건물에서 텔레비젼을 통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예배당만으로는 예배 참석자들을 수용하지 못하는 교회들이 폐쇄회로를 통하여 부속건물의 모니터에 예배실황을 전송하며, 부속건물의 참석자들은 모니터를 보면서 예배드리는 것이다.
  근래에 와서 많은 교회들이 멀티미디어를 통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  교회는 대형 스크린을 통하여 예배의 실황을 화면으로 보여준다.  예배 인도자의 얼굴이 크게 나타나 보이도록 해주며 예배 참석자의 모습도 보여주고 설교시간에는 설교자의 얼굴과 표정이 또렷이 보이게 한다.  설교자가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즉시 화면에 기록하여 참석자의 기억을 도와준다.  그리고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가사를 화면과 함께 보여주므로 모두가 예배의 동참자가 되게 한다.  예배의 멀티미디어화는 예배 참석시에 성경과 찬송가를 부득불 준비하지 못한 사람을 위한 배려가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배려를 통하여 참석자들은 보는 재미와 함께 예배 전체에 대한 이해와 기억의 효과를 높일 수 있고 예배 인도자와의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
  교회는 교인들이 변화와 미디어의 발전을 빨리 감지하여 멀티미디어 시대에 걸맞는 예배를 개발하고 예배를 미디어화해나갈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

철학이 분명해야 한다
  교회 사역의 멀티미디어화를 반대하는 생각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많은 개신교의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배타성이 위험에 빠지는 것처럼 보일 때 언제나 공식적으로 우려를 표명하곤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세속화되어서는 안 되며 배타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교인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17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어 미국으로 전파된 퀘이커교는 개신교의 극단적 우파로서 교회의 모든 형식을 거부한다.  그리하여 세례라는 외부적 의식과 십일조까지 거부하였고 성찬식도 폐지했다.  그리고 단지 신생을 통한 내적 정화만을 중요시하여 그리스도와의 내적 교통을 강조했다.  종교적 경험을 중요시하여 성경의 영감은 기록된 때뿐만 아니라 현재도 영감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성경이 주는 영감을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형식을 예배에서 제외하였고 성직자나 신조까지도 용납하지 않는다.  퀘이커 교도들은 철저하게 예배에서의 형식을 배제하고, 물론 악기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극단적 우파 외에도 교회 내에서는 새로운 형식의 변화나 도입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는 교인들이 많이 있다. 전통을 고수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성이 강하게 교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변화와 예배의 미디어화에 대하여 반대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찬성하거나 적극 시도해보는 이들도 많이 있다.  구미에서는 이미 예배의 멀티미디어화가 보편화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점차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심지어는 영화에 익숙해 있는 현대인들을 위해 영화로 드리는 예배도 시도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반응도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교회는 적절한 변화를 시도해야 하며 현대인들에게 가장 효율적인 복음전파의 도구를 찾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확신과 배경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예배를 멀티미디어화할 때에 교인들의 정서와 교회 건물상의 여건과 목회자의 신학적 입장이 분명히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70. 고전찬송에서 고전과 현대의 조화로 전환하라


종교개혁, 회중 찬송의 부흥
  종교개혁의 반대자들이 “루터는 그의 설교보다는 그의 노래로써 우리를 더 해쳤다.”고 할 만큼 교회의 음악은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었다.
  중세 초기에 음악은 상당히 발전하여 대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황제의 재직기간(590-604)에 편찬된 성가인 ‘그레고리안 찬트’(Gregorian Chant)는 천년 동안이나 교회를 풍미하던 유일한 예배 음악이었다.  그후 11세기까지 제창(齊唱)으로 드려지던 음악이 1600년에 접어들어 일반 음악에서 오페라 음악과 기악이 발달하면서 교회의 예배 음악도 새로운 형태를 낳게 되었고, 예배 음악도 파트별로 나누어 부를 수 있도록 화음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음악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개혁기간중에 루터는 회중적인 노래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했다.  반면에 칼빈은 인간이 창작해낸 찬송이 완전할 수 없으므로 시편을 제창하는 것은 인장했으나 합창음악을 거부하고, 회중이 함께 부르는 제창을 선호하였으며 예배에 악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초기 미국교회는 모든 예전에서 영국교회의 방식을 모방했다.  그러나 후에는 영국 민요와 미국화된 곡조가 예배 음악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의 새로운 찬송은 무디(Dewight L. Moody)의 부흥운동과 함께 일어나 복음찬송(Gospel Hymn)으로서(이보다 먼저 일어난 미국의 야외 집회찬송이 야외 전도집회를 위한 흥겨운 곡조의 노래인 데 반하여) 이는 피아노를 반주로 하며 옥내집회 찬송을 고집하는 새로운 찬송이었다.  무디의 복음찬송은 당시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새시대에 맞는 새로운 찬송이었다.  이것은 엄청난 호응을 얻으면서 퍼져나갔고, 많은 사람의 심령을 울리며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복음찬송은 처음에는 정식예배에서 거부당했으나 차츰 교회 예배에 받아들여졌다.  이 복음찬송은 서구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영국의 찬송과 함께 한국에도 전해졌다.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인간의 기쁨을 표현하며,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는 찬송은 이처럼 시대에 따라 그 형태가 변천된 것을 볼 수 있다.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중세를 풍미하던 그레고리안 찬트만을 유일한 교회음악으로 고집하지 않듯이, 현대교회도 왓츠의 찬송을 유일한 교회의 음악이라고 고집하지는 않는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인간의 정서와 하나님께 대한 표현의 방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또 달라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교회도 새로운 형식과 장르의 음악을 예배 음악으로 도입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야 한다.
 
씨씨엠, 신앙 아닌 세대 차이
  현대 교회음악의 대표적 위치에 있는 복음성가만 해도 끊임없는 시도와 더불어 끊임없는 반대에 봉착해왔다.  예배의 요소 가운데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제물이 음악인데, 이 음악에 사회적 요소와 영합하는 다른 재료를 섞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어떤 이들은 현대 기독교 음악(CCM: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은 대중가요에 교회적 가사를 붙인 것이므로 예배 음악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고 구별하기도 한다.
  이런 오해의 원인들에 대하여 경배와 찬양 사역자인 하스데반 목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는 세상음악과 경배와 찬양을 구별하지 못하여 하나님게 드리는 진정한 찬양의 의미보다 멜로디나 리듬, 악기 등의 표면적인 것만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여 세상의 음악을 즐기듯 찬양을 즐기기 때문이다.
  둘째는 예배와 삶을 분리하는 오류로서, 경배와 찬양의 형식은 갖추었지만 그 속의 능력이나 변화된 삶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형식만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경배와 찬양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편견에서 비롯된 오류로서, 찬양을 하나의 찬양운동 또는 크리스천 문화사업 정도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현대의 리듬음악이 교회를 타락시킬 것이라고 우려하지만, 실제로 교회음악 그 자체가 교회를 타락시킨 적은 없다.  록이나 비트가 강한 것이 교란으로 느껴지는 세대가 있고 그렇지 않은 세대가 있다.  이는 신앙의 차이라기보다 세대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적 성장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아이들과 기성세대가 좋아하는 음악 유형 역시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이중적 차별성 둔 개혁
  세속음악은 처음부터 속된 것이고 교회음악은 처음부터 거룩한 것이라고 여기는 고정관념도 재고해야 할 과제이다.  성경에 나오는 교회음악의 내용들은 처음부터 거룩한 것이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이 부른 노래는 처음부터 거룩한 성가였던 것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단순히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는 목자의 노래였다.  그가 노래할 때 사용하던 비파와 수금 등의 악기는 일반 목동들이 흔히 사용하던 세속악기였으며, 박수치며 노래하던 당시의 모습은 하나님께만 드려지던 예배형식이 아니라 일반 축제의 형식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현대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악기도 마찬가지이다.  피아노가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교회 음악의 중요한 도구이지만, 피아노 그 자체가 거룩한 악기인 것은 결코 아니다.  피아노는 대중적인 악기이며, 심지어는 술집에도 거의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을 정도다.  그런데 피아노는 거룩한 악기이며 기타는 세속악기이므로 기타는 교회에서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교회음악에 가장 좋은 악기가 파이프 오르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파이프 오르간은 좋기는 하지만 값이 엄청나게 비싸고 보존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많은 교회들이 전자오르간을 사용한다.  그러나 전자오른간은 사용하면서 전자 음향 합성장치인 키보드(Synthesizer) 사용은 반대한다.  전자오르간도 미국의 프로 야구장, 풋볼 경기장 등 경기장이나 심지어 경마장, 경견장(경마장이 없는 작은 마을에서 말 달리기 대신에 그레이하운드 등을 동원해 개 달리기를 시킨다)등 사행성이 있는 도박장마다 사람과 동물을 흥분시키는 도구로 사용된다.  경기장에서는 흥분용으로 사용되는 전자오르간이 교회에 사용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고, 기타와 드럼은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성(聖)과 속(俗)은 무엇을 사용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당분간 이중적 차별성을 두고 개혁을 시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전통과 현대의 두 가지 음악이 상존해야 한다.  전통음악이 유일한 교회음악이며 현대음악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적어도 교회에서는 금물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어느 한 부류만의 모임이 아니라 모든 부류가 조화 속에 모여진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180. 성직자 중심에서 평신도 중심으로 전환하라

  이전의 목회에서 평신도는 목회자와 종속적 관계에서의 협력자였으나 미래 목회에서 평신도는 목회자와 동등한 관계에서의 동역자가 된다.  미래 교회는 평신도 사역이 극대화되고 평신도 사역을 통한 교회성장을 도모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직자에게 의존되어 있던 목회 패러다임을 평신도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평신도는 목회자와는 달리 적절한 훈련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목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교회의 잠재적 자원이다.  목회자는 교회에 영향을 많이 주지만 언제나 유동적이며 안정적이지 못하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교회의 조직을 장악하는 것은 목회자의 이동시 교회를 불안정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평신도는 교회의 안정된 구성요소로서 잘 훈련된 평신도는 안정된 교회의 중요한 자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전환되어야 한다.

‘아무개 목사 교회’
  110년의 한국 개신교 역사 가운데 한국교회는 세계적인 목회자를 많이 배출했다.  그러나 세계적인 신학자는 상대적으로 배출하지 못했다.  세계적 신학자가 없는 교회에서 세계적 목회자가 배출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에서는 세계적인 교회이지만, 신학과 목회의 내용에서는 세계적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구석이 있다.  어쨌든 한국교회는 성장한 교회이고 성장한 교회의 이면에는 유능한 목회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성장 요인으로서의 목회자의 능력은 교회 성장의 물량적 평가 기준이 되었고, 목회자가 곧 교회라는 등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국의 개신교가 개교회주의라는 비판을 받는 것도 교회의 성장이나 목회 내용이 하나의 교회라는 교회연합 중심이나 교단 중심이 아니라, 개교회 중심이며 목회자 중심이기 때문이다.    교회란 ‘특정한 목적에 의하여 모인 하나님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주체가 항상 하나님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교회도 그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교회 평등의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평신도 개혁자 칼빈
  기독교의 불후의 명작의 하나로 꼽히은 ‘기독교 강요’는 평신도인 칼빈에 의하여 저술되었다.  그는 방대한 신학적 주제를 성직자나 신학자의 입장이 아닌 평신도의 입장에서 저술하였고, 개인의 성경연구에 바탕을 두고 기독교의 진리를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그 후에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레(John Wesley)는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의 위치를 성경적, 신학적, 교리적으로 깊이있게 연구하여 평신도 운동의 합리성을 그의 신학으로 선포하였고, 나아가서 평신도 설교자(lay preacher)의 필요성까지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그의 영향으로 평신도 설교자도 생겨나게 되었다.
  오랜 로마교회의 전통 가운데서 평신도는 성직자와 대칭적인 의미를 가진 일반 교인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평신도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개신교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계급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기능적으로 구분하여 평신도란 용어를 사용했다. 평신도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도구들이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모두가 하나님의 일꾼이며 교회의 봉사자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평신도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위해 선교와 교육 등 다양한 교회의 봉사업무들을 수행해야 할 중요한 직책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여건을 확립해야 할 것이며 평신도가 교회의 안정적 주체인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로마교회의 성직중심적 구조나 성직계급적(hierarchical) 사고를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 개념의 새로운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2등 없이는 1등도 없다
  초대교회에는 제1선은 아니지만 제2선에서 일선의 지도자를 도와 교회를 유익하게 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  바나바, 마가, 누가, 디모데, 브르스가와 아굴라 등이다.  이들이 없는 초대 교회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이들의 공헌은 컸지만, 이들은 한번도 사도라고 불린 적도 없고 스스로 사도가 아니라고 불평한 적도 없다.  또 이들의 업적으로 보아도 사도 가운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다 다대오나 시몬 등의 제자들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하였고 성경의 기록에도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가 사도들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고, 사도라는 이름을 원치 않았으며 자신의 일을 묵묵하게 잘 감당한 평신도들이었다.
  특히 바울은 누가를 극진히 사랑하여 함께 일을 하였고, 누가 역시 데마, 그레스게, 디도가 바울을 떠날 때에도 바울을 떠나지 않고 바울의 좋은 협력자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딤후4:10-11). 그리고 1차 전도여행에서 도중에 집으로 돌아가 바울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선교에 방해가 되었던 마가도 이후 성장하게 되어 바울은 마가가 유익한 사람이니 그를 데리고 오라고 말한다(딤후4:12). 이런 인물들은 한결같이 제2선에서 제1선의 사도들을 충실히 도와 교회를 교회답게 만든 모범적인 평신도였다.
  이와 같은 요인 외에도 미래 교회가 평신도 중심이어야 할 또 다른 당위성이 있다.  그것은 국가나 기업이나 조직에서 그 중심이 이동한다는 미래 현상 때문이다.
  그간의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이제는 서서히 평신도 중심으로 그 중심이 이동되고 있다.  평신도의 역할이 증대되고 평신도 훈련이 목회의 중심사역으로 바뀌며 잘 훈련된 평신도를 많이 가진 교회가 미래 사회에 경쟁력을 가지게 된다.

권력분산, 고객 중심의 구조
  최근 기업에서는 고객만족 경영의 중심이 되는 고객 중심적 경영을 강조한다.  지금까지의 기업은 회사 중심이었고 고객들은 회사의 결정대로 따라가는 형태였으나 이제는 고객의 의향에 따라 회사가 따라가는 형태로 그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고객 중심의 경영은 첫째, 고객의 불만을 파악하고, 둘째, 고객의 기대와 희망을 구축하고, 셋째, 고객만족 관리방법을 구상하고, 넷째, 고개만족 관리를 전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객 중심적 경영이 가능하게 되려면 고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고객의 취향을 분명히 알게 되면 고객의 만족을 위하여 고객의 요청을 어떠한 방법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개발하게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교인들이 교회에 대하여 불만을 가질 경우 그 불만이 무엇인가 먼저 파악하고, 교인들의 교회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구축한 다음, 교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하고, 교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하고, 교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관리해나가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관심은 그 중심이 성직자에서부터 평신도로 옮겨질 때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기의 목회는 평신도 중심의 목회이며 평신도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목회여야 한다.
  ‘고객 접촉 경영’은 고객을 만나서 그 고객에게 만족을 주는 경영을 의미하는데, 새로운 고객이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한 경영요소이다.  이러한 신경영기법에 따라서 최근의 많은 회사들은 사무실의 문을 열자마자 제일 가까이에 가장 지위가 높은 부장이 앉아서 고객을 맞이하고 지위가 낮은 대리는 안쪽에 자리하게 된다.
  이러한 경영기법을 교회에 적용한다면 신입교인이 교회에 와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은 목회자가 아니라 평신도이다.  주차안내와 예배당의 안내를 담당한 사람은 처음 교회를 경험하는 교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인상을 남기게 되고 일반적으로 그것은 새로 온 교인들에게는 그 교회에 대한 인상의 80퍼센트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평신도를 훈련하여 새 교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도록 하는 것은 교회성장과 성숙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
  실제적인 면에서 평신도는 다양한 전문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다양한 기능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모든 일에 전문가가 될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고 교회를 위하여 평신도가 가진 다양한 기능일 이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성직자에게 편중된 교회 구조를 평신도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교회와 성직자 개인에게 유익이 될 것이고, 또 성직자 중심의 구조에서 평신도 중심의 구조로 자연스럽게 전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90. 목회자의 권위에서 목회자의 지도력으로 전환하라


지도력과 권위
  지금까지 목회자는 일반적으로 지도력을 갖추었다는 이미지보다는 권위적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또 카리스마적인 목회자가 교회성장을 이루었던 것도 사실이다.  카리스마적이라는 표현 자체가 지도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도력이 있다는 의미보다 권위적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최근 우리 사회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권위 상실의 시대를 맞이했다.  전통적으로 권위를 가지고 있던 부모, 스승, 윗사람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권위가 권위주의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는 사회적인 지위를 권력이나 어떤 위력으로 지탱하려는 주의이므로 논리성이 결핍되어 있다.  그리하여 프로이드(Sigmund Freud)나 프롬(Erich Fromm)은 권위주의를 국수주의적 사회병리로 간주했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타파한다고 하더라도 권위 자체는 살아 있어야 사회의 규범도 바르게 정립된다.  그러나 지금은 그 권위마저 점점 실추되고 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매를 맞기도 하고, 지하철에서 지나치게 장난하는 학생들을 말리는 어른에게 학생들이 욕을 하며 때리기도 하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생을 매로 훈계했다고 고소를 당하기도 한다.  이렇게 권위가 땅에 떨어진 세상에서 권위적인 목회를 한다는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현대의 목회자는 제사장이 아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권위를 얻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고집이나 생각으로 교인을 억지로 따라오게 함면 권위주의가 된다.  권위주의는 구속적이며 강압적이기 때문에 무리하고 무도하게 되며 추종자들의 반항이 뒤따르기 때문에 목회자는 권위주의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강단의 권위, 생활의 친근
  강단에서 말씀 선포 기능은 누구와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 권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 권위가 강단 아래에까지 연결되어 강단 아래에서도 권위를 내세우면 더 이상 권위라 하지 않고 ‘고집’이라고 규정된다.  반면에 강단 아래에서의 인간적인 모습을 강단 위에서까지 드러내면 은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권위와 인간미를 적절하게 조화하는 것이 목회자의 지도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력은 권위와 인간미를 포함하는 목회자의 생명과도 같은 기능이다.
  교회행정학에서는 교회행정을 세 가지 용어로 설명한다.  이 세 가지 용어는 교회행정의 세 가지 형태이다.  첫째는 지도력 (leadership)이다.  지도력은 지배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비전을 제시하는 업무(envisioning task)와 모델을 만드는 업무(modeling task)이다.  둘째는 관리(management)이다.  관리는 기획하는 업무(planning task)와 감독하는 업무(monitoring task)이다.  셋째는 경영(administration)이다.  경영은 보조하는 업무(supporting task)와 향상시키는 업무(enhancing task)이다.  이와 같은 정의에서 보면 지도력은 목회자의 행정업무이며, 관리는 장로의 행정업무이며, 경영은 집사의 행정업무이다.  교회행정은 어느 한 직계로 획일화하는 독점적 업무가 아니라 모든 직제가 고유한 업무를 가진 종합 행정이다.
담당자교회행정의 형태업  무목회자지도력비전을 제시하는 업무,

모델을 만드는 업무장  로관리기획하는 업무,

감독하는 업무집 

사경영보조하는 업무,

향상시키는 업무
          

교회 행정의 세 가지 형태와 업무 및 직분자들의 역할
 
  이처럼 지도력은 통제와 지배의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지향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지혜이다.  그리고 지도력은 조직 운영에서 구심적인 힘을 형성시키는 것이며 조직의 공동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하나로 나아가게 하는 역량이다.  테리(George Terry)에 따르면, 지도력은 그룹이 추구하는 목표를 위해 사람들이 기꺼이 노력하도록 영향을 끼치는 행위라고 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사람을 이해해야 하며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는 강력하고 창조적인 지도력을 갈망한다.  좋은 지도력이 영적인 건강과 의미있는 예배, 그리고 지역사회에서의 활기찬 사역이 가능하도록 이끌어준다.
  결국 지도력은 조직의 목표 성취를 위한 힘의 동원 능력을 의미한다.

 

보스와 리더
  교회는 좋은 지도자를 원하고 지도자는 강력한 지도력을 원한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교회의 지도력은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하게 만들며, 의미있는 예배를 드리게 하며, 그리고 지역 사회에서 활기찬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이끈다. 
  결과적으로 목회자의 지도력은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주며 교회의 모양을 만들어간다.  교회가 영적으로 고갈되며 사회에 대한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는 때는 지도력이 상실된 때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지도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보스 지도자구성원을 몰고 간다
권위에 의존한다
공포감을 준다
‘나’혹은 ‘내가’라고 한다
잘못된 일로 비난한다
파업을 어떻게 할지를 안다
‘가라’고 명령한다구성원을 지도한다
호의에 의존한다
열심히 일하게 한다
‘우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잘못된 일을 수습한다
어떻게 할지를 가르친다
‘같이 가자’고 한다
                       

보스와 지도자의 차이점 비교

  지도력의 기술은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으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의사소통(communicating)의 기술이다.  의사소통은 언어로 표현되는 서로의 여러 가지 상징을 이해하기 위한 마음의 만남과 교환의 과정이다.  좋은 지도자는 좋은 대화자이어야 한다. 둘째, 귀를 기울이는 것(listening)이 지도력의 기술이다.  귀를 기울이는 것은 듣는 것(hearing)과는 다르다.  듣는 것은 육체적 경험에 불과하지만 귀를 기울이는 것은 듣는 것에 대한 수용과 판단의 행위가 포함된 종합적 과정이다.
  셋째, 위임(delegating)이 지도력의 기술이다.  지도자는 어떤 결정이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타인에게 책임과 권위를 부여하게 된다.  지도자는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일을 하게 하는 자이므로 자신의 업무를 적절히 분배 위임하고 이를 위해 타인을 신뢰하는 기술을 소유해야 한다.  넷째, 인간관계(human relations)가 지도력의 기술이다.  지도자는 타인의 동기부여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 견고한 업무 관계를 형성해야 하므로 지도자의 인간관계는 중요한 능력이다.  특별히 목회자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영적 자질을 비롯한 사랑과 신임, 그리고 사회적 모범 등의 지도력을 소유해야 한다.

 

W 이론
  지도력 이론이나 경영 이론에서 많이 이용하는 것이 인간 이론이다.  이것은 인간성을 기초로 하여 인간의 본질을 연구한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간 이론은 맥그리거(Douglas McGregor)의 X 이론과 Y이론이다.
X이론Y이론Z이론W이론인간성게으르고 책임지는 것 싫어함

안정만을 추구
타인에게 지시받는 것을 좋아함자기표현과 자발적 참여 가능
행동 결정 및 자제 능력 소유집단문화 속의 인간
일본 전통 무사문화의 전형신바람 내면동기부여방안조직화하고 엄격하게 통제해야 함스스로 지시하며 동기를 부여함통제와 자율의 중간신바람이 나도록관리자의 자세지시적 강압적보조적 촉진적강압과 통제, 자율의 조화칭찬과 격려로 흥이 나게
                        

인간성 이론과 관리자의 자세

  X,Y 이론이 미국의 인간이론이라면, Z이론은 일본에서 개발된 이론이다.  Z이론은 도쿄 올림픽 이후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일본의 토양에 적합하게 적용함으로 기술의 효율을 증대시킨 이론이다.  Z이론은 동양의 선(嬋) 철학을 모방한 것으로, 일본 기술의 우수성을 이론으로 체계화했다.  특히 이 이론은 일본의 전통적 역사, 문화와 조화를 이루어 전래적으로 무사(武士)문화를 토대로 집단문화가 발달한 일본의 기업경영에 크게 공헌했다.  이 이론은 종합적 인간관리를 위한 X,Y이론을 절충한 것이다.  즉 인간관리는 강압이나 통제만으로는 불가능하며 동시에 완전한 자율로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둘을 잘 조화한 중간 형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울대학교의 이면우 교수는 W이론을 만들자고 제창했다. W이론의 실체는 한국인의 ‘신바람’이라 했다.  한국인은 원대한 목표에 대한 포부가 포함되어야 흥이 난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통하는 지도자에게는 맹신에 가까운 신뢰를 보여주며 지도자에 대한 공생공사(共生供死)의 정신이 확인되면 신바람이 나서 일하게 된다.  신바람이 나서 하는 일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신바람의 문화는 기업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반적 문화이다. 이렇듯 교회도 신바람 나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신바람 나는 교회는 절대로 침체하지 않는다.
 
흥이 난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다
  신바람 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지도자인 목회자는 우선적으로 교인들에게 분명한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연초에 세우는 그해의 목회주제는 확실하고 구체적이어야 하며 교인들에게 그 목표가 성취 가능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만일 성취가 가능하지 않은 목표를 반복적으로 제시하면 교인들은 목회자를 신뢰하지 않으며, 제시된 목표를 성취할 의도를 상실하게 된다.
  교인을 자극하고 그 마음을 교회로 향하게 하는 것은 목표밖에 없다.  교인은 누구나 교회에서 일하기를 원한다.  단지 일할 여건이나 동기가 미흡하기 때문에 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적절하고 확실한 동기가 부여될 때 교인들은 즐겁다.
  둘째, 신바람 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목회자는 교인에 대한 관심과 칭찬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칭찬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관리 방법이다.
  사람은 누구나 칭찬받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칭찬하는 데 지나치게 인색하다.  칭찬은 신바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셋째, 신바람 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목회자는 교인들의 불만을 파악하고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며 적절한 평가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는 교인들이 교회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만이 무엇인가를 경청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나아가서 필요하다면 목회자 개인에 대한 불만도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있으며 실력이 있는 지도자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칭찬하며 업적에 대해 적절히 평가해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신의 목회에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목회자의 자신감은 목회자 스스로가 신바람 나게 한다.  신바람 나는 목회자가 교인을 신바람 나게 할 수 있다.
  내가 섬기는 교회는 21세기 교회를 준비하면서 교회의 신경영을 제시했다.  교회의 신경영은 사실은 신경영이 아니라 교회가 가져야 할 본래적 모습을 회복하는 것인데, 교회의 신경영이론 역시 신바람이라고 정리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신바람이 날 것이지만 신바람의 인간적 원리는 위에서 설명한 바대로 칭찬과 관심이다.  서로가 작은 일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교제의 삶, 교회학교 교사나 성가대원을 만났을 때 그 봉사의 수고에 대해 격려하고 감사하는 삶,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하여 절대로 얘기하지 않고 감추어주는 삶이 바로 신바람 나게 하는 삶이다.  이런 신바람 운동이 일면 교회가 성장하고 활성화된다.

 

베끼기 목회의 한계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 가운데 가장 큰 요인은 목회에 창의력을 발휘하려 하기보다 기존의 패러다임에 의존하여 모방을 반복하는 데 있다.  물론 목회 초기에는 모방으로 시작하지만 이 모방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자신만의 창조적인 목회를 시도하려 하기보다 모방에 의존하고 마는 경우가 흔하다.  설교, 교회행정, 심방, 훈련 그리고 교회의 전반적 프로그램에까지 창의성 발휘보다는 모방하고 답습하는 양태가 흔하다.
  교인들도 목회자의 목회 내용이 모방인지 창조적인 것인지를 알고 있다.  한국교회도 모방만으로 목회가 가능한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상황 자체가 달라져 모방에 의존해서는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교인들도 모방 목회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며 목회자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다. 교인의 불만은 교회에 식상해서 출석하지 않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지속적인 창의력 개발을 위해서는 축적된 핵심 역량(core competence)이 요구된다.  하나의 핵심 역량은 또 다른 기술의 개발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대다수의 교회에서 목회자의 창의적 목회를 수용하지 못하고, 창의적 목회가 목회현장에서 실패할 경우 큰 책임을 묻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창의적 목회를 하려면 적용에 실패할 경우도 얼마든지 생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미국의 어느 회사는 연구원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연구하다가 실패를 선언하면 전 연구원들이 함께 모여 파티를 열어 격려해준다.  그 한 번의 실패가 영원한 실패가 아니고, 또 다른 시도가 가능함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다.  이런 식의 창의력을 가진 목회, 도전의 목회를 우리도 배워야 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새로운 세계에서 지도자의 자세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교회도 변화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데,  지도자는 이런 변화의 흐름을 먼저 습득하고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경영방법의 하나가 가시(可視)경영이다.

 

가시적인 구호를 만들어라
  교회의 가시경영에는 몇 가지 중요한 접근방법이 있다.  첫째는 교회가 그 목표를 지향하는 방향이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목표의 방향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틀을 기초로 하여 문제점을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분석전개의 방법과, 현재의 틀과 상관없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새롭게 설정하는 목적전개의 방법이 있다.  목적전개의 방법은 예방전개라고도 하는데,  문제발생 후의 치유보다 문제발생 전의 예방을 전제로 전개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목표와 상황과 정보를 교인들과 공유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많은 교회들은 이러한 접근방식이 상당히 미흡하다.  목회자는 교회의 방향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고, 그 방향대로 비전을 제시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교인들은 목회자의 머리 속에 있는 비전을 알지 못한다.  배가 진행하는 방향을 선장만 알고 선원들은 알지 못할 때 선원들의 업무의 효율성은 떨어지고, 결국 배는 방향을 상실하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다.
  셋째는 경영의 흐름이나 목표의 전개 과정이 모든 교인들에게 보이게 해야 한다. 추상적인 용어나 포괄적인 제시보다는 구체적인 용어로 성취 가능한 목표가 제시될 때 교인들이 따르게 된다.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방대한 목표가 제시될 때 오히려 교인들은 포기한다.  교인들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목표는 단어 중심의 구호 형식이 아니라 개량적이고 서술적인 것이어야 한다.
    교회의 목표는 ‘형제사랑, 교회사랑, 이웃사랑’이라고 설정하면 피상적이고 관념적이기 때문에 시행할 수가 없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 세 사람 이상과 인사하고 돌아갑시다. 한 장에 8원, 휴지는 한 장씩만 씁시다.  한 주일에 100원으로 소년소녀가장을 도웁시다.’ 등으로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시행 가능해진다.  이러한 가시경영은 경영자의 지도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가시경영을 통하여 목회자는 지도력의 효율성을 증대하게 된다.  목회자의 지도력은 교회의 방향성을 좌우하며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부실의 징후
  지난 ’97년 10월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주최한 경영자조찬세미나에서 한국금융연구원의 양남하 교수는 부실.도산 기업에서 나타나는 주요 징후를 발표했다.  그는 최근의 경기침체를 이겨내지 못하고 부실기업이 양산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형 부실기업 자체 진단법’을 발표했다.  그는 강연에서 “중역들이 지각을 많이 하거나 책상 위에 서류가 수북히 쌓여 있는 기업은 대개 실적이 나쁘고, 공장 내에 사무용 책상이 많거나 화장실이 더러운 회사는 비능률적이고 품질이 나쁘다.  또 손님을 응접실에서 오래 기다리게 하거나 책상서랍 속에 화장품, 위스키 등을 넣어두는 곳은 부실기업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 밖에도 중역 수와 거래은행이 많고, 똑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중역마다 다르며, 판매사원들이 회사 내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고, 종업원들이 뒤에서 간부 욕을 하는 회사가 부실기업이라고 했다.  그는 또 친족을 임직원으로 채용하고 회사 차를 사적인 용도로 쓰는 경영자나 화려한 응접실을 갖추고 외부 명예직을 좋아하는 등 허영병에 걸린 경영자도 부실 경영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의 분석에 비추어볼 때 일반 회사와 교회의 근본적 차이는 있겠지만, 상당히 유사한 점도 있기 때문에 기업의 도산 형태를 통하여 교회의 쇠퇴 원인과 처방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미래 교회에 대한 일반적 예측은 교회의 쇠퇴나 교회의 통폐합, 또는 교회의 폐쇄 등으로 집약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측을 반전시키기 위하여 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목회자는 위와 같은 분석을 통해 미래 사회에 교회가 생존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목회자의 지도력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지도력을 키워나가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결국 미래 교회는 지도자의 지도력에 따라서 존폐의 여부가 결정지어질 것이며, 따라서 지도자의 지도력은 교회의 생존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이 될 전망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권위적인 목회의 틀을 벗어나서 지도력 있는 목회로 전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