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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목회자원, 이렇게 캐내쓴다

好學 2010. 4. 25. 21:23

 

 

5부  목회자원, 이렇게 캐내쓴다

 

 


  구약에서 은혜, 자비와 같은 말들은 여성의 육아 행위, 여성의 신체 기관을 언어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서 하나님의 성품에는 전투성, 호쾌함과 아울러 여성적인 섬세함과 모성애적 관심이 함께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 목회는 다른 어떤 세대에서보다도 여성적 민감성, 연약함, 심미안이 필요하다.  목회가 교회 안 여성에게서 나오는 영적 에너지를 수렴하고 거기서 통찰과 참신성을 확보할 때,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교회, 전세계 교회의 경험과 신앙고백에서 배우고 그 큰 물결에 합류하는 교회로서 든든히 자리 매겨져갈 것이다.

 

206. 남성중심의 교회에서 남녀평등의 교회로 전환하라

   여성은 우성(優性)인가
   ‘10퍼센트 법칙’이 있다.  일반적으로 남성은 모든 면에서 여성보다 10퍼센트 크다.  남성의 키는 여성의 키보다 10퍼센트 크고, 남성의 팔 길이는 여성의 팔 길이보다 10퍼센트 길며, 남성의 몸무게는 여성의 몸무게보다 10퍼센트 무겁다.  또한 남성의 손이나 발도 여성의 손이나 발보다 10퍼센트 크다.  뿐만 아니라 남성의 밥그릇의 용적은 여성의 것보다 10퍼센트 크고, 젓가락이나 숟가락의 크기도 10퍼센트 크다.  이에 따라 손수건, 우산, 만년필 등 여성의 용품들은 일반적으로 남성의 것보다 10퍼센트 작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성이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10퍼센트 더 오래 산다는 것이다.  작년 통계청에서 발표한 ’95생명표’ 에 따르며, 남자의 평균 수명은 69.5세인 데 비해 여자의 평균 수명은 77.4세이다.  네덜란드의 의사 보이텐디크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태중 사망률에서도 남아가 여아보다 무려 25퍼센트나 높다.   하나님께서 몸이 작고 적게 먹는 사람이 오래 살게 하신 것은 이 지구에 대한 은총이다.  학자들은 작은 여성이 큰 남성보다 오래 살고, 적게 먹는 여성들이 많이 먹는 남성보다 일에 대한 효율성이 더 크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여성은 환경이나 주변 조건에서 남성보다 강인하고 저항력이 강하다.
  한국 여성들은 옛부터 손이 발달하였고 손으로 모든 일을 했기 때문에 손재간이 뛰어나다.  우리나라는 전자산업, 섬유산업, 반도체산업 등이 발달하였는데, 특히 이런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손재간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이처럼 손이 발달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주방기구라는 것이 따로 없었다.  주방기구라야 겨우 주걱 하나 정도이다.  그 외에는 모두 손으로 해결한다.  밥을 할 때나 반찬을 만들 때나 우리나라 여성들은 거의 다 손으로 한다.  또한 어머니의 손은 약손이다.  아이들에게는 정말 약처럼 아픈 데가 감쪽같이 낫게 하는 손이다.  실제로 손으로 아이의 배를 문지르게 되면 손으로 자기(磁器)가 발생하여 치료효과를 얻게 된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아주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한국의 전통적 가정의 가사는 많은 양의 노동을 요구하였고 여성은 가정뿐만 아니라 농사에도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한꺼번에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 힘든 일은 주로 남성의 몫이었지만, 인내와 지속성을 요구하는 농사일은 여성의 몫이었다.  종일 땡볕에 앉아서 김을 매는 일은 남성은 엄두도 못내는 여성의 일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낸다.  전통적인 한국 여성들을 보면 아이를 등에 업고 머리에는 물동이를 이고 한 쪽 팔에는 빨래바구니를 끼고 다른 쪽으로는 빨래방망이를 들고 간다.  여성의 노동력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우수한데,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관념과 남성보다 여성이 약하다는 전통 논리에 의하여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절반 수준이었으며 교회에서도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를 받아왔던 것이다.

 

여성이 달려온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회에서도 여성이 인력의 우수성과 경영능력의 양질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실제로 여성이 경영하는 기업이 남성 경영자의 기업보다 더 건실한 면이 많이 드러나면서 여성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고 있다.  동시에 여성 스스로도 그간에 묻혀 있던 자질과 인력을 개발하여 여성이 남성보다 우수한 면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여성의 고용은 남성에 비해 낮으며 여성의 임금 수준은 남성의 60퍼센트 선에 머물고 있다.  ’97년 7월에는 여러 해 동안 남성으로 위장하여 취업했던 한 여성이 검거된 적이 있다.  위장 취업의 이유는 남성이 여성보다 많은 임금을 받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여성 고용조건의 상대적 취약점과 여성에 대한 편견은 모든 분야에 존재한다.  일반 기업체뿐만 아니라 국책연구소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국내 과학기술의 메카로 불리는 대덕연구단지 내에는 60여 개의 이공계 연구소가 있는데, 이 가운데 여자 박사가 한 명도 없는 곳도 있고 20퍼센트의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연구소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과학 연구 분야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기존의 견해가 편견임을 말해준다.
  실제로 교육부의 통계에 따르면, 자연계 고교생의 경우 수학, 과학 모두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3-4점이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96년의 경우 수리탐구Ⅰ(수학)에서 남학생은 평균29.9점(100점 만점 기준)인 데 비하여 여학생은 33.4점이었고, 수리탐고 Ⅱ(과학) 역시 남학생이 37점으로 여학생의 40.9점보다 뒤졌다.  이러한 통계 결과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여성이 지닌 선천적 요인보다 교육이나 사회적 분위기와 같은 환경적 요인 때문에 형성된 것임을 보여준다.
 
교회는 아직도 멀었는가
  이러한 편견과 사회적 선입견은 목회 분야에서 더욱 심하다.  실제로 여성의 사회진출보다 더 힘든 것이 여성의 목회진출이었으며, 아직도 여성은 목사 안수에서 제외시키고 있는 교단이 많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사회보다 더 보수적이며 성직은 남성의 역할이라는 인식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오고 있다.  내가 속해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도 이미 여성 안수가 허락되었다고는 하지만 여 목사의 업무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인색하기 짝이 없다.  여 목사는 일반 남성 목회자와 달리 단순한 목회업무를 담당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여성 안수 그 자체에 대하여 아직도 한국교회는 수구적이다.  이처럼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입장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성경적으로 여성 안수는 불가하다는 주장이다.  성경의 여러 구절, 특히 고리도전서11:3-5, 14:34-35, 디모데전서 2:11-15 등을 들어 바울의 논쟁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여성 안수를 반대한다.  그러나 바울의 논쟁 가운데는 어느 한 곳도 여성에게 안수를 하지 말라는 암시는 없다.  그리고 남성에게 안수가 허락되었다고 모든 남성에게 안수의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듯이 여성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성경에는 여성에게 안수한 흔적이 여럿 있다.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인 뵈뵈(롬16:1)는 ‘여 집사’였던 것으로 암시된다.  일꾼은 집사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의 집사는 안수직이었다.
  바울은 여성들에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하고 있지만, 바울의 가장 가까운 동역자였던 브리스길라는 당시의 최고 엘리트 목회자였던 아볼로를 데려다가 가르쳤던 것을 볼 수 있다(행18:34-36).  또한 바울이 직분자의 자격을 논하면서 “여자들도”라고 한 것은(딤전3:11) 여 집사라는 의미이다.  이 구절에서의 여자가 여 집사라는 것은 여성 안수를 현실적으로 반대하는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바울은 여성에게 가장 엄격한 지도자인 것처럼 평가되지만, 실제로 바울의 곁에는 수많은 여성 동역자들이 함께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이 문안하기 원하는 복음의 일꾼들 가운데는 유난히 여성의 이름이 많이 거명된다.  더구나 바울은 여성들의 이름을 들며 그들을 치사하는 수식어들로 그들의 이름을 장식한다.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1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3절),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6절),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12절) 등 이런 수식어들은 이들이 바울의 좋은 동역자일 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에 잘 알려진 유력한 일꾼들이었음을 암시한다.
  빌립보서 4:2에서도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함께 힘쓰던 부녀들”이라고 했다.  바울의 여성에 대한 편견이 한꺼번에 불식될 수 있는 구절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는 말씀이다.  바울은 인종이나 신분이나 성별의 차별을 과감하게 철폐한 평등사상가였다.  실제로 그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자신은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버리고 오네시모와 같은 종에게 복음을 듣게 하여 주인에게 돌려보내었으며, 위에서 열거한 수많은 여성들과 동역의 관계에서 사역했다. 

 

여성 안수, 정말 안 되나
  미래 교회가 여성 인력을 개발하여 목회적 자원으로 활용하며, 성경이 말하는 대로 남녀가 평등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구성하고 섬기게 하기 위한 과제를 크게 두 가지만 제안하려고 한다.
  첫째, 교회는 은사 활용에서 남녀 차별의식을 없애야 한다.  안수는 하나님께서 특정한 인물에게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공중 앞에서 인정하는 의식이다.  한국교회가 여성도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여 그들을 신학교에 입학시키고 실제로 사역에 동참시키고 있으면서도, 공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의식을 하지 않는 것은 모순적이다.  남성들은 여성들의 은사를 차별하지 말고 하나님의 소명으로 인정해주어야 하며, 여성들은 스스로 그 은사를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  많은 교회들에서 여 교역자의 역할은 아직도 남 교역자의 역할에 종속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불균형과 차별을 속히 없애야 교회가 사회의 민주화를 선도할 능력을 가지게 된다.
  둘째, 교회는 여성의 기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효율성 있는 여성의 역할을 개발해야 한다.  여성은 섬세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성만이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이것을 개발하여 여성의 잠재적 자원을 활용하게 되면 목회의 효율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  업무는 지위(position)와 기능(function)이 동시에 주어져야 하는데, 그동안 한국교회 여성들에게는 지위는 없고 기능만 있었다.  이런 여성들에게 지위를 준다면 그 기능의 효율성이 증대될 것이고 교회가 건강해질 것이다.  여성만이 제공해줄 수 있는 기능이 있으므로 여성 고유의 역할을 개발하면 여성 개인에게나 교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며, 교회의 성장에 기여하는 기능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신세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남녀성별 구분의 모호성(trans-border)이다.  신세대들은 남녀의 기능을 성별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다.  오래 전까지만 하더라도 남자는 ‘바깥 사람’, 여자는 ‘안 사람’이라는 분명한 구분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남자나 여자나 모두가 바깥 사람이고 모두가 안 사람이다.  남편보다 돈을 많이 버는 아내도 얼마든지 있으며 아내보다 먼저 퇴근 하여 가사를 돌보고 밥을 지어놓고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도 얼마든지 있다.
 
여성이 움직여야 교회가 큰다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 증대와 여성 성직자의 증가는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목회적 변화와 새로운 추세들이 발생하게 된다.
  첫째는 목회의 역할을 좀더 폭넓고 유연하게 정의하게 된다.  여성들이 성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개방적이고 다양한 목회 사역을 만들 수 있는데, 미래 목회는 현재의 목회 패러다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 될 것이 분명하므로 여성들의 성직 참여는 새로운 형태의 목회를 창출해 낼 것이다.  목회에서는 여성만이 참여하는 특정직을 두지 않는 게 좋다. 또한 여성 전문직이라는 용어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고는 목회에서 페미니즘을 유발할 뿐 아니라 남성을 제외시키는 또 다른 형태의 성차별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여성 성직자의 증가는 교회의 공동체와 비형식적인 양육이 강조되고 발전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성 지도자들은 프로그램이나 구조보다 양육과 인간적 접촉을 더 강조한다.  여성 목회자들이 목회하는 교회는 남성 목회자의 교회와 많은 차이가 있다.  여성 목회자의 설교는 좀더 인격적이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실제적인 설교가 많고 교회의 의사 결정에 회중을 참여시키는 경향이 많다.
  셋째로 여성 성직자와 신학자의 증가는 세계에 대한 유기적, 생태학적 관심을 높인다.  여성들은 환경이나 소외 계층에 대해 섬세한 관심을 가지므로 이러한 문제가 민감한 신학적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넷째, 여성 성직자의 증가로 평신도 사역의 증대를 도모하게 된다.  수적으로 여성이 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50퍼센트 이상이며, 더구나 활동적인 교인의 80퍼센트 이상이 여성들이다.  여성 성직자는 이러한 평신도의 동력화에 유리하기 때문에 평신도 사역이 활성화된다.
  다섯째, 여성 성직자의 증가는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는 교단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여성 안수를 시행하는 교회들은 은연중에 여성 안수를 거부하는 교회들에게 압력을 가하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전망하면서 한국교회의 거대한 잠재 인력인 여성을 교회의 성장에 활용하고, 사회의 변화에 걸맞게 평등한 사역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여성만이 가진 섬세한 기질이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길을 열어놓는 것이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는 중요한 과제이다.

207. 전통교회건축 양식에서 새로운 교회 건축양식으로 전환하라


감히 의자에 앉아 예배를
  교회가 공간이나 구조물을 조정한다는 것은 때로는 보수와 혁신간의 갈등이 있을 수 있으나 결국은 목회자의 소신과 철학에 따라 조정되어야 한다.  내가 섬기는 연동교회에는 소예배실이라고 부르는 공간이 있다.  주로 학생들이 예배처로 사용하는 방이며 평일에도 많지 않은 수가 모일 때는 가장 적절한 크기의 방이다.  이 예배실을 작년 여름에 새롭게 내장했다.  별로 크지 않은 방을 새롭게 꾸미는 데 6,000만 원 이상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편리하게 꾸몄다.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배려를 해 준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쓰는 방을 최고로 꾸며 주고 싶었다.
  평소에 나는, 교회가 어른들이 예배드리는 본당은 최고로 잘 꾸며놓고 아이들이 예배드리는 교육관은 적당히 꾸며놓는 데 불만이 있었다.  본당은 겨울에는 난방이 되어 있고 여름에는 냉방이 되어 있지만, 교육관은 겨울에는 냉방이 되어 있고 여름에는 난방이 되어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런 교육관 분위기에서 아이들에게 좋은 예배의 모범을 가르치기가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예배실을 꾸미는 데는 교회의 예산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예상외로 많은 교인들이 협조하여 예쁘게 단장하고 마무리할 수 있었다.  천장은 평면이 아니라 각을 지게 하였고 등은 길쭉한 형광등이 아니라 동그란 백열등으로 간접 조명으로 꾸몄다.  강단에는 전동 스크린을 달고 천장에는 고급 액정비전을 달아 언제든지 비디오를 볼 수 있게 했다. 연극 등 공연 시에 필요한 무대 막을 만들어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도록 창문 뒤에 숨겨놓았다.  모든 공사가 마무리된 다음 첫 번째로 맞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나서 어떤 아이가 내게 달려와 팔에 매달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참 좋아요. 카페 같아요.” 아이들이 좋다는 것은 예배당이 예배당 같아서가 아니라 카페 같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분위기에 맞는 예배실을 원한다.  교회가 자기들의 분위기에 맞는 예배실을 마련해주고 자기들의 정서를 이해해주었다는 한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그들은 좋아한다.

 

지나친 엄숙주의
  우리나라 교회들의 예배당은 너무 예배당 같은 흠이 있다. 더구나 아이들이 예배드리는 장소인 소예배실까지도 너무 예배당 같은 보수성이 있다.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사회복지관을 건립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우선 대지를 확보하고 빠른 시일에 건축 기공을 하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복지관에 꼭 포함되었으면 하는 공간들이 몇 개 있다.  지역주민을 위한 장례식장을 하나 만들어주고 싶고, 환경미화원들의 세탁과 휴식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방과 청소년들을 위한 농구장, 청년들을 위한 북카페, 노인들을 위한 노인정, 지방 학생들을 위한 학사, 그리고 언제나 공연이 가능한 작은 극장을 만들어 주고 싶다.
  이런 모든 공간들은 너무 단순하지도 않고 너무 복잡하지도 않아 모든 지역주민이나 교인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기존의 교회 건축물들이 너무 배타적이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들어오기조차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배타성을 없애고 누구나 편히 들어올 수 있고, 복지관에 들어오면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경직성보다 들어와서 그저 편안히 쉴 수 있다는 느낌만을 우선 주고 싶다.
  그러므로 교회건축은 철저하게 건물 자체보다 먼저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 웨어를 개발해야 한다.  같은 공간을 가지고도 다양하고 효율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월등한 시설을 가지고도 프로그램 개발을 하지 못하는 교회가 있다. 문제는 공간이 아니라 내용이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교회의 건축물은 목회자의 신학이자 목회철학이며 교인들과 지역사회에 주는 메시지이다.  교회가 어떤 건물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공간을 가지고 있는가는 목회자가 주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우리 교회에는 두 개의 특징적인 공간이 있다.  하나는 역사실(歷史室)이고 다른 하나는 재활용실(再活用室)이다.  사료실은 1894년부터 최근까지의 교회의 모든 역사 자료들을 진열한 방이다.  100여 년 동안의 교회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비교하여 도표를 만들어두었고, 그간의 사진, 당회록, 주보, 교인명부 그리고 거쳐간 인물들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방은 새신자들이나 주일학교 학생들, 그리고 손님들이 와서 교회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방을 만든 이유는 한국교회의 어머니 교회 가운데 하나인 연동교회의 역사를 보존하고자 하는 목회자의 철학 때문이다.
  재활용실은 내가 21세기를 연구하면서 만든 방이다. 미래 사회의 중요한 한 특징은 일회성의 발달인데,  사람들은 한 번 쓰고 버리는 일에 너무나 익숙해질 것이다.  최근에 와서 자원을 많이 낭비하게 되는 또다른 이유는 주거문화의 변화에 연유한다.  광이 있어서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 아파트문화가 정착되면서 허드레물건을 넣어둘 공간이 없어지면서 그냥 버리게 된다.  그러나 물건을 쉽게 버리게 되는 미래 현상은 자원의 문제를 발생시키고 교회가 추구하는 경건과 절제의 운동에 역행한다.  그래서 교회는 절제운동에 앞장서야 한다는 취지에서 우리 교인들의 자원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가정에서 쓰지 않는 물건을 가지고 올때는 빨고 고쳐서 가지고 오는데, 그 물건을 가지고 갈 사람이 바로 쓸 수 있도록 한다.
  물건을 가지고 갈 때에는 500원씩 돈을 내게 하는데, 그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재활용품을 공짜로 갖기를 꺼린다고 해서 적은 돈을 내더라도 사 가지고 가게 한다.  그러면 “싸게 샀다”. 고 생각하기 때문에 좋아한다.  한해 동안 재활용실 운영으로 생기는 수입도 상당한 액수에 이른다. 이 돈은 다시 노인들을 위한 급식에 사용되기도 한다.  이 방은 주일에 가장 붐비고 재미있는 방이 되었다.  어쨌든 이러한 공간들에는 목회자의 철학이 숨어 있고 이 방을 통하여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교회의 모든 공간은 목회자의 철학과 메시지를 전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이전까지는 교회 예배당이 사람이 들어가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지만, 이제는 예쁜 공간, 편리한 공간, 다양한 기능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분위기가 있는 공간을 원한다.  마치 이제는 자동차의 구매욕구가 달린다는 단순 기능이 아니라 디자인과 안전성 등에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교회- 십자가 첨탑?
  어떤 유형이든 교회 건축에는 목회자의 확고한 신학과 철학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  교회의 건축은 건축물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건축물을 통하여 목회자가 교인들에게나 사회인들에게 주고자 하는 목회자의 메시지가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건축은 교회의 목적도 아니며 교회의 최고의 사명도 아닌데, 마치 교회 건축을 목회의 목적처럼 여기는 경우가 이따금씩 있다.  교회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부동산 투자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듯이 교회의 건축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크게 확장하고 많은 돈을 들여 건축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왜곡된 의도로는 교회 건축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무리한 생각 때문에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복음전파, 사회봉사, 친교 등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반드시 하지 않아도 될 건축에 교회의 전 에너지를 소모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은 자신의 능력에 맞게 해야 하는 것이 건축인데,  지나친 과욕으로 다른 교회에 폐를 끼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무리하게 교회를 확장하기 위하여 필요 이상의 대지를 구입하거나 건축을 시작한 뒤 감당하지 못하여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교회 건축을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편지의 대부분은 “믿음으로 시작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이 다른사람에게 해가 된다면 그것은 바른 믿음은 아닐 것이다.
  또 지나치게 크게 건축하려는 의도가 자칫 교만으로 변질되기 쉽고 미래적 전망에서 볼 때 보존과 관리가 더 큰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가 자체 건물 보존에 지나치게 많은 경비를 소모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일 수는 없는 것이다.  교회 건축은 건축 자체보다는 지속적인 보존과 사용가치가 더 중요한 문제로 고려되어야 한다.  서구의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가 이제는 하나의 관광지로 변하고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구경하는 관광자원으로 변해 있는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
교회 건축은 합리적으로
  그러므로 최대 혹은 최고라고 명예심이나 허영심보다 작지만 아름답고 교회에 적합한 규모로 내실있게 건축하는 것이 실리적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그래서 교회의 공간이 웅장함보다는 친밀감을, 소비적인 것보다는 경제적인 것을 제공할 수 있도록 설계되고 건축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중요한 점은 교회 건축이 목회자 자신의 명예심 때문이 아닌지를 스스로 확인해보아야 한다.  교회 건축은 목회자에게 힘든 사역이지만 교회 건축을 완성한 다음에 느끼는 성취감이나 만족감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는 목회자의 명예심은 총회장이나 노회장이라는 소위 감투를 쓰는 지위에서 만족되는 줄 알았는데, 목회 현장에서 체감되는 명예심은 그뿐만 아니라 “내가 시무할 동안 교회를 건축했다.”라는 자부심도 극복하기 힘든 명예심이었다.
  교회 건축은 개인의 명예나 공동체의 과시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성이 고려되어야 하며,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성취할 수 있는 그릇이어야 한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너무 빨리 짓고 너무 빨리 부순다.  건축 기공에서 헌당까지가 단기간 내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졸속한 건축이 되기 쉽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주는 건축물보다 교회에 와서는 불편하더라도 참고 예배드리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강요하여 다른 공공건물보다 불편하게 만들고, 조금만 교인이 많아지고 더 좋은 교회 건물을 보게 되면 깊이 고려하지 않고 헐고 다시 짓는다.  그 결과 역사가 오랜 교회의 건물 가운데 정동감리교회와 같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건물이 그리 많지 못하다.  구미의 교회들이 장기간에 걸쳐 교회를 건축하고 동시에 수백 년 동안 그 건물이 보존되고 사용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한국교회의 건축은 상대적으로 졸속한 편이다.  교회의 건축은 좀더 장기적인 목회 계획에서 원칙이 있어야 하며, 교인이 조금 증가했다고 해서 쉽게 재건축을 위하여 해체하지 말고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교회 건축의 장기적 종합 계획의 원칙은 현실적 필요의 충족보다는 교회의 본질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일이며, 사회변동에 따른 목회자의 목회철학의 반영이며, 건물자체가 가지고 있는 가치성의 회복이다.
  교회 공간은 제한적으로 활용될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당이라고 부르는 예배실은 예배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다른 부속 공간들이 어린이들을 위해서 사용되기도 하고 연극 등의 공연에 사용되기도 하지만 본당만은 예외인 경우도 많다.  주일 오전에만 사용되는 공간들은 융통성 있게 주간에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연구하는 것도 공간의 효율적 사용과 융통성에 중요하다.  나아가서 장기적 종합 건축 계획은 지역환경에 적응하는 것이어야 하고, 사회 공익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지역사회를 위한 존재가 되어야 존재가치가 있다.  교회가 사회에 대하여 개방적일 때에 사회는 교회에 대하여 포괄적일 수 있다.  교회가 평소에 사회에 대하여 개방적이지 못하면 교회가 건축을 할 때나 교회가 사회를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자 할 때에 사회가 교회에 대하여 협조적일 수 있다.  교회가 건축을 할 때에 지역주민들의 방해를 받는 경우를 허다하게 목격하는데, 이는 평소에 교회가 사회에 대하여 개방적이지 못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교회건축의 장기적 종합 계획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다.  교회는 이 땅에 거대한 교회 건물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다.

 

208. 만족하는 교회에서 감동하는 교회로 전환하라


침체의 원인은 안에 있다
   교회성장연구소의 명성훈 박사는 나와의 대담 프로에서 미래와 미래 목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래(FUTURE)는 안개와 같이 모호하며(Fog), 도시화현상이 극대화되며 (Urbanization), 기술이 발달하고(Technology), 연합운동이 강조되며 (Unity), 종교가 발달하며(Religion), 경제가 발달하게 된다(Economy), 그는 또한 미래목회도 ‘FUTURE'라는 단어를 통하여 재미있는 목회가 되어야 하며(Fun),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Understanding), 다양한 재능을 요구하며(Talent), 유용하고(Useful), 새로운 부흥(Renewal, Revival)과 탁월함(Excellency)이 요구된다고 했다.
  지난 ’97년 8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우리나라 역대 최고 히트 상품들을 발표했다.  12명의 상품 전문가들에게 의뢰하여 상품이 기업과 소비자와 사회에 미친 영향력을 점수로 환산해 한국의 역대 최고의 히트 상품을 조사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350만 장이 팔린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반이 최고 히트 상품으로 조사되었다. 2위는 ?글, 3위는 박카스 드링크, 4위는 럭키 하이타이, 5위는 새우깡, 6위는 칠성사이다.  7위는 연속극 모래시계, 8위는 이명래 고약, 9위는 초코파이, 10위는 하이트 맥주였다. 이들 상품들은 소비자에게 강한 인상을 준 상품들이며 기업과 소비자의 호흡이 가장 잘 맞는 상품이었다.  일반적으로 경제 평론가들은 이들 상품이 고객에게 만족을 주는 차원이 아니라 고객에게 감동을 준 상품들이라고 평가한다.  이런 고객 감동의 전략이 고객에게 상품을 오래 기억하게 하고 상품 가치를 발휘할 수 있게 한다.
  한국 사람들은 주로 기업의 주인을 기업주로 생각하여 회장을 주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기업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기업주가 아니라 고객이라고 한다.  여기에 우리와 일본의 경영의 차이가 있다.
  오래 전 물자의 절대수요가 모자랄 때까지만 하더라도 상품은 만들어 내놓기만 하면 팔렸다.  그러나 이제는 상품 자체가 아니라 품질이며, 품질 또한 얼마나 고객에게 만족을 주는가 하는 문제에서 고객을 얼마나 감동시키는가 하는 문제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공급이 수요에 비해 부족하던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공급이 수요보다 많은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환경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기업은 경쟁력을 상실하고 경영난에 빠지게 되어 끝내는 도산하게 된다.

 

매력적인 교회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고객인 교인들에게 만족을 주는 차원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성장할 수 있다.  문제는 현대 교인들은 좀처럼 감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감동을 줄 만한 것이 사회에, 세상에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이다.  백화점에 즐비한 아이디어 상품들과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제 신상품들 때문에 교인들에겐 교회가 아니더라도 감동과 자극을 받을 곳이 얼마든지 많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보다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목회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기존의 목회구조를 전환할 수 있는 대체상품을 개발해야 한다.  이러한 목회자의 노력이 있을 때 교인들은 만족의 차원에서 더 나아가 감동의 차원으로까지 영적 수준이 성장한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경쟁력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대안이 필요하다.  첫째, 성직자에서 교인으로 교회의 중심 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교인이 외면하는 설교나 교회의 프로그램을 지양해야 한다.  둘째, 세계화시대를 맞이하여 교회의 목표를 한국 최고에서 세계 최고, 한국에 영향을 주는 교회에서 세계에 영향을 주는 교회로 바꾸어야 한다.  셋째, 교회의 목표나 경쟁의 수단이 양(quantity)에서 질(quality)로, 크기(size)에서 가치(value)로 바뀌어야 한다.  넷째, 기업에서 일회성 고객을 평생 고객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듯이 교인을 일회성 교인에서 평생 교인으로, 한 세대(single-generation)의 교인에서 다세대(multi-generation)의 교인으로 바꾸어야 한다.

 

마지막까지 만족시킨다
  고객의 만족은 이전에는 기능적 만족이었다.  예를 들면 이전의 자동차의 문이 잘 닫히느냐 잘 닫히지 않느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동차가 달릴 때에 문이 열리지 않게 만드는 것이 기능적 만족이었지만 요즘은 이런 기능적 만족이 아니라 문이 닫힐 때에 고객의 느낌 즉 감동을 어느 정도 만족시켜 주느냐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므로 문이 닫히는 소리와 문이 닫힐 때에 손끝의 감각이 고객을 감동시키고 품질관리에 중요하다.  독일의 포르쉐(Porsche) 자동차의 문 여닫는 소리는 세계 시장에서 유명한 고객만족의 사례이다.
  따라서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제품의 품질은 제품의 디자인에서부터 제조과정, 전달과정, 애프터서비스까지 총체적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품질은 생산현장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은 경영자에게 있다.  미국의 모토롤라(Motorola) 회사는 철저한 품질관리로 유명하다.  이 회사에서는 생산과정에서뿐만 아니라 조직 내의 전 공정, 디자인, 구매, 기술개발, 생산, 판매, 마케팅, 교육훈련까지도 품질관리의 대상으로 삼았고 통계적 관리기법을 통하여 품질을 관리했다.  동시에 회사에서는 단순히 품질관리를 운동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품질 정보 시스템(Quality Information System)을 통하여 품질에 관한 모든 것을 수집, 판단, 분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품질 불량의 요인을 제거하고 품질을 향상시켰다.
  이러한 시스템을 통하여 모토롤라는 10년 동안 90억 달러의 비용을 절감하였고 생산공정의 결함을 99.6퍼센트 제거하였고 근로 생산성도 약200퍼센트 향상했다.  품질은 기업의 생명이며 품질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기업은 생존해나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기업은 품질향상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또한 고품질은 결과적으로 저비용이며 판매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생산자는 자신의 만족이 아니라 고객을 만족 시켜주어야 하며 나아가서 위에서 말한 대로 고객의 느낌에 감동을 주는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이러한 기업의 생존방식의 변화는 교회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다.  교회도 이제는 교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제공해주는가 하는 생존의 방식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이전의 교회와 같이 문만 열면 교인들이 몰려들고 한 마디만 하면 새신자들이 등록하는 시대가 아니라 기존의 교인들도 새로운 고품질의 설교를 원하고 신선한 교회의 프로그램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는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설교와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이러한 개발은 결국 최고의 경영자인 목회자에게 그 책임이 있고 목회자의 의식전환이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고객이 기업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 여기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일본 요코하마시의 성 마리안나병원은 서비스 업종으로서 고객에게 만족을 주기 위하여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했다.  일반적으로 병원은 아픈 사람을 고쳐준다는 일방적 제공자의 입장에서 냉정한 자세로 고객인 환자를 대하기 쉽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불편한 환자가 앉아 있어야 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강한 직원은 서야 하는데 병원은 반대가 되어 환자는 서 있고 직원은 앉아 있다.  이런 상식을 이 병원은 바꾸어주었다.  5퍼센트의 개선이 50퍼센트의 혁신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기존의 틀을 그대로 두고 바꾼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이 병원은 이러한 기존의 틀을 깨트려 환자들을 접수실에 앉게 하고 직원들이 서서 접수를 받게 했다.  이 외에도 병원 실내의 모든 문턱을 없애고 복도의 넓이를 두 대의 침대가 스치지 않게 지나가게 만들었고 환자용 전화의 높이를 환자의 상태에 따라 조절하게 하는 등 고객 만족의 차원에서 개선했다.

목회자가 나서서 만족시켜라
  이렇게 고객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최고경영자가 이에 대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최고경영자의 의지는 전 사원에게 전달되어 전사적인 고객 만족의 분위기로 번지게 될 것이고 실제로 고객은 만족하게 된다.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로 목회자가 교인에게 만족을 줄 수 있도록 의지가 있어야 하며 전 교인이 이에 함께 참여하게 될 때에 전사적 만족에서 감동으로 전환된다.  우선은 내부 고객인 기성교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불편을 느끼지 않게 만들어주어야 하며 이러한 내부 고객의 만족은 결국 외부 고객인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자연히 만족을 줄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최대한 편리하고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만족할 수 있는 물질 영적 공급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교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만족을 줄 수 없다면 감동도 줄 수 없다.  만족을 주지 못하지만 감동은 준다는 말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감동이 없어지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세상으로 변했다.  감동이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감동이 필요하며 감동이 없는 사람들이 감동을 원하게 된다.   교회행정학에서는 목사를 ‘전문 관리인’(professional manager)이라고 한다.  목회자는 전문 관리인이므로 교인이 생각하고 제안하기 전에 교인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목회자가 교회와 교인의 전문 관리인이라면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관리적인 측면에서 만족을 주는 목회를 넘어서서 교인들을 감동시키는 목회를 해야 한다.  좀처럼 감동하지 않는 현대인은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 감동한다.  기독교의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감동하지 않을 것 같은 교인이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 감동하고 이런 감동의 원천은 모든 교인들에게 동일하다.  감동이 있는 교인이 생동하고 생동하는 교인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순간순간 교인을 감동시키는 감동자가 되어야 하며 감동이 있는 교회가 감격시대를 살게 된다.

 

209. 한국교회에서 세계교회로 전환하라


새로운 대양(大洋) 시대
  이미 세계는 환태평양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500년 전 세계의 중심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근 대서양 중심의 세계 정치와 경제는 태평양 중심으로 옮겨졌다.  미국은 동부와 서부가 큰 바다와 연해 있다.  동부에는 대서양, 서부에는 태평양이라는 큰 바다와 연해 있는 거대한 대륙인 것이다.  대서양 중심의 시대일 때 미국은 동부가 발달했다.  그래서 미국 동부는 학문이 발달하고 유럽의 전통을 유지하려는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많이 밀집되어 있고, 서부에는 전통보다 캐주얼한 의식을 가진 다민족이 밀집되어 있다.  그런데 대서양 시대에는 동부가 발달하고 흥왕했지만, 그 기운이 서서히 서부로 이동되고 있다.  이는 태평양 시대가 열렸다는 증거다.  미국은 대서양에는 뉴욕, 태평양에는 로스앤젤레스라는 큰 항구를 가지고 있는데, ’95년 4월 이전에는 뉴욕이 가장 교역량이 많은 항구였지만 그 이후부터는 로스앤젤레스로 바뀌었다.  이것은 대서양 시대에서 태평양 시대로의 전환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였다.
  세계의 역사는 바다를 중심으로 발전한다.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긴 역사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고대의 그리스와 중세의 로마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역사를 발전시켜온 것이다.  그러나 근세로 옮겨가면서 역사의 중심은 대서양이 되었다.  대서양을 중심으로 한 에스파니아, 영국 그리고 대서양 반대편의 미국이 새로운 역사의 중심지가 되어 수백 년 동안 세계 역사를 이끌어 왔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세계 역사의 중심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현재 역사의 중심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이동되고 있다.
  혹자는 한국이 21세기의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확증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어 설명한다.  “세계는 반도국가와 섬나라, 대륙국가가 순회하면서 역사를 이끌어가게 된다.  대륙국가인 바벨론과 바사가 세계를 정복한 이후, 반도국가인 로마가 세계를 지배했다.  섬나라인 영국은 근대에 접어들면서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고, 다시 대륙국가인 미국이 세계를 지배한다.  대륙국가 다음에 세계를 지배할 나라는 반도국가인데, 이 반도국가가 바로 한국이다.  태평양 시대 그리고 동북아시아 시대의 반도국가는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은 21세기에 세계의 중심국가로 부상한다.”
  토플러는 “미래의 세계는 동북아시아의 쌀을 먹는 민족이 지배하게 된다.”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동북아시아의 쌀을 먹는 민족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미래 산업이라고 하는 나노 기술(Nanotechnology)은 작게 만드는 기술이기 때문에 섬세한 손을 가진 민족이 유리하다.  현실적으로 보아도 미래 기술은 작게 만드는 기술인 것을 알 수  있다.  기계는 점점 작아지면서 기능은 다양해진다.  이미 손목시계에 팩스와 전화의 기능을 넣는 기술이 개발되었고 컴퓨터의 기능을 가진 핸드폰도 만들어졌다.  탄소 반도체의 개발로 컴퓨터도 작게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모든 기계가 작은 것으로 변한다.  이런 나노기술은 손이 작고 손기술이 발달한 민족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우리나라는 손이 발달한 민족으로 꼽힌다.
  미래학자들이 한결같이 21세기에는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예견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는 한국과 중국과 일본을 가리킨다.  이 세 나라는 전통적으로 젓가락을 사용하는 민족인데,  젓가락을 사용한다는 것은 손이 발달했다는 뜻이다.  또한 이 세 나라 가운데 가장 긴 젓가락을 사용하는 민족은 한국인이다.  우리는 긴 젓가락을 사용할 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이 갖지 않은 쇠젓가락도 사용하며, 소풍 가서 젓가락이 없어도 나뭇가지 둘만 있으면 식사를 해결할 만큼 손이 발달한 민족이다.  손이 발달했기 때문에 “손이 모자란다”, “손 좀 빌려야겠다”, “그 일에 손 뗐다” . “손 쓸 겨를도 없다”, “저 사람 손 좀 봐야겠다”, “내 손안에 있소이다”, “손 위의 사람, 손아래 사람”등 손이란 단어를 넣어 표현하는 말이 풍성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손이 발달했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만져보려 한다.  예로부터 포목상에는 만져볼 수 있는 옷감을 따로 준비할 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꼭 만져봐야 산다.  수박을 살때도 손으로 두드려보고 사는 것이 우리의 관습이며, 손이 지나치게 발달하다보니 몇 마디 말을 하다 안되면 서로 멱살을 쥐고 주먹질을 한다.  우리 민족은 입보다 손이 발달했기 때문에 대화보다 손이 앞서는 민족인 것이다.

 

우리에게 온 기회
  위와 같은 여러 가지 미래적 현상과 세계사적 흐름을 보면, 한국은 미래에 세계의 중심으로 주목받을 만한 여건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한국은 21세기에 세계의 중심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중심 국가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아무리 중심 국가가 될 여건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준비하지 않으면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도 한국이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될 때에 세계의 중심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세계화시대를 맞이하여 한국만의 교회가 아니라 세계교회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세계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자세가 필요하다.
  첫째, 한국교회는 세계교회를 배워야 한다.  역사는 중요한 하나님의 섭리를 배우는 교과서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역사를 배워야 하며 특히 유럽교회의 번성과 쇠퇴, 그리고 많은 미국의 교회가 쇠퇴하는 이유와 더불어 성장하는 미국교회들의 사례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둘째, 한국교회는 세계화 시대에 걸맞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세계화’란 영어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변화와 역사의 변천을 아는 것이다.  세계는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하나의 집단이므로 세계교회의 하나로서 한국교회를 볼 수 있어야 하며, 세계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세계를 보는 감각을 길러주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셋째,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에 채무자의 의식으로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외국의 교회들로부터 복음을 받았고 신문화와 신기술을 전수받았다.  이제 한국교회는 우리가 받은 대로 다른 나라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선교사를 배출하여 세계 복음화에 공헌하는 것도 중요하며, 학문과 기술을 가르치는 것도 빚진 자로서 중요한 일이다.  요즘 서양의 선교사들이 많은 나라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의 선교사들이 세계 선교에 공헌할 수 있는 공간이 더 많다. 더구나 한국의 여권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거의 없는 좋은 기회를 맞이하여 세계화 시대를 세계 선교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넷째, 교회의 세계화가 국가의 세계화를 주도할 수 있도록 교회가 세계화 노력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쉬운 것은 그동안 교회가 세계화 흐름에 가장 뒤져 왔다는 점이다.  이미 사회는 세계화를 준비하고 무한 경쟁 시대에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교회는 아직도 그 행보가 느리다.  과거에 한국의 근대화를 교회가 주도하였고 교회가 가장 먼저 개화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다시금 교회가 사회의 세계화를 이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초연구의 빈약상
  110년의 개신교 역사 가운데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에서 인정을 만한 좋은 교회와 목회자를 많이 배출했다.  그러나 세계적 목회자를 많이 배출한 한국교회가 상대적으로 세계적 신학자는 많이 배출하지 못했다.
 이제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한국 신학은 세계적 신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교리적이고 교파 지향적인 종래의 신학 교육은 초교파적이고 에큐메니칼 지향적인 미래의 신학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또 성경적. 역사적 지향성의 종래의 신학 교육은 성경적. 상황적 지향성의 미래의 신학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성경적. 본문비평적 분석의 종래의 신학 교육은 사회. 인류학적 분석의 미래의 신학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한국 신학이 세계화에 공헌할 수 있는 여건은 서양보다 훨씬 낫다.  왜냐하면 위에서 서술한 대로 성경은 히브리적 관습에서 기록되었으며 히브리적 사유로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동양적 생활습관에 익숙한 우리가 서양 사람들보다 성경해석이 더 용이하다는 것이다.  특별히 최근에는 문화인류학적 성경해석이 발달하면서 헬라적 사유보다 히브리적 사유에 가까운 우리가 성경해석에 유리하다.
  나는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하면서 ‘문화인류학적 성경해석학’이라는 과목을 공부했었다.  ‘문화인류학적 성경해석’을 전공한 교수는 성경을 인류학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설교나 성경공부에 많은 유익이 되었다.  한 번은 수업시간에 그 교수가 갑자기 “나는 왜 요셉이 만삭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갔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하셨다.  그때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동양에는 주소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본적이고 다른 하나는 현주소입니다.  요셉의 본적지는 베들레헴이고 현주소는 나사렛입니다.  동양에서는 호적은 반드시 본적지에서 합니다  요셉은 호적을 하기 위하여 본적지인 베들레헴으로 간 것입니다.” 그때 교수님은 그런 게 있었느냐며 박수를 치면서 좋아하셨다.  서양인들은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본적지로 간 이유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또 다른 수업시간에는 ‘탕자의 비유’를 문화인류학적인 시각에서 해석해주었다.  탕자의 비유에는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어머니가 없기 때문에 둘째 아들이 버릇이 없어졌고 이기적이 되어 자신의 분깃을 가지고 나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동양적 사유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아들에게 유산을 주지 않는다.  당시 분깃을 달라는 것은 아버지에게 빨리 돌아가시라고 하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분깃을 주는 일은 동양에서는 아버지의 일이 아니라 어머니의 일이다.  아들이 다른 도시에서 방탕하게 살 때에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아들이 돌아올 때에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아버지가 아무리 돌아오는 아들이 반가워도 뛰어나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지는 않는다. 반갑지만 오히려 화난 척하면서 안방에 뒤돌아 앉아 있는 것이 동양적인 아버지상이다.  그리고 당신의 관습으로는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푸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 아니라 어머니의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어머니이며 이는 하나님의모성애를 상징하는 비유이다.
  이 외에도 우리에게 유리한 요소들이 많이 있다.  따라서 우리의 신학, 우리의 목회를 세계화할 수 있는 다양한 요인들을 개발하여 세계화 시대에 우리 교회가 세계적인 교회가 되게 하는 노력이 요청되고 있다. 세계화는 요란스럽고 거창한 작업이 아니라 아주 작은 부분에서부터 시작되는 우리 주변의 이야기이며 작아보이지만 큰 과제이다.  이제 한국이라는 우물 안에서 벗어나 세계라는 더 넓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개념을 넓혀 세계가 우리이며 세계인이 우리인 것을 알고 세계 속의 한국, 세계교회 안의 한국교회를 창출해나가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300. 분단시대의 교회에서 통일시대의 교회로 전환하라

사람의 분열, 하나님의 통일
  통일은 우리 민족의 정치적 과제일 뿐만 아니라 선교적 과제이다.  한반도의 통일이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려울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분명히 통일은 불시에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때를 위해 교회가 준비하여 통일을 앞당기고 통일 이후 혼란을 극소화해야 한다. 교회가 통일을 앞당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통일 운동의 최전선에 나서야 할 당위성은 충분하다.
  우선 통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손 안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37:17, 22)고 증거하고, 그리스도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엡2:14-16)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각이나 정치적 이념이나 국제적 여론에 의해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둘째, 통일은 신앙 운동이다. 성경은 철저하게 애국과 신앙을 일치시킨다.  우리나라의 통일운동이나 북한돕기운동에 투신하며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의 대부분은 그리스도인이다.  환경운동에 몸을 바치며 사명감을 가지고 봉사하는 분들도 마찬가지다.  환경운동도 사회운동이 아니라 신앙운동이다.  사회학적 접근이나 인류학적 접근은 한계가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땅을 정복하고 생물을 다스리는”(창1:28) 권리와 사명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속적으로 환경운동을 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환경운동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더 잘할 수 있다.  또 실제로 이런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자들의 80퍼센트가 그리스도인이다.

 

통일은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선교적 사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한 가지 재미있는 특징은 사고는 집합적인데 실생활은 개인적이라는 점이다.  집합적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언어에는 ‘나’라는 일인칭 단수보다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가 많이 사용된다.  또한 조금만 관련이 있어도 곧잘 ‘회’를 조직한다.  그래서 초등학교 동창회를 비롯하여 화수회, 종친회, 각종 계 모임, 재향군인회 등의 동질형 집단들이 많이 생겨나고,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와 같은 구호도 만들어진다.  나와 조금만 관련되면 한없이 관대하고 나와 관련되지 않으면 한없이 인색하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활을 감추기 위해, 통일하지 않아도 되는 때에 통일을 강조한다.  가령 여러 명이 음식점에 갔을 때도 처음 주문하는 사람의 주문이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첫사람이 설렁탕을 주문하면 둘째 사람은 “통일!”을 외치고 나머지 사람들은 선택권도 없이 통일된 메뉴에 따라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통일은 통일이 되지 않기 때문에 통일을 위장하는 것일 경우가 많다.
  한민족은 하나라는 당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인 통일의 장애요소는 많다.  최근 신세대들의 통일관은 기성세대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기관인 월드리서치가 ’97년 6월에 조사 발표한 청소년의 통일관을 보면, 통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34퍼센트에 불고했으며 가능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좋다는 응답자가 41퍼센트였다.  반면에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응답자가 10.4퍼센트, 통일되는 것이 싫다는 응답자도 14.6퍼센트나 되었다. 이러한 응답은 분단 반세기가 가까워지면서 분단시대의 신세대들이 “꿈에도 소원은 통일”을 부르는 기성세대와 통일에 대한 견해차가 뚜렷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청소년들은 또 북한 주민을 동포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79퍼센트가 긍정적인 응답을, 21퍼센트가 부정적인 응답을 했다.  이들 중 북한동포돕기 모금활동에 용돈을 모아 성금을 낼 의향이 있다는 응답자는 58.5퍼센트였고, 의향이 없다는 대답도 41.5퍼센트로 상당히 높게 집계되었다.  성금을 내지 않겠다는 응답자들은 39.8퍼센트가 용돈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여 개인주의적인 신세대의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 이 리서치의 응답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싫어하는 나라로 일본을, 두 번째로는 북한을 꼽았다.  신세대들의 이러한 통일관은 우리나라의 통일교육에 허점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이러한 사고가 결국 북한동포돕기에도 장애가 되고 나아가서 현재와 같은 분단 상태가 지속될 경우, 민족의 염원인 통일이 요원해질 것이라는 우려를 낳게 한다. 그래서 통일 이후에 예상되는 여러 가지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통일은 빠를수록 좋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노래는 ‘소원’이라 부르지만
  실제로 통일 연습은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통일을 위해 한국교회는 우선 가난해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에 따르면, 북한의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은 남한의 10.3퍼센트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1만 달러 시대를 살고 있던 우리가 통일이 되면 다시 6천 달러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IMF 위기 이후 이미 한국은 6천 달러 시대로 되돌아가 있는 상황이어서 현실적으로 통일은 남북한 모두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다.  이런 과다한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 없으면서 안일하게 통일만 외쳐대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헨켈 독일경제인 연합회장은 한국의 통일비용은 사회간접자본 부분에만 약1천 3백80억 마르크(약70조원)가 소요될 것이라고 했다. 또 현재의 북한의 생산성을 남한의 40퍼센트 선까지 끌어올리는 데만도 2백 50조원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통일 비용이 얼마나 엄청난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 비용이 분단 비용보다 싸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런 일이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21세기를 맞이하는 한국교회가 남북 평화통일의 전위(前衛)가 되기 위해  해야 할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가 먼저 화해의 마음을 가지는 일이다.  성경은 야곱과 에서의 화해 장면을 보여준다.  인간적으로 에서는 야곱을 용서할 수 없고 만날 수 없었지만 모든 것을 용서하고 만나게 된다.  에베소서1:10에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있다.  통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하나님의 일이며 통일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통일을 위해 교회에 주어진 중요한 과제는 가난해지는 연습이다.
  셋째, 교회의 일관된 대북 정책이 필요한 때이다. 
  교회의 북한에 대한 정책의 최종 목적은 ‘남북 통일을 통한 북한의 복음화’이다.  우리와 서방이 지원하는 식량이 군량미로 쓰인다는 의혹도 있고, 돕지 않아야 북한의 붕괴를 앞당긴다고도 하고, 북한의 군비를 축소하면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이 얼마든지 먹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북한 동포들의 기근 가운데 있고 우리는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넷째, 교회는 통일에 앞서서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
  다섯째, 증가하는 북한 이탈 주민들에 대해 교회는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기득권 포기
  여섯째, 교회는 통일 이후 시대를 대비하여 북한의 교회를 재건할 재원과 구체적인 방안을 준비해야 한다.
  북한교회를 재건하기 위하여 이제는 교단과 교파가 새로운 경쟁체제로 돌이비하여 또다시 소모적인 경쟁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를 재건할 수 있도록 연합정책을 세우는 일이 시급하다.  북한에 가서 다시 또 이전과 같은 교파간의 경쟁과 분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북한교회 재건은 통일을 위한 1차적 업무가 아니라 2차적 업무라는 것이다.
  일곱째, 북한의 기근과 각종 질환에 대해 교회는 적절한 구호에 앞장서야 한다.
  여덟째, 통일 후를 겨냥한 교회의 연합된 정책이 필요하다.
  아홉째, 교회는 통일을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열째,  교회는 통일 이후에 발생할 갖가지 예상 시나리오를 만들어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는 기구를 구성해야 한다.
  ’97년 4월의 보고에 따르면, 북한의 인구는 2천 백만 명에 이른다.  이 인구는 우리의 미래 목회의 대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21세기에 통일 한국이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될 수 있도록 한국교회는 분단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속히 벗어나 통일시대의 교회 모습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각 신학교의 재학생들과 졸업한 목사 후보생들의 수가 많아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을 이루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통일 한국 시대를 내다보시고 양육하신 일군들임을 알게 된다.  이제는 신학교 재학생들과 목사 후보생들도 분단시대의 목회자가 아니라 통일시대의 목회자로 양육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