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한국기독순교자 열전 - 김길수 목사

好學 2010. 2. 9. 20:48

 



한국기독순교자 열전 - 김길수 목사     
일제시대와 6·25동란을 거치며 한국교회는 숱한 순교자를 배출했다.
교회의 탄압을 온몸으로 막아낸 ‘믿음의 투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 이외의 절대신이 있을 수 없다며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성수주일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다.
이 가운데 해방후 행방불명돼 순교한 김길수목사(金吉洙·1905∼1949)는 복음전파 뿐 아니라 
민족운동과 청년운동,교육사업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고 또 교회의 미래를 내다보는 
선각자적인 삶을 살다간 목회자였다.김목사의 신앙엔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었고 
주일을 바르게 지키기 위해 공산정권과 맞선 것이 결국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평남 용강군 양곡면 남동리. 유복한 유교가정에서 출생한 김길수는 소학교를 마친뒤 
일본으로 유학,와세다대학 중학부를 마쳤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하기 직전 부친의 별세로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오랫만에 본 조국의 모습은 일본과 비교해 너무 피폐했다.
“지금 우리 민족에 필요한 것은 민족정신이며 청년들이 바로 서야 나라가 설 수 있다.
공부보다 민족·청년운동이 더 절실하다”
20대 초반의 청년 김길수는 고향에서 남동(南桐)학교를 개교해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족의식과 바른 사고를 깨치는 일에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조만식선생과 이상재선생등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들의 사고(思考)를 주도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신앙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뒤 
스스로 기독교인이 될 것을 다짐한다.
김길수의 개종은 집안에 큰 파란을 일으켰지만 그는 오히려 평양고등성경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에 입학함으로 기독교에 더 몰입한다.
진남포 비석리교회,평양 남문밖교회 등의 전도사를 거쳐 42년 목사안수를 받은 뒤 부임한 곳이 평양 신암교회였다.
당시 일제는 41년에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을 모두 강제출국시킨 뒤 조선기독교통리직을 만들었다.
교단적 특징을 없애고 하나의 교회로 만들어 마음대로 통제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강사였던 선교사들이 떠난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열심히 목회하던 김목사는 
항상 청년들에게 소망과 비전을 주는 메시지를 전했다.45년 8월15일.식민지 아래에 있던 민족의 해방은 
지하에 숨어 은밀히 신앙생활을 하던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더할 수 없는 기쁨을 주었다.
잃었던 교단을 재건하고 복음전도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3·8선 이북을 맡은 소련군정과 김일성이 교회탄압을 시작했다.
당시 목사와 성도들은 세가지 부류로 나뉜다.처음은 무조건 공산정권의 교회탄압에 대해 항거하고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자는 파와 공산당과는 대화가 되지 않으니 무조건 피해 남한으로 내려가자는 파,
셋째는 강단을 지키며 현실을 인정하고 신앙을 유지해 나가자는 파 등이었다.
김목사는 첫번째 파에 속했다.
김목사는 45년 12월,장로교 이북5도연합노회를 발기하는데 앞장섬으로 처음 공산정권의 눈총을 받았다.
또 46년 3월1일은 해방후 처음맞는 기념일이어서 강양욱이 주도하는 기독교연맹은 
평양역전에서 기념예배를 갖기로 했다.
그런데 김목사는 바로 이날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3·1절기념예배를 갖는다고 공포했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장대현교회예배를 중지시키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허사가 되었다
.5천여명이 성도가 모인 이날 행사로 인해 김목사는 ‘인민의 적’으로 간주되며 
정치보위부의 철저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47년에 김목사는 더 큰 일을 냈다.11월3일로 확정된 인민위원회 총선거를 주일성수를 이유로 반대한 것이다.
담판을 짓기 위해 김일성까지 만났던 김목사는 결국 선거가 예정대로 주일에 치러지자 
성도들을 토요일 오후 모두 교회로 불러 모은 뒤 철야예배를 드리게 하고 다음 주일날 저녁예배후까지 데리고 있다 
귀가시켰다.당시 결의문을 쓴 김목사는 “신자의 주일성수는 생명이며 정치와 종교는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고 
어디에서든 집회와 신앙의 자유가 확보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치보위부는 김목사에 대해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았다.48년도에 체포돼 1년간 심한 옥살이를 하다 
49년 3월에 잠시 석방 되었고 곧바로 다시 연행돼 행방불명이 되고 밀았다.
당시 신암교회 당회원들이 대동강에 배를 준비하고 남하할 것을 권유했으나
 “양을 놓아두고 목자가 어떻게 도피하느냐.한사람이 있어도 교회를 지키겠다”고 말한 일화가 유언처럼 남아 있다.
공산당에 의한 납치로 아무로 모르게 죽임을 당한 김길수목사.복음전파와 후진양성으로 일관된 
그의 삶은 오늘의 우리에게 주일성수의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키며 신앙의 귀감이 되고 있다.
<장남 김만용목사>
김길수목사는 부인 김화연권사(85년 소천)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
장남 김만용목사(76·평양신학원학장)와 차남 김완용집사(73·영락교회)는 모친과 남하해 
순교자 유족으로서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맺고 있다.
특히 김만용목사는 부친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어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이야기를 듣는다.
일본중앙대학에서 수학,평양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김만용목사는 남하해 
1951년부터 학교법인 숭의학원 설립의 산파역을 맡아 교육일선에 일생을 헌신해 왔다.
53년에 교회장로가 된 그는 지난 92년 부친의 유업을 잇기 위해 숭의학원장직을 떠나 뒤늦게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부친이 제자를 가르치던 신학교육의 맥을 이어 현재 서울 홍익동에 있는평양신학원 학장을 맡고 있다.
“목회자 가정은 누구나 들여다 보기에 유리와 같은 것이라며 항상 언행에 조심할 것을 당부하시던 
부친의 모습이 생생합니다.어려울 때마다 아버님의 말씀이 삶의 큰 지침이 되었습니다.
부친은강양욱과 절친한 사이였으나 정권과 타협치 않으셨고 이윤영목사님이 월남할 때 
동행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이것도 거절하셨습니다”
김만용목사가 부친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49년,26세 교사시절이었다.
“지방의 연합집회인도를 위해 집을 나선 뒤 이후의 소식을 아는분이 아무도 없습니다.
당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교회의 진리를 사수하신 
부친의 신앙을 유산처럼 생각하며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습니다 ”
김목사는 교육자로 이제 목회자로 무탈한 삶을 살았고 
1남4녀의 모든 자녀들이 신앙안에서 훌륭하게 성장해 제몫을 다해주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긴다며 남을 후진양성에 더욱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김무정 moojeong@kukmin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