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집회 기사 裵哲秀
우리는 9월 12일 오전 8시 50분에 경부선 구포역에서 기다리던 白선생님을 맞어 感깊은 악수를 交하였음니다. 거긔에서 도보로 집회장소인 大池교회(김해)고 갓슴니다.
12일 오후 8시에 경남부산구역 전도사 중심의 집회가 우리 백선생님의 인도하에 열니게 되였음니다. 집회의 첫 선언으로 「신앙의 고집을 깨트리라」는 설교는 가장 날카로운 주장이여서 그의 한말 한말은 寸鐵과 같이 모든 심령의 奧底를 관철하엿음니다. 첫시간브터 성령의 역사는 강하엿음니다. 백선생의 설교는 적극적 주장을 위한 소극적 주장으로써 시작되야 진행하는 중, 일반은 驚異疑問의 상태로 되여 장내의 기분은 자못 긴장하엿음니다.
성령의 역사는 집회의 도를 따라 강하여가고 진리주장은 깊은 내용에 드러가게 되자 청중은 진리의 밝힘을 받아 아- 과연 철저하다는 소래가 장내에 가득하게 되며 時時로 놀나며 말끝마다 아멘 아멘을 브르게 되엿음니다. 이 폭발력의 복음에 정복을 당한 일반은 서로 서로 고백하되 이제야 참 신앙을 알게 되엿다하며 그중 엇던 전도사 형님은 감격에 넘치는 어조로 「주께서 나를 이 집회에 참석케 하기 위하야 과거이 불으섯다」 하며, 또 다른 형제는 「과거에 나를 죄에서 구속하신 주께서 이제 나를 肉에서 구속하엿다」말하야 깃븜을 금치 못함니다. 어느 전도사는 말하되「과거에 나의 전도는 사람으로 하여곰 순수한 복음을 받지 못하게 하고 도로혀 예수를 바로 믿지 못하게 하엿다」고 참회하며, 모 신학교 재학중인 형제는 말하기를 「백선생의 진리주장은 다른 아무대에서도 듯지 못한 새 說이올시다.
금후브터 신학교 칠판밑에 앉어 견대기가 괴롭겟다」고 하엿음니다. 이같이 은혜를 味解한 여러 형제들의 진정한 간증을 들은 生은 백선생을 향하야 「선생님은 이십세기에 반다시 잇어야 할 靈의 과학자라」고 불넛음니다. 아- 망한 조선아 네가 복이 잇도다 하는 感이 솟아올나 깃븜과 감사의 눈물뿐이엇음니다. 이려한 상태중에 집회는 성령의 다사림을 받아 시종이 여일하엿고 백선생님의 웨치신 진리는 질서정연한 대체계를 일운 것이엿음니다.
9월 19일 오전에 집회를 ꁹ이게 되여 동일 오전 11시 구포발 차에 사랑한 백선생님을 석별하엿음니다. 우리의게 희비의 정이 깊엇고 주의 허락중에서 속히 다시 만나기를 기도하엿음니다.
아-찬송하나이다. 조선의 구원을 위하야 팔을 펴신 아바지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돌니나이다. 이것이 지극히 높은 곧에서는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감이 되고 땅에서는 이 깃븐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게 위로와 깃븜의 충만함이 되기를.
특히 이 일을 위하야 먼곧에서 기도하시는 최선생님과 이 깃븐 소식을 듣고저 기다리시는 여러 형님들을 위하야 이 拙筆의 기록을 드림니다.
(집회중 전문과 서신으로써 장려하여 주신 여러 형님들께 이에 감사를 표함니다.)"
김해 집회의 참석자의 한 사람인 배철수로부터 김해 집회에 관한 편지를 받자 최태용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는 김해 집회의 강사 백남용이야말로 '우리의 전도자'로서 그들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앞장 서고 있는 가장 유력한 사람이라고 증거하였다. 《영과 진리》를 통해 최태용은 백남용의 집회일정을 보도하고 있는데, 경남 김해군 진영면 신용리교회에서 마산구역 교역자 중심의 집회를 인도하고 11월에는 함남 문천 집회를 인도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최태용 계는 그 자신과 백남용, 장도원 등을 통해, 그들의 약속과는 달리, 주로 기성교회를 파고 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최태용계의 주장이 어떠했기에 경남에서 추종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논의의 초점상, 최태용계의 주장이 어떠한가보다는 당시 추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에 두겠다.
경남노회에서는 처음에 이를 '신교리'라고 언급하였다. 울산읍교회의 안영두 오의상 집사는 "주일을 율법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으며 또한 예수를 자유로 믿을 것이오 율법적으로 믿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로 이해하였다. 최태용계와 가장 깊이 사귀고 있던 배철수는 교리관에 대한 질문에 "예수는 영과 육이 분리할 수 없는 완전한 인격을 가지신 예수이시나 神子의 인식이 12세전에는 없었다"고 대답하였다.
1931년 11월 22일 문천교회 사경회에서 북선영계의 웅자 전계은 목사와 백남용 사에에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변론이 벌어졌는데, "이는 백선생의 사람의 난대로의 전존재가 육이라는 말에 대한 전목사의 의문" 때문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사람의 난대로의 전존재가 육'이라는 데서 '純肉說'이라고 명명된 것 같다.
배철수는 1931년 9월 12일부터 19일까지 계속된 백남용의 김해 집회에 참석한 사람으로 앞의 부산시찰회의 보고서 중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앞서 언급한 김해 집회의 상황을 알리는 편지를 쓰기 전에 《영과 진리》의 주간 최태용에게 따로 편지를 보내어 나름대로 깨달은 복음의 내용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그의 편지는 당시 최태용 백남용 장도원 등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전문을 소개한다.
"배철수씨의 편지
경애하는 선생님, 그리스도안에서 영의 생활이 부요하시기를 비나이다. 너무 늦게야 글을 올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복음을 통하여 살림을 받은 소생은 장구한 시일에 오직 복음의 소화를 위하여 잠잠하였나이다. 소생은 <天來之聲>(직접 독자는 아니었지만 간접으로 읽었음)으로부터 <영과 진리>까지 빠짐업시 받아 읽어 그 말씀들의 일점일획은 저의 살과 피로 化現되었나이다. 그 말씀의 폭발력이 저의 전존재를 삼켜 靈化하였나이다. 이제 저에게는 영 이외의 그 아무것에도 만족할 수 없게 되었나이다.
육과 세상을 부정하고 영으로 살 생명이 되었나이다. 영을 味解한 생명은 육에서는 살 수 없게 되었나이다. 이 은혜를 생각하면 너무나 크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이 납니다. 선생님의 주장하신 영적 기독교는 全然한 <새복음>임을 확신합니다. 그것이 진실로 선생님의 독립복음임도 확신합니다. 영, 진리, 생명이란 말씀들은 종래의 기독교가 경험치 못한 것을 내용으로 하여 독창적 술어로소이다. 전인미답의 영계의 처녀지를 개척하였음이 확실합니다. 선생님의 영적 복음은 그 가치비판에 있어서 독립성을 가졌나이다. 그것이 또한 동양인이 그리스도를 味解한 첫 소리로소이다.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소화할 첫 소리로소이다. 하나님이 동양인을 통하여 영의 지성소를 엶이여! 그 진리가 오묘하도소이다.
아, 그 누구가 이 복음의 독립성을 捉心하는가? 우리는 엄숙한 진리비판에 있어서 종래의 기독교에서 이같이 철저한 진리주장을 듯지 못한 것을 확인합니다. 신앙은 육의 靈化라고 충분 해명히 주장한 자가 과거의 기독교 역사에 있었는가? 신앙이 교회도 아니오 성경도 아니오 聖도 아니오 愛도 아니오 전도도 아니오 오직 영이라고 명백히 가리킨 사도가 누가 있었는가. 진리주장에 있어서 영을 가장 과학적으로 취급한 자가 현대신학자중에 있는가. 아- 진실로 현대를 含(?)消할 영적복음이로다. 현대교회를 살리는 생명의 복음이로다. 아-, 현대의 종교는 形의 종교요 영의 종교가 아니며, 우상의 종교요 진리의 종교가 아니외다. 소생은 실로 선생님의 위치는 영적 복음에 접촉하여 혁명을 받은 신앙이 되었고 그 진리의 세례를 통하여 모든 인간적 종교관념을 깨쳐버리고, 현대를 정복할 생명의 종교를 가졌나이다. 소생은 과거 전통적 종교관념 속에 무서운 고뇌를 맛본 자올시다. 스사로 성자가 되고자"
위에 언급한 것은 최태용게의 주장에 대한 당시 신자들의 반응이다. 배철수가 언급한 것처럼, 종래 기독교에서 이같이 철저하게 진리주장을 한 적이 없을 정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전통을 묵수하던 조선교계에 충격을 주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온 육으로 이해하고 십계명이나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 예수를 자유로 믿는다는 것 등 받아들이는 측의 반응은 혼란스러운 일면이 없지 않다. 이러한 혼란에 대한 대답은 당시 두번이나 경남에 내려와 '이단'에 대한 반격을 가했을 박형룡의 표현을 통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들의 주장을 게노시스기독론 혹은 신비적 속죄론으로 풀이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33년 1월 3일부터 회집된 제31회 경남노회는 부산시찰회에서 올린 보고를 중심으로 그 동안 드러나지 않게 해결점을 찾아 보려고 노력하였다. 최태용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주기철의 입장이 어떠한 것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최태용계추종세력을 '무교회주의' 혹은 '순육설'로 인식하고 권면은 하되,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교회를 보호하는 길이라고 인식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1월 7일 폐회하기 직전에 주기철이 주재하는 노회는 임사부의 보고에 따라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처리하였다. 교회법을 따라 치리하되 시간을 두고 지도, 감독한다는 것이었다.
"김형윤씨의 애원서는 해 당회장에게 맡겨 처리케 하는 것이 좋은 줄 아오며, 안영두씨는 김만일 목사와 해 당회에 맡겨 신중히 돌아보고 치리케하는 것이 좋은 줄 아오며, 금석호 씨는 김해 대지교회 사경회 때에 벌아래 있는 사람으로 성경을 교수케 한 것과 부산시찰회에서 문제있는 사람은 주의하라고 권면한 것도 불고하고 최태용씨에게 강대를 허락함에 대하여 무교회주의에 의심이 있음으로 전도사직을 1년간 쉬게 하는 것이 몝은 줄 아오며, 배철수 씨는 주일지키는 것을 경히 여김과 무교회주의의 의심이 있음으로 1년간 전도사직을 쉬게 하는 것이 좋은 줄 아오며, 부산시찰회에서 우봉석씨는 강도사로 청원한 것은 허락지 아니함이 좋을 뿐아니라 해 당회에 맡겨 치리케 함이 좋은 줄 아오며, 부산시찰회에서 오성문씨를 구포교회의 전도사로 청한 것은 허락지 아니함이 좋을 줄 아오며, 임사부보고에 의하여 각 교회내의 무교회주의나 기타 교리에 위반되는 일들이 있을 때에는 그 지방 시찰과 당회는 특별히 잘 돌아보아 처리하도록 회중이 가결하다."
1933년 1월의 경남노회의 이같은 결의는 곧 최태용에게도 알려진 모양이다. 그는 "교회는 우리를 이단이라 하며 무교회주의자라고 한다"고 항변하면서 무교회주의자라는 이름은 자신들이 스스로 부르는 이름이 아니며 교회가 부르는 이름이며 자기들은 교회에 적을 두지 않고 "복음이 없는 교회시대에 있어서 교회를 책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장"한다고 하였다.
최태용은 경남노회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는 한편 노회에 복종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신교에서 법왕지위를 얻으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경남 지방 교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그들 추종세력에 대해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경남지방의 몇교회는 노회에 대항하야 노회의 명령을 들지않고 있는 현상이 출현되고, 그 원인은 崔泰瑢을 강단에 세우며, 그 집회에 참석한 전도사들을 노회가 치리하였음에 있는 모양이다.
나는 이 사건을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한다. 대체 조선장로교회의 노회란 것은 그 至上權을 주장하고, 시비막론하고 노회에의 복종을 교회에 요구하고 있어 그것을 맡이(마치) 신교에 있어서의 법황지위를 얻고저하는 모양이다. 저희에게 取하야 사람이 진리에 就하는가 안는가는 문제가 아니고 누가 노회에 복종하는가 안는가가 문제이다. 「노회를 무시한다」는 말이 저희의 판단의 표준어이다.
제군은 생각하여보라. 노회가 신성한 권위의 대표가 되어서 가한가. 푸로테스탄트교회에는 하나님 말슴의 권위 이외에 다른 권위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이고, 노회도 이 말씀으로 새 심판을 받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런데 노회란 것이 잘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받지 아니하고, 우매하게 기뻐하기도 쉽고, 노하기도 쉬운 감정의 소유인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 권위를 주장하고, 「노회를 무시」한다고 하여 그 관하의 교직을 함부로 처벌하니, 일이 이렇게 되어 가한가. 만일 전도사들이 신앙에 있어서 진리에 있어서 그릇됨이 있거든 어찌하여 진리로 悔諭하지 아니하고, 이를 휴직 면직을 식힘으로써 능사를 삼는가. 吾輩가 경남형제들과 관계됨이 있다면 이는 오직 신앙의 일, 영의 일에 한하여서 관계됨이 있을 따름이다.
吾輩는 노회를 대항하여 서라고는 일언도 말한 일이 없음은 물론이고, 도리어 거기에 복종할 것을 말하였음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남에 있어서 수교회가 노회와 대항, 분립이 되어 있다면 이는 경남노회의 無理解가 일을 그렇게 한 것이다. 일전에 나는 울산교회에서 사오회의 강연을 하고 왔거니와 나는 신앙 이외의 일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형제들이 나와 상관이 있다면, 이는 서로 주안에, 한 믿음에 있는 사랑으로 그러한 것뿐이다. 이 의미에 있어서 나는 경남형제들을 사랑하고, 형제들이 더 믿음에 나아가며, 진리에 자라기를 기도한다."
경남노회가 논의를 시작함으로 이 사건은 긴장감을 갖게 되었고 아량이나 무조건적인 복종이 없이는 원만하게 끝나기가 힘들게 되었다. 경남노회는 약 6개월간 해당 시찰회를 통해 관련된 전도사들과 교회를 설득하였다. 노회에서 결정한 대로 전도사들에 대한 치리를 시행하는 것도 중요하였다.
그러나 해당 교회들은 노회의 치리에 쉽게 복종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문제는 앞서의 정덕생 목사의 문제와 중첩되어 복잡하게 전개되었으므로, 노회차원에서 더 이상 묻어둘 수가 없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설득과 함께 신학적인 판단이 중요하였다. 주기철은 부산시찰을 중심한 경남일대에 확산되었던 '이단' 문제를 보면서, 여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인 바탕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경남노회장과 마산시찰장을 겸임하고 있는 점을 활용하여, 6월 26일부터 1주간 마산서 교역자 수양회를 개최하고 강사로 평양 신학교 교수 박형룡 박사를 초빙하였다.
경남노회가 몇년간 '이단' 문제로 갈등을 빚어 왔기 때문에 박형룡 교수를 통해서는 '특별교리 문제'에 관한 강좌도 들었다. '특별교리 문제'는 바로 경남노회가 겪고 있는 '이단' 문제였을 것이다.
'이단' 문제의 심각성 때문이었든지, 2년전(1931) 7월 1일부터 5일간 동래읍교회에서 행한 박 교수의 별로 '재미없는' 수양회 강의와는 달리, 이번에는 타 구역 교역자도 다수 참석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을 정도였다.
박 교수와의 만남은 그 뒤 주기철의 행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지만, 특히 마산 집회에서 만난 것은 아마도 그 1주일 뒤에 모였던 경남노회 임시노회에서 소위 <부산시찰 각교회의 문제>를 결단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주기철이 박 교수 인도의 교역자수련회를 임시노회와 타이밍을 맞춘 것도 바로 당시 현안해결에 초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그 해(1933년 9월) 장로회 총회에서 "금년 칠월에 본로회 주최로 신학교 교수 박형룡 박사를 청하야 특별이 교리에 대한 문뎨로 일주일간 수양회를 하얏사오며"라고 보고한 것은 이 수양회를 그만큼 중요시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수양회에서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7월의 임시노회에서 최태용계 추종세력을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최태용에 대응하는 데에서 합력한 그들은 주기철이 산정현교회로 옮기는 데까지 이어지지만, 신사참배라고 하는 큰 대적앞에서는 삶의 방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본 자료는 한국 기독교 역사연구소의 소유입니다.
'好學의 神學 > [韓國信仰人]'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 (0) | 2010.02.09 |
---|---|
제주 이도종 목사의 순교 (0) | 2010.02.09 |
주기철 목사의 신앙 4 (0) | 2010.01.16 |
주기철 목사의 신앙 3 (0) | 2010.01.16 |
주기철 목사의 신앙 2 (0) | 2010.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