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한국기독순교자 열전 - 주영진 전도사

好學 2010. 2. 9. 20:52

 

한국기독순교자 열전 - 주영진 전도사


기독교인들에게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일사각오’를 외친 평양 산정현교회 주기철목사(朱基徹·1897∼1944)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그의 불퇴전의 믿음과 신앙이 영화와 저서를 통해 널리 알려져 감동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기철목사의 장남이며 평안남도 대동군 김제면 장현교회에서 시무하던 주영진전도사(朱寧震.1919∼1950)는 아버지 못지않은 믿음으로 짧은 일생을 살다 간 순교자임에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주영진은 주기철목사가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안질 때문에 중퇴하고 고향 웅천으로 돌아와 1917년 안갑수와 결혼한 뒤 낳은 첫 아들이었다.

그는 부친의 모교인 오산중학교에 입학해 음악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그래서 프랑스로 바이올린유학을 가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그런데 어느날 평양 주암산에서 열린 산상기도회에 3일간 참석한 뒤 목사가 되기로 결심을 바꾸었다.평양신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신사참배를 반대하면 학교를 다닐 수 없기에 일본 동경으로 유학,루터교신학교에 입학했다.그러나 일본신학교는 신사참배가 더 심했다.궁성요배까지 극렬히 반대하는 그에게 학교는 퇴학처분을 내렸다.2학기만 마치면 졸업이었지만 부친의 곧은 믿음을 보고 자란 주영진에게 타협이란 있을 수 없었다.

다시 동경의 일치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이곳에서도 한 달도 못돼 퇴학당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고향에 와보니 부친 주기철목사는 신사참배를 계속 반대해 벌써 4번째 평양형무소에 갇혀 있었다.주전도사는 고문과 매질로 고통받는 부친을 만날 수도 없었다.그 역시 요주의 인물로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경남 구포에 있는 애린원에서 총무로 봉사하고 어촌 어장일을 하는 등 이리저리 몸을 숨기던 주전도사는 주기철목사가 44년 결국 순교하자 부친의 뜻을 이어 목회자로 나설 것을 다짐한다.그래서 해방직후 한상동목사가 산정현교회를 돌볼 때 전도사로서 일을 도왔다.

1946년 주전도사는 새어머니인 오정모사모의 중매로 평양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기독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던 김덕성(金德聲)과 결혼한다.당시 28세의 신혼인 그는 전도사 직함으로 평양에서 북쪽으로 50리 떨어진 긴재교회에 부임했다.

당시 북한을 접수한 공산당은 보안서원들을 시켜 긴재교회 안에도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걸도록 권유했다.이 말을 들을리 없는 주전도사였다.방문한 보안서원을 오히려 혼쭐을 낸 주전도사는 얼마있지 않아 형사들에 체포되고 말았다.놀란 사모가 이 사실을 당시 병원에 입원 중이던 오정모사모에게 알리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당신이 사랑하시는 주기철목사를 순교의 제물로 받으시더니 이제는 그 아들까지 허락하시려고 합니까.한없는 영광을 드립니다.다만 아들에게 어떠한 환경에도 변치않는 담대한 믿음을 주옵소서”

공산당에 협조할 것을 강요받으며 고문을 당하던 주전도사는 결국 30일만에 풀려났다.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선전하는 공산당이 목사를 잡아갔다며 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46년 11월3일은 인민공화국위원 선거일이었다.주일날에 선거를 하기로 했기에 엄격한 주일성수를 강조하는 주전도사가 성도들에게 투표에 참여하라고 말할리 없었다.이 사실을 안 형사들이 주전도사를 찾아왔다.

“아무리 종교의 자유가 있어도 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종교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성도들이 모두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선거가 아닙니다.거룩한 주일을 다른 일로 범할 수 없기 때문이죠.그리고 교회는 세상의 일을 이래라 저래라 광고하는 곳이 아닙니다”

“정 이렇게 나오시면 재미없습니다.만약 한 사람이라도 투표를 하지 않으면 선동죄로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저녁예배까지 본 뒤 투표를 하면 되지 않소”

“밤이나 낮이나 주일은 주일입니다”

화가 잔뜩 난 형사는 이때부터 긴재교회를 예의 주시했고 장현교회로 목회지를 옮겨가서도 주전도사에게 불순분자란 딱지를 붙여 놓았다.이후에도 주전도사는 기독교연맹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다.강양욱위원장이 집까지 찾아와 부탁했으나 교회가 정치와 관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그런데도 주전도사가 6·25직전까지 큰 화를 입지 않은 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먼저 김일성정권은 항일투쟁에 앞장선 애국자를 크게 높이는 작업에 들어가 주기철목사가 일본에 항거한 애국자임을 강조하고 많은 돈과 토지를 보냈다.그러나 오정모사모는 ‘하나님의 종으로 당연한 일’이라며 모든 것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주목사가 일제시 형무소에 있으며 주영하란 공산주의자를 같은 감방에서 만나 친하게 지냈다.해방이 되자 주영하는 인민공화국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그런데 이 주영하가 주목사와 형제란 이야기가 나돌았기 때문이다.

1950년 6월24일.북한 공산당은 그동안 당에 비협조적인 인사들을 모조리 체포하는 일체검거령을 내렸다.남침에 앞서 남한에 협조적일 수 있는 인물들을 숙청하기 시작한 것이다.당연히 주전도사도 이 대상에 포함돼 있었다.당시 신의주지역을 돌며 초교파적으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었던 주전도사는 돌아오자마자 피할 것을 당시 담임하던 장현교회 성도들로부터 권유받았다.

“나만 살겠다고 도망가진 않겠습니다.생사는 주님이 주관하십니다.다음 주엔 순교하신 방계성목사님이 시무하시던 평양 산정재교회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겠습니다”

산정재교회에서 마지막설교를 하던 주전도사는 설교를 마치기 무섭게 두명의 형사들에게 잡혀갔다.그 뒤 주전도사의 행적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그러나 당시 잡혀간 사람들이 모두 총살형에 처해졌기에 주전도사도 총살당했다고 보는 것이 거의 정확한 의견이다.

“참 의연하고 신앙이 곧은 형님이셨습니다.당시 형수가 며칠동안 형님의 시체를 찾다가 못 찾았고 두 자녀와 피란을 내려오다 아흔이 넘은 조모가 힘들어하자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주기철목사의 막내아들인 주광조장로(68·극동방송부사장)는 “형수는 깊은 신앙을 가졌기에 아직 살아있다면 30여박스나 되었던 아버님(주기철목사)의 설교원고를 보관하고 있을 것”이라며 “아버님의 뒤를 이은 형님도 남은 가족들이 항상 기억하고 그 곧은 믿음을 이어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고 말했다.

불과 32세의 나이에 공산당의 총탄에 순교한 주영진전도사.신사참배로 신학교를 졸업하지 못해 목사가 되진 못했지만 그의 하늘나라 상급은 어떤 직분자보다 더 크고 귀할 것이다.

/김무정 moojeong@kukmin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