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이도종 목사의 순교
이도종 목사 순교기념비
삼방산 돌로 세운 최초 기념비
예장 통합 제주 대정교회(이도종 목사 순교 기념비)
대정교회는 이기풍 목사의 제자로 제주도 최초의 현지 목사인 이도정 목사(1891-1948)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순교 기념비를 세운 교회이다. 순교 당시 이도종 목사는 인근 고산교회 담임으로 인근 화순교회, 대정교회 등을 순회하며 예배를 드렸고 전도하며 교회를 세웠다. 1948년 6월 순회 예배를 드리기 위해 대정으로 가던 중 산사람들에게 산속으로 끌려가 "양놈의 사상을 전파하는 예수쟁이" "미 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혐의와 핍박속에 다른 10여명과 함께 구덩이에 생 매장되어 순교 하였다. 그 시신을 대정교회 교인들이 장사 지냈으며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인근 삼방산에서 돌을 가져다 순교 기념비를 세우므로 성지가 되었다. 2003년 제주 노회에서 이도종 목사 순교 기념비를 새롭게 세웠다.
이도종 목사
제주출신 제1호 목사인 이도종목사(李道宗·1891∼1948)는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다 순교하였다.제주읍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이도종은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착실히 공부하며 전도유망한 청년으로 성장했다.그의 나이가 열일곱이던 1907년,제주선교사로 부임한 이기풍목사를 만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다.평양의 폭력배였다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 전도자가 된 이기풍목사는 색다른 전도를 하겠다는 결심으로 제주선교를 자원했던 것이다.이기풍목사가 부임한 1907년 당시 제주는 육지와 다른 이방지대였다.풍속과 말도 달랐고 외지인에 대해서는 무조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이 때문에 이기풍목사는 서양종교를 전한다고 몰매를 맞고 너무 굶어 쓰러지기도 하는 등 숱한 고생을 했다.그러나 특유의 뚝심으로 13년을 사역하며 제주 최초의 교회인 성내교회를 비롯해 삼양 내도 금성 등 15곳에 교회를 설립했다.이도종목사는 이기풍목사가 전도한 첫열매이다.
이도종목사는 북제주군 애월읍 금성리 출신이다. 금성리 지역에서 이장이었던 이덕연장로의 장남으로 1892년 9월 13일에 태어났다. 제주 최초의 장로로 기록되고 있는 이덕연 장로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제주를 찾은 이기풍목사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직접 초청해 금성교회를 세우는가 하면, 둘째 아들 이이종(일제강점기 행방불명)을 평안북도 오산중학교로,딸 이자민을 전주 스피아여학교로 보내 학문과 함께 민족교육을 시킬 정도로 식견을 가지고 있던 장로였다. 이덕연 장로는 장남 이도종을 우선 숭실중학교로 보내 학문에 정진 하도록 했다. 그에 앞서 제주시에 있던 제주공립농림학교에서 1년간 학문을 하기도 했다.
숭실중학교 졸업후 잠시 제주에 온 이도종은 2년여간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이당시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조봉호 전도사의 독립군자금 모금 활동에 참여하다 옥고를 치렀다는 기록이 짧막하게 있을 뿐 그의 자녀에게도 독립운동 내막을 알리지 않아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 이도종은 1926년 당시 나이 34세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북도 김제지역에서 전도사 활동을 시작한다.
김제 농촌지역에서 전도사 활동을 하다 1928년 김제 신풍리지역에서 김제중앙교회를 설립,목사장립을 받았다. 나이 36세의 일이었다. 이때 가족으로는 김도전사모(1892~1977)와 1녀 4남을 두었다. 목사로 김제중앙교회를 섬기던 이도종목사는 항일에 대한 남다른 견해로 언제나 감시의 대상이었다. 어느날 지역 유지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맡은 이도종목사는 당시 시국과 관련한 연설을 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갔다. 일본 경찰은 이도종목사가 제주출신이라는 점에 그의 시국관련 행동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그의 아들 이영복씨(현재 80세)는 증언하고 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이도종목사는 제주행을 결심했다.
1929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곳이 고향이면 어떻고 타향이면 어떠하겠냐 생각하겠지만 이도종목사는 ‘고향 제주의 첫 목회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주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고자 제주에 다시 가자’라고 다짐했다. 아들 이영복씨는 “아버지 이도종목사가 고향으로 가면서 제주 지역 농어촌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주출신 첫 목회자 이도종목사는 고향을 찾은 이듬해 부터 제주노회에 중심적인 활동을 하며 제주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다. 1930년 노회 서기를 시작으로 노회일을 맡으며 본격적인 전도활동에 들어갔다.
이도종목사의 시무지만 해도 서귀포, 고산, 금성,남원,서귀포제일,용수,협재,삼양,표선,남원,고산,중문교회이고 남원교회는 직접 설립했다. 당시 목회자들의 전도활동이 거의 비슷했지만 이도종목사는 교회 한 곳에서 오랫동안 시무하지 않고 제주지역 구석구석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맹렬히 펼쳤다. 특히 그는 노회 성경학원장으로 제주지역에서의 종교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직접 성경학원 운영자금을 위해 만주를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남다른 전도열정은 네번의 노회장 역할을 통해 충분히 알수 있다. 더욱이 농어촌 지역 목회활동을 위해 순회시무를 마다하지 않고 열심으로 복음전파에 힘을 기울였다. 오직 전도를 위해 헌신한 목회자 였기에 우리는 그를 첫 순교자로 기억한다. 그리고 제주 출신 첫 목회자 였기에 우리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제주 선교의 큰 아픔으로 그의 순교를 기념해야 한다.
이목사는 제주 곳곳을 돌며 예배를 인도하고 교회를 개척해 나가는 일을 계속하기 시작했다.당시 일제치하였기에 어려움이 여간 많지 않았다.교회전도가 황국신민이 되게 하는데 지장을 준다며 교묘한 방법으로 예배를 방해했다.그러나 어떤 방법도 이목사의 복음전도 열정을 꺾을 수 없었다.외지에서 선교의 열정을 갖고 제주를 찾는 목회자도 적지 않았으나 주민들이 철저히 배척하는데다 일제의 간섭도 만만치 않아 거의 두손을 들고 돌아가곤 했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았다.이목사는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기독교를 활발히 전파할 수 있게 된 것이 더 기뻤다.그사이 제주도에는 조남수(趙南洙)목사가 들어와 복음을 전하고 있었는데 두사람은 보다 효율적인 전도를 위해 상의를 했다.“조목사님이 제주 남쪽을 맡으시지요.제가 북쪽을 맡겠습니다.같은 곳을 두사람이 다니는 것 보다 더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목회자가 거의 없는 교회들을 순회하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예배를 요청하는 곳을 다니다 보면 항상 밤이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피곤한 육신이었지만 주님이 주시는 용기와 힘으로 하루하루를 이겨나갔다.
1948년 4월 3일.한국역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사건이 제주도에서 발발했다.‘4·3제주폭동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민중봉기는 공산무장폭도에 의해 일어났다.정부는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관을 파견했는데 그들은 양민과 폭도를 구분치 못하고 난을 제압함으로 더 큰 사건으로 발전했다. 이럴 때는 조용히 숨어 있거나 선교활동을 제한해야 함에도 이목사는 담대함으로 예배를 드리는 일을 계속했다.예배를 원하는 곳이 있는데 목사가 신변의 위협을 받는다고 그것을 마다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 사건의 여파가 점점 더 거세어지던 그해 6월의 어느날,이목사는 예전과 다름없이 자전거에 성경과 찬송을 싣고 화순교회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떠났다.산을 넘게 되어 비탈길을 자전거를 끌고 천천히 올라가는 중이었다.갑자기 공산폭도들이 산속에서 나타나 총구를 이목사에게 들이댔다.“손들어.어디 가느냐” “저는 목사인데 화순교회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음.당신이 양놈들 사상을 전파하는 예수쟁이로구만.당신은 분명 미 제국주의 스파이로군.우리를 따라 오시오” 변명도 소용이 없었다.이목사는 자전거를 내팽개친 채 그들에게 끌려 산 속으로 들어갔다.산 속에 그들이 기거하는 막사가 있었는데 이 때 “이목사님”하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돌리니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에 마른피가 엉켜붙었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화순교회 이집사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행방불명됐다고 교회에서 걱정했는데 여기에 끌려 와 있었던 것이다.
이목사에 대한 취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목사님.뵙고 싶었습니다.예수교가 그렇게 좋다면 공산인민이 이 싸움에서 이기도록 간절히 기도좀 해주시겠습니까” 자신을 조롱하는 것을 알았지만 이목사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죄없는 양민을 죽이는 무신론집단의 승리를 위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조금도 양보의 기색이 없는 이목사를 그들은 다른 10여명과 함께 막사밖 숲 속으로 끌고 갔다.그리고 거의 실신할 정도로 두들겨 팼다.계속 찬송을 부르는 이목사를 크게 파놓은 구덩이에 생매장을 해버렸다.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목사는 생의 마지막을 기도로 마치며 숨을 거두었다.향년 5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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