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과 함께한 손애원목사(앞줄 좌측 2번째)
“하나님께서 많은 선한 이들을 제쳐두고 이 죄 많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에게 그 자비하신 손길을 뻗치셨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넉넉히 눈물겹고 또 눈물겨운 것이라오.”며 고백하시던 어르신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때 나누며 섬기고 사랑으로 교제했던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는 이 땅에서 육신의 질고로 온갖 수난과 더불어 부끄럽기 그지없는 그들의 지난 삶이었지만, 지금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함께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으리라. 그 삶 위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만큼은 숨길 수가 없어 세상 모든 이에게 큰소리로 외치리라는 진솔하고 참된 고백이 되도록 소망을 품어본다.
*애양원 역사관
애양원 태동
애양원 병원은 1909년 ‘포사이트’선교사가 의사 오웬씨를 치료하기 위해 목포에서 광주로 오는 도중 길가에 쓰려져 있는 한센병 여자환자를 돌봐준 것이 계기로 설립됐다. 이 한센병 여자 환자는 그해 3월에 부임해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윌슨(Robert M. Wilson)과 몇몇 선교사들에 의해 치료를 받게 된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서양의학으로 ‘한센병’을 치료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광주 제중원장직을 맡고 있던 윌슨 선교사는 자신의 사택건축을 위해 벽돌을 굽던 가마터에 당시만 해도 천형(天刑)으로 알려진 한센병 환자 10여명을 수용, 치료를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건달로 불렸던 최흥종씨는 윌슨 등 몇몇 선교사들이 소외받고 있던 한센병 환자의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게 되고, 그가 광주 봉선동에 약 1,000평의 부지를 기증하면서 애양원 건물이 들어서게 된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한센병원인 광주나병원이었다.
갈수록 늘어나는 환자들로 병원이 좁아지자 1928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8번지로 이전했으며 당시 나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한센 병자 600여명이 옮겨와 지금의 애양원을 이루게 됐다. 이후 1936년 광주 나병원을 '여수 애양원’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오늘날의 ‘애양원 시대’를 열게 됐던 것이다.
손양원목사의 출생과 성장배경
‘사랑의 성자’라 불리는 손양원 목사는 1902년 경남 함안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8년 장로였던 부친을 따라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고향에 있던 칠원 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 학교에서 동방요배를 강요하자 그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며 단호히 거절했으며 이로인해 결국 퇴학 처분을 받게 됐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는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쓰가모 중학교 야간부를 다녔는데, 동양선교회의 활동에 큰 감동을 받고 귀국해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그곳에서 부산 초량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성경학교 강사로 나오던 주기철 목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가르침에 크게 감동을 받아 주 목사를 스승으로 섬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