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주기철 목사의 신앙 4

好學 2010. 1. 16. 08:37

 

주기철 목사의 신앙 4


4. 최태용 백남용 계열과 경남노회-정통신앙 보수의 문제


주기철이 경남노회장으로 재임하던 2년동안 그는 장로회총회에 두 차례에 걸쳐 경남노회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 경남노회 회장 자격으로 노회 관내에서 문제되고 있는 '예수꽅육설'과 '이단'에 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본로회 경내에는 백남용 시의 창도한 예수꽅육셜이 류행되야 거긔 감염된 젼도사와 교인들이잇셔 회가 다소 어지러운 에 잇싸오며"


"본로회 경내에는 이단에 감염된 젼도사와 교인들이 잇서 루루히 로회로써 권유하엿스나 종시듯지 안코 졈졈 악화되여 나아감으로 치리를 바든 자들이 만사오며, 금년 칠월에 본로회 주최로신학교 교수 박형룡 박사를 청하야 특별이 교리에 대한 문뎨로 일주일간 수양회를 하얏사오며"


위의 인용에서 말한 '예수순육설'이나 '이단'은 같은 내용으로서, 최태용(崔泰瑢)이나 백남용(白南鏞)과 장도원(張道源) 등이 경남지방에 와서 강설한 내용을 두고 지칭한 것이다.

경남노회록을 보면 1930년을 전후한 시기에 경남노회 관내에는 부흥 사경회가 자주 열렸다. 당시 전국적인 부흥사로 이름이 높은 강사들이 많이 내려왔다. 1931년에만 하더라도 이용도 목사가 사천읍교회, 통영읍교회, 거창지방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였다. 주기철은 자신이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회심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부흥사경회 개최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김익두 목사가 당시 일부에서 비판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량교회에 시무할 때에 그를 두번이나 강사로 모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부흥사경회의 강사로서 봉사하였다.

경남노회가 백남용의 집회를 처음 거론한 것은 1932년 1월 5일 밀양읍예배당에서 제 30회 노회를 개최했을 때다. 마지막날 임사부는 "부산시찰 구내에 백남용씨에 대한 문제 듣기로 회중이 가결하다. 백남용씨의 대한 문제는 해 시찰회와 관계된 당회에 맡겨 돌아보고 내회에 보고하기로 회중이 가결하다."고 보고하였다. 이것은 그 전해(1931) 9월 12일부터 19일까지 김해 대지교회에서 부산시찰 구내의 전도사들이 '당회의 허락도 받지 않고' 백남용을 강사로 하여 집회한 데 대하여 우려를 표시하고, 그 경위를 살펴보고 적당한 조치를 취한 후에 다음 노회에서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경남노회의 전도사들이 최태용 계열의 백남용을 초빙하여 집회를 가지게 된 것은 당시 조선의 기성교회가 영적인 피폐성을 드러내는 한 증거이면서 새로운 신앙사조에 갈급했던 것을 보여주었다. 1920년데부터 일본에 유학하면서 우찌무라(內村鑑三)로부터 성경과 민족의식을 배웠던 김교신과 최태용 등은 조선의 이같은 영적인 갈급을 채워주고자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김교신은 1927년 7월부터 《聖書朝鮮》을 간행하면서 <성서 위에 조선을>이라는 기치를 높이 쳐들었으며, 최태용은 1925년 6월부터는 《天來之聲》을, 1929년 2월부터는 《靈과 眞理》를 간행하였다. 조선 교회의 기성 신앙에 일정하게 식상한 젊은 전도사들 중에는 이러한 잡지를 구독하는 이들이 있었다. 백남용을 초청한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1931년 9월에 그를 초청한 것으로 보아 이미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경남노회 안에서 둥지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잡지가 구독되고 새로운 신앙사조가 소개되면서 교회에 따라서는 최태용과 연결된 이들에 대해 교권이 개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기들에게 동조하는 신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듯, 최태용은 《영과 진리》를 통해 '조선교회의 관용을 바란다'는 글을 띄웠다. 당시 최태용과 그의 추종자들이 기성교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현대 문법으로 풀어 쓴, 그 글의 일부다.


"조선교회에 관용을 바람

교회는 교리로써 통일될 것이 아니다. 종래 교회가 교리적 통일만을 주안으로 하였음으로 그것은 지리멸렬, 他를 이단으로 매도함을 능사로 한 것이다. 교리적 통일을 주안으로한 교회,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새 번역이 이염이명 일어나는 예언자정신이 현저히 쇄감되어 있다. 교리적 교회는 산 하나님을 죽은 하나님으로도 가지고자 한다. 조선교회에서 교리에 충성된 정통주의자를 향하야 나는 울고 싶으다. 정통주의자여, 너는 과연 기독교를 네 배속에 생수가 강과 같이 흐르는, 하나님 말씀의 샘이 네 영혼안에 터저 있는 산 종교로 가졌느냐고. 안의 깊음에 산 종교를 가짐이 없이, 네가 누구의 正한 교리를 지적으로 쥐고 있음으로 신자인체하나, 우리는 그것을 칭하야 종교상의 이지주의 intellectualism이라 하야 거기에는 종교가 십분지일도 잡혀 있지 아니한 줄로 안다.

교리적인 통일을 무시하면 이단사설이 백출하는 혼란에 빠질 것이 아니냐고 혹은 말하리라. 그러나 이는 역시 교리적 관념에 잡힌 판단에서 나오는 기우이지, 사실은 그럴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교리를 떠나서 기독교 신자를 통일할 규정은 충분히 있다. 성신받은 자를 신자로 하면 된다. 거듭난 자를 신자로 하면 된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오직 그리스도를 그 안에 살리고자 하는 자를 신자로 하면 된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를 신자로 하면 된다. 성령의 다스림이 행하는 곳에 아무 혼란이 있을 까닭이 없다.

근자에 우리에게서 복음을 들은 자를 어떤 노회는 그 이유로써 그 소속교회의 장로를 파면하며, 어느 지방에서는 저희가 저희의 말하는 교리에 복종치 아니함을 책잡고자 소동을 일으키며, 또 어떤 지방에서는 신자가 오인의 잡지를 구독함을 금하랴 하니, 이 어찌 가당한 일인가. 나는 그 교권자들이 어떤 정도로 칼비니즘, 웨슬레정신에 철저하여 있는지를 모르거니와, 짐작건대 그것은 전통주의적정통주의가 아닌가 한다. 저희는 칼빈적, 웨슬레적 종교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신경문자의 표면을 할터 모은 지식을 가지고 산 신앙을 비판하는 자들이 아닐가 한다. 나는 나의 우인들이 나의 보는 바로써하면 저의는 그 기도가 성하며, 그 언설이 열렬하며, 보담 더 생명이 약동중에 있음으로써 진부한 교권자들과 낡은 신자들과 구별되어 저희 두 사이에는 싸움이 일게 되는 모양이다. 우리는 지금 기성교회의 파괴를 일하(삼?)지 아니하며, 신교파를 창시코자 아니한다. 우리의 우인들로 장로는 그 교회의 충실한 장로이고자 하며 전도사는 그 집회에 생명의 말씀을 주기를 힘쓰며 평신도는 그 회당을 기도의 집으로 쓰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신앙을 생명이라고 깨닫고 그리스도와 보담 더 생명적인 관계에 들어가랴고 힘쓰며, 들어가는 확신이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교회의 부흥은 신앙의 부흥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 산 신앙을 자기로써 예증하여 교회에 종사하려는 자들이다. 교회가 만일 우리를 용납하면 우리는 교회에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왕성케 할지언정 교회를 못되게 하지 아니할 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장으로써 신앙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더 긴밀한 것, 더 생명적인 것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스도 인격을 그 진리의 높음대로, 깊음대로 개념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말하는 바가 신앙을 더 참되게 하며, 그것을 더 생명적으로 하여 신자로 더 좋은 신앙의 소유자로 하지 아니 하거든 우리를 심판하며, 우리를 정죄하라. 우리가 상이한 형식을 가진 자들일지라도 같은 주안에 있는 형제애를 感하야 서로 손을 이끌고 하나님나라의 싸움을 싸울 것이 아닌가. 나는 조선교회가 성령 이외의 다른 아무 것에도 잡히지 아닌(니한?) 관대한 태도를 가지고 우리를 용납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위의 글이 발표된 것이 1932년 7월 말이고, 경남노회가 모여 본격적으로 백남용의 집회를 거론한 것이 그 이듬해 1월이다. 이 글에 의하면, 경남노회 회집에 앞서 이미 기성교회에서는 최태용 계열의 집회에 참석한 신자들이나《영과 진리》독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그래서 최태용은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를 알게 하는 것은 학문이 아니오, 성경연구가 아니오, 환란이다. 우리는 성령의 책망을 받아 죄의 고통을 가져서만 기독교를 안다. 우리는 하나님을 쳐다보면서 세상고생을 하여서만 기독교를 안다. 집회 기타 방법으로 일시의 흥분을 얻음도 그때 그때의 가치가 있다. 마는 거기에 아직 너의 확실한 기독교파악은 없다. 하나님의 섭리 중에서 환란중에 있는 자, 저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더하고 더한다."고 하면서 환란과 핍박이 그리스도 진리에 더 가까이 가게 만들어 준다고 격려하였다.

이듬해(1933) 1월 3일 부산진예배당에서 31회 경남노회 정기노회가 열렸다. 주기철이 노회장이었다. 그 전 해에 부산시찰회에 맡긴 백남용의 집회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시찰부장 박문찬의 보고가 있었고 그 보고는 어쩔수 없이 경남노회로 하여금 결단하도록 몰아갔다. 이러한 사건이 주기철의 노회장 때에 이뤄짐으로 그는 이 문제와 씨름해야 하는 책임자가 된 것이다. 장황하지만 보고서 전문을 현대 맞춤법에 따라 옮겨 본다. 부산시찰회 나름대로의 노력이 돋보인다.

"1932년 1월 노회에서 비 시찰구내에 발생한 신교리에 대하여 위임한 사항을 좌기와 같이 보고하오니 조량하심을 경요하나이다.

최초발단: 상회의 허락없는 전도사회가 주최하여 김해대지교회에서 당회장의 승락도 없이 전라도 백남용씨를 청하여 일주일간 집회함으로 되었는데 그로 인하여 전도사중 일인인 김형윤씨는 그 당회로부터 책벌을 받고도 여전히 시무함으로 비회에서 위원을 파송하여 권면함으로 전도사의 시무는 정지되었고 그 후에 비회에서는 전도사들을 선도키 위하여 평양신하교 교수 박형롱씨를 청하여 7월 1일부터 5일간 동래읍예배당에서 교역자 수양회를 하기로 결정하고 광고를 하였던 바 미리 몇 전도사의 주최로 당회장의 허락없이 울산읍교회에서 일본있는 장도원씨를 청하여 몇날동안 집회를 하였으며 그 후로 들리는 바 제반풍설이 자자하나 이미 광고한대로 동래읍교회에서 5일간 교역자수양회를 개하였더니 저 전도사들과 또한 동감된 교인 몇사람들은 끝까지 참석하였으나 별로히 은혜를 받지 못함인지 여전히 자미없는 소식이 들림으로 할 수 없이 비회에서는 매견시, 예원배, 박문찬, 조승제 4씨를 파송하여 울산읍교회와 량산읍교회를 방문케 한 후 그들의 보고를 듣건대 여좌함.

울산읍 교회에서 장로 안영두 집사 오의상 양씨를 만나 문답한즉 주일을 율법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으며 또한 예수를 자유로 믿을 것이오 율법적으로 믿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하고 다음으로 양산읍교회는 풍편으로 많은 이상한 말들이 들였으나 직접 가서 보는 바로는 평온한 상태에 있는 모양이라고 하다. 그러나 그 후로도 여러가지로 들리는 말이 있음으로 1932년 10월 18일에 비회에서 전도사 중 문제인 대표로 5인을 지명 소환하여 별지와 같이 일일히 문답한 후에 종차로 특별히 주의하여 상회를 복종함에 아무 문제가 들리지 않도록 힘쓰라고 권면한 후 돌려보내였던 바 그 후 얼마 아니하여 양산읍교회에서 최태용씨를 환영하여 문제중에 있는 전도사 몇사람들이 당회장도 모르게 몇날동안 회합한 일이 있은 바 모든 사실에 대략 보고하나이다.

전도사들에 대한 문답의 대요:

1. 금석호씨에 대하여, 김해 대지교회에서 거년 음 정월 시찰사경회시에 김형윤씨는 책벌하여(에?) 있음과 해교회 당회장 안다손 목사가 직접 가서 조사가 치리아래 있음으로 시무할 수 없다는 것을 직원들에게 알게 한 뒤에도 성경을 교수케 한 것이 잘못이 아니냐 물은즉 그의 답은 현재 조사로 시무하니 그를 시키지 아니할 수 없는 사정인 고로 한시간 맡겨 교수케 하였다는 것과 또한 김형윤씨 치리에 대하여는 잘 잘못을 말할 수 없다고 하다.

1. 배철수씨에 대하여, ① 교리관에 관하여 물으매, 예수는 영과육이 불이(분리?)할 수 없는 완전한 인격을 가지신 예수이시나 신자(神子)의 인식이 12세 전에는 없었다고 하다. ② 장도원 백남용 양씨를 청할 때에 당회장의 허락도 없이 청한 것은 어떠한 이유이냐 하매 그것은 당회원의 허락과 교인들의 청에 의하여 한 일인데 하여간 법적으로 보아서는 잘못됨인즉 앞으로 주의하겠다 하다.

1. 홍성만씨에 대하여, 김형윤씨를 청하여 사경을 시킨 것은 불법한 일이 아니냐 하매 그것은 교인들의 선청(先請?)에 의하여 거절할 수 없는 사정인 고로 그리한 것인데 법적으로는 잘못된 것이니 앞으로 주의하겠다 하다.

1. 손량원씨에 대하여, 손씨에 관하여는 제반 풍설이 많이 있었음으로 그대로 물어본즉 직접 그의 말을 들어보아서는 별 이상이 없었다.

1. 오성문씨에 대하여, 김형윤씨를 청하여 강도시킨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하매 그의 답은 김형윤씨가 은혜받은 사람인고로 다만 은혜를 생각함이요 또한 안란애목사의 치리에 불복하고 있음으로 벌아래 있는 자가 아닌 줄 알고 청하여 강도시킨 것이나 지금에 생각한 즉 범법한 일인 줄 알고 이후에는 주의하겠다 하다.

1. 김형윤씨에 대하여, 1932년 12월 27일에 비회에서 김형윤씨를 불러서 책벌받은 것을 단 마음으로 순종하는 여부를 물은 즉 자기를 이단자란 조문을 취소하면 순종하겠다 하다.

이상 보고를 채용하고 사건만 임사부로 보내기로 가결하다."


위에 인용한 내용은 1931년 9월 12일에서 19일까지 김해 대지(大池)교회에서 열린 백남용의 집회 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노회보고를 위해 부산시찰회에서 정리한 것이다. 정리 내용은 문제의 핵심인 백남용의 강론 내용에는 별로 역점을 두지 않고, 그보다는 당회장의 허락도 없이 백씨를 청하였다는 것과 책벌 중에 있는 김형윤 전도사를 초청, 강도(講道)시킨 점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는 인상이다. 위의 보고는 당시 야기되었던 문제들을 거의 망라하고 있다. 즉 백남용의 집회 후에 부산시찰회에서는 "전도사들을 선도키 위하여" 그 이듬해(1932) 7월 1일부터 5일간 박형룡 교수를 청하여 동래읍예배당에서 교역자 수양회를 개최키로 하였다는 것, 이 사실을 알고 그 전도사들은 일본에 있는 장도원씨를 청하였다는 것, 양산읍교회에서는 최태용씨를 환영하였다는 것, 그리고 강론한 내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도 일부 소개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는 뒷날 <복음교회> 운동의 중심인물 세사람이 등장하며, 이들의 신학 신앙의 침투를 막기 위해 부산시찰회는 박형룡 교수를 초빙하여 교역자 수양회를 개최하였다는 것, 이 사건과 관련하여 문제가 있다고 파악하고 있는 전도사와 장로를 만나 면담한 내용과 그들의 이름도 일부 거명되고 있어서 흥미롭다.

그러면 이 사건의 핵심이라 할 김해집회는 어땠는가. 이 집회에 참석한 배철수가 《영과 진리》의 주간인 최태용에게 보낸 편지에 집회의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1930년대의 한국교회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됨으로 전문 게재한다. (편지는 한자를 많이 사용했지만, 한글로 옮겨도 뜻을 알 수 있는 한자는 대부분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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