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목사의 신앙 3
3. 경남노회 시절의 신앙행적 확인
주기철이 1925년 말에 목사로 안수받아 부산 초량교회의 담임목사로 그리고 1931년부터 1936년까지 마산 문창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동안 수많은 곡경을 겪게 된다. 그 중에는 아내 안갑수를 먼저 보내는 인간적인 비애를 맛보기도 하지만, 경남노회의 중진이었던 그는 교회의 정체성 수호와 관련된 여러가지 갈등에 어쩔 수 없이 휘말리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은 한국 장로교회가 1934년 희년을 맞아 신학 노선의 문제로 갈등이 빚어지기 전에 터졌던 것이다.
희년을 맞으면서 한국 장로교회는 여권(女權) 문제와 모세의 창세기저작 부인(否認)문제 그리고 단권주석(單券註釋) 문제 등의 '신신학(新神學)'적 사조에 관련된 갈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앞서 경남노회에서는 이와는 다른 일종의 신앙적인 갈등을 겪는데, 이들 사건들은 주기철이 당회장으로서 혹은 노회장으로서 처리해야 했었기 때문에 그의 신앙노선과도 일정하게 관련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거기에는 박승명 목사 사건, 정덕생 목사 사건 그리고 최태용 추종자들과의 문제 등이 있다. 그 중 한국교회에 소개되지 않은 뒤의 두 사건만 언급하겠다.
주기철의 행적에서 이 기간 동안 몇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는 그가 1929년 혹은 1931년에 경남노회에서 신사참배반대 결의를 이끌어냈다는, 전거가 불확실한 그의 행적이다. 둘째는 그가 노회장으로 재직한 시기이다. 곁들여 그의 초취부인 안갑수에 대한 것이다. 먼제 이 문제를 거론한 뒤에 정덕생 목사 사건과 최태용 백남용과 관련된 문제를 거론하고자 한다.
3-1 경남노회 신사참배 거절안 가결의 문제: 이것은 아마도 김인서(金麟瑞)가 "주목사가 경남노회에 신사참배 거절안을 제출하여 가결하였다. 당시 일인(日人)의 부산일보(釜山日報)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로 공격하여 일본의 조야를 놀라게 했다. 주(朱) 목사가 태양신(太陽神)과 싸운 것은 경남에서 시작하였다."고 썼던 데서 발단되었던 것같다. 그 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를 무비판적으로 인용, 답습하거나 혹은 이를 전재한 것을 다시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김요나는, 주기철이 1929년 노회석상에서 <신사참배 반대 헌의안>을 경남노회장 함태영 앞으로 제출하여 가결케 했다는 것과, 가결되던 날 왜인들이 경영하던 부산일보가 이 사건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완미(頑迷)한 양귀(洋鬼), 끝끝내 신사참배 거부"라는 사설까지 게재하여 신랄히 비판하였다고 했으며, 또 "주목사의 신사참배반대의지가 대외적으로 표면화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으며 최초의 일이었다. 김충남 전기는 이 장면을 전일본과 한국 교회는 소년 다윗과 골리앗을 보는 느낌으로 이 싸움을 주목하게 되었다고 했다."고 썼다.
민경배는 주기철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전개설이 '김인서와 『어둠을 밝힌 사람들』의 저자'에게서 나타나며 그 후의 모든 전기나 논문에 문헌비판 없이 그대로 답습되어 왔음을 지적하면서 전승의 전모를 이렇게 소개하였다.
"주기철이 초량교회에서 목회할 때 경남노회에 신사참배 거절안을 제출하여 가결되었다. 그래서 당시 부산의 일본인 발행 부산일보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공박하되, '완매(頑迷)한 양귀(洋鬼) 끝내 신사참배 거부'라고 해서 일본 조야에 충격을 주었던 일이 있었다. 주기철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여기서 발단된다. 따라서 한국교회 신사참배 반대투쟁사는 여기서부터 기론해야 한다. 그 다음 시대가 경남노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그리고 제3기가 전국적인 신사불참운동으로, 평양 산정현교회에서의 주기철 저항과 순교에서 정점을 이루는 투쟁기라고 본다. 경남노회에서 거절안이 가결된 것은 1931년 여름의 일로 추정된다."
필자는, 주목사 주도로 경남노회가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가결을 끌어낸 주장과 '부산일보'에서 그 점을 대서특필하였다는 점과 관련, 연구자들이 김인서를 인용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거를 제시하지만 그 원자료(原資料)에 대해서는 어떤 전거도 내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그 해결방법의 하나로서 무엇보다 경남노회록의 소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다행히 1929년 9월에 이홍식(李弘植) 목사가 편집, 간행한 경남노회 제22회(1926)∼제27회(1929) 노회록과 <송상석(宋相錫) 목사 자료>에서 제 28회∼제40회 경남노회록을 발견하고 기록을 검토하였지만, 1929년과 1931년에 '신사참배반대'를 논의하거나 가결한 어떠한 기록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1929년이나 '1931년 여름'에 가결하였다는 주장은 말할 것도 없고 1925년말 주기철이 경남노회원이 되었을때부터 노회를 떠나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하는 1936년까지의 기록에서는 경남노회가 신사참배 문제를 다루었다는 어떠한 논의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경남노회에서 주기철의 주도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결의를 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경남노회에서 그같은 결의를 했어야 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다. 더구나 주기철과 한상동의 신사참배반대 방식을 비교하면서, 한상동이 운동차원에서 진행시켰다면 주기철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조용히 진행시켰다고 주장하는 형편이고 보면, 주기철이 경남노회에서 그런 결의안을 가결하도록 주도했다는, 말하자면 운동적인 방식으로 반대시위를 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연구자들은 주기철이 내면에 정열을 안고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매우 합리적인 신앙인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구나 뒷날에 비해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급박한 사단이 아직 벌어지지 않은 분위기에서 주기철이 미리 앞장서서 참배반대에 나섰다는 것은 충분히 설득되는 것은 아니다.
주기철의 신사참배반대와 순교에 연계되어 이루어진 이 불확실한 증언은 사료적인 실증을 거치지 않은채 많은 연구자들의 검증없는 지지를 끌어내었다. 이런 지지 분위기 속에서라면 그가 초량교회를 떠나면서 행했다는, "이제 앞으로 일제가 강요하는 우상숭배의 어려운 시대가 눈앞에 다가옵니다. ."라는 설교가 나타났다는 것도, 그 전거가 희박하지만, 자연스럽다. 그러나 경남노회가 주기철의 주도로 일찍 신사참배 반대를 가결했다는 항간의 주장은, 아직까지는 그 확실한 전거를 들이대어야 할 단계이지, 그것이 사실(史實)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 '사실'을 해석해야 할 단계는 아니라고 본다.
3-2. 노회장 재임시기와 사모 안갑수: 몇몇 연보나 행적기록에서 그가 경남노회장으로 피선된 시기를 1931년으로 잡고 있다. 그러나 경남노회록에 의하면, 그는 1930∼31년은 부회장(회장 김만일 목사)으로 봉사하였고, 1932년 1월 5일 밀양읍예배당에서 회집된 경남노회 제30회 정기노회에서 회장으로 피선되었으며, 그 이듬해 1933년 1월 3일 부사진예배당에서 회집된 31회 정기노회에서 회장으로 재선되었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그가 노회장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경남노회 관내에서 두가지 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하나는 경남노회 내의 목사 정덕생 씨에 관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최태용 백남용 등이 경남노회 관내에 와서 집회를 가짐으로 적지 않은 파란이 야기된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주기철의 초취부인 안갑수는 1931년과 32년에 경남부인전도회 회장으로서 해당년도 정기노회에 출석하여 경남부인전도회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그가 이렇게 경남여전도회 회장으로 활약하였다면, 그를 두고, '한국 목사 부인들의 한 삶의 모습' 혹은 '말없이 조용히 목사의 일과 많은 목회 성역(聖役)을 뒤에서 돕고, 어렵게 가정생활을 꾸려나가며, 그러다가 병약에 시달리다 다시 조용히 세상을 떠나는 삶의 모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타당할런지 의문스럽다. 안갑수가 이같이 연합활동에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활달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돌아가자 경남부인전도회는 전회장 안갑수의 장례를 적극 도왔고 주기철은 그 이듬해 2월에 그 후의에 감사하여 경남부인전도회에 엽서를 보내고 그의 아내 장례 때에 도와주심에 감사하였던 것이다.
3-3. 정덕생 목사 사건: 주기철 목사에 앞서 초량교회에서 거의 10여년간 시무했던 분은 정덕생 목사다. 그는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8회)하고 그해 경상노회에서 목사안수받고 초량교회의 전신인 영주동교회로 부임하였다. 2년후 그는 장로회 총회의 파송을 받아 일본 고베(神戶)신학교에 유학생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조선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교포 교회를 운영하는 등 선교활동도 하면서 학문에도 전념하였으나" 그 부인의 신병으로 귀국, 다시 초량교회를 섬겼다. 그가 시무하는 동안 초량교회는 30∼40명의 교인이 240∼250명으로 증가되어 초창기의 기초가 다져졌다. 삼일운동 이후 절망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았던 것이다. 그 교회에는 독립운동 자금조달 기관으로 1914년에 설립된 백산상회(白山商會)의 백산 안희제(安熙濟, 1885∼1943) 등이 출석하였으며, 항일운동을 위해 초량교회에서 비밀회합을 가졌다고 한다. 초량교회사는 백산상회와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백산상회는 백산 안희제 선생이 세운 무역상회이나 사실은 무역상으로 위장된 족립운동의 연락처였던 것이다. 안희제 선생이 부산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할 때 초량교회에서 간부들이 비밀 모임을 자주 가졌다. 백산상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애국지사 중에는 초량교인들이 많다고 했는데 그 중에서 특이한 인물이 윤현진 집사이다. 호가 석산(石山)인 윤씨는 1892년양산에서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안희제 씨와 손잡고 처음에는 소비조합을 만들려고 12,000원의 자금을 모았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안희제, 송문주 등과 함께 백상회를 설립하여 상해 임시정부와 내통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백산상회의 안희제가 초량교회와 이런 관계를 가졌다면 담임목사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정덕생 목사가 1922년 예배당을 신축, 헌당식을 거행하는 그 해 2월경, "대정 8년(1919) 제령위반피고사건이라고 평북 중강진 경찰서에 압송되어 3천리이 먼길을 16유치장을 거쳐서 50일만에 무사히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1919년에 관련된 '피고사건'이라면, 초량교회사(105)에 "정목사가 독립운동하는 사람들과 연대되어 이들을 측면지원한던 것이 발각되었던 것"으로 언급된 것처럼, 3 1운동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런 사실은 그의 백산상회와의 관계 및 그 후의 그의 행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주기철이 1925년 부임한 후에도 초량교회에는 정 목사 때의 그같은 '민족주의적' 분위기는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윤현진은 1919년에 상해에 파송되어 그 뒤 임정에 참여하게 되었고, '백산무역주식회사'는 주기철이 부임한 지 2년만인 1927년에 해산되었으며, 그 즈음해서 안희제도 만주로 망명한 듯 1931년 10월 3일에는 "대종교에 입교하여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주기철이 부임한 후 김익두 목사(1927년과 30년)와 이명식 목사(1931년)를 부흥강사로 모신 것은 교회의 이런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다. 주기철이 6년 동안 교회의 부흥을 위해 애쓴 결과 초량교회는 400여명의 교회로 성장시켰다.
주기철이 마산교회로 부임한 후 1932∼33년에 경남노회장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그는 1933년 9월 초에 회집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 22회 총회에서 "졍덕생목사는 딴교파를 세우고 나아갓슴으로 본로회로서는 권증죠례 54조에 의하야 그 셩명을 로회명부에서 제명하얏사오며"라고 보고한 것이 보인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정덕생 목사가 "딴 교파를 세우고 나갔다"는 점이다. 자신에 앞서 초량교회 목사로 시무하였고, 부산에 있는 동안 정목사에 대하여 소상하게 이해하였을 주기철로서는 노회장의 직분상 이 일을 처리하는 데에 많은 인간적인 비애를 느꼈을 것이다.
정덕생 목사 문제는 1933년 1월 3일 31회 경남노회가 부산진예배당에서 회장 주기철의 인도로 회집되었을 때 노회적으로 표면화되었다. 정덕생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던 부산진 교회의 김덕경씨가 1931년 5월 16일에 '교인을 선동하여 불복도장을 받아' 별노회소집을 청원한 적이 있었고, "김덕경 씨가 노회장 주기철씨를 상대로 한 고소장"을 제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건은 1931년에 이미 벌어졌던 것이다. 노회는 김덕경 씨의 고소장이 합법이 아니므로 본인에게 반려하였지만, 정목사는 이 때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을 정도로 신앙생활에서 떠나 있었다. 노회가 특별위원을 파송, 정목사의 일을 심사토록 하고 그 다음 노회에서 논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2. 정덕생목사에게 대하여 주일 지킨 상태를 물어보니 거년 3월로 11월까지는 아들 병으로 인하여 간호하기 까닭에 주일 예배에 출석지 못한 것과 그 외에는 외처 여행중에 있엇다 함으로 또다시 목사의 성직을 가지고 광업을 함이 어떠하냐고 물으니 하등 양심에 가책이 없다고 하였으며, 3. 목사 정덕생씨에 대하여 금일까지 지내오는 중 주일을 잘 아니지키는 것과 광업을 한다는 것으로 목사성직에 부당한 소문이 들릴 뿐더러 건덕에 방해스러운 일이 많이 있으니 그 사실에 진부를 회중에서 한번 청취하여보기로 가결하고 정덕생 목사로 회중에 설명케 하니 정덕생 목사는 형편에 의하여 주일을 지키지 못한일도 있고 광업도 경영하는 것이 사실이라 함으로 회중에서는 목사의 성직으로 이러한 건덕에 방해되는 일을 함이 불가하니 이제부터는 이런 일을 아니 하겠느냐고 하매 정목사는 노회 앞에서 자복하고 이후로는 주의하겠다 함으로 노회에서는 2개월 기한을 정하고 광업 폐지할 것을 부산 시찰에 맡겨 돌아보고 권면하기로 회중에 가결하다"
이 일의 자초지종을 잘 설명하고 있지 않아서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부산진교회의 김덕경이 노회에 고소장을 제정(提呈)하는 등의 와중에서 정목사는 아들의 병과 외처(外處) 여행 등으로 성수주일(聖守主日)을 하지 않았고, 노회에서는 성수주일 문제와 목사로서 광업을 경영하는 문제로 그를 불러 권면하니, 건덕(建德)을 위해 앞으로 '이런 일'을 하지 않기로 자복(自服)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듯했다.
그러나 정덕생 목사는 노회 앞에서 '자복'한 것과는 달리 금광사업을 정리하지 않았고 오히려 '불법당파'를 망라하여 '조선예수교회'라 하고 경남노회를 비난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1933년 7월 3일 마산문창예배당에서 모인 임시노회는 그를 노회명부에서 삭제하는 책벌을 단행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노회장 주기철은 이를 그해 9월 총회에 보고하였다. 경남노회의 기록이다.
"7. 정덕생씨에 대하여는 거(去) 노회에서 2개월내로 금광사업을 정리하겠다 하였음으로 2개월 지난 후 본시찰회에서 2차나 불렀으되 한번도 오지 않았사오며 아직 금광도 정리하지 않았사오며 또한 불법당파를 망라하여 조선예수교회라 명칭하고 목사직을 행하며 세례를 주고 장로와 직원을 택하며 동예배당 건축비라 하고 노회반동분자가 있는 각 교회에 불온언사의 문구(경남로회의 무법과 폭정행위라는 문구)를 써서 각 교회에 선전한 일도 있었사오며 출교를 당하고 벌아래 있는 자들을 제직이라는 명칭을 주고 선전문에 기록하여 배부한 일도 있었사오며(선전문 첨부), 정덕생 목사는 부산시찰의 보고에 의하여 권징조례 54조대로 그 성명을 노회명부에서 삭제함이 좋은 줄 아오며."
총회에 보고한 내용과 노회의 결의사항을 앞뒤로 맞춰보면 정목사가 노회명부에서 삭제되는 책벌을 받게 된 것은 "딴 교파를 세우고 나갔다"(총회록) "불법당파를 망라하여 조선예수교회라 명칭"(노회록)한 것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장로교회에서는 1918년에 이르러 소종파가 나타나고 있었다. 황해도 지방 김장호(金庄鎬)의 '조선기독교회'와 대구 이만집(李萬集)의 '조선기독교회'였다. 이들은 반선교사 내지는 자치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선교사들 중심으로 가르치는 평양신학교의 신학노선과 달랐고 선교사들의 지도를 충실히 따르는 장로교회의 신앙노선과도 이념을 달리하려고 하였다. 이들이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분파되었다는 점에서 정덕생의 '조선예수교회'도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교단의 지도부가 일차적으로 우려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조선예수교회'라는 명칭일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명명되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명칭은 바로 그 해(1933) 1월 3일 이용도(李龍道)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창립된 새 교단 '예수교회'의 이름을 연상케 한다. 정덕생의 '조선예수교회'와 이용도의 '예수교회'는 이름이 유사하다는 점을 우선 염두에 두는 것이 좋겠다. 1930년에 들어서서 이용도는 경남지방에 부흥사경회 강사로 자주 내려왔다. 그러다가 이용도는 장로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기독신보에 의해 '이세벨의 무리'로 낙인찍혔다. 그 때문에 이용도가 창설한 '예수교회'라는 명칭이 장로교회에 주었던 거부감이 컸을 것이다. 여기서 정덕생의 책벌이 단순히 주일성수나 목사로서 광업에 종사하기 때문이 아니라, 또 그가 과거 민족운동을 도았다던가 직접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게는 신앙노선상의 갈등을 책벌문제의 핵심으로 삼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경남노회가 주기철 주도로 정덕생 목사의 새교단설립을 책벌한 처사는 당시까지의 장로회 신앙정통을 수호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경남노회가 엄중한 책벌을 가하고 그것을 총회에까지 보고하였지만, 노회는 계속 그의 귀순을 권고하면서 정덕생과 접촉하여 1935년 6월 4일 부산 항서예배당에서 회집된 35회 경남노회에서는, 특별위원 3인을 택하여 정덕생 씨를 권면하여 본 노회에 돌아오게 하기로 가결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특별위원들이 정덕생 씨를 권면한 결과 노회에 귀순할 마음이 있음을 확인하고 노회 앞에서 말할 기회를 요청, 노회 앞에서 사과하니 회중은 이를 감사히 받고, 그의 귀순에 따른 후속조치를 임사부원과 특별위원 3인에 맡겨 의논, 보고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임사부는, 정덕생씨가 내주일부터 노회 관내의 장로교회에 예배보려 오겠다는 것과 정덕생 씨의 장래문제는 부산시찰회에 맡겨서 다음 노회시에 보고케 하도록 하겠다고 보고하였다.
1935년 12월 3일 부산 초량교회에서 회집된 경남노회는, 부산시찰 보고에 의해, 정덕생 목사를 회원으로 받자는 안을 45대 27로 가결하는 한편 정덕생 목사에게 금후 일년간 당회장권을 맡기지 않고 전도사로 청하는 곳이 있으면 허락하기로 가결하였다. 이로써 약 4년간 끌었던 정덕생 목사 문제는 일단락을 지었다. 주기철이 노회장으로 있을 때에 터진 문제가 그가 경남노회를 떠나기 전에 이렇게 해결되고 그 이듬해 그는 다소 홀가분한 심경으로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할 수 있었다. 주기철이 이런 과정에서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노회장으로 있을 때에 이런 책벌이 단행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주기철은 다음에 볼 최태용 백남용의 문제에서와 같이 신앙적 보수성 내지는 정통성 고수에 충실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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