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주기철 목사의 신앙 2

好學 2010. 1. 16. 08:35

 

주기철 목사의 신앙  2


2. 신앙 형성의 배경

2-1. 한국 교회 초기에 소개된 신앙: 주기철은 그의 나이 14세되던 1910년 12월 말경에 웅천읍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어린 시절 출석하던 웅천읍교회는 1906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창원군 웅천읍 교회가 성립하다. 이에 앞서 선교사 심익순(沈翊舜)의 전도로 약간의 신도가 점차 나아와 송화여(宋化汝) 사저에서 예배하였고 교회가 점진하여 서중리(西中里)에 예배당을 건축하였다가 뒤에 북부리(北部里)에 예배당을 옮겨 지으니라"

경남지역은 일찍부터 호주 장료회 선교사들이 들어왔지만, 선교 지역의 분할이 확정되기 전에는 미국 북장로회도 부산과 밀양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펴고 있었다. 웅천읍교회가 성립되기 전 이 근방에도 복음이 전파되어, 김해읍 내지교회(1898)와 구마산교회(1901)가 성립되었고, 1905년에는 김해읍교회를 비롯하여 김해군 진례면 시례동(詩禮洞)교회, 창원군 경화동(慶化洞)교회 등이 성립되었다.

우리가 주기철의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음이 이 땅에 처음 전파될 때 어떠한 신앙을 갖고 있었는가, 다시 말하면, 주기철의 신앙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의 시대의 신앙은 어떠했을까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 기독교 수용초기에 사용된 전도문서에 대한 검토와 둘째 장로교가 채택한 신경 셋째 초기의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온 신학사조 및 그가 신학교 진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 김익두의 신앙을 거론해보는 것이 순리라고 본다. 선교사들의 신학사조와 관련, 평양신학교의 신학적인 입장을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1900년대 이전에 한국에서는 60여종이 넘는 전도문서들이 간행되었는데, 이들은 성경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과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설명하는 것, 기독교를 동양종교와 비교설명한 것, 교회의 의식과 규칙에 관한 것, 교리공부를 겸해 국문공부를 위한 것 그리고 찬송가책 등이다. 이들 중 1897년에 노병선이 쓴 《파혹진선론(破惑進善論)》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번역된 것으로서, 이들은 현대신학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놀라울 정도로 기독교교리의 핵심에 도달하고 있었다.

초기의 전도문서는 한국 사회의 범신론(汎神論)적인 사고를 배격하고 유일신(唯一神)관을 분명히 하였고, 하나님이 존재의 기반이고 만물의 제일원인이며 자존영원(自存永遠) 무소부재(無所不在) 무소불능(無所不能)한 인간의 아버지임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기독신자들에게 제일, 제이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고 거기에 따른 비타협적인 신앙생활을 엄격하게 수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스도론(基督論)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타락한 인간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왔으며 인류의 죄악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어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3일만에 부활, 승천하여 장차 재림할 것이라고 성명하고 있다. 이러한 신관 기독론을 전제로, 기독교는 처음부터 배타적이며 다른 종교와 양립할 수 없는 신관을 갖고 비타협적으로 전통적인 종교사상에 도전하였으며, 따라서 우상거부와 제사폐지 등의 반전통적 행동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것은 또한 기독신자들로 하여금 전통적 윤리에서 자신을 고립시킴과 동시에 성속을 구분하여 세속으로부터 성화(聖化)를 이룩하려는 개인윤리로 나타나게 되었다.

전도문서는 한편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는 이원론(二元論: 二分法)적 인간관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인간을 통일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현대 기독교적인 인간관과는 다르다. 이원론적 인간관은 희랍적 혹은 영지주의적 인간관과 상통하는 것으로, 한국의 경우 무교(巫敎)적 바탕 위에서 성립된 인간관이라 할 것이다. 이원론적 인간관은 영혼을 하나님과 연결시켜 예수믿는 것을 영혼의 일로 귀속시키고, 육체를 세속과 연관시켜 일상생활을 철저히 영적인 세계와는 분리시켰다. 사후에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 것을 전제로 예수믿는 것이나 땅위의 선행의 목적은 사후에 영혼의 안식과 영복(永福)을 누리는 데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원론적인 사상은 일 자체도 하나님의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나누고 세속적인 생활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차단시켰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개인적인 경건생활에 머물러버리게 되었다. 이것은 1920년대에 성행하게 된 타계(他界)주의 사상과 함께 기독신자의 사회의식을 마비시키고 윤리생활도 개인적인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이 개인의 생활을 규제하는 사회의 구조문제에 대해서 일정하게 눈감아버리게 만들었다.

2-2. 요리문답과 신경: 주기철의 신앙형태를 규정했을 신앙적 지형은 당시 장로교단이 채택했을 신경에서 엿볼 수 있다. 교단적으로 신경을 채택하기에 앞서 장로교회의 언더우드는 1888년에 장로교 교리의 핵심이라 할 <웨스트민스터요리문답 Westminster Cstechism>을 번역, 출간하였고 이어서 1890년에는 <성교촬리 Salient Doctrines of Christianity>를 간행하여 신자들의 교리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이들 교리서들은 장로교 신자들이 믿어야할 중요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북장로회 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카나다장로회 등 4개의 재한(在韓)선교부들이 공의회를 조직하여 장로교적인 이념과 치리기구를 일치시키려고 하면서 신경의 제정을 서둘렀다. 이미 1905년 9월에는 장로회공의회가 이런 결의를 남기고 있다.

"1905년에 교회신경(1907년에 채용된 것이라)을 공의회가 의정(議定)채용하였는데 그 위원이 보고하기를 새로히 신경을 제정하지 아니하고 만국장로회에셔 전부터 사용하는 신경과 신경에 대하여 개정한 것과 신경도리에 대한 광고와 또 선교각지방에셔 통용하는 신경을 비교하야 조선예수교장로회형편에 적합한 신경을 택하는 것이 가한 줄로 인정하노라. 이 신경은 몇개월전에 새로 조직한 인도 나라 자유장로회에서 채용한 신경과 동일하니 우리가 이 신경을 보고한 때에 희망하는 바는 이 신경이 조선, 인도 두나라 장로회의 신경만 될뿐아니라 아세아 각 나라 장로회의 신경이 되어각 교회가 서로 연관이 되기를 옹망(毋望)한다 하니라(1905년 영문회의록 37페지)"

이 때부터 시작된 신경제정의 논의는 그 이듬해에는 교회정치문제에 집중, 계속되었고,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되면서 유안해 온 신경을 장로회규칙과 함께 1년만 채용하기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 서문은 이 신경이 장로교회의 가르치는 표준이며 '성경을 밝히 해석한 것'임을 천명하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대한 장로교회에서 이 아래 기록한 몇가지 조목으로 신경을 삼아 목사와 및 인허강도인과 장로와 집사로 하여곰 청종케 하는 것이 대한교회를 설립한 본 교회의 가르친 바 취지와 표준을 버림이 아니요 오히려 찬성함이니 특별히 웨스드민스터 신경과 셩경요리문답 대소책자는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 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셩경요리문답 적은 책을 더욱 교회문답으로 삼느니라"

물론 이 신경이 확정되는 것은 그 뒤 신중한 논의를 더 거쳐서 채택되었다. 이 신경을 '12신조'라고도 부르는데, '칼빈주의' 경향이 강력하게 표시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12개 조목은, 제1조 "신구약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니 믿고 행할 본분의 확실한 볍례인데 다만 이 밖에 없느니라"로 하여 신앙의 출발점인 성경의 권위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신 속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인간창조, 인간의 타락과 범죄, 대속자(代贖者) 그리스도, 성령의 역사, 예정과 구원, 성례, 믿는자의 본분 그리고 최후의 부활 심판 등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주기철이 주일학교시절부터 쳬계적인 교회교육을 받았다면, 당시 책자로 소개되고 있었을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장로교단에서 채택한 12신경을 중심으로 하여 교육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교육받은 신앙은 앞서 전도문서에서 보이는 신앙유형에다 장로교 교리 속에서 터득한 것을 그 중요한 내용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2-3. 부흥운동적 열정: 교리와 신조는 신앙을 냉정하게는 하지만 가슴 속에서 울어나는 뜨거움은 없다. 뜨거움이 없이는 회심도 생의 방향에 대한 결단도 할 수 없다. 주기철이 그 때까지 쌓은 학식과 3 1운동을 전후한 시기의 민족적 고뇌로 방황하고 있을 때 그에게 생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사건은 바로 길선주와 김익두로 대표되는 1920년 전후의 부흥운동에 접하면서부터라 할 것이다. 그는 김익두의 마산 문창교회와 웅천교회에서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크게 회심하여 신학교에 입학할 것을 결심하였다. 따라서 부흥운동은 그의 생애를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김인서는 부흥운동가 김익두를 두고 이렇게 언급하였다.

"조선 초대교회는 영계(靈溪) 선생의 영화(靈化)운동을 통하여 그 터가 잡혀졌다. 그러나 신문화 수입에 선구되였던 것만치 과학사조와 함께 신신학사조가 침습함에 미쳐 신앙상 동요가 생기게 되고 일변(一邊) 민족주의자의 이용에 기울어진 때도 있었고 우(又) 일방(一方) 사회주의의 방해도 받게 되어 기미(己未) 전후의 조선교회는 정(正)히 위기였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내세운 종이 권능의 사자 김익두였다. 조선교회를 바로 보는 일(一) 노인은 말하되 '기미 이후에 만일 김익두 아니더면?' 하고 탄식과 감사를 마지아니함도 이 때문이다."

김인서의 지적대로 기미 전후에 조선교회를 향한 김익두의 역할이 이러하였다면, 바로 그 시기에 주기철은 기미 직후(1920) 한국 사회나 그 자신이 혼란에 빠졌을 그 때에 김익두에 의해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김익두는 경건과 독경(讀經), 기도로 신유의 큰 권능을 받아 한국 교회 부흥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부흥운동의 한 장면이다.

"사람들은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게 되니 눈에는 흔적이요 얼굴에는 기쁨이라 여광(如狂) 여취(如醉)하니 부흥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옷모양이나 태도가 이 세상 사람같지 아니하였다. 대정(大正) 9년 사람들은 새벽 기도회에 모이면 회개하여 울고 슬피 울었나니 울고 울어 눈물의 집회였고, 낮공부에 모이면 두려운 기운에 잠기었고, 저녁에 모이면 웃고 또 울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이 모인 때문에 다수의 회중은 김목사의 말을 잘 듣지도 못하면서 김목사의 모양만 보고 웃고 울었다. 선생이 문 밖에 나가면 사람들은 신인(神人)의 얼굴을 뵈옵고자 좌우에 인성(人城)을 쌓고 병자들은 그 그림자라도 스치기를 바랐다. 그 때 김목사의 설교의 내용을 전하는 대로 들어보면 지금 김목사의 설교보다 나을 것이 없었건만 보다 더 큰 은혜가 내렸으니 이는 하나님이 때의 조선 교회를 돌보시고 특별히 성신으로 감화하신 것이다."

대정 9년이라면 바로 1920년이다. 이 때의 김익두의 부흥회의 광경이 이랬다면, 마산이나 웅천읍의 김익두의 부흥회도 이러한 분위기의 연속선상에서 진행되었을 것이고, 주기철이 김익두의 부흥회에 참석하고 생의 방향을 틀었다면 그는 바로 이러한 부흥운동의 성령의 역사에 사로잡혔던 것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주기철이 지금까지의 오산 연전으로 이어지는 어쩌면 민족운동적이라고 해야 할 삶의 방식에서 자신과 민족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믿고 의지하는 삶의 방식으로 바꾸는 데는 1920년의 한국 부흥운동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주기철이 뒷날 일제의 태양신과 투쟁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김익두를 준비하셨고 한국 교회의 부흥운동에서 축적된 힘이 밑받침되었던 것이다.

2-4. 지성을 갖춘 신학교육: 부흥운동을 통해서 형성된 불같은 신앙은 자칫 순간적일 수 있다. 그 불을 계속 지피는 데는 교리나 신조 공부와는 다른 냉정한 수련이 필요하였다. 하나님은 주기철로 하여금 부흥운동의 뜨거움을 신학공부로 연결시킨 것은 가슴과 머리의 신앙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김인서가 길선주 김익두 후에 일어나야할 제3의 부흥운동을 전망하면서, "제3 부흥의 그 사람은 길선주 신앙에 플러스 김익두 권능 그리고 또 플러스 석학(碩學) 대덕(大德)이라야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디 있으며 그 때는 언제일가? 과거를 기록하는 분은 미래를 전망한다." 김인서가 길선주 김익두에다 석학 대덕을 겸비한 인물을 말했을 때 그 자신은 예측한 것 같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그 제3의 인물을 부흥운동가가 아니라 일제의 태양신과 투쟁할 수 있는 인물로 예정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가 존재함으로 한국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은 아니었을까. 따라서 김인서가 고대했던 그런 인물은 뜨거운 신앙과 냉철한 지성을 갖춘 인물이어햐 했다. 김익두의 부흥회로 뜨거워진 주기철은 평양신학교의 배움을 통해 신앙적인 지성을 갖추게 되었다.

그가 신학교에서 수학한 것은 1922년-25년의 3년간인데, 그 때 신학교의 정식 교수들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네비어스 방책 중 한국인 교역자 양성책과 관련, 장로회 선교부는 한국인에게 외국 유학의 기회를 거의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물러나기까지 장로교단의 신학문제는 거의 선교사들이 쥐고 있었다. 그 때문에 주기철은 재학 시절, 3 1운동 때 장로회 총회장으로서 독립운동에 앞장 섰다가 옥살이를 경험한 김선두 목사와 미국 유학에서 갓돌아온 남궁혁 박사를 졸업 전에 교정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있고 나머지는 대부분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친 선교사들의 출신학교와 교과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평양신학교의 교수로 있었던 선교사들은 호주선교회 소속으로 왔던 엥겔(G.O.Engel, 王吉志)이 스위스 바젤 출신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미국 캐나다의 신학교 출신이었다. 선교사들이 본국에서 공부한 신학교들은 '보수주의 신학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는 미국에서 근본주의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도 하였다. 근본주의운동은 천년왕국운동을 기초로 성경의 축자영감설과 무오설, 삼위일체설과 그리스도의 동정녀탄생, 인간의 전적타락과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및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주기철의 신학교 재학 시절, 미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을 근본주의 운동이 한국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보다는 길선주 김익두 및 이용도 등으로 대표되는 부흥사들에 의한 부흥운동이 신앙의 큰 조류로서 전개되었음을 더 유념해야 한다.

교과과정의 시간 배정으로 볼 때 평양신학교는 감리교계통의 협성신학교에 비해서 성경신학의 백분율이 서로 비슷했다. 조직신학과 실천신학 분야의 교육은 훨씬 강조되었다. 성경신학도 성경해석 정도에 그쳤을 것이며, 현대적인 성경신학을 교수했다고는 볼 수 없다. 1930년대 이전, 평양신학교는 성경원어 교육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것은 장로교 선교사들이 '교역자 양성책'을, 한국인의 평균 교육수준보다 약간 높게 교육하자는 선에서 묶어 두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기철이 신학교에서 교수들의 수준을 능가하는 새 신학사조를 소개받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정통적이고 교조적인 이론은 열심히 되풀이되었고, 칼빈주의적 신경과 거기에 따른 훈련이 강화되었을 것이다. 이는 교역자될 사람들은 금식과 철야기도 등 고된 훈련을 강화하도록 하자는 교역자 양성책과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뒷날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전시체제가 강화되고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이 전개되는 시점에 이르게 되면, 근본주의 신앙과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함께 수용되어 군국주의와 부딪치게 되었다. 기독교의 1,2계명은 군국주의와 더 이상 타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제의 태양신숭배 강요와 기독교의 우상숭배거부론은 결국 신사참배에서 강요와 거부로 부딪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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