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정치·경제·사회·문화)

쿠데타인가? 정의실현(正義實現)인가?

好學 2010. 1. 6. 18:29

 

쿠데타인가? 정의실현(正義實現)인가?
                       

"탕, 탕, 탕!"

 
2004년 3월 12일 오전 11시 56분, 고함, 몸싸움, 절규, 발버둥, 흐느낌이 마구잡이로 뒤섞이는 가운데 의사봉(議事棒)이 세 번 타격음(打擊音)을 냈다. 찬성 193표, 반대 2표. 탄핵이 가결되자 어떤 소장파(小將派) 국회의원은 의사당 바닥에 쓰러졌고, 어떤 의원은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반면 본회의장을 황급히 빠져나가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국회의원들의 얼굴은 만족감을 띠고 빛나고 있었다.
 
"…50분 만에 끝났네."
"잘 했어, 야당의 저력을 보여준 거야."
"선거 편하게 치르게 됐어."

 
적어도 마지막 말은 완전히 빗나갔다. 탄핵이 가결(可決)되는 순간부터 가결에 참여한 한나라당, 민주당, 자민련의 지지도는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다. 오죽했으면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 국회의원까지 있었을까. 코앞으로 다가온 16대 국회의원 선거는 최악(最惡)의 조건에서 치러야할 선거가 되었던 것이다.
 
대통령(大統領) 탄핵(彈劾)이란 법조문상에만 존재할 뿐,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헌법(憲法) 제65조에 의하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彈劾訴追)는 국회 재적의원(在籍議員) 과반수(過半數)의 발의(發議)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역대 국회의 경우 여당이 재적의원 3분의 1에도 미달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과반수에 미달하는 '여소야대(與小野大)'의 경우도 1986년 민주화(民主化) 이후에나 가끔 나타날 뿐이었다. 그러나 2003년 11월에 새천년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중 40명이 탈당(脫黨)하여, 열린우리당을 창당함으로써 사상 최초로 여당이 3분의 1에 미달(未達)하는 상황이 현실화된 것이다.
 
요건이 갖추어졌다고 바로 실현이 될까? 그랬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규칙상 허점(虛點)이 있으면 아무리 상식과 조리에 어긋나더라도 기필코 그 허점을 이용(利用)하고야 마는 게 보통 아니던가. 야3당, 특히 하루아침에 여당에서 야당으로 전락한 민주당은 이를 갈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2004년 벽두(劈頭) 기자회견에서 민주당 조순형(趙舜衡) 대표는 '대통령은 선거중립의무 위반과 측근비리 등에 사과(謝過)하고 재발방지를 확약할 것'을 요구하며 이에 응하지 않을 때 탄핵소추를 할 수 있음을 경고(警告)했다.
 
실마리는 2004년 2월 24일에 처음 잡혔다.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으로 기대한다"며 여당 지지(支持) 발언(發言)을 했던 것이다. 야3당은 대통령이 선거중립의무(選擧中立義務)를 위반했다며 곧바로 공세를 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中央選擧管理委員會)에서도 이 발언이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상의 선거중립의무 규정에 위배(違背)된다고 판시(判示)했다.
 
다시 3월 11일에는 대통령이 대국민(對國民) 기자회견에서 "내가 잘못했다는 데 무엇이 잘못인지 잘 모르겠다. ……… 하지만 시끄러우니 그냥 사과하고 넘어가겠다. …… 이번 총선(總選) 결과를 국민의 심판(審判)으로 보면 된다"고 한 발언이 또 문제시(問題視)되었다. 야당은 이를 '선관위의 유권해석(有權解釋)조차 조롱(操弄)하는 독재적, 반민주적 폭거(暴擧)'로 규정하고, 급기야(及其也) 탄핵소추에 들어갔다.
 
3월 11일 오후의 탄핵발의(彈劾發議)는 일단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저지(底止)로 무산(霧散)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 야당이 다시 공세를 펼쳐 몸싸움이 벌어지는 가운데, 박관용(朴寬用) 국회의장이 경호권(警護權)을 발동해 여당의원들의 육탄(肉彈)저지(底止)를 차단했다. 이어서 탄핵발의, 심의(審議), 결의(決議) 과정이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진행되어 사상 초유(初有)의 대통령 탄핵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대통령 탄핵 사유(事由)는 크게 세 가지였다. 선거중립의무 위반, 측근비리 등 권력형 부패, 국민경제 및 국정 파탄(破綻). 그러나 헌법학자들은 대체로 이런 사유는 탄핵사유로 불충분(不充分)하다고 했다. 탄핵은 '그 직무집행(職務執行)에 있어 헌법이나 법률에 위배(違背)한 때' 소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단 '국민경제 및 국정 파탄'은 해당되지 않는다. 무능(無能)하다고 그것이 위법(違法)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측근비리의 경우도 대통령이 직접 직무상 권력을 남용(濫用)해서 비리에 개입(介入)했다면 모르지만, 그런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선거중립의무 위반'은 선관위의 해석도 있었다는 점에서 보다 미묘(微妙)하다. 하지만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정무직(政務職) 공무원으로서, 공무원이면서 국회의원이라는 이중적 입장에 서있다. 즉 일반 공무원과는 달리 정당(政黨)에 가입(加入)하여 활동을 하는 일이 허용된다. 그런데 분명 국회의원은 자기 자신의 선거운동은 물론 소속 정당이나 동료의원을 위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대통령은 안 되는가? 실제로 외국의 경우 대통령이 공공연히 소속 정당을 위한 선거유세에 나서는 경우도 많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이 공무원 선거중립의무에 구속되지는 않으며, 설령 구속된다 해도 노무현의 발언 정도로는 중대한 의무 위반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 반론(反論)도 있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은 입장이 다르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은 몇몇 보좌관을 제외하면 지휘(指揮)할 수 있는 공무원이 없다. 그러나 대통령은 행정부 소속 전(全) 공무원의 지휘권자(指揮權者)다. 물론 노무현의 경우에 대통령이 공무원들에게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라고 지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관권선거(官權選擧) 관행(慣行)'으로 볼 때 대통령이 여당에 대해 그런 식으로 운(韻)을 떼면 공무원들이 '알아서' 개입에 나서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일리는 있지만 법률을 적용할 때 그처럼 모호한 관행까지 끌어서 적용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또한 대통령이 측근비리에 개입한 증거가 없다지만, 측근비리에 대한 특검(特檢) 법안(法案)에 거부권(拒否權)을 행사한 점은 개입의 정황증거(情況證據)로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 역시 일리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다소 공정성을 잃은 행동이라 여길 수는 있어도 비리에 개입한 정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주된 견해였다.
 
여기에 절차상의 문제점, 즉 국회법 제72조에 따라 본회의는 오후 2시에 연다는 규정(단 의장과 교섭단체 대표의 협의로 변경할 수 있다)을 위반하고 오전 10시에 개회했다는 점과 국회법 제93조에 따라 안건을 심사한 위원장의 보고와 제안자의 취지 설명, 질의와 토론의 과정을 거치게 되어있는 것을 모조리 생략하고 진행됐다는 점이 지적됐다. 이에 대해 박관용 의장은 "변경 제의를 했는데 이의 제기가 없어 수락한 것으로 보았다. … 탄핵소추 관련 국회법에는 질의 토론 요건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당시의 상황이 여야의 격렬한 몸싸움으로 정상적 진행이 곤란했음은 납득되지만, 과연 국회의장이 적절히 규칙을 지키며 의사를 진행했는가는 의문으로 남을 수 있다. 다만 이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로 무사히 넘어갔다는 점에서 절차상의 문제는 사후승인(事後承認)을 받은 셈이다.
 
법적(法的) 문제야 어찌됐던(사실은 법적 문제가 전부일 수도 있지만), 정치적으로 탄핵은 야3당의 자살행위(自殺行爲)였다. 연일 광화문을 메우는 촛불집회 끝에 치러진 제16대 통선은 47석이던 열린우리당이 152석으로 대약진하고, 한나라당은 121석으로 주저앉으며, 새천년민주당은 9석, 자우민주연합은 4석으로 거의 존재가 없어지는 대변동을 낳았다. '진보(進步) 무드'에 힙입어 민주노동당도 10석을 얻어, 민주당을 제치고 제3당에 올라섰다.
 
탄핵 직전까지만 해도 대통령의 지지도가 30퍼센트를 밑돌 정도로 여당을 불신했던 민심이 왜 이렇게 바뀌었는가? 일부 문제점이 있다 해도 탄핵소추 과정은 적법(適法)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의회(議會)의 쿠데타'라는 평가까지 들어야 했는가? 일부에서는 이를 '대의제(代議制) 원리와 국민주권(國民主權) 원리의 충돌(衝突)'이라고 풀이한다. 직접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에서 주권을 국회의원 등 선출직(選出職) 공무원들에게 위임하는 대의제 원리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주권(主權)은 국민(國民)에게 있다'는 국민주권 원리와 충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는 원리와 원리의 충돌이라기보다는, 관념(觀念)과 관념의 충돌이었다. 제1공화국 이래 국민은 대통령을 국민적 기대를 한몸에 받는 '영웅(英雄)'으로 여겼고, 적어도 취임 초에는 그에게 전폭적(全幅的)인 지지(支持)를 몰아주었다. 물론 점점 실망이 쌓이면서 지지도가 바닥을 치게 되지만…. 아무튼 그에 비해 엄연한 '민의(民意) 대표자(代表者)'들인 국회의원은 일종의 협잡(挾雜)꾼들, 간신배(奸臣輩)들로 여겨지는 게 보통이었다. 그 간신배들이 국민의 진정한 대표인 대통령을 별 시덥지 않은 이유로 갈아치웠을 때, 국민의 일반적 반응은 이것이었다. "갈아치워도 우리가 한다. 누구 마음대로 너희가 그러느냐?" 반명 야3당은 과거 여야 대립시절(對立時節)의 관념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 관념에 따르면 여당은 항상 교활(狡猾)한 악(惡)이고, 야당은 선(善)이었다. 야당이 조금이라도 공세를 늦추면 여당은 관권(官權)과 금권(金權)을 동원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따라서 타협(妥協) 없는 극한투쟁(極限鬪爭), 선명투쟁(鮮明鬪爭)만이 야당의 본분(本分)이라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마각(馬脚)을 드러낸 이상 기회가 있을 때 치명타(致命打)를 안겨야 한다. 그러면 국민이 박수(拍手)를 쳐줄 것이라는 국회의원들의 관념과 국민 일반의 '너희가 무슨 권리로?'하는 관념이 정면충돌(正面衝突)한 것이다.  
 
17대 총선이 여당의 승리로 끝난 다음, 헌법재판소(憲法裁判所)에서 탄핵이 기각됨으로써 노무현은 다시 청와대(靑瓦臺)로 귀환(歸還)했다. 그 이상 좋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치 그런 상황을 알고 유도(誘導)한 것처럼….
 
하지만 그 뒤의 행로(行路)는 결코 꽃길이 아니었다. 야3당은 탄핵 직전의 지지율만 보고 자신들의 행동이 지지받을 것으로 착각(錯覺)했으나, 탄핵으로 격앙(激昻)된 민심이 그대로 지속적(持續的)인 야당 지지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 역시(亦是) 착각이었다.
 
약 3년 후, 탄핵에 반대하여 촛불을 들고 여당에 몰표를 줬던 그 손들이 한나라당 후보들에게 압승(壓勝)을 선물(膳物)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