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정치·경제·사회·문화)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은 없다(?)

好學 2010. 1. 6. 18:27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은 없다(?)
 


2005년 12월 22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재판관 7대 1의 의견으로 민법 제781조 제1항 본문 중 '자(子)는 부(父)의 성(姓)과 본(本)을 따르고' 부분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선고했다. 단 당장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2007년 12월 31일까지는 그 조항의 잠정 적용을 명한다고 덧붙였다.
 
이 재판 결과는 2003년에 곽 모 씨 형제가 헌재에 낸 위한법률심사제청에 대한 선고의 형식을 취했다. 이들 형제는 생부(生父)의 사망 후 재혼한 어머니와 함께 양부(養父)를 맞이했는데, 양부의 성으로 바꾸기를 원하면서 민법에서 자식은 혈통적 아버지의 성을 따른다는 조항, 즉 '부계성 강제조항'이 헌법 제 10조에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한 것과 제36조 제1항에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個人)의 존엄(尊嚴)과 양성(兩性)의 평등(平等)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고 하는 것에 위배된다고 헌재에 제소한 것이다.
 
그런데 헌재는 강제조항 자체는 원칙상 합헌이라고 판시했다. 그 이유는 '성은 기호가 가지는 성질로 인해 개인의 권리의무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이 크지 않으며' 성에 대한 법률은 사회문화적 통념과 전통을 반영하기 마련이라는 점, '인간의 혈통(血統)을 모두 성에 반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성이 개인의 혈통을 제한된 범위에서만 반영하는 것도 반영된다고 보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즉 성(姓)이란 그 자체로 어떤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므로 어머니의 성을 전하지 못한다고 하여 개인의 이익이 특별히 침해되었다고 볼 수 없다. 또한 일부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부모성 함께 쓰기'를 할 경우 대를 이어가면서 성이 무한정 길어지는 성향을 초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선택적으로 사용하면 된다는 반박(反駁)이 있다. 가령 김박영희와 정최철수가 결혼해 민희와 민철을 낳았다면, 자식들의 성은 '김박정최'라는 네 개의 성을 모두 사용하지 않는다. 김정민희, 김정민철이 될 수도 있고, 박최민희, 박정민철이 될 수도 있으며, 김정민희, 박최민철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할 경우 형제자매끼리도 성이 틀리는 등 가족 구성원 모두의 성이 제각각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 중 하나의 성이 다음 대에는 반영되어도 그 다음 대에는 반영되지 않을 수 있으므로, '단일하게 계승되는 혈통'을 표시하는 성의 기능은 사실상 폐기된다 할 것이다.
 
그러면 왜 위헌(違憲) 판결이 나왔는가? 그것은 '예외적 상황에 대한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아이 아버지가 일찍 죽었거나, 애초부터 싱글맘이거나 해서 자녀는 생부와 실질적 가족생활을 나누지 않으며 어머니 및 새아버지와 실질적으로 결합해 있다고 하자. 그런데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아버지의 성을 따라야 하는가? 그것은 해당 자녀에게 가족 정체성(正體性)의 분열을 가져 올 것이다. 더욱이 재혼 가정 자녀가 현실적으로 따돌림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때. 그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표시('아버지'와 성이 다른 자녀)는 실질적(實質的)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다. 양자로 입양되었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 때문에 양자라는 사실을 계속 확인당하고, 멸시받을 가능성에 노출된다. 그런 사실 때문에 입양에 소극적이기 되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부계성 강제 조항은 예외적 경우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폐지 찬성 재판관들 중 다수 의견이며, 소수(전효숙, 송인준)는 더 적극적 취지로 헌법불합치(憲法不合治) 판정을 내렸다. 현실적으로 부모성을 모두 따르는 게 어렵든 않든, 성이 어느쪽 성인지에 따라 현실적 불이익이 있든 없든, 부계성을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가부장제 문화를 온존하는 것이며 여성을 남성에 비해 열등한 위치로 상정한다고 한다. 호주제(戶主制)의 경우에도 호주가 남성 우선적으로 계승된다고 해서 특별한 이익관계를 발생시키지는 않지만, 여성을 남성의 뒤로 돌리는 상징적 효과를 갖는다. 따라서 호주제도 폐지되었으니, 부계성 강조 조항 역시 폐지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단 한 명의 반대의견(권성)은 '부계혈통 문화는 법이 있기 전부터 존재해온 문화'라는 것과 '재혼이나 입양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는 불이익 역시 잘못된 사회적 관행 때문이지, 부계성 제도 자체 때문이 아니다'는 것을 근거로 했다. 본래 가족을 정할 때 모자관계는 확실하지만 부자관계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므로 부계를 중심으로 성씨를 전하기로 한 것인데, 이제 실체적 불이익도 없는 상황에서 추상적인 근거를 폐지해서는 안 된다. 또한 서구의 경우처럼 우리나라도 사회적 관행이 바뀐다면 재혼 가정 자녀나 양자라하여 차별의 대상이 되지 않을 텐데, 지금 구태여 그것을 이유로 성을 바꾸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위헌결정은 기존의 민법조항에 대한 판결이었으며, 이미 정해져 있던 법 개정에 따라 2008년 1월 1일부터 만법 제781조 제1항은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합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로 종전의 부계성 원칙을 유지하되 부모의 합의에 따라 모계성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제6항에서 "자의 복리를 위해 자의 성과 본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부, 모 또는 자의 청구에 한하여 법원의 허가를 받아 이를 변경할 수 있다"고 하여, 양자, 재혼 가정자녀 등의 복리에 대한 배려를 덧붙였다. 이로써 부계성 강제 원칙은 일단 유지된 듯하면서 실제로는 폐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통(傳統)과 인권(人權)이 충돌하면 어느 쪽이 승리해야 할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평등한 것은 얼마든지 더 평등하게 할 여지가 있다. 보이는 모든 것을 기계적 평등의 잣대로 잰다면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한 개인에서 다른 개인으로 전해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리라.
 
그러나 한 편으로 전통이란 공동체의 다수가 지켜야 할 가지가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가치가 없다는 의견이 다수가 되는 순간, 그것은 전통이 아닌 인습이 된다. 오랜 세월동안 당연시 되었던 신분제(身分制)와 가부장제(家父長制)는 근대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하나씩 발 디딜 곳을 잃어갔다. 유난히 혈통에 집착하는 우리의 가족문화(보통 서양에서는 결혼한 여자가 자신의 성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남편의 성을 따른다는 점을 들어 '우리는 그래도 나은 편'이라 하는데, 서양의 경우 성이란 혈통개념이 아니라 가족개념이다. 따라서 만약 데릴사위가 될 경우 남편이 아내의 성으로 바뀐다. 더욱이 서양에서는 부계성이든 모계성이든 뭐든 성에 대한 강제조항이 법률에 없다)도 여러 차례의 민법개정을 통해 가부장제적 속성을 하나씩 잃고(가령 1980년대까지는 상속에 있어 호주 및 아들에게 차등적 혜택이 있었다), 명맥만 남은 채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조차 없어지게 된다.
 
관습상 앞으로도 당분간은 부계성 위주로 계승되겠지만, 결국 혈통의 상징으로써의 성씨는 무의미해지리라. 그때쯤이면 '본관(本貫)'이 어디니, '무슨공파(公派)'라느니 하는 이야기도, 족보(族譜)나 종친회(宗親會) 같은 것도 상투나 갓처럼 지난 시대의 유물이 되리라. 그것인 과연 인간을 더 행복하게 해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제 한국인들은 실질적 이익이 걸린 불평등만이 아니라 상징적인 불평등조차 참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조선왕조 5백 년간 우리의 '민족성'에 뿌리내린 두 가지 중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계기로 소멸에 접어들었다면, 이제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 역시 그 길을 걷고 있다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