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정치·경제·사회·문화)

10. 시장가격은 어떻게 정해지나?

好學 2010. 1. 6. 18:24

 

 

 중세가 되자 정기적(定期的)으로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시장(市場)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구하고 팔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의 원칙을 만들어 갔다.
 
중세의 수도원은 야만적인 세상에서 섬 같은 곳이었다. 수도원 밖은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무법천지였지만, 수도원 안의 수도사들은 직접 농사를 짓고 옛날 책과 문서들을 보관하고 연구하며 평온히 살았다.
 
왕과 귀족들은 수도원에 기꺼이 토지를 나누어 주었고, 수도원의 살림은 모두 수도원의 땅에서 나온 것으로 이루어졌다. 수도사들은 필요한 것들을 직접 만들거나 수도원의 농토에서 일하는 농노들에게 만들게 했다. 수도사와 농노들은 밀을 심고 거두어 빵을 만들었고 포도주와 맥주를 만들었으며 여러 가지 통과 연장도 만들었다. 또 양어장을 만들어 물고기를 기르거나 옷감을 잘라 옷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수도사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주의 토지인 장원(莊園) 안에서 살았다. 장원에는 농사짓는 땅과 영주와 농조들의 집, 제분소나 제빵소, 창고처럼 생활에 필요한 시설들이 있었다. 장원은 귀족인 영주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받은 땅인데 영주는 그 대가로 왕을 위해 전쟁에 나가 싸워야 했다. 장원에서 사는 농민은 신분이 자유롭지 못한 농노로, 영주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세금을 내며 영주를 위해 일해야 했다. 중세에는 이런 장원을 중심으로 자급자족의 경제가 이루어졌다.
 
중세 초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지중해 지역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던 무역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중세에 상업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수도원이나 영주의 장원에서 만들지 못하는 물건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소금이 그랬다. 소금은 당시 대단히 중요한 물건이었다. 소금이 없으면 고기와 치즈를 오랫동안 보관할 수 없었다. 중세 사람들은 소금을 ‘염천(鹽泉)’이라고 부르는 소금물 샘에서 길어 올리거나 광산에서 캐낸 돌덩어리에서 구했다. 알프스산맥에는 소금 광산이 여러 개 있었는데, 지금도 그 근방의 도시 이름을 보면 과거 그곳에서 소금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소금(잘츠)’과 ‘성(부르크)’이라는 단어로 이루어진 독일의 잘츠부르크가 그런 곳이다.
 
수도원이나 장원에는 언제나 지나치게 많이 생산되는 것과 적게 생산되는 것들이 있었다. 포도 농사가 잘되어서 포도를 저장할 통이 부족해지면 포도가 많은 사람은 통을 많이 가진 사람을 찾아 교환해야 했다. 또 흉년이 든 장원의 농부들은 많은 수확을 낸 품질 좋은 씨앗을 구하려고 애썼다.
 
농부들은 멀리 가지 않고도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중세에는 로마제국 시대에 건설된 도로가 모두 파괴되어 도로사정이 좋지 않았다. 또 어딜 가든 도둑이 들끓어서 먼 곳까지 여행하기 어려웠다. 만약 일정한 장소에서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만나 물건을 사고팔 수 있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까지 가지 않고도 원하는 물건을 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시장(市場)’이 생겨났다.
 
중세의 시장은 오늘날 세계 어디에나 있는 재래시장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시장에서는 직접 거둔 농작물을 가지고 나온 시골 여자들과 집에서 만든 바구니나 기구를 가지고 나온 남자들이 적당히 물건을 늘어놓고 팔았다. 어떤 사람은 지붕이 있는 포장마차에 물건을 올려놓았고, 또 다른 사람은 보자기에 과일들을 펼쳐 놓았다. 살아있는 닭을 닭장에 가둬 놓고 파는 사람도 있었다. 돈을 가지고 값을 흥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사용하기에는 아직 돈이 부족했기 때문에 여전히 물물교환(物物交換)이 많이 이루어졌다.
 
744년 프랑크왕국(王國)의 왕 피핀은 커다란 마을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일주일에 한 번씩 시장을 열도록 명령했다. 프랑크왕국에서는 로마시대의 동전(銅錢) 주조방법을 이어받아 알자즈 지방에서 캐낸 은으로 은화를 만들어 썼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런 동전을 손에 쥘 기회는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구하고 팔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의 원칙을 만들어 갔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가능한 비싼 값에 팔려고 하고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은 싸게 사려고 했다. 팔려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이 시장에서 만나 서로 만족할 때까지 흥정을 해서 적당한 가격을 정했다. 가격이 오르면 사려는 사람이 줄어들고 팔려는 사람이 많아진다. 팔려는 사람이 사려는 사람보다 많아지면 가격은 다시 떨어진다. 이런 방식으로 시장에서는 물건의 가격뿐만 아니라 필요한 물건의 양이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제대로 된 시장에서는 아침에 물건을 팔러 나온 사람이 저역이면 물건을 모두 팔고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규칙을 따르지 않는 시장에서는 바로 혼란이 찾아왔다. 어떤 나라의 왕이 백성들이 빵이 비싸다고 불평하는 것을 듣고 법으로 빵 값을 낮추었다고 생각해 보자. 정해진 값보다 더 비싸게 빵을 파는 사람은 엄하게 처벌을 받았다. 결과는 어떨까? 처음에 사람들은 빵을 싸게 살 수 있어서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곧 빵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줄어들어 시장에는 빵이 부족해 질 것이다. 애써 농사를 짓고 빵을 만들어도 적절한 값을 받을 수 없다면 아무도 빵을 만들어 팔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빵은 시장에 나오기가 무섭게 팔려 나가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도 빵을 사지 못하고 굶주리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왕이 빵 값을 높였을 경우에 대해 생각해 보자. 빵 값이 비쌀 때는 빵을 팔아 돈을 벌려는 사람이 늘어난다. 하지만 비싼 빵을 살 수 있을 만큼 돈이 많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결국 상인들은 팔리지 않고 남는 빵을 다시 집으로 가져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시장에서는 가격이 물건을 사려는 사람의 욕구인 수요(需要)와 물건을 팔려는 사람이 제공하는 공급(供給)에 따라 정해졌다. 그런데 중세 수공업자들은 이런 시장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가격을 결정했다. 그러고는 수요가 얼마나 있는지 알아보는 대신 시장에 물건이 너무 많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길드’라는 조합을 만들었다.
 
길드에서는 시장에 내보낼 물건의 종류와 양을 엄격하게 정했다. 처음에 길드는 수공업자들에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시장에서 정해진 가격으로 물건을 파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길드에 속한 수공업자들은 자기 직업을 계속 독차지하기 위해 직업상의 비밀을 숨기는 데 엄청난 정성을 기울였고, 더 새롭고 나은 제조법을 발명한 사람들을 견제했다. 이 때문에 중세에는 기술이 느리게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