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정치·경제·사회·문화)

관습헌법(慣習憲法)의 벽은 높았다(?)

好學 2010. 1. 6. 18:28

 

관습헌법(慣習憲法)의 벽은 높았다(?) 
                       

 

"서울이 수도(首都)라는 점은 헌법상 명문의 조항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왕조 이래 600여 년간 오랜 관습(慣習)에 의해 형성된 관행(慣行)이므로, 관습헌법(慣習憲法)으로 성립된 불문헌법(不文憲法)에 해당된다."
 
2002년 17대 대통령선거 당시 노무현(盧武鉉) 후보의 핵심 공약(公約)이었던 '수도 이전(首都移轉)'은 2004년 10월 22일,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무산되었다. 노정권(盧政權)은 이에 굴하지 않고 충청남도 연기군에 '행정복합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으로 '청와대, 국회 빼고 다 옮기는' 사실상의 수도 이전을 추진하고 나섰다. 하지만 정도(定都) 6백여 년 만에 비로소 서울에서 다른 곳으로 수도를 옮긴다는 원대한 프로젝트는 일단 빛이 바랬다.
 
노무현이 수도 이전을 공약한 이유는 복합적(複合的)으로 해석된다. 우선 그 주된 명분은 거울을 비롯한 수도권(首都圈)에 정치, 경제, 문화, 인구 등의 자원(資源)이 과다(過多) 집중(集中)되어 있는 '서울 공화국(共和國)'의 병폐(病弊)를 해소하자는 것,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낙후(落後)된 지방을 살려 '균형발전(均衡發展)'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사실 다른 나라의 경우 정치적 중심지와 경제적 중심지가 별개이거나, 중앙권력이 수립되기 훨씬 이전부터 발전해온 지방이 수도권 못지않은 역량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조선 태조 이성계에 의해 한양(漢陽)이 수도로 정해진 이래 보든 부분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사람이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는' 것이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상식이 됨으로써 1960년대 한국사회를 분석한 그레고리 핸더슨이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소용돌이처럼 하나의 중심으로 굽이쳐 들어간다.…… 가령 지방에서는 하나 같이 서울로 올라가려고만 하며, 지방마다의 독자성(獨自性)과 자율성(自律性)을 확보하려 하지 않는다"고 꼬집을 정도가 되었다. 이런 불균형이 가져오는 문제를 해결하자면 수도 이전 이외에는 답이 없다는 말은 설득력(說得力) 있는 주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노무현의 수도 이전론은 그렇게만 이해할 수 없는 면도 있다. 과거의 천도(遷都)가 으레 그랬듯 서울에서 수도를 옮기자는 것은 서울 중심의 기득권(旣得權)을 공격하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노무현은 그들을 달래는 입장에 서고자 '경제수도론(經濟首都論)'을 함께 내놓았다. 정부는 지방으로 옮기지만 서울은 경제 중심지로서 오히려 지금보다 발전시키며, 동북아의 경제 허브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서울 지역 유세(遊說)에서는 "지저분한 것들은 저 밑으로 내려 보내고, 더 쾌적하게 살아 보자"는 말까지 나왔다.
 
대체 왜 너도 나도 수도권으로 몰리는가? 과거에야 정치적 중심지가 자연스레 경제, 문화의 중심지도 되었겠지만, 오늘날에는 청와대(靑瓦臺)와 국회(國會)가 어디에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천만의 인구가 공해(公害)와 교통난(交通難), 비싼 집값에 시달리면서도 수도권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일자리 때문이며, 또한 자녀 교육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만 서울에서 빼내고 경제 중심지로서의 서울의 역량을 더욱 강화시킨다면, 오히려 서울의 집중도가 더 커지지 않겠는가?
 
사실 수도 이전론자들 중에는 이런 점이야말로 이전의 진정한 목표라고 여긴 사란들도 있었다. 그들은 '균형발전'이란 정치적 수사(修辭)일 뿐이며, 수도권이라는 이유로 묶여 있는 각종 규제에서 서울을 해방시켜 자유롭게 공장, 학교 등이 들어설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 21세기 경제전쟁 시대에 서울의 경쟁력(競爭力)을 확보할 수 있다고 여겼다.
 
사실 천도를 통해 기존의 권력구도를 허물고, 국가의 세력분포를 일신한다는 아이디어는 구시대적이다. 전통시대라면 몰라도, 공간적 거리의 큰 의미가 없어진 IT시대에는 정부부처 건물이 서울에 있든, 대전에 있든 큰 차이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노무현의 수도 이전 공약의 진짜 목적은 충청권 표심(票心)에 호소함으로써 선거에서 이기려는 것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그는 아무 연고가 없었던 충청권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어 17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수도 이전이 '관습헌법'이라는 일반에 생소한 개념까지 동원하며 헌법재판소에서 기각(棄却)되자, 수긍할 수 없다는 여론이 상당기간 이어졌다. 일부에서는 헌법재판관들이 대부분 서울 강남지역 거주자들이라며, 기득권 수호에 연연하는 엘리트 계층의 음모(陰謀)를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런 면도 일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결정의 더 중요한 의미는 수도권 분산의 절호(絶好)의 기회가 무산된 것도 아니고, 이기적인 기득권에 의해 야심찬 개혁의지가 좌절된 것도 아니다. 전근대(前近代)부터 오랫동안 '새 시대를 열어줄 영웅'으로 민중의 기대를 모았던 지도자, 개혁군주나 개혁적 대통령의 의지(意志)만으로는 더 이상 실질적인 변화를 이룰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 정치권의 밀어붙이기가 사법권의 권한에 따라 언제든지 차단될 수 있는 '정상적(正常的)인 민주국가(民主國家)'가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