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정치·경제·사회·문화)

9. 노동은 노예나 하는 일이라고?

好學 2010. 1. 6. 18:23

 

 

 

고대(古代) 사람들은 노예(奴隸)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중세(中世) 수도원에서 노동(勞動)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면 공장은 세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에서는 시민의 자유와 사유재산을 보장했고, 로마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자유(自由), 법(法), 사유재산(私有財産)은 소수의 시민들에게나 의미 있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노동을 도맡아야 했던 노예들은 어떤 것도 누릴 수 없었다. 고대사회에서 노예는 왕이나 시민 혹은 농민의 소유물이었으며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고대에는 어디를 가든 노예를 부리는 일이 매우 흔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는 붙잡은 포로들을 시장에 노예로 내다 팔았다. 스파르타뿐만 아니라 아테네와 로마에서도 노예들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대부분을 맡아 일했다. 노예들은 돼지를 기르고 밭을 일구고 광산을 개발했다. 아테네에서는 노예가 큰 은행의 책임자로 일하기도 했다. 아테네의 장군들 중에는 노예가 1,000명을 넘지 않는 사람이 드물었고, 어떤 장군은 자기 소유한 노예들을 돈을 받고 광산에 빌려주기도 했다.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에 아테네에는 대략 40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 이것은 시민 한 명이 노예를 다섯 명씩 데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부자들뿐만 아니라 보통 시민들도 노예를 부렸다. 노예들은 요리사, 심부름꾼, 가정교사, 집사, 비서로 일했다. 노예를 좀더 많이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로마제국 시대에 북아프리카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부유한 로마인에게 노예로 파는 일도 있었다. 또 빚이 많은 사람들은 빚을 갚기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이 무렵에는 노예들이 들고 일어나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기원전 73년부터 71년 사이에 일어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다. 이 일은 로마제국을 위기로 몰아넣을 만큼 큰 사건이었다. 반란군의 우두머리였던 스파르타쿠스는 그리스 북쪽의 시골 마을인 트라키아 출신으로, 노예 검투사 훈련소에 갇힌 검투사였다. 그는 훈련을 마치면 격투장에 나가 로마인들의 즐거움을 위해 죽을 때까지 싸워야만 했다. 그는 70여명의 검투사들을 데리고 검투사 훈련장을 도망쳐 가난한 농민들과 목동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로마제국에서 보낸 진압군 2개 군단을 차례로 격파하고 남부 이탈리아를 지배하기도 했지만, 결국 2년 만에 이탈리아 북부지방에서 붙잡혀 처형되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가 노예제도의 폐지를 위해 싸웠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자신과 가족이 좀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려고 했을 뿐 노예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노예제도는 고대 사람들의 생활뿐만 아니라 사고방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분이 자유로운 시민들은 지금 우리가 ‘일’이라고 말하는 것들의 대부분을 우습게 생각했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작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서력기원전 106~43)는 직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떤 직업이 귀하고 천한가를 판단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기준이 적용된다. 우선 항구의 세관원이나 고리대금업자처럼 인간에게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직업은 귀하지 않다. 타고난 재주를 발휘하지 못하고 단순히 노동력을 제공하고 돈을 받는 직업도 별로 좋지 않다. 그런 일을 해서 받은 돈에는 자신을 노예로 부린 데 대한 값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또한 금방 되팔기 위해 물건을 사들이는 상인도 천한 직업이다. 그들은 상대를 속이지 않고는 돈을 벌지 못한다. …… 일을 할 때 정신이 자유롭지 못한 수공업자등도 천한 직업에 속한다. 가장 비천한 직업은 육체적인 쾌락을 위해 일하는 직업이다. 예를 들면 생선장수, 푸줏간주인, 요리사, 닭고기나 새고기를 파는 사람, 향수를 파는 사람이 그렇다. 춤꾼처럼 사람들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키케로는 의사, 설계사, 교육자 등을 귀한 직업으로 보았다. 그러나 가장 고상한 직업을 가진 사람은 농사 지를 땅을 가지고 있으면서 일은 노예에게 시키고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결국 키케로의 기준에서 보면 오늘날의 직업은 거의 모두 비천한 것이다.
 
고개 사람들의 이런 생각을 바꾸려면 혁명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혁명은 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가능해졌다. 로마제국이 쇠락의 길을 걷던 4, 5세기경 로마사람들의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는데 타락한 황제는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놀았다. 도둑이 들끓어 나라는 혼란에 빠졌고 상업과 농업과 수공업이 모두 쇠퇴했다. 사람들은 크리스트교라는 새로운 종교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처음 로마에 크리스트교가 전해졌을 때는 박해가 심했다. 그러나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사랑과 평등을 주장한 크리스트교는 노예에서부터 부유한 시민층에 이르기까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로마제국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더욱 세력이 커진 크리스트교는 중세유럽의 지배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중세의 교회는 왕과 귀족으로부터 많은 땅을 넘겨받았다. 당시 교회에 속한 땅은 서유럽 전체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 이렇게 교회의 세력이 커지면서 목사나 집사 같은 직책을 돈으로 사고파는 일이 벌어졌다.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수도원을 중심으로 이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수도원은 4세기경 이집트에 처음 세워졌는데 중세유럽의 수도원 중에서는 청빈(淸貧), 정결(淨潔), 순종(順從)을 계율로 삼는 베네딕트수도원이 특히 유명했다. 그들은 시간을 지켜 기도하면서 짬짬이 밭에 나가 일을 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구했다. 베네딕트는 사람들에게 직접 노동을 해서 신을 모셔야 한다고 설교했다.
 
베네딕트가 생각하는 노동의 규칙은 이런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정신에 해롭다. 그러므로 정해진 시간에 따라 육체적인 일과 정신적인 일을 모두 해야 한다.”
 
베네딕트의 규율을 따르는 수도사들은 수도원 바깥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수도사들처럼 계획을 세워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 일을 계기로 사람들은 시간과 환경, 노동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