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정치·경제·사회·문화)

7. 사유재산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好學 2009. 12. 3. 22:03

 

7. 사유재산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는 시민의 사유재산(私有財産)을 인정함으로써 경제가 크게 발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유재산을 인정하면 사람들의 일할 의욕(意慾)을 자극해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쓰고 남는 물건이 많아질수록 누가 어떤 물건을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점점 중요해졌다. 사냥을 하거나 식물을 채집해서 먹던 석기시대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젊은 남자들이 곰을 잡아 오면 부족 사람들이 모두 모여 고기를 먹고 가죽을 나누어 가졌다.
 
사냥한 짐승이 누구의 것인지에 대해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지금도 현재 문명과 접촉하지 않은 오지의 원주민들은 석기시대 사람들처럼 살고 있다.
 
그러나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많은 것이 더 복잡해졌다. 밀과 보리를 키우는 밭은 부족의 공동소유(共同所有)일까? 아니면 추장의 소유(所有)일까? 만약 밭이 추장의 것이라면 추장이 죽은 다음에는 그 권리(權利)가 다음 추장에게 이어질까? 아니면 전 추장의 가족에게 남게 될까? 그런 권리를 가진 추장이 계속 한 집안에서 나오는 것으로 해야 할까? 아니면 매번 여럿 가운데 한 명을 뽑아야 할까? 어떤 식으로든 밭을 누구의 소유로 할 것인가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했다.
 
수메르 왕과 이집트의 파라오는 자신이 다스리는 땅에 사는 사람들과 거기서 자라는 곡식을 모두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백성 모두가 왕의 노예였고 재산이었다. 수메르 왕의 무덤에서는 왕과 함께 묻힌 신하들이 종종 발견된다. 왕은 죽어서도 왕이었고, 왕이 떠난 세상에 신하가 계속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산 채로 왕과 함께 묻혔던 것이다.
 
그러나 왕의 신하들 가운데에도 자신만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또 수메르 상인들 역시 계약서를 아주 세밀하게 작성해 세금을 냈던 것으로 보아 개인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유재산(私有財産)을 가지고 있었다.
 
사유재산이라는 뜻의 라틴어 ‘프리바투스’는 ‘나뉘었다’ 혹은 ‘약탈했다’의 의미로 쓰였다. 개인의 재산이 인정되면서 도둑과 강도가 생겨나고 사람들이 부족 전체보다는 자기 부족만 부유하게 살고 싶은 욕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절도(竊盜)와 사기(詐欺), 도난(盜難) 같은 사건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미국의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1881~1973)는 “세상에 있는 토지 가운데 폭력적으로 빼앗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프루동(1809~1865)도 “사유재산이란 도둑질한 물건이다”고 했다.
 
하지만 사유재산을 인정한다는 것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재산을 늘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유재산제도가 경제발전에 어떤 영향을 비쳤는지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예에서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는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리스 언어, 그리스 철학, 그리스 신화는 지금도 많은 학자들이 주요한 자료로 연구하고 있다. 그 무렵 그리스는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대신 여러 도시 국가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했다.
 
처음에 아테네 시민들은 왕과 귀족의 지배를 받았지만 해외 무역과 국내 상공업의 발달로 시민들 가운데에 부유한 사람이 늘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시민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맞는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면서 귀족과 대립했다. 결국 서력기원전 6세기, 아테네에서는 시민들이 국가의 일을 직접 결정하는 민주정치가 시작되었다. 비록 여자나 노예는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신분이 자유로운 시민은 누구나 정치에 참여했고 사유재산도 가질 수 있었다.
 
반면 스파르타는 군사국가였다. 남부 그리스의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정복하고 나라를 세운 스파르타 사람들은 그곳 주민들을 노예로 부렸다. 많은 원주민을 지배하기 위해서 스파르타 사람들은 강력한 군대를 만들고 시민들의 생활을 통제했으며 엄격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다. 7세에서 20세까지 군사훈련을 받고 나면 결혼을 할 수 있었지만 30세가 될 때까지는 독립된 가정생활을 할 수 없었다. 사유재산도 제한적으로만 인정되어 전쟁에서 공을 새운 병사의 가족은 일정한 넓이의 농토를 경작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그들은 노예를 시켜 그 땅에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스파르타 사람들은 아주 검소하게 살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나라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사유재산을 인정한 아테네의 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한 데 비해 스파르타는 경제적으로 점점 어려워졌다. 스파르타는 이방인들을 나라밖으로 몰아냈지만 아테네는 그들과 적극적으로 무역을 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기름과 포도주, 도자기, 무기, 쇠로 만든 제품들을 지중해 너머에서 온 상인들에게 팔았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치즈, 생선, 목재, 상아, 밀가루, 대추야자 열매, 양탄자 등을 사들였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서력기원전 384~322년)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경제를 비교한 후 이렇게 결론 내렸다.
 
“누구나 각자 자기 물건을 가지고 돌볼 수 있게 되면 다른 사람과 싸울 일이 없다. 또한 모든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자기 재산을 늘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게 되므로 국가도 더 크게 발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에 각각 임자가 있다면 서로 다투거나 고소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유재산이 국가에 평화를 안겨 준다고 보았다.
 
아테네는 시민의 사유재산을 인정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기가 소유한 것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개인의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테네 사람들이 자유라는 개념을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일찍 생각해 낸 것도 당연하다. 당시 다른 나라에서는 그리스어의 ‘자유(自由)’라는 단어를 자기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서력기원전 495~429년)는 개인(個人)의 권리(權利)와 사유재산(私有財産)을 인정하는 민주정치의 대변자(代辯者)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어느 강연에서 민주정치의 장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일상생활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서로 의심하지 않고 이웃이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한다고 해도 결코 그것을 조롱하지 않는다.”
 
아테네에서는 스파르타와 달리 시민의 의무와 권리가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시민은 국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의무와 권리를 함께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