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Jean Calvin의 신앙

[스크랩] 칼빈의 초기사상 이해 [성례]

好學 2009. 11. 5. 13:31

칼빈의 초기사상 이해 [성례]

 

 

 

A. 일반적 의미의 성례

1. 성례란 무엇인가? 성례란 우리의 약한 믿음을 붙들어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선한 뜻을 나타내시고 확증해 주는 일의 외적 표시이다. 또한 성례는 이러한 외적 표시를 통해 우리에게 선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성례는 반드시 약속이 있으며 성례는 이 약속에 부록격으로 결합되어져서 그 약속 자체를 확인하고 인치며, 그 약속을 우리에게 보다 명확하게 해 준다.

2. 성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함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만드는 행사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육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성례도 육에 속한 것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어거스틴이 성례를 “보이는 말씀”이라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그림으로 그리듯이 분명한 형상으로 그려서 우리 눈 앞에 제시하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성례를 더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다른 비유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곧 성례를 “우리 믿음의 기둥”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믿음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아 그 위에 서 있기는 하나 성례를 여기에 첨가함으로써 마치 기둥으로 받친 듯이 더욱 튼튼하게 서게 된다. 또 다른 비유로 성례를 거울이라 부를 수도 있는데, 이때 거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위에 풍성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례가 우리의 믿음을 섬기도록, 다시 말해서 그 믿음을 기르고 연습시키고 증대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3. 그런데 어떤 자들은 말하기를, 우리의 믿음이 이미 좋은 것이라면 더 좋게 될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를 굳게 또 꾸준히 믿어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면 믿음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믿음이 마음에 가득하다면 세례가 믿음을 굳게 할 여지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의 마음 한 구석에 믿음이 없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지, 그래서 그들이 매일 믿음이 자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지에 대해 묻고 싶다. 우리는 아무 진보 없이 늙는 다면 우리는 매우 가련한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인생의 모든 시기를 통하여 항상 성장해서 마침내는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엡 4:13).

4. 또 다른 이들은 성례를 통해 믿음이 증가하는 것이라면 성령은 헛되이 주셨다고 말한다. 이는 성령이 믿음을 시작케 하고 또 지속시키며 완성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한가지만 말하는데 비해서 우리는 세 가지를 인정한다고 말하고 싶다. 첫째, 주께서는 우리를 그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지도하신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말씀을 성례로 확고히 하신다. 마지막으로는,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또 우리의 마음을 여사 말씀과 성례가 들어오게 하시는데, 이런 일이 없이는 그것들이 그저 울의 귀를 울리고 눈앞에 아른거리기만 하여 결코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할 것이다.

5. 어떤 사람들은 “사크라멘트”(Sacrament)라는 이 말이 저명한 작가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표징”이란 뜻으로는 단 한가지만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꾸준히 선언할 수 있는 것은 이 “사크라멘트”라는 말을 표징에 적용한 우리의 교부들은 라틴 문헌들이 사용한 이 단어의 용례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다만 그들의 편의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붙여서 거룩한 표징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말하고 싶다.

6. 더 깊이 “사크라멘트”를 조사해 보면 교부들이 이 말을 현재의 의미로 전환해서 사용한 것은 “믿음”이란 말의 사용에 나타나는 동일한 유추법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믿음이란 약속을 수행할 때의 신실성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사람이 진리에 대해서 가지는 확신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정말 많고도 명백한 논증을 통해 교부들이 “사크라멘트”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에는, 성례가 거룩하고 영적인 일들의 표징이라는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뿐이었을 것이다.

7.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이런 사람들이 성례의 힘을 약화시키고 그 효력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데 반해, 그들과는 정반대의 쪽에서 어떤 사람들은 성례에 일종의 비밀스런 능력이 붙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능력을 주셨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읽어볼 수 없다. 이 위험한 오류에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속아 넘어간다.

8. “성례”라는 용어는 우리가 이미 그 본질을 논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의 신실성을 사람이 더욱 확실하게 믿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에게 정하야 주신 모든 표징들을 전반적으로 함축하는 말이다. 때로는 자연물로 표징을 삼으시고 어떤 때에는 기적들 속에 그것을 나타내셨다.

첫 번째 종류의 예들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불멸의 보증으로 생명나무를 주시고, 그들이 그 열매를 먹는 동안은 불멸을 확신할 수 있게 하셨다(창 2:9; 3:22). 또 다른 예로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후손들을 위해 무지개를 주셨을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후로는 홍수로 땅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신 사실에 대한 상기물이 되었던 것이다.(창 9:13-16). 아담과 노아는 이런 것들을 성례로 여겼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그 생명나무와 무지개에 표를 새겨 두셨기 때문에 그것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증거요 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9. 성례들 자체는 역사상 각 세대에 따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모양으로 계시하던 그 다양한 방식을 인하여 그 또한 여러 모양이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는 할례를 명하셨다(창 17:10). 후에 모세의 율법에서는 여기에 결례(레 11-15장)의 희생제사(제 1-10장)가 첨가되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유대인들의 성례였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것들이 폐지되고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가지 성례가 제정되어 현재 기독교회가 사용하고 있다(마 28:19, 26:26-28).

그러나 고대의 그 성례들도 오늘날 우리의 성례들과 같음 목적을 지향했다. 즉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고, 손을 잡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거나 또는 형상으로써 그를 나타내고,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성례들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보여 주어야만 했다.

10. 오늘날 우리의 성례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께서 더 가까이 사람들에게 계시됨으로써, 아버지께서 이미 약속하신대로 그리스도를 참으로 계시하신 때로부터 이 성례들은 그를 더 가까이 우리에게 현존하게 해준다. 세례는 우리가 씻어 깨끗하게 되었음을 증거하며, 성만찬은 우리가 구속을 받았음을 증거한다. 물에는 씻음이, 피에는 만족이 표시되었다. 하지만 최우선적인 증인인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 증거를 확신할 수 있게 해주신다.

 

B. 세례

11. 세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첫째 목적은 그분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섬기기 위함이요, 둘째 목적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섬기기 위함이다.

12.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세우신 첫 번째의 일은 이 세례가 우리의 씻음의 상징이요 증거라는 것이다. 믿는 모든 자가 죄사함을 위한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마 28:19, 행 2:38).

13. 세례의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6)라는 약속과 함께 세례를 받는다는데 있다.

14. 그러나 우리가 세례에 대해 생각할 때, 이것이 우리의 과거를 위해 베풀어진 것이며, 세례를 받은 후에 지은 죄를 위해서는 마치 전에 받은 세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듯 새로운 처방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겠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어느 시기에 세례를 받든 우리는 그 단 한번으로 우리 전 생을 깨끗케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세례 받은 기억을 회상하고 마음을 굳게해서 항상 사죄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15. 세례는 또 다른 위로를 전해 준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것과 그 안에서 새생명을 받은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가지가 그 접붙인 뿌리에서 수분과 영양을 취하듯이, 올바른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그들의 육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효과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참으로 느끼며, 성령이 생명을 주시는 사실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하는 것을 느낀다(롬 6:8).

16.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세례에 의해서 우리가 원죄에서 벗어나게 되고 면제되며 또 아담으로터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유전된 부패를 면하게 되며, 또 만일 아담이 처음 창조된 상태대로 지속했더라면 그가 얻어 누렸을 그 의와 본성의 순결을 세례를 통해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류의 교사들은 원죄가 무엇인지, 원의가 무엇인지, 또 세례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7.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주의깊게 고려해 보아야겠다. 첫째는, 우리 본성의 모든 부분이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저주와 유죄 선고를 받은 자로 인정된다. 비록 유아들이 자가 스스로의 죄의 열매들을 짓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들 속에 죄의 씨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의 전 본성은 죄의 씨이며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는 가증할 뿐인 것이다. 세례를 통해 신자들은 이 저주가 그들로부터 제거되었고 취소되었다는 활약을 받는다. 둘째로는 이 왜곡된 본성이 우리 속에서 없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열매들을 낳는데(롬 7장) 이는 앞에서 우리가 “육체의 일”이라고 묘사한 바 있는 것으로서(갈 5: 19), 마치 뜨거운 용광로가 끊임없이 불꽃과 불똥을 내뿜듯이, 또 샘에서 쉬지 않고 샘물이 솟아 나듯이 그 열매들을 쏟아 놓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서 사는 동아에는 죄의 흔적은 항상 우리 안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례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신실하게 붙잡고만 있다면 그 죄의 자취가 우리를 지배하거나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이다.

18.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육체의 죽음이라는 세례를 받지만 이 일은 우리의 세례와 함께 시작되어, 매일 매일 이 목표를 추구해 가야 하며 마침내는 이 생을 떠나 주님께로 갈 때에야 완성되리라는 것이다.

19. 세례로부터 우리 믿음이 받는 위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에 접붙여졌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에게 완전히 연합되어서 그의 모든 축복의 동참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세례를 자신의 몸을 바쳐서 거룩케 하여(마 3:13) 그가 우리와 함께 누리실 연합과 교제의 가장 견고한 끈으로서 그 세례를 우리와 함께 공유하시고자 했던 것이다.

20. 나아가서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의 우리의 고백을 위해 봉사한다. 참으로 이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기를 원한다는 그 소원을 공적으로 나타내는 표시이다. 이 세례를 통해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합류한다는 것과 또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하나의 종교를 가진다는 것을 증거한다. 마지막으로 이 세례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혀와 우리의 모든 지체가 온갖 방법으로 하나님을 높이 찬양한다.

21. 세례란 우리의 믿음을 위로하고 강화하기 위해 주신 것이므로 그것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손에서 받는 것처럼 해야겠다. 이 표징을 통해 말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고 증명된 일로 여겨야 하겠다. 하지만 우리가 성례로부터 얻은 것은 믿음으로 우리가 얻은 꼭 그만큼일 뿐이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이것이 곧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았다는 증거요, 그 안에 주어진 약속을 믿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고백의 상징인 한은 우리가 그 성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비 안에 우리의 확신이 있다는 것, 죄용서 속에 우리의 순결이 있다는 것, 또한 하나님의 교회에 모든 신자들과 함께 믿음과 사랑의 완전한 일치 가운데서 조화롭게 살도록 속하여 지게 된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22. 성례는 그 집행하는 자의 손에서 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것을 보내어 주신 분이신 하나님의 손에서부터 반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여기에는 그 손으로 성례를 집행하는 자들의 인간적 가치로 무엇인가를 덧붙이거나 빼거나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세례준 자들이 아무리 무지하고 경멸스러운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들이고, 우리를 세례줄 때 자기들의 무지와 배도를 나누도록 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위해 세례주었던 것인데 이는 세례 시에 그들이 부른 것이 자기들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기 때문이며 또 그들이 우리를 다른 어떤 이름으로 세례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3. 우리는 세례의 용도에 두 부분, 즉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과,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기 위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이 아직도 많은 증거들을 들어서 가르침을 받을 만한 능력이 없고, 또한 밖으로 고백하기 위하여 안으로 믿음을 생각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없음에도 유아세례를 받는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다.

죽을 인생으로부터 주님께서 유아적에 불러가시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바로 천국의 상속자로 만드신다. 심지어 이 나이 때부터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그릇으로 선택을 받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고백한다면 우리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믿음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C. 성만찬

24. 그리스도 교회를 위해 제정된 나머지 하나의 성례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거룩하게 된 떡과 그의 피 안에서 거룩하게 된 포도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성만찬 혹은 성찬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안에서 주의 선하심에 의해 신령한 양식을 공급받고 그의 친절하심에 대한 감사를 드리게 되기 때문이다.

25. 성례에 나타난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우리는 일종의 영적인 것들에 대한 비유로 옮겨 가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표시로 우리에게 제공된 떡을 볼 때 우리는 마치 떡이 우리 육신의 생명을 지탱시켜 주고 양육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한 양식이요 보호라는 것을 포착해야 한다. 피의 상징으로 제시된 포도주를 볼 때 우리는 포도주가 육신에게 주는 유익을 생각하고서 그와 동일한 유익이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영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26. 그러므로 성례의 주된 기능은 단지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의 몸이 참양식이며 그의 피는 음료임을 증거하는 그 약속을 인치고 확증하는 것이다. 또한 그 약속에 의해 그는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선포하신다. 그것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하셨거나 고통당하셨던 모든 일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살리심은 영원한 것이어서 우리는 그것에 의해 평생동안 끊임없이 양육을 받고 지탱되며 보존된다는 것을 성례가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27. 이러한 성례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떡 속에 임재하는 가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기도 하였고, 떡 자체가 몸이고 그리스도의 몸이 떡 안에 있다는 엄청난 화체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었는가를 물을 필요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28. 그러면 성례가 어떠한 종류의 영적인 일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획득할 충분한 길을 가지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얻게 되는 것은 성례로부터 어떤 열매들을 거두는 것이 그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29. 어떤 사람들은 성례에 제시된 몸이 영광스럽고 불멸하는 몸이기 때문에 성례 하에 그것이 여러 장소에 나타날 수도 있고 아무 장소에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아무 형체가 없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런 제한을 받음이 없고 하늘과 땅의 어느 곳에서든지 원하시는 곳에서 자신의 능력을 행사하실 수 있으며, 능력과 권능으로 자신의 임재를 보여 주실 수 있으며, 항상 자기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계셔서 그들 안에 사시고, 그들을 지탱시키시고, 그들을 강화 시키시며, 소생시키시며, 보호하실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몸 안에 계시는 것처럼 말이다.

30. 성례의 성격이 요구하는 몸의 임재는 그러한 것이다. 한 분이 여기서 너무나 위대한 능력과 권능으로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 영생에 대한 확신을 줄 뿐 아니라 우리 육체의 불멸성에 대한 확신까지 주신다는 것이다.

31. 그러나 만일 어떤 비타협적인 사람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놓고 논쟁을 제가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이것이 나의 몸이요 이것은 나의 피라 하셨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에게 성례는 전부 믿음과 관계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가 선언한 이 몸에 참여하는 것과 함께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을 하늘로부터 끌어내리려는 자들만큼이나 풍부하게 믿음을 공급한다.

32. 이러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물질에 경배하는 오류를 면케 해 줄 것이다. 성례가 몸이라면 영혼과 신성이 육체와 함께 있으며 육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성례에서 그리스도를 경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성례 자체에 경배를 하는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성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셨지 그것에 경배하라고 하시지는 않았던 것이다.

33. 주님은 성례를 통해 풍성한 은혜를 우리에게 상기시키시고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게 하신다. 동시에 그는 우리가 그처럼 풍성한 은혜에 대해 배은망덕하지 말고 적절한 찬양과 함께 그것을 선포하고 감사함으로 그것을 전파하라고 권고하신다. 그러므로, 그가 사도들에게 성례제도를 주셨을 때 그는 그들이 그를 기념하여 그것을 행하라고 가르치셨다(눅 22:19). 그것이 바로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으로 바울이 해석했던 것이다(고전 11:26).

34. 주께서는 또한 성만찬이 우리를 위한 일종의 권면이 될 것을 의도하셨다. 그것은 다른 어떤 수단보다도 더 강력하게 우리를 소생시켜서 우리에게 사랑과 평안과 조화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심으로 그가 완전히 우리와 하나가 되고 우리가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35. 우리는 성만찬의 이 거룩한 떡이 신령한 양식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생명이 되도록 주신 자들에게 달콤하고 오묘하여 그들로 하여금 감사하게 하며 그들 사이에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권면이 됨을 본다. 한편, 그것은 성례를 통해 감사와 사랑을 배우지 못하는 자들, 즉 성례가 감사와 사랑을 일으키지 않는 자들에게 치명적인 독이 된다.

36. 이 때문에 바울은 사람이 자기를 살핀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한다고 명한다(고전 11:28). 그 말의 뜻은 각 사람이 정신을 가다듬고서 자신이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자기구주로 인정하고 있는지를 숙고해 보라는 것이다. 입술의 고백으로만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형제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주고 함께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나타낼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가 그리스도의 지체로 생각되고 있는 것처럼 그도 모든 형제들을 그리스도의 지체로 간주하고 있는지, 그들을 자기 자신의 지체로 아끼고 보호하고 도울 맘이 있는지를 살펴 보라는 것이다.

37.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합당하게 먹을 준비를 하게 할 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련한 양심들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들은 은혜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합당하게 먹었다고 말했다. “은혜의 상태”란 모든 죄를 씻어 내어 깨끗한 것을 의미한다고 그들은 해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도그마는 지금까지 지상에 존재했거나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성례에서 제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만일 문제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 자신의 가치를 찾는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38. 그러므로, 그러한 혼란과 파멸로 줄달음질 쳐 가지 않도록, 이 거룩한 향연이 병자들을 위한 약이요, 죄인들을 위한 위로며,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임을 기억하도록 하자.

39. 어떤 사람들은 결코 획득할 수 없는 완전한 신앙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과 꼭같은 사랑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므로써 그들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지극히 거룩한 성찬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성례는 완전한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약하고 무력한 자들이 믿음과 사랑의 결핍을 깨닫고, 일깨우고, 자극하고, 훈련하도록 제정된 성례이기 때문이다.

40. 우리가 지금까지 성례에 대해 언급한 많은 것들은 그것이 일년에 단 한번만, 그것도 현재 행해지고 있는 바와 같이 아주 기계적으로 시행되도록 제정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자주 사용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주 기억하고 또 그러한 기념에 의해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며 강화하고 감사의 찬미를 부르면서 그의 선하심을 선포하도록 격려하고 드디어는 그것에 의해 상호간에 사랑을 배양하고 그들 사이에 이 사랑을 증거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 속에서 그 유대를 분별하도록 제정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주의 만찬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그리스도인들의 회집시에 행해져야만 했으며 그것을 통해 우리를 영적으로 양육할 약속들이 선포되어야만 했었다. 모든 사람들은 굶주린 사람처럼 그토록 풍성한 식사에 참여 했을 것이다.

41.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로의 태반으로부터 성찬을 도둑질하거나 그것을 반쯤 빼앗아 간 경우가 있다. 피의 상징이 평신도들과 불신자들에게 거부됨으로써 소수의 기름부음받은 자들에게만 특별한 재산으로 주어지게 된 사실이다. 영원하신 칙령은 모든 사람이 마셔야 한다(마 26:27).

42. 어떤 사람들은 “미사”라는 한 마디 말 속에서 신앙의 총체를 붙들고 미사가 죄사함을 얻기 위한 희생이요 제물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 미사가 아무리 장엄하게 꾸며져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에게 불명예를 끼치고 있으며 성례들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마치 포장이 너무 현란하여 이 빛이 그 밑에 숨어 있는 악을 드러낼 수 없는 경우와 같다.

43. 그러므로 이제 매일 희생제물을 드리는 자들은 그들의 의무를 위해 그들이 계승자와 대리자로 그리스도를 대체할 제사장들을 임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제사장직이 마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대신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영원한 제사장직의 보조자일 뿐이라고 주장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44. 미사의 또 다른 능력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을 매장하여 억눌러 버린다고 제시되었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희생제물로 자신을 주셔서 영원히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를 위한 영원한 구속을 이루고자 하셨다면(히 9:12) 이 희생의 능력과 효과가 한없이 계속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희생제물로써 십자가 상에서 제공되었으나 영원히 정결케할 능력은 결하고 있다고 고백하든지 혹은 그리스도께서 영 단번에 모든 세대를 위해 하나의 제사를 지냈다고 고백하든지 해야할 것이다.

45. 여기서 미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참되고 고유한 죽음을 제가하여 그것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게 만드는지를 설명하도록 하겠다. 미사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언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의 죽음을 요청한다. 게다가 제공된 제물이 죽임을 당하고 희생제물로 바쳐지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각 미사때마다 희생제물이 되신다면 그는 매순간 수천 장소에서 잔인하게 죽임을 당해야만 할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주 자기를 드러내셔야 했다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반복적으로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다(히 9: 25-26).

46. 미사는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유익을 앗아가는 반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인정하거나 묵상하지 못하게 한다. 미사에서 새로운 구속을 발견하는 사람이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자신이 구속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사죄의 길을 발견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 죄가 용서받는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아버지께 제공할 때 이 의무의 행위에 의해 우리는 사죄를 얻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47. 성만찬은 이 미사 때문에 제거되고 파괴되었으며 폐기되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성만찬 그 자체는 하나님의 선물인데 감사함으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미사의 희생은 하나님께 값을 치르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값을 배상(satisfaction)에 의해 받으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희생과 성례 사이에는 주는 것과 받는 것 사이에 있는 것 만큼이나 커다란 차이가 있다. 성례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우리가 한번 생명을 회복하게 될 뿐아니라 계속적으로 소생하게 된다고 약속한다.

48. 성만찬은 교회의 공적 모임에서 거행됨으로써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결속되는 영적 교제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런데 미사의 희생은 이 공동체를 찢어 분해시킨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대신해서 제사를 행하기 위해서는 제사장들이 있어야만 한다는 오류가 판을 치게 된 후에는 그것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신자들의 교회에 전달되는 것이 중단 되었다. 사적인 미사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주께서 제정하신 공동체보다는 오히려 출교를 시사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49. 미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어떻게 하나님을 이러한 희생제사의 방식에 의해 즐겁게 해 드린다고 믿을 수 있는가? 그들은 한번도 그런 일을 하라고 명령을 받은 적이 없으며 성경 어느 곳에서도 그것에 관해 언급한 내용을 발견할 수 없는데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제사장직의 창시자요 설립자로서 하나님을 모셔오든지 혹은 그 명예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자신들이 부르심을 받지 않았으면서 사악한 경솔함으로 그것을 자취했다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50. “희생제사”와 “제사장”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살펴 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이해하기에는 “희생제사”라는 말은 하나님께 받쳐지는 것 전부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별되어야 한다. 또한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는 “감사와 찬미의 제사”, 다른 하나는 “화해 또는 화목의 제사”라 부르기로 하자. 이제 화목의 제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그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죄를 씻고 은혜와 구원을 간청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아버지의 은혜를 회복하고 사죄와 의와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모든 것이 그분의 고유한 희생제사에 의해 수행되고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그 의무를 반복함으로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을 무마시키려고 의를 획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의 죽음을 통해 치르셨던 희생과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불경이요 아주 사악한 모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51. 희생제사를 우리는 “감사”의 제사라고 불렀다. 이는 우리의 모든 기도와 찬미와 감사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하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실로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거룩히 구별되어 그분에게 바쳐짐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의 영광에 이바지하고 그의 장엄함을 나타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높이는 것에만 관련되어 있다. 실로 그것은 오직 사죄를 받아 하나님과 화목되고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은 교회를 위해 너무나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떨어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영원할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예배”라고 불렀다. 성만찬은 이런 종류의 희생제사 없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그이 죽음을 선포하고 감사를 드리는 동안 우리는 바로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중재자 없이 우리의 선물만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를 위해 중재하는 중보자는 그리스도이신데 그분에 의해 우리는 자신과 자신의 것을 아버지께 드린다. 그는 우리의 제사장인데 하늘 성소로 들어가셔서 우리가 들어갈 길을 열어주신다(히 10:20).

52. 세례는 사실상 교회의 가입이 되어야 하며 신앙생활의 시작이어야 한다. 그러나 성찬은 일종의 계속적인 양식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가지고서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권속을 영적으로 먹이신다. 그러므로 오직 한 하나님, 한 믿음, 한 그리스도, 한 교회, 즉 그의 몸이 있는 것처럼 세례도 오직 하나 뿐이며(엡 4:4-6) 자주 되풀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찬은 반복적으로 거행되어 일단 교회로 들어온 자신들은 그리스도를 계속적으로 먹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성례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인데 그분 자신의어떤 약속에 관해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를 향한 그분 자신의 선한 의도를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기위한 것을 알아야 한다.

 

D. 성례의 집행

53. 성만찬에 관한 한 만일 그것이 교회 앞에서 아주 자주,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 거행된다면 그것은 아주 적절하게 집행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첫째, 그것은 공중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그 후에는 설교가 있어야 한다. 다음에, 떡과 포도주가 식탁 위에 놓였을 때에 목사는 성찬의 제정에 관한 말씀들을 반복해야 한다. 다음으로, 그는 성찬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들을 암송해야 한다. 동시에 그는 주님의 금지에 의해 그것으로부터 제외된 모든 자들을 제외시켜야 한다.

후에 그는 주께서 이 거룩한 음식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그 친절함으로 또한 우리를 가르치셔서 우리가 믿음과 마음의 감사로 그것을 받도록 기도해야 하며, 또한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합당한 자가 될 수 없음으로 그분의 자비로 우리를 향연에 합당하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시편을 노래하든지 혹은 어떤 것을 읽어야 하며 적절한 질서 속에서 신자들은 지극히 거룩한 잔치에 참여해야 하고 목사들은 떡을 떼고 잔을 주어야 한다.

성찬이 끝나면 신실한 믿음과 신앙고백, 또한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사랑과 행위에 대해 권면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감사가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 대한 찬미를 불러야 한다. 이러한 일들이 끝나면 교회는 평안 중에 돌아가야 한다.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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