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Jean Calvin의 신앙

[스크랩] 기독교(개혁주의) 영성의 현주소

好學 2009. 11. 5. 13:32

 

기독교(개혁주의) 영성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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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영성신학원 세미나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1. 시작하는 글

제가 맡은 강연, 칼빈신학에서 본 영성과 은사와 그리고 새로운 교회 갱신에 대한 전망 등을 말하기 전에 먼저 몇 가지 신학적, 교회사적 고찰을 통해 칼빈신학 및 개혁 교회 전통에 대해 개념 정리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장로교 전통의 뿌리가 되는 종교개혁의 원류인 칼빈신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전통을 말할 때 화란의 개혁주의의 전통, 다시 말해 도르트 신조로 불리는 5대교리(TULIP;전적 타락, 무조건적 예정, 제한 속죄, 저항할 수 없는 은총, 성도의 견인)와 앵글로색슨 교회의 전통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그리고 청교도들에 의한 미국적 토양에서 꽃을 피운 장로교주의 전통을 말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더욱이 한국에 개신교에 심어 준 사람들이 대부분 미국의 청교도의 영향(또는 세대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람들이거나 고작해야 앵글로색슨 교회 전통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영향 아래 서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이런 장로교주의 시각에서 칼빈의 영성, 성령 신학 및 교회 갱신을 이야기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물론 최근 샌프란시스코 신학 대학원 예배학 교수인 하워드 라이스(Howard Rice)가 쓴 "Reformed Spirituality"에서 이 전통에 대한 새로운 영성신학적 접근을 보여주기는 합니다.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일반적으로 칼빈신학의 정수를 예정론이나 장로주의 아니면 성서 권위주의적 말씀 중심으로 못박아 버리기 때문에 칼빈 자신의 신학 속에 역동적으로 흐르는 영성, 신비주의에 대한(다른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 의한) 깊은 통찰, 성령론, 교회 갱신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들은 거의 간과되기 쉽습니다.

교수 자격 논문 토론차 지난달 제네바에서 스위스 개혁교회의 한 신학자와의 대화에서 그가 던진 질문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의 질문의 요지는 다름 아닌 한국의 장로교는 얼마나 종교 개혁의 전통에 서 있느냐? 디트리히 본 회퍼가 미국의 체류를 마치면서 미국 교회를 "종교개혁의 전통이 없는 교회"(American Church without Refamation)라는 표현으로 핵심으로 찌르는 일련의 진리를 언급했다면 한국 역시 칼빈신학의 역동적인 종교개혁의 유산과는 무관한 것 아니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이런 일반적인 이해를 놓고 저의 강연의 요지는 칼빈 신학을 칼빈 자신으로부터(adfontes) 어떻게 그의 영성 교회 갱신, 성령 신학을 이해할 것인가 하는 해석학적 문제와 만나게 됩니다. 칼빈 신학에 대한 나의 접근은 그의 기독교 강요 3권의 성령론을 기초로, 현대 교회의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 때로는 비판적으로 때로는 상호보완적으로 에큐메니칼 대화의 관점에서 진행될 것입니다

칼빈의 종교 개혁적 관심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는 하나의 특수한 장로 교단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본래적인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One holy universal catholic chruch)를 어떻게 회복하느냐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의 기독교 강요가 사도신조를 기초로, 1권이 하나님론, 2권이 그리스도론, 3권이 성령론, 4권이 교회론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초대 사도교회의 올바른 전통에 대한 신학적 관심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의 종교개혁적 통찰들은 그의 독창성에 있다기보다는 성서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줄기찬 탐구, 교회 교부들에 대한 비판적 대화와 그 이해에서 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칼빈의 성령신학(기독교강요 3권)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 논문이 거의 없다시피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 이유는 칼빈을 주로 말씀 중심의 신학, 또는 기독론 중심의 신학(칼바르트와 그 동료들)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화란 개혁주의 전통에 따라 성서문자 영감론이나 운명론적 예정론으로 파악해 온 것에서 나름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칼빈의 성령신학을 언급하기 전에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 그의 신학과 교회 운동의 적대자들입니다. 그것은 카톨릭 우파의 입장에서 이른바 성유물 신학을 근거로 초자연적 기적신학의 한 경향과 좌파로부터의 운동 즉 유럽의 재세례교도들의 운동 다시 말해 교회를 부인하는 성령의 직접 체험을 우위에 둔 은사주의 그룹들입니다.

성유물 신학이란 다름 아닌 역사적 예수의 유물들을 포함해서. 성인들의 성물을 지나치게 숭배하면서 사이비 기적이나 미신으로 전락한 당시 카톨릭교회의 기적 신학을 말합니다. 이런 성유물신학의 기적에 대한 칼빈의 가차없는 비판 때문에 칼빈 자신은 전혀 신비하거나 기적적인 요소, 또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를 부인한 것처럼 보여져 왔고, 마치 세대주의자들의 원류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그 다음은 유럽의 재세례교도들에 대한 칼빈의 비판입니다. 즉 성서를 기초로 한 계시에 대한 경험과 이해보다는 자신들의 주관적 체험을 신앙의 척도로 삼은 자들과의 대결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초자연적 체험을 역사화하기 위해 "15xx년 모월 모일에 세상 종말이 온다 하나님 나라의 전진을 위해 모든 교회의 위선과 제도들을 가차없이 처단하고 파괴하는 거룩한 전쟁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표적 인물로는 칼 슈타트, 토마스 뮨쪄 - 어느 정도로는 쯔빙글리가 포함됩니다.

이들은 철저히 반 예전적(Anti-liturgical) 입장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고, 눈에 보이는 일체의 상징, 이미지, 예배에 있어서 예술의 가치를 전면 부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언했고, 방언 했으며. 비참했던 농민 전쟁 실패 이후 이들의 사상적 지류는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또 다른 영향은 미국에서의 종파적 운동이나 청교도들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칼빈의 좌우에서 위협하고 있던 이런 운동 때문에 칼빈의 비판은 때로 지나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 자신이 기독교 복음의 내용들을 합리성의 틀 안에 가두어 버린 합리주의적 신학의 대변자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2. 칼빈, 성령, 인간의 경험

칼빈은 기독교 강요 3권에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합일(mystical union with Christ)이란 언어를 성령신학의 핵심으로 전개합니다.

이 언어는 전형적으로 신비주의의 핵심 내용을 칼빈 자신의 성령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선 그의 성령론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서 언급할 수 있는 데 1)창조의 영으로서 우주적 차원에서 활동하는 성령의 역사, 2)모든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성령(이 차원에서 칼빈은 바르트와는 달리 자연신학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 그리고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도르트 신조와는 다른 지평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3)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틀 속에서(perechoresis/appropriationis) 모든 인간의 삶을 깨끗게 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창조하는 영으로서의 성령입니다.

위에 언급한 세 번째 차원에서 그는 신비주의의 문제를 진지하게 취급합니다. 신비주의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정화(purgation)-조명(illumination)-합일(union)의 단계를 거쳐 고양되는 영혼의 내적 여행을 말합니다.

로마 카톨릭 신학을 전형적으로 대변하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은총주입설(infusa gratia)을 기초로 성령을 하나님 자신의 활동이라기보다는 초월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은총의 에너지, 또는 능력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철저히 초월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영성훈련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은총의 능력의 주입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합일해 나가는, 즉 하나님처럼 되어 가는 과정(divinization)속에서 파악됩니다.

이런 이해는 카톨릭의 성례주의 신학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카톨릭의 영성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인간의 영적 노력 내지 훈련으로 이해되거나 또는 그 과정에서 일곱 가지 성사들은 인간의 영혼에게 은총을 주입해 주는 중요한 수단으로 이해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다음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뒷전에 머물러 계시는 것으로 만족해 하신다"(God is content to remain in the background)

잘 아는 것처럼 루터는 수도원에서 금욕 및 영성 생활을 통해서 이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루터는 찾아가는 인간이 아니라, 죄인인 인간을 향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합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인 십자가에서만 가능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카톨릭의 영성의 신학의 틀에서 발전되었던 이른바 "하나님처럼 되어가는 과정"을 루터는 십자가 중심의 성령론으로 뒤바꿔 놓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실 때 그는 무엇을 하는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도한다."

이 관점에서 우리는 루터의 종교 개혁의 관심을 성령론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성령론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은 지나치게 실존적 또는 개인주의적으로 흐르거나 아니면 정적주의(靜寂主義)로 흐를 위험성이 있습니다 이 경향은 훗날 루터 정통파 논쟁에서 여실히 나타납니다.

칼빈은 루터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칼빈의 성령신학은 그 구조나 지향하는 면에 있어서 루터와는 사뭇 다릅니다. 우선 칼빈은 신비주의에서의 최고의 단계인 연합을 진지하게 다룹니다.

성령은 누구인가?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또는 하나님과) 연합하게 한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은총과 은사를 누리게 된다(강요3.I.1.). 우리 외부에서(extra nos)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와 용서의 사역을 성령은 바로 우리를 위해(pro nobis)그리고 우리 안에서(in nobis) 가능하게 하는 의사 소통의 영이다.

이것은 신앙에 대한 지적인 긍정이나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는 신비한 경험의 측면을 말합니다. 놀랍게도 성령을 통한 신비적 연합을 칼빈은 신앙 자체로 규정합니다

그는 버나드 클라보의 사랑의 신비주의와 대결을 하면서 신비주의의 전통에 흐르는 정적인 관상주의를 성령론적 카리스마적 역동성으로 밀고 나갑니다. 왜냐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신비적 합일은 관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봉사와 사화 정의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신비적 합일을 체험할 때 (칼빈 자신도 이 경험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는데) 비로소 우리는 나의 외부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의로운 사건을 알게 되며 거룩한 삶을 향한 용기와 영원한 삶에 대한 종말론적인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 신비적 합일에대한 표현 뿐만 아니라 칼빈은 젖붙임(engrafting)이라고 하는 또 다른 신비주의적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참고:peter Martyr Vermigli에게 보낸 그의 편지).

칼빈신학의 주춧돌을 이루는 의인론, 성화론, 예정론은 별개로 취급되는 신학적 주제들이 아니라 이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합일이라고 하는 영성의 다이나미즘 속에서 흘러내리는 은총으로 파악되어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그가 이해하는 예정은 결코 훗날 화란 개혁주의자들이나 청교도적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운명론적인 예정론이나 또는 실천의 삼단논법(sylogismus practicum)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더욱이 바르트처럼 기독론적 관점에서 심판자 자신이 심판되었다는 객관적 계시 사건으로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칼빈이 말하는 예정은 성령을 통하여 이 신비적 합일을 체험한 자에게서 나타나는 영성의 고백이며 거기서부터 감사, 겸손, 희망이라고 하는 독특한 칼빈신학의 영성의 특징들이 나타납니다.

성령의 우주적 차원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문화, 종교,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기 때문에 예정은 크리스천들이 이웃과 사회를 향한 선교적 관심으로 파악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비적 합일"이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에 대한 가능성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칼빈은 재세례교적 은사 운동을 경계하면서 치유나 기적 같은 은사들이 교회사 속에서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강요4, ?Ⅹ, 18)

이 카리스마적 은사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이 죄의 용서, 새로운 생명의 삶막括?약진, 사도의 전승에서 있는 교회 공동체를 세워 나가는 능력으로 파악된다면, "신비한 합일" 속에서 이런 은사에 대한 초자연적 체험은 칼빈에게는 적극적으로 개방될 수 있습니다.

칼빈의 언급처럼 이런 은사가 제멋대로 인간의 이기적으로 이용된다거나 또는 화란의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제는 말씀의 시대이니 모든 하나님의 은사는 사도 시대에나 국한된다니 하는 억지 주장은 신학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 중단은 은사에 대한 인간의 타락과 무질서를 막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공동체적 유익함을 위해 주어집니다 우리의 방언하는 혀가 이제는 진정한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의 고백으로, 죽음의 언어에서 생명의 언어로, 이기적 삶에서 그리스도의 포괄적인 희생의 삶으로 성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초자연적 은사의 체험에서 오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종말론적, 희망, 세상의 유혹 속에서 사회 정의와 인권을 위한 헌신, 경건한 삶, 겸손, 이 모든 것들은 신비적 합일에서 나오는 칼빈적 은사의 이해일 수가 있고, 영성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인간의 경험 신학을 위한 성령론적 근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비주의적 관상에 대한 칼빈의 관계는 그의 기도에 대한 이해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최고의 기도는 침묵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침묵은 말이 없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나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순종을 의미하는 위탁과 헌신을 말합니다. 이 침묵의 기도는 칼빈의 예전에서 무릎을 꿇고 고백과 참회 그리고 용서의 선언으로 이어지는 예배의 정신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이것은 관상과는 어떤 관련을 맺는가? H. Rice는 그의 책 '개혁주의 영성'에서 칼빈 전통 안에 있는 lictio dovina의 가능성을 언급합니다.

흔히 베네딕틴에게서 유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그러나 그보다 더 앞선 초대 교회 전통 안에 있던 것으로 이야기 되기도 하지만' 이 영성훈련은 호흡 기도를 통해 성서 본문을 되새김하면서(luminatio) ,읽고(lictio), 간구하고(oratio), 묵상하고(meditatio), 관상하는(contemplatio)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칼빈의 기도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그의 성서 해석의 단계인 문자적, 역사적, 영적 단계를 밟아가는 해석학적 탐구도 이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칼빈의 성령신학을 관상적-은사적(contemplative-charismatic) 경향성을 갖는다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중세기 신비주의자들이 관상적-신비주의적(contemplative-mustic)으로 빠져 나간 것과는 달리 침묵과 관상 속에서 체험되는 신비적 합일은 교회와 세상을 향한 카리스마적 방향성을 취합니다 이것은 칼빈 신학이 갖는 역동성이기도 합니다.

 

3. 영성의 유형들과 은사 현상

은사주의 성령운동은 교회사 초기부터 있어 왔던 교회 외적 운동들로 쉽게 파악될 수 있습니다 교회사 초기에 속하는 몬타니스트 운동에서 우리는 방언과 예언의 현상들을 만날 수 있고, 이후 중세기 중반에서 만나게 되는 요하킴 피오레스(joachim de Fiores), 종교 개혁과 맞물려 있는 재세례파 운동, 이후 경건주의 (특히 블름하르트 부자의 치유 운동) 또는 미국의 1차, 2차 대각성운동 등을 통해 볼 때 사실상 은사주의 운동은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영성의 흐름과 성격들을 분석해 볼 때 흥미로운 것은 서로 영성의 유형(tupe)이 다른 운동들은 서로 부딪히고 갈등한다는 것입니다. 그 실례로 삼위일체를 기초로 한 자연신비주의 전통에 서 있는 Franciscan운동이 그후 오순절 성격을 갖는 요하킴 피오레스 운동과 만날 때 생기는 현상이라든지, 종교개혁자들과 제세례파 성령 운동 그룹들과 부딪치는 현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나는 이 강연에서 교회사에 나타나는 성령 및 영성 운동의 유형을 나㎢酉?분류해서 칼빈적 영성운동이 현대의 다른 유형의 성령 운동과 어떻게 비판적으로 또는 상호보완적으로 만날 수 있는지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는 그의 책 [Christ and Culture]에서 복음과 문화가 만나는 관계를 5가지 유형을 통해 제시했지만, 그의 분석에 아쉬운 것이 있다면 성령의 역동성 속에서 복음, 영성, 문화의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통찰이 결여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제시하려고 하는 영성의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관점보다는 성령론적 이해와 때로는 심층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통해(대개는 융학파의 관점에서 - 그렇다고 해서 융의 심리적 이해나 통찰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른바 "soul type"을 근거로 시도된 분석 유형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에 대한 나의 분석 유형은 규범적(normative)이라기 보다는 경험을 현상적으로 파악하는 기술적(descriptive)성격을 띄게 될 것입니다.

 

1)관상적 - 신비주의적 유영(contemplative mystic type)

이 유형에 속하는 영성은 대략 토마스 아퀴나스적 스콜라 신학에 병행하여 중세기 신비주의를 대변하는 흐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초대교부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이 유형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정화-조명-합일"이라는 하나님처럼 되어 가는 신화의 영적 단계입니다.

이런 유형 속에서는 그의 영성의 성격에 따라 영혼 신비주의(soul musticsim / Augustine), 자연 신비주의(nature mysticism / F.Assisi), 그리스도 신비주의(Christ mysticism / Bermard of Clrveaux) 등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외에도 imgeless의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걷는 아벨라 테레사 또는 십자가 성요한등도있고, 이외에도 둔스 스 코투스의 영향 아래 있는 독일적 부정의 신비주의(Negative Mysticism/M.Ekhardt)등 여러 가지 유형들을 언급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비판의 길을 걸어오며, 형성된 "Devotio Modema"(근대의 경건)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칼빈은 "근대의 경건"에 영향을 받았고, 토마스 아 켐피스 같은 사람들을 이 경건운동의 예로 들 수 있습니다.

 

2)관상적 - 카리스마적 유형(contemplative Charismatic type)

신비주의적 기도, 묵상, 관상을 성령론적 관점에서 수용하면서 신비주의적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세상을 향한 제자직의 봉사, 즉 영성과 사회 정의라는 관점에서 파악되는 영성의 유형을 말합니다.

루터, 칼빈, 그리고 이들의 영향을 받은 Tate 공동체 운동, 스위스 개혁교회의 영향을 받은 유럽의 영적 공동체들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3)영적 - 성결적 유형(spiritual holiness type)

이 유형에는 Weslev적 성결운동과 보수파 칼빈주의에서 나타나는 말씀 신비주의(Word Mysticism)의 성격을 갖는 성화주의 운동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Wesleu적 영성운동은 특히 제수이트 신비적 영성운동과 세상을 향한 책임성 속에서 서로 맞물려 있고, 또한 칼빈 자신의 영성운동과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버트 투톨은 그의 책 [Mysticism in the Wesley tradition]에서 이 사실을 잘 밝혀 주고 있습니다.

문자, 말씀 신비주의 운동은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된 성서문자와 하나로 동일시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주로 청교도와 세대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보수파 장로주의 교회나 남침례교를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의 영성은 주로 "Syllogimus practicus"(실천의 삼단논법), 즉 의로운 일들을 통한 영적 체험으로 나타납니다.

 

4) 오순절(Pentecostal)의 유형

일반적으로 오순절 성령운동의 유형은 1904년 (또는 1906) L. A. 아주사 거리에 있는 한 오순절 초대교회에서 흑인 전도사 새무르에 의한 방언 집회에서 시작합니다.

물론 오순절 계통의 학자에 따라선 새무르 이전에 파람이 주도하는 신학교에서 있었던 방언체험을 시작으로 들기도 하지만 자세한 논쟁은 피하기로 하겠습니다.

이 유형에서 이른바 "방언은 성령세례의 시작"(Tongue speaking as the starting point for baptism with the Holy Spirit)이라는 논쟁적인 주장이 시작됩니다. 이 문제는 많은 논란을 거듭 했고, 백인 그룹들이 급기야 갈라져 나가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미국의 나사렛 교회의 경우).

이후 60년대 불어닥친 캐서린 쿨만의 치유 운동에 오순절의 방언 운동이 합류하면서 초교파적 성격을 띄기 시작합니다 이후 하나님의 성회라는 교단으로 대변되기도 하지만 미국 내의 독립 교회들 가운데는 오순절 성령운동의 유형을 대변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른바 빈야드 운동 역시 이 유형 속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풀러 신학대학원 교수인 피터 와그너는 굳이 제1의 물결, 제2의 물결. 제3의 물결이라는 유형을 통해 성령운동을 설명하면서 빈야드 운동을 21세기의 성령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제3의 물결의 운동으로 과찬(?)하지만. 그의 논지에는 교회사에 나타나는 다양한 유형의 영성운동들과 성령신학에 대한 신학적 빈곤을 엿볼 수 있습니다.

빈야드 운동에서 일어나는 넘어지는 현상(slaying in the Spirit or Resting in the Spirit)이나 치유, 거룩한 웃음(Holy laughing) 등은 결코 낮선 일들이 아닙니다. 빈야드 운동 역시 오순절 성령운동의 유형에서 파악될 수 있습니다.

주로 여기서는 능력을 드러내고 과시하는(Showing up and demonstrating) 경향이 짙습니다. 주로 능력 대결을 표방하고 나서지만 캐서린 쿨만이 훗날 집회에서 자신의 능력이 드러나지 않아서 고민했던 흔적이나, 쿨만의 치유 집회를 존경심을 가지고 도왔던 Molan의 비판적 의학보고서는 능력 과시적 치유집회에 대한 건전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질 필요가 있습니다.

 

5) 심층분석적, 은사적 유형(psychologlcal charismatic type)

주로 이 유형은 융학파의 강한 영향 아래, 암시적으로 상징과 Image중심의 전통적 기독교 영성(주로 이그나시오 로을라 영성 수련)과 은사주의 운동이 만남의 가능성을 시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순절 운동의 능력 과시나 영적 대결이 아니라 내적치유(Inner Healing)을 중요시 여기며, 여기에 묵상 영성훈련(일례로 lectio divina, spiritual exercise, cursillo등)을 통해 은사에 대한 개방적 입장을 취합니다/Agnes Sandford, Molten Kelsey 어느 정도로는 Francis Mcnutt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A. Sandford는 그의 책 "The healing gifts or the Spirit"에서 한 동방교회의 지도자가 lectio divina의 마지막 단계인 관상의 차원을 넘어서는 은사로서 방언을 하나님과 "신비한 합일"의 상태로 언급하기도 합니다.

 

6) 성례전적 - 은사주의적 유형(sacramental charismatic type)

로마 카톨릭에서 대변되는 성령은사 운동입니다. 벨기에 추기경 수엔넨스가 지도급적 인물에 속합니다. 전통적인 카톨릭의 영성훈련과 7가지 성사들에 대한 이해에서 은사의 현상을 교회론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퀴나스는 은총을 "영혼의 특질"(quality of the soul), (St, Ⅱ/ I, Q.110, arts, 2-4)로 파악합니다. 이 영혼의 특질은 영적 생활의 원천이 됩니다. 여기서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덕목들이 흘러나 오는데, 이것들은 선한 공적을 이루는 원천이 됩니다.

그러므로 은총은 덕목들을 통해 선한 공적을 이루는 원리들이 됩니다(st, Ⅱ/I, 110, art, 4, ad 1). 그래서 아퀴나스는 성사들이 은총을 일으킨다고 강조합니다(The sacraments cause grace).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성사를 제정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사들은 집행하는 사제의 영적 상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됩니다(ex operantis), 오히려 그것은 성사가 이루어짐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ex opere operato).

이러한 신학의 근거로 회생제의로서의 미사에 대한 예전 이해가(실례로 화체설-Transubstantiation) 어느 정도로는 은사운동에 대한 카톨릭적 이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유형 분석을 근거로 우리가 영적 지도에서 피해야 하는 부분은 이러저러한 체험은 반드시 해야만 옳은 것이고,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라는 획일적인 영적 지도입니다.

적어도 성령세례는 칼빈 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물과 성령의 하나인 세례(Baptism in water and the Spirit)라는 관점에서 파악 되기 때문에 오순절 계통이나 성결운동에서 중생 체험 또는 은사 체험을 성령세례로 파악하는 신학적 견해와는 다른 면을 갖습니다.

오히려 성령충만함, 성령의 인도함, 은사체험 등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책임성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윤리적으로 교회와 이윤을 향한 봉사로서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체험의 영역을 다를 때 분명한 교리적 이해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칼빈은 영성 이해에 있어서 Cataphatic(Viapositiva 긍정의 방법) 흐름에 서 있습니다. 그의 시편의 주석에서 볼 수 있는 회심의 체험에서 빛에 대한 은유(Methapor)나 Vermigli에게 보낸 목회적 편지에서 엿볼 수 있는 신비적 체험에 대한 긍정적 견해들은 인간의 영적 체험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이런 Cataphatic측면은 칼빈과 이그나시우스 로욜라의 영적훈련(활동적인 상상력을 기초로 한)과 만날 수 있는 에큐메니칼적인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더 나아가 초대교회의 Icon에 대한 이해나 예배 에전의 갱신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주기도 합니다. 상징과 이미지(Image)가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prayerful) 예술적, 시각적 수단이 된다면, 스위스 개혁교회 출신의 예배 신학자인 쟝작크 폰 알멘(J.J Von Allem)이 주장하는 것처럼, 장로교의 지나친 지성주의 내지 설교 중심의 예배는 말씀과 성례전을 기초로 한 종교 개혁적 또는 초대 교회의 성령 중심의 예배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장로 교회와 21세기 오순절주의자들과의 만남 뿐만 아니라 동방 정교회, 카톨릭과의 비판적인 대화와 만남들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페루 리마문서에 대한 정당한 장로교적 평가나 또는 프랑스 Taize를 중심으로 한 예배 갱신과 신비한 체험에 대한 영적 개방성, 사회 정의를 위한 운동들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맺는 글 : 칼빈과 오순절 운동과의 대화를 위한 몇 가지 제안들

첫째, 칼빈의 심오한 성령신학의 통찰들은 화란의 개혁주의나 합리주의 정통주에서 간과되어 왔고, 그 신학의 역동성이 망각되어 왔습니다.

칼빈은 기독교인의 삶이 성령의 은총과 능력에 의해 끊임없이 갱신될 것을 강조합니다(강요 3. I. 3.-4). 반면에 오순절 성령운동은 대체로 성령의 인격성과 권능에 강조를 둡니다. 마찬가지로 개혁신학도 성령의 인격과 사역 뿐만 아니라 보다 넓은 성령론의 틀을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서 성령은 창조의 영이며, 세계와 우주적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일반적 사역 없이 세계는 지탱할 수 없으며, 모든 이방인들 심지어 무신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은 역사하시며 복음의 포괄성을 갖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은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이 없는 자들을 위한 선교적 관심과 책임성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강요 2.II.12-20). 이런 의미에서 칼 바르트가 말한 칼빈의 창조론은 특수한 성령론의 한 분과라고 한 것은 정당합니다.

 

셋째, 칼빈이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에게 미친 성서영감론은 성령의 내적 증거의 교리(Dictrine of the internal testimony of the Holy Spirit)에 기초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성서의 권위, 설교의 효율성, 이 모든 것들은 성령의 내적 증거에 기초되어 있습니다(강요,1.ⅧⅠ.1-3). 이런 이해들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성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칼빈은 기독교인의 삶의 영역을 성령론 관점에서 전개합니다. 그가 기독교 강요 2권의 기독론에서 3권의 구원론으로 옮겨갈 때, 그리스도의 외부적 사역(extra nos)의 모든 은혜를 우리를 위한 사건(pro nobis)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봅니다. 여기서 "신비적 합일"이라는 경험의 차원과 은사 경험에 대한 칼빈 자신의 신학적 개방성이 고려될 필요가 있습니다(강요 3.I.1) 장로교는 이 부분에 대한 주의 깊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다섯째. 특히 칼빈은 기독교인의 삶을 "중생"(regeneration)의 포괄적 범주 아래서 다룹니다. 여기서 성령의 주도적 역할이 두드러집니다 중생의 특수한 측면들 - 소명, 회심, 회개, 의인, 중생, 성화 - 은 성령의 실재적 능력과의 관련 속에서 다루어집니다(강요 3.II.7-8,33-36)

신앙을 언급할 때 완전한(충만한) 구원의 확신(assurance)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강요 3.Ⅱ.15) 이 용어는 특히 오순절 성령운동이나 웨슬리 성결운동에서 애호되는 용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오순절 운동에서 성령체험과 확신은 개인주의적으로 또는 영적 이기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는데, 개혁신학과의 만남을 통해 성령의 사회적 책임성에 대한 영성의 지평을 열 필요가 있습니다.

 

여섯째, 칼빈은 웨슬리 운동이나 오순절 성령운동에 뒤지지 않은 성화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란 표현은 그의 저작에서 매우 빈번히 나타납니다(강요 1.XⅦ.3/2.Ⅲ.10./3.XX.5/4.Ⅷ.13).

여기서 개혁교회는 웨슬리 전통에 서 있는 교회들과 성령신학에 대한 새로운 에큐메니칼 대화의 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곱째, 칼빈의 성령론적 역동성은 교회와 성례전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 한층 두드러집니다.

루터가 실존적으로 내가 어떻게 하면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영혼의 고민에서 종교개혁의 길을 걸었다면, 칼빈은 바른 "교회"의 수호 때문에 종교개혁의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사이프리안(Cyprian)의 말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크리스천에게 교회는 어머니와 같다"(강요4.I.14)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 아래서 사랑으로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와 신자들이 묶어지는 곳입니다. 칼빈의 교회론은 기독론 중심이라기보다는 성령 중심적으로 이해될 수가 있습니다.

 

여덟째,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로서 성례전은 성령에 의해 가능합니다. 성례전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직접 임재하십니다.

성례전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현존합니다(강요4.IV.17). 칼빈은 말씀과 성례가 있을 때 비로소 교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성례에 대한 성령론적 강조는 오순절 교회 뿐만 아니라 장로교에서도 중요하게 고려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홉째, 미국에서의 오순절 운동은 성령에 대한 성서적, 교리적, 이해보다는 은사체험에 대한 확신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1세대 오순절 성령운동주의자들의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는 심지어 신오순절주의(Neo Pentecostals) 또는 은사주의 운동 그룹에서 조차도 일면적이고 피상적인 것으로 비판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칼빈의 후예인 장로교회는 그 풍부한 영적 유산에도 불구하고 은사에 대한 빈곤한 이해와 목회적 지침들을 가지고 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영적 실제에 대한 경험. 영성, 성령이 주는 기쁨과 충만함에 대한 이해를 오순절 운동을 통해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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