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Jean Calvin의 신앙

[스크랩] 칼빈의 삼위일체론 5

好學 2009. 11. 5. 13:30


칼빈의 삼위일체론 5


V. 칼빈의 삼위일체론의 독특성    

         

V.i. 종교개혁과 새로운 삼위일체 패러다임


Philip Walker Butin, Revelation, Redemption, and Response: Calvin's Trinitrian Understanding of the Divine-Human Relationship (Oxford: Oxford Press, 1995), 3.    


16세기 유럽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신앙이 원인이 되어서 세계사의 대변혁이 일어난 특별한 시대였다. 이 때에 하나님은 서양역사에서 타락한 교회사를 수정하도록 휴머니즘의 후예들로 성장한 탁월한 학자들을 배출하여 성경연구에 몰두하게 하였다. 이 때에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가라는 데까지만 간다’는 성경중심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하나님에 대한 연구도 마찬가지로 중세 전통을 무조건 답습하지 않았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는 한, 그 한계 내에서 신학을 세워야 하고, 사변적인 탐구는 피해야 하는 것이다. 칼빈의 주장은 이처럼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는 크나큰 변화를 종합적으로 반영하고 주도하였던 것이다.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우구관을 바꾸듯이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낸 종교 개혁신학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성을 발견하였다. 새로운 관계성을 인식한 건전하고 견고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은 역시 삼위일체론에서도 드러났다.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자들이 남겨준 위대한 신앙의 유산들은 주로 칭의론, 예정과 선택론, 구원의 확신 등으로 압축되고 있는데, 이런 주제들은 모두 다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의 배경에서만 풀이되어 나올 수 있었다. 김재성, 「개혁신학의 광맥」(서울: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1), “제 2장 개혁신학의 교리체계와 특징”을 참고할 것. 하나님의 대한 이해를 바르게 회복시키는 일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형태만을 바꾼 또 다른 기독교 유사 종파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중세 교회의 악습에 대해서 바르게 성경적인 교회론과 구원론을 회복하려했던 종교개혁자들은 먼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게 됨으로써 타락한 로마 가톨릭 교회와는 더 이상 영적인 교제를 할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신비이다. 아무리 인격적인 용어를 동원한다하더라도 정확히 묘사할 수 없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기를 아주 싫어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오직 위격들을 통해서 안다고 강조하였다. 이점에서 칼빈은 중세 스콜라주의에서 벗어나서 성경으로 향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하나님은 본질상 알려질 수 없고, 오직 그의 위격들을 통해서 알려질 수 있다고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인격적 존재로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하기 전 아담이 지녔던 인간 본성의 완전한 탁월함이었다. 그러나 그가 타락의 상태로 떨어졌을 때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는 손상을 이었다. 따라서 비록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파괴되어졌고, 심각하게 오염되어서 잔해만 불순하게 남아있다. 그것이 오늘날 선택된 자들에게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한 부분적으로 나타나지만 하늘에서 온전한 영광에 도달할 것이다. Institutes, I.xv.4.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칼빈은 구분한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다는 것도 오직 인격적인 관계라는 상황에서만 가능하게 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과학자가 실험으로 입증하듯이 하나님에 대해서 객관적인 지식을 세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알 수 없는 측면인 존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위격적인 표현에만 치중하다 보면,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 전체적인 측면을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신성과 권능을 평가절하 하거나 등한시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세심하게 노력하였다. 칼빈은 새로운 삼위일체론의 패러다임을 형성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신학의 핵심으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이를 중요시하지도 않았다. 중세 서방신학자 보에티우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추구했던 신적인 각각의 본질 (the conception of individua in the Trinity)에 대한 연구보다는 하나님 안에 영원한 본질의 관계 (eternal subsistent relations in God) 에 강조점이 있음도 드러났다. Institutes, I.xiii.25.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본질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사실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이나 환상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되므로 성경의 근거를 훨신 뛰어넘게 된다. Institutes, I.xiv.4. 하나님은 우리의 관심의 눈길과 우리의 예배를 그분의 본질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 맞추기를 원하지 않으셨음을 발견하였다. Institutes, I.xiii.1.           


V.ii. 구원론적인 관점           

칼빈이 설명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세 인격으로 역사하시는 한 분 하나님, 혹은 한 분 안에 존재하는 세 인격들인데,

 

먼저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구분되어져서 표현되어짐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 Institutes, I.xiii.2. 하나님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먼저 세 인격들을 아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 아버지와 구별되는 성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계시되었고, 성령도 그의 신성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마28:19).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삼위일체의 이해에서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 인격이란 무엇인가? 칼빈이 인격에 대해서 매우 날카롭게 풀이한 설명을 들어보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사벨리우스와 같은 양태론의 여지는 전혀 성립의 근거를 찾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인격(Person) 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존재 (God's Being) 안에 있는 실체(혹은 본질, subsistence or essence)라고 부르는데, 다른 인격에 연관을 갖고 계시면서, 서로 공유할 수 없는 성질에 (incommunicable property) 의해서 구별되어진다. 우리는 “본질”(essence, 혹은 실재) 라는 용어를 가지고서, “존재” (being)와 구별되는 어떤 것으로 이해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말씀이 단순히 하나님이지만, 그분이 갖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면, 요한이 그가 하나님과 항상 함께 있었다. (요1:1)고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그는 그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추가했는데, 그는 그 말씀을 한 분 하나님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안에 머물러있지 아니하고서는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본질이 있는 것이기에, 분리할 수 없는 연합된 존재로 함께 묶여있고, 그 본질로부터 따로 떼어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표식으로 그를 구별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다른 인격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 세 실체의 각각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데, 그 고유의 독특한 성격으로 구별되어진다. 이 관계는 특별하게 표현되는 바, 하나님에 대해서 매우 단순하고도 불명확한 언급이 주어졌으니, 아버지와는 다른 이름인 아들과 성령이라는 이름들이 사용되어져 있다.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면서, 서로 다른  각각의 독특한 성격이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각각에 속하여 있는 것은 비공유적이라고 주장하는 바, 아버지에게 속한 것은 아들에게 적용할 수도 없고, 전이되어 질수 도 없을 만큼 구별되어지는 것이다. Institutes, I.xiii.6. 칼빈은 서로 연관을 가진 각각의 독특한 인격을 설명하기 위해서 터툴리안이 주장했던 한 분 하나님의 어떤 구별이나 경륜이 다르다는 표현에 대해서도 용납하였다. 또한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성자가 성부와 항상 본질적으로 함께 있다는 주장을 따르면서도, 성육신한 성자의 존재와 성부의 존재가 하나라는 것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의 세 구별된 인격을 풀이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Athanasius, De Decretis 15ff. "the consubstantiality of the Word or Son of God with the Father" in Origen and Athanasius, The Trinitarian Faith: The Evangelical Theology of the Ancient Catholic Church (Edinburgh: T. & T. Clark, 1988), 320ff.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하였는데, 이 존재는 그냥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공허한 소리가 아니라, 영원하고도 본질적인 아버지의 말씀이며, 태초부터 계시되 정작 시작은 없었던 분이요, 아버지와 함께 계시면서 창조부터 함께 하신 분이다. 그분은 실체를 가진 말씀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구별되어졌다. 그분은 항상 한분 하나님으로 동일하게 머물러 계시면서, 아버지로부터 낳으신 분이시다. 칼빈은 심지어 구약의 ‘여호와’라는 이름에서도 이미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가 표현되어 있다고 보았다. Institutes, I.x.ii. 칼빈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설명한 부분은 Institutes, I.xiii.7-9, 19을 볼 것. 하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성부와 성자의 구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권능과 역할에서 항상 한 분임을 강조한다. 좀더 범위를 확대하여 말하자면, 삼위일체되시는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한 분이시므로, 먼저 철저하게 각 위격을 알고 난 후에 하나되심을 제대로 이해하여야만 그 하나님이 한분이심을 온전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각 위격을 풀이하는 칼빈의 핵심은 성자의 참된 존재, 영원하심, 신성을 증명하는데 집중되고 있음은 확연하지만, 그러나 필자는 칼 바르트의 주장처럼 칼빈의 신학이 ‘기독론 중심’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삼위일체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다루는 칼빈의 관점은 구원론적이면서 존재론적 (soteriological and ontological approach)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치유 사역은 창조의 시작부터 성부가 지속적으로 해온 인류 구원의 사역이었다. 그리스도가 하신 것과 성부가 하신 것은 연속적이며 상호 관련을 맺고 있다. 죄를 용서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있던 권세를 갖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는 다른 어떤 분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받아서 전달하거나 그냥 소개해주는 분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지녀야 할 모든 의로움과 생명과 거룩함을 소유하시고서 구원을 시행하신 분이다. 그리스도는 예배의 대상이요, 구원의 창시자요, 모든 축복의 수여자로서,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육체로 거하신 분이다.


Institutes, I.xiii.13: "It is due to the communion in power between himself and the heavenly Father that the Son is himself the Author of saving benefits, so that actual knowledge of him is unquestionably more certain and solid than any idle speculations. For in him the godly mind discerns God as very present, and almost handles him when it feels itself quickened, enlightened, saved, justified and sanctified."


칼빈은 성령의 신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삼위일체를 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을 표명하면서, 성령이 자신의 권세로서 역사하심을 특히 강조하면서 생명을 주시는 권능과 우리가 체험하게 되는 본질에 대해서 설명한다. 성령은 여러 성경구절에서 중생과 영생의 창조자로 언급되어있다. 이 권능은 그 누구로부터 빌려온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고유한 권능이다. 칼빈은 성자에게 속한 것으로 설명한 방식으로 모든 신성의 활동들을 성령에게 적용한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살려주시는 권능을 체험하고 참여하는 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이다. 성령만이 우리의 칭의와 성화의 근거이자 저자가 되시며, 모든 진리와 은혜와 선한 것들의 출처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위격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분이시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가 로마서 8장과 고린도전서 2장에서 성령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구별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위격적으로 존재하며,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성령의 존재는 하나님을 떠나서, 혹은 하나님 밖에서는 상상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Institutes, I.xiii.14-15. 성령의 존재와 활동은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의 즉각적인 실재이다.  모든 구원사역과 재창조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긴밀한 관련 속에서만 가능하다.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구원론적이며, 동시에 존재론적이라고 평가해 볼 수 있다.   칼빈은 성부와 성령 사이에 하나됨은 성경적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존재이자 대행자로서 하나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V.iii. 위격과 본질의 명확한 구별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위격들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은 ‘위격’(휘포스타시스) 혹은 ‘인격’ 이라는 용어를 충분히 수용하면서도, 전통적인 방식에 무조건 따르기보다는 신중하게 성경을 연구하여 답변하고자 했다. ‘실체’라고 번역하는 ‘휘포스타시스’는 성부의 존재나 본질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위격 혹은 인격(person)을 가리킨다. 칼빈은 교부들이 채택했던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를 바르게 파악하여, 하나님에게는 삼중의 ‘휘포스타시스’가 있고, 단일의 ‘우시아’ (본질)가 있다고 가르쳤다. Calvin's Commentary on Hebrew 1:3.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헬라 정교회에서는 세 ‘휘포스타시스’가 있다고 가르친 반면에, 서방 교회에서는 ‘휘포스타시스’를 ‘수브스탄티아’로 번역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하나의 ‘휘포스타시스’로 직역하므로서 크나큰 혼란이 빚어졌던 것이다. 다시 반복해서 요약하여 보자. 칼빈의 삼위일체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본질 (‘우시아’ 'essence', 라틴어로는 essentia)과 각 위격 (‘휘포스타시스’ hypostasis) 간에 명확한 구분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칼빈은 본질과 위격을 확연히 구분하여 사용하라고 강력히 주문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삼위의 각각의 인격이란 한 하나님의 본질 안에서 (in Dei essentia) 내재적인 위격 (hypostasis), 혹은 실재이며 (subsistence, 라틴어로는 subsistentia), 서로 간의 관계에 있어서 다른 인격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며, 서로 바꿀 수 없는 독특한 요소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때에 ‘실재’ 혹은 ‘실체’ (subsistence)라는 의미는 ‘존재’ (being)라는 용어와는 좀 다른 말로 쓰여졌는데, ‘존재’와는 분리할 수 없는 용어이지만, 존재와 연관을 갖고 있는 한 위격이라는 말로 이해되어진다. ‘수브시스텐티아’라는 말은 존재 내에 있는 관계성을 드러내는 단어이며, ‘에센티아’라는 말은 존재 그 자체 (esse in se ipso, a se ipso)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칼빈의 강조점을 다시 한번 인용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In the absolutely simple unity of God these three hypostases or subsistence  coexist in one Being without being confused with one another. Hence although   the Father is one God with his Word and Spirit, the Father is not the Word,  nor the Word and Spirit. 

         

 (절대적으로 단순한 하나님의 통일성 속에서, 이들 세 위격들 혹은 실재들이  서로간에 그 어떤 혼동도 없이 하나의 존재 속에 함께 거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성부는 말씀과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성부는 말씀이 아니며, 성령도 아니다) Institutes, I.xiii.4. 우리가 성부께서 성자와 함께 거하신다고 할 때에, 서로 구별되는 인격으로서 두 실체들 사이의 관계 (relatio)를 생각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고 말할 때에는 성부나 성자나 성령의 구별된 위격들과는 확연히 다른 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Institutes, I.xiii.vi. 삼위의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 (Being)는 전혀 구별이나, 구분이란 없다. Institutes, I.xiii.25. 칼빈은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에서는 다른 어떤 관련성을 포함하는 단어로서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절대적으로 한분만을 생각하라고 주장하였다. Institutes, I.xiii.20; “Simplex Dei nomen relationem non admittit, non potest Deus ad se ipsum dici hoc vel illud esse." 중세 스콜라신학자들의 영향으로 인해서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본질을 일종의 확고한 상태의 어떤 존재 혹은 정태적인 어떤 것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각 위격이 담당하는 행위를 순수한 존재로 동일시하였다. 칼빈은 위격이 본질에 앞서서 거론되고 있음에 대해서 매우 우려하였다. 행위와 사역은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구체적인 사건들이요, 이것들은 위격들의 기능에 해당한다. 이것들은 결코 각 위격의 공통적인 본질을 설명하여 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위격과 본질은 구별하여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칼빈에 있어서 세 위격들은 하나의 본질 안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본질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Institutes, I.xiii.25. 더구나 하나님의 본질은 일반적으로는 인지가 가능하지 않으며, 오로지 세 위격의 속성들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고 보았다. 성부와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도 역시 본질을 충만하게 보여주시는데, 역시 ‘아우토테오스’이며, 완전한 하나님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각 위격은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보여주신다. 이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위격들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위격들의 속성에는 그들 각 위격의 독특성과 그들이 본질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단일한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을 모두 다 소유하고 표현하고 있다. 위격을 통해서 설명되는 그리스도는 마땅히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 (theos ek theos)이다. 아들로서는 성자는 성부로부터 존재하게 된 것이다. 위격적으로 볼 때에 성자의 ‘낳으심’과 성령의 ‘나오심’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이해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성경이 이런 용어들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성자와 성령은 성부의 본질과 동일하기 때문에, 그들의 속성과 자존성과 영광은 모두 동일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위격적인 술어들 때문에, 성부가 계시고, 그와 다른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해를 하게되므로 삼신론에 빠지게 되고 만다.           


V.iv. 각 위격의 동등성과 독특성                      

니케야 신경을 작성했던 시대의 성도들과 초대 교부들은 주로 본질의 통일성이 아니라, 개별성을 지닌 각 삼위 사이의 근원적 관계에 대해서 연구하는데 집중하였었다. 그러나 칼빈은 삼위일체 내에서 하나의 공통 본질을 지니고 계신 것을 삼위 사이의 관계보다도 더 중요시했다. 어거스틴은 위격 개념을 주로 신적인 관계로 국한시키려고 했었으나, 칼빈은 위격 (서열)은 본질 (비서열, 완전한 동등)과 명확히 구분하려고 했다. 본질 면에서 볼 때에 삼위일체는 한 분이며, 서열이 없다. 반면에 위격에서 볼 때에는, 성자의 위격을 구분하는 특성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자가 본질로서는 완전히 하나님과 한 분이시다. 또한 성령의 위격을 구분하는 특성은 영원한 발출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성령의 본질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동일하다. 각 위격은 자존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부께로부터 성자가 나오셨지만, 똑같은 신성을 가지셨으면서도 성부와 성자 사이를 구분하는 독특한 개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점은 칼빈의 삼위일체론에서 가장 강조되는 조항으로서 그가 신론의 발전에 끼친 중대한 공헌이 아닐 수 없다. 칼빈은 성자와 성령의 자존성과 동등성을 먼저 강조하고 난 후에, 세 위격이 본질상 지니고 계신 통일성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본질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전적으로 완전하게 공동으로 남아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때는 진실로 본질상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전혀 구별이 없게 된다. Institutes, I.xiii.25. 칼빈은 위격에 있어서 성자가 성부로부터 낳으셨다는 말에 대해서 의심없이 받아들이면서, “만약 성부와 말씀 사이의 구별에 주목해서 살펴본다면,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하지만, 성자의 본질은 성부로부터 온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성자의 본질은 무발생적이며, 낳아진 것이 아니라, 성부의 본질과 동일하며, 성령의 본질도 이와 동일하다. 그리스도가 신이었다는 말은 신적인 속성과 본질을 소유한다는 말이며, 자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칼빈은 강조하면서, “그는 혼자서도 스스로 항상 자존하신다... 만약 말씀의 근본적인 본질이 성부와 함께 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거론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영광의 삼위일체의 제 2위격이신 그리스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Calvin's Letter to Simon Grynee, 1537년 5월. in Letters of John Calvin, ed. Jules Bonnet, tr. David Constable (Philadelphia: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1858), vol. 1:55. 칼빈의 핵심적인 강조점은 삼위일체 세 위격 가운데 각 위격의 자존성, 다른 말로 하면 성자와 성령의 충분한 신성에 대한 강조점이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교회가 오랫동안 채택해온 삼위일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동등성과 독특성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이시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시고, 성령은 아들이 아니다. 세분은 독특한 특성 (property) 에 의해 구분된다. Institutes, I.xiii.2. 칼빈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히1:3)는 구절에 나오는 헬라어 ‘카락테르 휘포스타세오스 아우투’ (라틴어로는 character substantiae eius)라는 말씀의 해석에서부터 시작하여 용어를 정의한다. 칼빈은 바른 단어의 사용이 얼 마나 중요한가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고전적인 기독론에서 항상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실체’ 혹은 ‘본체’라는 단어였다. 성부의 본질과 성자의 본질이 과연 어떤 관계인가를 풀어보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성경에 난해한 내용이 있을 때 좀 더 분명한 단어들로 그 내용을 설명하는 일을 막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런 단어들을 사용하더라도 성경의 진리를 충실하게 견지하고, 그 단어들을 시의적절하게 절제하여 사용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할 것이다.” Institutes, I.xiii.3.   칼빈이 헬라 정교회에 속한 교부들의 글과 서방 어거스틴파의 저술들을 연구하여 각각의 공헌을 종합하고 체계화하여 제시한 삼위일체 이해의 핵심은 삼위일체 안에서 각 위격들은 ‘스스로 하나님이심’ (아우토테오스, autotheos)이라는 것이다. 워필드 박사는 삼위일체 교리를 일별하는 두편의 논문들에서 칼빈이 성자의 ‘아우토테오스’를 주장하므로서 삼위일체 교리를 정확하게 그리고 생동감있게 정립하는데 탁월한 기여를 했다고 강조한다.


B. B. Warfield, “Calvin's Doctrine of the Trinity," Calvin and Calvin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31), 189-284. idem, "The Biblical Doctrine of the Trinity," in Biblical and Theological Studies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52), 59: "In particular, it fell to Calvin, in the interests of the true Deity of Christ-the constant motive of the whole body of Trinitarian thought-to reassert and make good the attribute of self-existence (autotheos) for the Son. Thus Calvin takes his place, alongside of Tertullian, Athanasius, and Augustine, as one of the chief contributors to the exact and vital statement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the Triune God."           


죤 머레이 교수는 칼빈이 초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에서 성자의 성부로부터의 영원발생설을 거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다른 하나님’이라는 니케야 신경의 표현을 그냥 답습하기 보다는, 성자는 처음부터 하나님이심 (아우토테오스)를 강하게 주장하였음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John Murray, "Systematic Theology,"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25 (1963):141; "This evidence shows that the meaning intended is that the Son derived his deity from the Father and that the Son was not therefore αύτόIt was precisely this position that Calvin controverted with vigour. He maintained that as respects personal distinction the Son was of the Father but as respects deity he was self-existent (ex se ipso). This position ran counter to the Nicene tradition." Robert L.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Christian Faith (Nashville: Thomas Nelson Publishers, 1998), 327.


각 위격들은 공동 주권에 대한 행사의 일부로서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를 형성하거나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위격들이 그저 공동의지의 집행자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위격들보다 신적인 본질이 우선한다는 생각에 머물고자한 사벨리우스주의자들의 생각을 배격한다. 성령의 위격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시고, 성부의 심판대 앞에서 중보자이신 성자와의 인격적 사귐이 영원한 형벌을 면케 만든다. 이점은 니케야 종교회의 삼위일체론에서 다루었던 모호성에 대해서 정면으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것이다. 각 위격들 자체가 하나님이지 임명에 의해서 신성이 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처음 이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오리겐이었다. 그는 오직 성부에 대해서만 이 용어를 적용하였다. 칼빈과 같은 이해가 없고, 오리겐처럼 생각하는 경향 때문에 헬라 정교회에서는 성부만이 ‘아우토테오스’라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였고, 결국에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는 “이중발출”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칼빈은 삼위일체 위격들 각각이 ‘아우토테오스’라고 말함으로써 모든 형태의 오리겐주의적인 요소들을 공격했다.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 비해서 열등하거나 종속되어 있지 않고, 성자와 성령도 충만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어느 한 위격이 다른 위격에 대해서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권위를 주장하지 않는다. 특히 칼빈은 성자의 위격이 하나님 안에서 시작되어졌다는 표현에서 아주 세심하게 어떤 인과적인 암시라도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한다. 성자의 존재가 성부의 존재에 의존적이라고 간주되어서는 안되고, 단지 그런 관계 속에서만 성자가 되기를 바라셨음에 유의하도록 호소한다. 칼빈은 요한복음 1:1에 나오는 ‘말씀’ (로고스)는 자신만의 특성을 지닌 실재로서 성부와 함께 계셨음을 역설한다. 각 실재는 저마다 고유의 속성이 있으며, 아버지만의 독특한 표지로 인정되는 것은 아들에게 속할 수도 없고, 아들에게 돌릴 수도 없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아들의 출생을 아시고 함께 하셨다. 하지만 성자는 처음부터 ‘아도토테오스’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격의 구분에서 삼위일체의 위격들 안에 있는 논리적인 순서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삼위의 각 위격을 논할 때에는 물론 일정한 순서를 함축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이 말하는 앞과 뒤의 순서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등과 이등과 삼등을 주장하려는 순서도 아니다. 삼위께서는 함께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 순서에서는, 비록 순서의 준수가 의미 없는 일도 아니요, 불필요한 것도 아니지만, 성부가 첫째이고, 그 다음이 성자이며, 성령을 그 후에 거론하게 되더라도 영원하신 중에도 먼저와 이후로 나누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Institutes, I.xiii.18. 특히 서구 신학에 잠재해 있는 사벨리우스주의, 즉 양태론에 대해서도 공격했다. 사벨리우스주의가 삼위의 각 위격들이 서로 동등함을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그 위격들이 신적 본질 자체와는 완전히 동등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세 위격이 그들의 신성에서 상호 동등하며, 비인격적인 본질의 공유에서가 아니라, 세 위격의 상호 교류와 상호 교통함에 의해서 하나가 되었다는 교리를 주장했다.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언급하면서 ‘거짓-디오니시우스’ 에 대해 통렬히 거부하고 있다. 계시에 근거하여 볼 때에, 비록 충분히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처럼 환상에 근거한 신학으로 지나치게 나가는 것은 성경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 버린다고 비판하였다.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xiv.4. 반대로,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 계시된 것이 적다고 하더라도 사변적인 지식을 발전시켜서 함부로 말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빈 한 사람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은 삼위일체의 모든 위격들이 동등하다는 믿음을 굳게 가졌다. 이점은 중세 신학이 아타나시우스 신경에 나오는 조항들에 대해서 변질된 해석을 가한 부분들을 배척하는 것이기도 하다. “삼위일체에서 어느 위격이 앞서거나 뒤서지 않으며, 어느 위격도 다른 위격보다 더 위대하거나 모자라지 않다”는 것이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삼위일체론이었다. 그런데 중세신학자들은 성부를 성자와 성령의 원천으로 해석해서 이 두 위격보다 더 높이려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또한 성령에 대해서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연결만을 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인격성이 의문시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여기서 삼위 사이의 동등성과 자존성을 강조하는 칼빈은 성부께로부터 나오는 것은 성자와 성령의 본질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성자와 성령은 모두 완전하신 하나님으로서 스스로 본질을 지니신다. 성부께로부터 나오는 것은 독생하신 성자의 고유성과 성령의 고유성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위격들이 모든 점에서 서로 동등함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중세 전통에서 무시되었던 성령의 인격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두 성례전에 묶여 있었고, 성령의 적용사역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은 구원의 적용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임을 분명히 밝혀냄으로서 ‘성령의 신학자’라고 불리어지는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다양한 하나님의 현현이 나타나 있는데, 이들에 대해서 칼빈은 주저없이 기독론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받아들인다. 구약의 성도들은 아직 충분한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던 성도들이었으므로 세 위격으로 구분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 예배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창조와 구속과 성화라는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칼빈은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다. 위격들 각각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전체로서 삼위일체가 동시에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구속주이자, 동시에 성화자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내부를 보다 명백하게 드러내신 것은 오순절 때 성령님을 보내면서부터이다. 이때 이후로는 성부의 위격과 사역, 성자의 위격과 사역, 성령의 위격과 사역을 구분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때에 위격들은 상호 다른 두 위격들의 지식을 동시에 포괄적으로 이해한다. 성경은 활동의 기원과 만물의 원천과 샘이 성부에게 귀속되며, 지혜와 경륜과 만사의 주관하심은 성자에게 귀속되며, 행동의 능력과 효과는 성령께 귀속된다고 말씀한다. Institutes, I.xiii.18. 여기서, 칼빈은 특히 처음 시작과 근원이 성부에게 귀속되기에 혹시라도 성자와 성령의 신성이 손상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설명을 첨가하고 있다. 특히, 요한복음 14장 28절에서 ‘아버지는 나보다 크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오해되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성자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하나되게 하시고자 육체를 입고 오셨고, 그로 인해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를 이룩하게 시도하였다. 그렇다고해서 성자는 이등 하나님이거나, 성부에 비해서 다소 열등하며 종속적인 지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Institutes, I.xiii.26. 칼빈은 이 구절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구원론적으로 혹은 경륜적으로 풀이할 것을 주문한다. 성자가 육체를 입고 있다고 하더라도 영원한 삼위 사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성자와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을 도입하므로써 칼빈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 시대부터 내려온 성부수위설은 그가 ‘신성의 원천’이기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었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의 성도들의 생활 속에 파고 들어와서 다른 두 위격들의 사역을 유효하게 만들며, 효과적으로 적용하시는 분이시기에 결코 성령의 활동을 소홀히 취급할 수 없다. 어떠한 면에서도 성령의 인격성을 격하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세 시대의 교회가 전혀 강조하지 않았던 요소들이다. 어떤 영역과 사역에서 성부가 주도하듯이, 혹은 성자가 주도하듯이, 성령도 똑같이 인격적인 자발성과 주도성을 발휘하신다. 그렇게 하더라도 방종하거나 자유가 지나치지 않는 것은 성령이 가지신 지혜는 다른 두 위격들의 지혜를 공유하고 관통하고 있으며, 특히 삼위를 하나로 묶고 있는 영적인 사랑에 의해서 추진되기 때문이다.           


V.v. 한 위격의 지식은 다른 두 위격의 지식을 동시에 포함함           

우리는 이제 칼빈의 삼위일체론에서 인격들간의 관계 혹은 하나의 분리할 수 없는 하나님 안에 있는 실재들에 대한 해설에 대해서 주목하고자 한다. 이것은 칼빈이 삼위일체론을 발전시킨 기여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 손꼽히는 부분이며 삼신론자라는 오해를 해소하는 답변도 되는 것이다. 칼빈은 위격들이 성부로부터 어떻게 나오느냐에 관심을 가졌던 종전의 삼위일체론과는 달리,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충분히 입증한 후에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공존적 연계성을 더욱 부각시키고자 했다. 상호 교통은 세 위격 모두에게 적용되며, 세 위격이 공유하는 본질적 속성은 동일한 하나의 실체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기 때문이다. 각 위격은 독특한 속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는 모든 속성들을 다 소유하고 있다. 신적 본질은 충만하게 완전하게 단일한 본질을 이루고 있다. 그 본질은 하나이신 하나님의 단일성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성을 규정하면서, 각 위는 다른 위격들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함께 구비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이런 면에서는 성부는 성자와 성령과 함께 모든 신성과 지혜를 겸비한다. 각 위격에게만 속해있는 독특한 특성들을 서로 공유하신다. Institutes, I.xiii.19: "The relationship of Father, Son, and Spirit" 성부는 충만하게 성자 안에 있고, 성령 안에 있다. 칼빈은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는 구절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성자가 성부로부터 확연히 구별된다는 것과 성령이 성자로부터 확연히 구별된다는 것은 성경에 의해서 분명하게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아주 놀라울 정도로 거대한 신비로움이 이 탐구에 있어서 우리가 추구해야할 거대한 존경심과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있다. 나는 그레고리 나지안젠의 언급을 극도로 좋아한다: “나는 한 분을 생각할 때에 즉각적으로 세 인격의 광채에 의해서 휩싸여있는 존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시 나는 세 인격을 구별할 때에 즉각적으로 한분으로 돌아가는 존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세 인격들로 구분하면서 통일성으로 즉각 귀결하지 않는 생각을 허용하지 않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버지” “아들” “성령” 등의 용어는 확실히 실제적 구분을 허용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들을 통해서 다양하게 나타낸다는 식으로 이런 용어들을 단순히 하나님의 별명쯤으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구별을 (distinction) 하려는 것이지, 분리를 (division) 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Institutes, I.xiii.17. Cf. Gregory of Nazianzen, Oratio, 40:31, "I cannot think of the One without immediately being surrounded by the radiance of the Three; nor can I discern the Three without at once being carried back to the One. When I think of any One of the Three, I think of him as a whole. . . I cannot grasp the greatness of that One so as to attribute a greater greatness to the rest. When I contemplate the Three together, I see but one luminary, and cannot divide or measure out the undivided light."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삼위일체 사역을 내적인 사역 (opera Trinitatis ad intra)과 외적인 사역 (opera Dei ad extra)로 나누고 있는데, 하나님의 외적인 사역은 경륜적으로 나누어지고, 구별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내적인 사역을 결코 분리하거나 나눌 수 없다고 말하였다. 칼빈은 과연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내적 관계에서 어떤 점들을 중요하게 설명하는가? 영원한 관계로서 말하되, 그는 삼위 사이에는 “경륜”(economy) “세대” (dispensation) “성질” (disposition)이라는 용어를 자주 채택하였는데, 창조와 구원의 사역에서 각각의 위격들은 독특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런 용어들은 모두 다 위격들의 영원한 신비적 교류와 공유를 표현하려는 단어였다. 각각의 인격들 혹은 위격들을 가지고 있어서 구별되면서도 한 분 하나님으로서 서로 전적으로 함께 머물러 계신다. 세 인격들의 하나됨은 본질적인 특성면에서, 그리고 실재적인 하나됨에서 전혀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한 분 하나님이 존재 안에서 세 인격들 혹은 위격들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 세 위격이 사역적으로 서로 다른 역할을 감당한다고 하더라도 한 하나님으로 존재와 한 분 하나님의 통일성을 해치지 않는다. 경륜적 질서에서 볼때에,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모든 지식과 지혜를 공유하시고 모든 면에서 상호 교통하시는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칼빈은 “단일체 안에서” (in solidum)라는 용어를 채용하여 삼위 사이에는 서로 아무런 가등이나 차별이나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Institutes, I.xiii.2: "quorum quisque in solidum sit Deus." I.xiii.23: "in solidum patris et filii sit communis." "in solidum"이라는 용어는 칼빈으로 하여금 삼신론자의 위험을 견제하게 하는 가장 적합한 술어였다. 한 하나님 안에서 삼위는 본래적으로, 태생적으로 상호인격적인 결합 (cohension)이 되어있음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성부는 성자 없이는 성부만으로서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전체 하나님의 존재는 각각의 위격과 모든 것을 공유하고 교통한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 각각의 인격에도 그대로 충만하게 머물러 있다. 반대로 각각의 충만함은 한분 하나님 안에 그대로 충만하게 거하고 있다. 한 분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격적이시며, 완벽한 의미에서 위격적이시고, 성부, 성자, 성령 모두 다 ‘스스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한분 하나님은 하나의 인격 (una persona)만을 취하신 것은 아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 없이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성자는 구원경륜을 성취하기 위해서 성육신하여 오셨지만, 그 순간에 성자가 생겨난 것도 아니요, 독자적으로 별도의 하나님으로 존재를 시작한 것도 아니다. 삼위의 인격적인 내적 관계는 지위나 높낮이에 관한 선언이 아니요, 권세나 권위에 대한 차이를 설명하려는 것도 아니다. 존재, 권능, 위엄에 있어서는 전혀 삼위 사이에 차이가 없다. 삼위는 한 하나님의 충만한 존재 (tota essentia)과 온전한 본질(tota natura)을 동등하게 갖고 있다. 성경이 증거하는 삼위일체의 통일성과 삼위성은 성자의 오심으로부터 성령이 밝히 계시되기 시작하였음에 유념해야 한다. 앞에서 지적한 바대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을 떠나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아니며, 성경에 위배되는 망령되고 헛된 사상이다. Institutes, I.xiii.16. 에베소서 5장 5절과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근거하여 칼빈은 하나님의 하나됨과 삼위성을 모두 강조한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모두 하나로 묶여져서 하나님으로 불리어지며, 그 이름을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 안에 세 인격이 머물러 있지만, 한 분 하나님으로 알려진다. "따라서 하나님은 여러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다. 우리는 말씀과 성령이 하나님의 바로 그 본질적인 존재 그 이상이 아니라는 점을 결론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Institutes, I.xiii.16: "Therefore since it is settled that God is one, not several, we conclude that the Word and the Spirit are nothing other than the very Being of God."           


결론:  구속 역사적 관계의 신학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어떤 유익이 주어지는가? 삼위일체 신학은 무엇 때문에 성경에서 주어졌는가? 칼빈이 전개한 삼위일체론은 루터와 마틴 부써가 가지고 있던 초기 종교개혁자들의 시각을 갱신하는 것이요, 특히 초대교부들과의 접목을 통해서 새롭게 세우고자 한 것들이다. 중세신학은 칼빈에 이르러서 완전히 새로운 삼위일체론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따라서 칼빈의 신학이 지닌 중요성과 의의에 대해서 몇 가지로 결론을 맺고자 한다.           

첫째는 서방 신학의 양태론과 동방신학의 종속설을 극복하는 절묘한 해답을 제시하였다. 즉, 어거스틴의 전통에 확고히 서 있으면서도, 삼위일체 각 위 격 부분은 헬라교부들, 특히 갑바도기아의 신학자들을 추적하여 그들의 문제점도 파악하고 이를 보완하는 훌륭한 결론을 도출했다는 사실이다. 겉으로는 전혀 유사성이 없어 보이는 두 전통 사이에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일치점을 찾아내고, 절묘한 종합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이다.


T. F. Torrance, "Calvin's Doctrine of Trinity," Calvin Theological Journal 25 (1990): 165-93. idem, "The Doctrine of Trinity, Gregory Nazianzen and John Calvin" Calvin Studies V, ed., John Leith (Davidson: Davidson College, 1990): 7-19. idem, The Hermeneutics of John Calvin (Edinburgh: Scottish Academic Press, 1988).       

       

둘째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체험과 경험에 대해서 보다 온전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였다. 중세시대에는 사람이 은혜를 입게 되면 현재의 인간 됨됨이가 달라지게 되며, 그렇게 만들어주는 은혜라는 것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영적인 실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칼빈의 삼위일체론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이나 위격적 사역의 열매이므로, 죄인들이 은혜를 받고 새사람으로 변화되어서 어떤 다른 인간으로 만들어진다기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이 주어질 뿐이다. 은총을 받은 거듭난 사람은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은혜의 주입이 아니라, 전가에 의해서 신적인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는 구원론적인 설명을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구원의 은혜는 각 위격들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택함받은 자들에게 값없이 흘러내리는 것이다.         

  

셋째로, 칼빈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전체 구속적인 관계를 설명하는 근간이 되는 구조, 패턴, 그리고 역동성을 모두 다 삼위일체의 존재방식을 통해서 분석하고 설명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삼위일체론을 옹호하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주요 관심사항으로 보인다. 칼빈이 사변적이요, 철학적인 삼위일체론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개념을 주장하는 것도 피하였던 진정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하므로써, 그를 통해서 주워진 구원의 확실성을 전파하려는데 있었다.

 

Timothy Geroge, Theologies of Reformers (Nashville: Broadman, 1988), 200-201.        

   

요약하자면,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구원론적으로 풀이되고 전개되었다. 이것은 아타나시우스에게서도 보여졌으며, 서방신학과 동방신학의 삼위일체론에서 간과되어온 문제점을 바르게 교정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다시한번 지적하지만, 종교개혁자 가운데 가장 성경적이며, 기독론적인 삼위일체론을 제시한 신학자는 단연 칼빈이었다. 종교개혁자 가운데서 요한 칼빈만큼 삼위일체론을 깊이 있고, 광범위하게 다룬 신학자는 없다. 칼빈 신학의 근본원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지만, 그 내용은 결국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김재성, 「칼빈과 개혁신학의 기초」(수원: 합동신학대학원 출판부, 1997), 129. 칼빈의 신학저술 전반에는 극도로 혼란한 하나님에 대한 이단적 해설들, 서방신학의 삼신론과 양태론의 모순과 문제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동방신학의 종속설과 성부우위설에 빠지지 않는 성경적, 구원론적 삼위일체론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 (고후 13:13) 아멘.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