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Jean Calvin의 신앙

[스크랩] 칼빈의 삼위일체론 4

好學 2009. 11. 5. 13:30


칼빈의 삼위일체론 4 

          


IV.ii. 세르베투스와의 대결           


성경적 삼위일체론을 수호하려는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은 유티테리안들이나 삼신론자들을 그저 신학적인 이견을 가진 사람들로 그저 보아 넘길 수 없었다. 이단적인 가르침은 어느 시대에나 그저 묵과할 수 없는 절박한 문제다. 칼빈은 삼위일체 이해를 잘못한 자들이 종속주의와 양태론적 단일신론을 주장하고 있음을 매우 경계하고 이를 바로 잡으려 노력하였다. 특히 칼빈은 사벨리우스주의자이며, 아리우스파로서 제네바 종교개혁에 매우 어려운 삼위일체 논쟁을 야기시킨 세르베투스 (1511-1553)를 처벌해야하는 난제를 떠맡게 되었다.  세르베투스는 스페인 출신으로 처음에는 의학을 공부하다가 신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오랫동안 스페인에는 모슬렘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그 영향으로 세르베투스는 사벨리우스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 같다. 더구나 세르베투스는, 칼빈이 날카롭게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이단설을 종합하여 자신이 새로운 체계를 세워놓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는 「삼위일체에 대한 오류들에 관하여」(De Trinitatis Erroribus, 1531)와 「삼위일체에 관한 두권의 대화록」(Dialogorum de Trinitate libri duo, 1532)를 펴냈는데, 모두 다 사벨리우스주의적인 양태론적 단일신론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칼빈은 나름대로 헬라 정교회의 삼위일체론과 서방의 삼위일체 모델을 종합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세르베투스는 정반대로 이단들만을 종합하여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마니교도들의 조잡한 신론이 혼합되어 있었다. 결국, 비엔나에서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감수에게 뇌물을 주고 도망쳐 나온 세르베투스를 지지하는 일부 반대파들이 의회에 포진하고 있어서 칼빈 편을 들어준다는 확고한 보장이 없었던 어려운 시기였다. 칼빈은 지금까지 세르베투스의 이단적인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단호히 맞서서 그가 죽도록 했다는 오명을 안고 있으며, 이로 인해서 그의 모든 인간성이 매도당하고 매우 냉혹한 인간으로 오해를 받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세르베투스가 주장한 사상들이 바로 중세 말기에 내려온 이단적인 사상에 젖어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아들 성자에 대한 모독죄'로 고소를 당하였다. 가히 하나님에 대해서 천재적인 새로운 교리를 자신이 발표하겠다는 야망을 품고있던 세르베투스는 사벨리우스와 아리우스의 종속설을 교묘히 혼합시킨 사상을 유포하였다. 김재성,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서울: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1), 394-406. 칼빈은 삼위일체 위격들 중에서 한 위격을 다른 위격보다 더 높이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세르베투스의 문제를 다룰 때에 칼빈이 가장 염두에 둔 문제점이었다. 세르베투스는 “하나님의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마다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단일성에 일치되지 않는 한 이 삼위는 공상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Institutes, I.xiii.2.  더구나 세르베투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주의자였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의해 성자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이 함축하는 바 이외에는 그 어떠한 신성도 그리스도에게 존재하지 않았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강도높게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1559년 「기독교 강요」최종판에서 신성과 인성을 포기하는 세르베투스의 기독론을 비판하고, ‘신성과 인성의 완벽한 통일’을 주장했다. 그는 말씀의 영원한 위격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간주해버리고, 다윗의 아들을[즉, 인간이요, 역사적인 사람이요, 예언을 전달하는 유대인] 우리로부터 낙아 채버린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로서 약속된 분이다... 만일 육체가 신성만을 가진 것이라면, 그곳은 신성의 성소가 되지 못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낳으신 분으로, 우리의 유일한 구속주가 되신 분만이 육체를 따라서 참된 인간의 몸으로 지음을 받았다. Institutes, I.xiv.8. 그렇다고 해서, 칼빈이 항상 정통 삼위일체론을 거스리는 모든 이단자들만을 쫓아다니면서 정죄하는 일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었다. 당대에 여러 도시에서 심각한 물의를 일으키고, 비엔나에서 투옥되어 있던 중 도망을 다니던 세르베투스를 처형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칼빈이 모든 유니테리언들을 다 처벌한 것이 아니다. 세르베투스가 극도로 위험하게 주장한 내용은 "신의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마다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단일성에 일치되지 않는 한, 이 삼위는 공상적인 것"이라고 주장한 대목이다. Institutes, I.xiii.2. 더구나 성부로부터 태어난 자이기 때문에 성자의 신성을 거부하는 세르베투스의 가르침은 성경의 모든 설명보다도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이성적인 설명을 더 신봉한 자들의 극치라고 할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제 13장 23항-29항에서 세르베투스와 사벨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한 반격을 자상하게 첨가하였다. 그리고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지닌 중보자로서 양성의 상호교류를 통해서 우리를 위한 구원을 성취하였다. Institutes, II.xii.3.           


IV.iii. 유니테리언들과의 논쟁           

칼빈은 당대에 가장 큰 문제 거리로 등장한 이탈리아의 반삼위일체론자들 문제로  곤욕을 치루었다. 이들 중 일부는 제네바에 있던 회중교회와 연계를 맺고 있어서 칼빈의 입장에서는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칼빈이 오직 세르베투스와 같은 단일신론자들만을 정죄한 것일까? 세르베투스 사건이 끝난 후, 1558년 5월 18일부터 유니테리안파의 불순한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서 삼위일체 교리를 고백하는 사람만이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도록 조건화하였다. 지속적으로 제네바에 유입해 들어오는 많은 난민들 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불순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성자의 본질이 성부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오랫동안 성자의 위격을 격하시켜 온 로마 가톨릭 교회에 습관적으로 젖어서 성부 수위설에 이성적으로 동조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유니테리언들은 아직 확고하게 신앙이 정립되지 못했던 개혁파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쉽게 동조자를 얻고 있었다. 1557년 이탈리아 지방에 널리 퍼져있던 유니테리안들의 사상에 입각하여, 이단자들은 칼빈이 세 마귀들을 예배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들 중에서 네 사람의 ‘비전문가들’은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다.


Jack B. Rogers, "Calvin and the Italian Anti-Trinitarians (A.D. 1558)," in Case Studies in Christ and Salvation, eds., Jack Rogers, Ross Mackenzie and Louis Week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7): 73-82.


삐드몽의 의사로 산부인과와 여성병 전문가였던 죠지오 비안드라타 (Giorgio Biandrata 혹은 Blandrata)는 삼위일체를 거부한 유니테리안으로서 제네바에서 쫒겨 난 후 폴란드 지역에서 세를 형성하였다. 적어도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을 갖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점에 있어서는 세르베투스의 입장에 충실한 제자였다. 죠반니 파올로 알치아티 (Giovanni Paolo Alciati)도 역시 칼빈을 삼신론자라고 공박하다가 제네바에서 추방되었다. 그리발디 (Matthias Gribaldi)는 당대에 매우 잘 알려진 법학자로 세르베투스의 저술에 신뢰를 더 두는 인물이었다. 학교 교사였던 죠반니 발랑띤 장띨 (Giovanni Valentine Gentile)도 역시 칼빈과 충동하였다. 이들은 일반적으로는 지식이있고 뛰어난 인물들이었지만, 신학적인 훈련을 전혀 받지 않아서, ‘이성적’이요, ‘논리적’인 이해를 추구하고 있었다. 종교개혁 시대에 일어난 반삼위일체론자들의 신학은 일부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Antitrinitarianism in the Second Half of the Sixteenth Century, ed. R. Dán and A. Pirnát (Hungary: 1979). Hans Hillerbrand, Christendom Divided: The Protestant Reformation (Philadelphia: Westminster, 1971), 93. George H. Williams, The Radical Reformation (Philadelphia: Westminster, 1962), 634-669.


현대 유니테리언들의 입장에서 칼빈과 논쟁했던 이들을 옹호하는 주장도 있다. E. M. Wilbur, A History of Unitarianism: Socinianism and its Antecedents (Cambridge: Harvard, 1947), 222-226.  특히, 쟝띨의 삼신론은 오히려 칼빈으로 하여금 양쪽의 극단적인 이단들 (삼신론과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문제점을 공정하게 비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칼빈은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삼신론을 주장하던 장띨에 대해서 설득과 권고를 겸한 논문을 펴서 그 시정을 권고하였다. 여기서도 칼빈은 성자가 ‘아우토테오스’ (스스로 하나님)임을 강조하고 본질을 셋으로, 즉 세 위격과 세 본질로 증식시키는 일을 금하도록 타일렀다. 1561년 칼빈은 「발랑띤 장띨의 불경건에 대한 해설」(Impietas Valentini Gentilis detecta)을 저술하였다. 비안드라타와의 논쟁은 칼빈의 「기독교강요」제 1권 13장 20항, “모든 이단들의 기초, 그들 모두에게 주는 경고”에서 분명하게 반영되어있고, 29항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된 논쟁에서도 반삼위일체론자들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강요」제 2권 12-17장까지 기독론을 정리하면서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를 볼 수 없다고 삼위일체론적 진술을 다시 한번 제시한다. 칼빈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보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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