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世界史/[지구촌]中國

마지막 원로정치인 장쩌민(江澤民)

好學 2009. 10. 27. 19:32

 

마지막 원로정치인 장쩌민(江澤民)



                       

출생
:
1926년생

학력 : 상하이교통대학 전기학과

경력1983년 국무원 전자공업부장, 1985년 상하이시 시장, 
         1990년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
          2004년 중앙군사위 주석직 사임

1943년부터 지하당 지도의 학생운동에 참가, 1946년 4월 중국공산당에 가입. 1947년 상해교통대학 전기과 졸업. 상해 해방 후 상해 益民식품공장 부기술자, 공무과 과장 겸 동력작업장 주임과 공장 黨지부 서기, 제1부공장장, 상해비누제조공장 제1부공장장, 1기계부 상해 제2설계분국 전기전업과 과장 등을 역임.


1955년 소련 모스크바 스탈린 자동차공장에 부임하여 실습. 1956년 귀국 후 長春제1자동차공장 동력처 부처장, 부총동력사, 동력분공장 공장장 등을 역임. 1962 1기계부 상해전기과학연구소 부소장, 1기계부 武漢熱工기계연구소 소장과 당위원회 서기를 대리하였으며, 1기계부 외사국 부국장과 국장을 역임. 1980 국가수출관리위원회, 국가외국투자관리위원회 부주임 비서장과 당임원을 역임. 1982 전자공업부 1부부장과 당조직위의 부서기, 부장, 서기를 역임.


1985
상해시 시장과 중공상해시위원회 부서기, 서기를 역임하고, 1982 9 중국공산당 12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공중앙위원으로 당선, 1987 11 중국공산당 131중전체회의에서 중공중앙정치국위원으로 당선. 1989 6 중공134중전회에서 중공중앙위원회상임위원, 중공중앙위원회 총서기에 당선. 1989 11 중공135중전회에서 중공중앙군사위원회주석에 1990 3 7회전국인민대표대회제3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당선. 1992 10 중공14 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위원, 상임위원, 중앙위원회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주석에 당선. 1993 3 8회전국인대제1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중화인민공화국중앙군사위원회주석에 당선.


1997
9 중공15 1중전회에서 중공중앙정치국위원, 상임위원, 중앙위원회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주석에 당선. 1998 3 9회전국인대1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중화인민공화국중앙군사위원회주석에 당선.

강택민은 89년 5월 조자양(趙紫陽)이 천안문사태로 실각하면서 권력 핵심부에 등장했다. 등에 의해 『경험과 성과는 부족하지만 개혁을 단행한다는 인상을 인민들에게 확실히 줄 수 있는 놀랄만한 신인』으로 전격 발탁돼 「제3세대 영도핵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강택민은 1920년 강소성 양주 출신. 전 국가주석 이선념(李先念)과 함께 혁명운동을 한 숙부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 43년 상해 교통대학에 입학, 지하활동에 참가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55년 소련에 유학, 스탈린자동차공장에서 1년간 공부하고 돌아와 장춘시 제1자동차공장에서 동력처 부처장을 맡았다. 문화혁명 초기 한직으로 밀려났다가 74년 제1기계공업부 외사부국장으로 복귀하며 순조로운 승진을 거듭했다.


82년 이래 전자공업부 부부장과 부장을 지냈다. 86년 상해시장을 거쳐 시 당서기를 맡고 있던 89년 천안문사태를 맞았다. 그는 이때 시장과 함께 천안문사태의 불길이 상해로 확산되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은 공적과 상해시의 경영 성과를 인정받아 당중앙에 진출, 등소평에게 발탁된 것이다.  발탁 당시 강은 기계공업부장, 상해시장 등을 지낸 테크노크라트라는 인상이 강했다. 그러나 92년 등이 남순강화 (南巡講話)로 개혁의 가속화를 암시하고, 그해 가을 군부의 거물이었던 양상곤 (楊尙昆) 양백빙 (楊白氷) 형제 등 군부내의 잠재적인 저항세력을 퇴진시킨 것을 기화로 강의 역량을 강화해주었다.


이른바 「상해방」으로 불리는 인사들이 대거 중앙에 진출한 것도 이때였다. 강의 후임으로 상해시장을 맡았던 주용기(朱鎔基)부총리, 역시 상해시장을 거쳐 올라온 오방국 (吳邦國)부총리, 그리고 89년 강이 상경하면서 데리고온 회경홍 (曾慶紅) 중앙판공실주임, 그리고 정관근 (丁關根) 당선전부장 등이 이른바 상해방을 이루는 주요 인물들.  이들 모두 강의 강력한 후원아래 중앙에서 요직을 차지했다.

「三個代表論」

3개 대표론은 중국공산당은 △선진사회 생산력(사영기업가) △선진문화 발전(지식인) △광대한 인민(노동자와 농민)의 근본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것으로, 노동자와 농민의 적이었던 자본가와 지식인을 품안에 끌어들이겠다는 내용으로 중국공산당을 유럽식 사회민주당 또는 국민정당을 지향하는 정치개혁의 맹아(萌芽)가 내포돼 있다.

1) 선진생산력 발전요구:『3개 대표론』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선진생산력 발전요구이다. 선진생산력은 바로 물질적 부와 정신적 부를 형성한다. 따라서 당은 생산력의 해방과 발전을 추진하여 인민의 생활수준을 부단히 향상시켜 인민의 근본이익을 대표해야 한다. 이러한 생산력발전의 추진을 위해 경제건설의 중심과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2) 선진문화 발전요구: 선진문화 발전요구는 사회주의 정신문명건설을 강화하는 지도 사상이다. 선진문화는 인류 문명의 진보적인 결정체로 정신적인 동력과 지력·기술의 총체이다. 또한 선진문화는 건설적이며, 과학적이며, 미래지향적이며, 사회 전진적인 문화를 향상시킨다. 이러한 선진문화 발전을 위해 선진적인 사상도덕문화와 과학기술문화가 요구된다.

3) 광대한 인민의 근본이익: 선진생산력 발전요구, 선진문화 전진방향은 광대한 인민의 근본이익과 서로 친밀한 관계에 있다. 그 중『3개 대표론』을 관통하는 것은 인민의 광대한 이익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민대중의 물질적인 생활수준을 계속해서 향상시키고, 인민에 대한 복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3개대표론은 표현을 바꾸어 말하면 중국공산당은 공산당의 교리나 강령에 묶여 중국의 국가로서의 선진화나 다양한 선진문화유입에 결코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중국공산당은 노농계급의 이익만을 반영하는 당에 머물지 않고 중국선진화에 이바지한 민간 기업가들에게 당의 문호를 개방하는 당, 즉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이익대변의 저변을 확대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그것이 공론화되면서 공산당 내 보수파에서 적잖은 반발을 불러 일으켰는데 우선 당내 보수파 거두인 화구어펑(華國峰)은 당의 변질에 격분, 공산당 탈당을 선언했고 같은 보수파의 덩리쥔(鄧力群)도 강력 반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장쩌민은 그의 유명한 “위스쥐진”(與時俱進), 즉 시대의 흐름에 앞서지도, 뒤지지도 말고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나가야 당이 산다면서 3개 대표론에 대한 당내지지를 호소했고 마침내 작년 제16차 당 대회는 중국공산당의 당 이론인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뚱주의, 덩샤오핑 이론과 더불어 장쩌민의 3개대표론을 당 이론의 하나로 채택하였다.

3개 대표론은 지금까지 공산당이 무산계급이라는 특정계급의 이익을 대표해 온 기존의 성격에서 탈피하여 자본가를 포함한 광범위한 계급과 계층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정치적으론 앞으로도 공산당의 일당독재가 계속되겠지만 경제적으로는 성장의 엔진인 민간 기업인, 자영업자, 전문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식 사회주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려고 하는 중국의 의도를 엿볼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론 대만과의 이념적 갈등을 다소 완화시켜 양안 관계 개선에 일조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중국 정부가 대만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긴 하지만 대만과의 다른 그들의 체제속에서 발생하는 이념적 갈등속에서 점점 변화해나가는 모습은 분명 양안관계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국가의 최고의 자리에 앉아 권력은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에 의해 주어지는 권위는 총구나 공식적 지위에 의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강택민이 명실상부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긴 했지만 과거 모택동 등소평과 같은 그런 권위는 없었다 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때문에 고심하고 이를 얻기위한 방법으로 "3개 대표론"이 나왔다고 본다면 어느 정도는 사상적 지도자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고 여겨지지만 이것은 여전히 후진타오 및 차기 중국을 이끌어 갈 세대들에게 큰 숙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