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世界史/[지구촌]中國

중국 근대민주혁명의 선구자 - 손문(孫文)

好學 2009. 10. 27. 19:26

 

중국 근대민주혁명의 선구자 - 손문(孫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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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쑨원의 생애

1) 출생

손문(孫文: 쑨원, 1866~1925)은 중국 근대민주혁명의 선구자이다. 이름은 문(文), 자는 덕명(德明), 호는 일신(日新) 또는 일선(逸仙)이다. 일본에서 혁명활동을 할 때 이름을 중산(中山)으로 바꾸었다. 광동성 향산(香山: 지금의 중산시<中山市>) 취형촌(翠亨村) 출신이다.

2) 히와이로 이주

광서(光緖) 5년(1879) 손문은 어머니를 따라 호놀룰루(Honolulu)로 갔다. 당시에 그곳의 화교 자본가였던 큰형 손미(孫眉)의 도움으로 손문은 호놀룰루, 광주(廣州), 홍콩 등지를 오가며 서양식 근대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1883~1885년의 중프전쟁은 손문에게 민족의 위기를 구해야 한다는 애국적 정열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청나라 정부의 부패와 무능함을 목도하면서 반청사상(反淸思想)과 자산계급 정치 방안으로 중국을 개혁하겠다는 사상을 싹틔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자주 반청 관련 언론을 발표하면서 초기의 개량주의자 하계(何啓), 정관응(鄭觀應) 등과 교류를 가졌던 것이다.

3) 서의서원졸업

1892년 손문은 홍콩 서의서원(西醫書院)을 졸업한 후, 마카오, 광주 등지에서 의사 생활을 하다가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혁명단체 창설을 준비하였다.

4) 이홍장과의 서신

1894년 손문은 이홍장(李鴻章)에게 편지를 보내 "사람은 그 재능을 다할 수 있어야 하고, 토지는 그 이익을 다할 수 있어야 하며, 물건은 그 쓰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하고, 재화는 그 흐름이 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개혁적인 주장을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 흥중회 조직

1894년 11월, 손문은 상해(上海)에서 호놀룰루로 가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고, "만주족 축출, 중국 회복, 연합정부 건설"을 강령으로 삼았다.

6) 홍콩 흥중회 창설

1895년 2월, 홍콩흥중회를 창설하였다. 같은 해 10월, 흥중회는 광주에서 봉기를 모의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손문은 해외로 망명하였다.

7) 청나라 공사관 체포

1896년 10월, 영국 런던에서 청나라 공사관에 체포되었으나 영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 후 손문은 구미 각국의 정치 경제 상황과 많은 유파의 정치학설을 연구하고, 구미 각국의 진보적 인사들과도 접촉을 가지면서 그의 독창적인 민생주의(民生主義) 이론을 완성하였다. 여기에서 삼민주의(三民主義) 사상의 기초가 형성되었다.

8) 도일

1897년 손문은 영국에서 캐나다를 거쳐 일본으로 가서 정부와 재야 인사들과 교분을 맺었다. 무술변법(戊戌變法) 이후 일본의 우호적인 인사들의 활동으로 손문은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를 대표로 하는 개량파와 합작문제를 논의하였지만, 개량파가 황제체제를 견지하고 혁명을 반대함으로써 합작은 실현되지 못했다.

9)  본격적인 혁명 시작

1904년 손문은 일본, 호놀룰루, 베트남, 사이암(지금의 태국), 미국 등지에서 화교와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혁명을 선전하였다. 1905년에는 필리핀, 독일, 프랑스 등지의 유학생들 속에서 혁명단체를 조직하고, 이 시기에 국내의 혁명단체, 혁명지사들과도 관계를 맺었다.

10) 일본 동경 -  동맹회 창설

1905년 8월, 손문은 황흥(黃興) 등과 함께 흥중회, 화흥회(華興會) 등의 혁명단체를 기반으로 일본 동경에서 동맹회(同盟會)를 창건하였다. 여기에서 손문은 총리에 추대되었으며, 그가 제기한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민국 창립, 토지 소유의 균등"이 동맹회의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民報)≫ 발간사에서 손문은 제일 먼저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의 3대주의를 발표하였다. 동맹회의 성립은 전국 혁명운동의 발전을 강력하게 촉진시켰다. 그는 국내외 각지로 사람들을 파견하여 조직을 발전시키고 혁명을 선전하였다. 그 자신도 직접 화교들에게 홍보하면서 모금 활동을 벌였으며, 그 결과 몇몇 지역에서 동맹회의 지부가 창설되기도 하였다. 손문은 중국 혁명민주파의 선봉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주도한 개량파 비판은 신해혁명(辛亥革命)의 강력한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11) 동맹회 주축으로 무장봉기

1906~1911년, 동맹회는 화남(華南) 각지에서 여러 차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손문은 그러한 봉기에 전략 방침을 제공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분주하게 다니면서 봉기를 위한 모금활동을 벌였다. 비록 이들 봉기는 대중적 기반이 부족하고 조직도 치밀하지 못하여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혁명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청나라 정부에 많은 타격을 입혔다. 특히 1911년 4월 27일의 광주 황화강(黃花岡) 사건은 중국 전역을 크게 뒤흔들었다.

12) 임시 대총통 추대됨

1911년 10월 10일, 무창봉기를 기점으로 전국 각지에서 이에 호응하는 봉기가 잇달아 일어났다. 손문은 미국에서 이 소식을 접한 후 12월 하순에 중국으로 돌아와 17개 성 대표자들에 의해 임시 대총통에 추대되었다. 1912년 1월 1일, 남경(南京)에서 임시 대총통 취임을 선포하고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하였다. 1912년 2월 12일, 청왕조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 부의(溥儀)는 강제 퇴위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2000여년에 걸친 군주전제 제도를 종식시키고 공화국을 건설하였다. 3월 11일, 손문은 <중화민국임시약법(中華民國臨時約法)>을 반포하였다.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강대한 압력과 혁명당 내부의 갈등으로 인하여 손문은 1912년 2월 13일 임시 대총통직을 원세개(袁世凱)에게 양위하였으며, 4월 1일 공식으로 해임되었다. 그 후 1여년간 손문은 민생주의를 적극적으로 선전하였지만, 정권이 원세개의 수중으로 떨어진 뒤인지라 이러한 손문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13) 재차 도일

1912년 8월, 동맹회는 국민당을 개편하여 손문을 이사장(理事長)으로 추대하였다. 1913년 3월, 원세개가 국민당 대리 이사장 송교인(宋敎仁)을 암살하자, 손문은 무력으로 원세개를 타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7월에 2차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1914년 6월, 손문은 동경에서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조직하였다. 1915년 5월초에 중국으로 돌아가서 공화정 체제 수호를 위한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으로 되돌아가서 10월 25일 동경에서 송경령(宋慶齡)과 결혼하였다.

14) 광주에서 군사정부 건립

1917년 7월, 단기서(段祺瑞)의 북양군벌(北洋軍閥)이 국회를 해산시키고 <임시약법>을 폐기하자, 손문은 서남군벌(西南軍閥)과 연합하여 광주에서 군사정부를 세웠다. 9월에 대원수(大元帥)에 추대되어 <임시약법>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손문은 군사정부 내에서도 군벌과 정치인들의 배척을 받아 1918년 5월 어쩔 수 없이 대원수직을 사임하고 일본을 거쳐 상해로 갔다.

15) 러시아와의 교류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이 성공하자 손문은 1918년 여름에 레닌과 소비에트정부에 축전을 보냈다. 1919년의 5.4운동은 그를 크게 고무시켰다. 손문은 1920년부터 소련 인사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여, 1921년 12월에 계림(桂林)에서 코민테른(komintern) 대표 마링(Maring)을 접견하였다. 1922년 4월, 다시 광주에서 소련의 전권 대표와 회견을 가졌다.
16) 중국국민당 개편

1919년 10월,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편하였다. 1920년 8월, 손문은 복건성과 광동성 주둔군에 회군을 명령하여 광동에서 계계군벌(桂系軍閥)을 축출하였다. 11월 손문은 광주로 돌아가서 다시 <임시약법> 수호의 기치를 들었다.

17)  비상국회의 비상 대총통 취임

1921년 5월, 광주에서 비상국회의 추대로 비상 대총통에 취임하였다. 계속하여 육영정(陸榮廷)의 세력을 소멸시킨 다음, 광동과 광서를 근거지로 삼고 북벌을 준비하였다. 광동군의 지휘권을 장악한 진형명(陳炯明)이 1922년 6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손문은 위험에서 벗어난 후 해군을 이끌고 반란군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였지만, 다른 부대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하는 수 없이 광주를 떠나 상해로 갔다. 진형명의 반란은 손문을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뜨렸다. 이에 손문은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의 도움을 받기로 결심하고, 이대교(李大钊) 등 공산당 인사들을 개인 자격으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도록 하였다.

18) 손문 요페 선언 발표

1923년 1월, 소련 대표 요페(Joffe)와 <손문 요페 선언>을 발표하여 러시아와의 연합을 위한 정책적 기초를 다지고, 즉시 요중개(廖仲凱)를 일본에 파견하여 요페와 협상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1923년 2월, 손문은 상해에서 광주로 돌아가 다시 육해군 최고사령부를 창건하고, 대원수의 이름으로 전군을 통솔하고 정무를 총괄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서히 중국국민당 개편 준비 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8월에 장개석(蔣介石)을 중심으로 하는 '손문박사 대표단(孫逸仙博士代表團)'을 소련으로 파견하여 정치와 당무, 군사를 시찰하게 하였다. 10월 소련에서 파견된 보로딘(Borodin)을 고문으로 초빙하였다. 계속하여 요중개, 담평산(譚平山) 등으로 구성된 새로운 중국국민당 임시 중앙집행위원회에 국민당의 개편 작업을 책임지고 준비토록 위임하였다.

19)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소집

1924년 1월, 손문의 주관으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광주에서 소집되었다. 여기에서 새로운 당의 강령과 헌장을 제정하여, 사실상 "러시아와의 연합, 공산당과의 연합, 노동자 농민에 대한 원조"라는 3대정책을 확립하고, 중국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 통치 기구를 구성하였다. 이 대회에서 통과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에서 손문은 삼민주의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리고 반제 반봉건적인 내용을 보충하였다.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의 소집은 손문의 혁명사상과 혁명사업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20) 육군군관학교 창설

1924년 5월, 손문은 광주 황포(黃埔) 장주도(長州島)에서 육군군관학교를 창설하고 혁명군대의 설립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21) 간암으로 북경에서 사망

이러한 일련의 혁명투쟁을 거치면서 손문은 제국주의의 타도만이 중국의 독립과 부강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1923년 12월, 광동 혁명정부가 의화단사건 때의 광동 세관의 배상금을 억류하고 세관의 주권 회복을 요구하자 서양 열강들은 대규모 군함을 광주 앞바다에 집결시켜 손문에 대한 위협을 가했다. 의화단사건 때의 배상금 문제에 대한 손문의 입장은 단호하여, 1924년 5월에 서양 열강들에게 광동정부가 받아야 할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요구하였다. 1924년 10월, 손문은 광주 상인단체가 일으킨 무장반란을 진압하였다. 1924년 10월, 봉계군벌(奉系軍閥)의 사령관 장작림(張作霖)과 직계군벌(直系軍閥)의 장성 풍옥상(馮玉祥)이 연합하여 조곤(曹锟)이 사령관으로 있는 직계군벌 정부를 전복시켰다. 풍옥상, 단기서, 장작림은 손문에게 전보를 보내 국정을 함께 논의할 것을 요청하였다. 손문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11월에 광주를 떠나 북으로 갔다. 12월 말 병을 무릅쓰고 북경에 도착하였으나, 1925년 3월 12일, 간암으로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2. 쑨원(손문) 평가

1) 역사적 의미

손문은 중국의 위대한 민주혁명의 선구자이며, 중국을 개혁하기 위하여 일생동안 모든 정력을 다 쏟았다. 그는 중국 역사상 불후의 공적을 세웠으며, 정치적으로도 중국인들에게 소중한 유산을 남겨주었다.

그의 주요 저작은 ≪건국방략(建國方略)≫, ≪건국대강(建國大岡)≫, ≪삼민주의(三民主義)≫ 등이 있다. 그의 저술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전집으로 여러 차례 출판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1986년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출판된 ≪손중산전집(孫中山全集)≫(11卷本), 대북(臺北)에서 출판된 ≪국부전집(國父全集)≫ 등이 있다.


2) 손문의 유언

손문은 1925년 3월 12일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에 세 개의 유서에 서명하였는데, 그것은 <국사에 대한 유언(國事遺囑)>과 <가사에 대한 유언(家事遺囑)>, <소련에 보내는 유서(致蘇俄遺書)>이다.

그 중 국사에 대한 유언에서 그는 40년에 걸친 혁명 경험을 총결하여, "반드시 민중들을 일깨워서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연합하여 함께 분투합시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혁명은 아직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니, 동지들은 계속 더 노력해야 하오."라고 호소함으로써, 그의 혁명주장과 혁명주의가 실현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의 가사유언에서는 서적과 옷, 일상용품, 주택 등을 송경령에게 기념으로 물려준다 하고, 자녀들에게는 그의 혁명 유지를 계승할 것을 요구했다.

소련에 보내는 유서에서는 3대 혁명정책을 실행하면서 견지하였던 반제 애국사업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을 천명하고, 세계 피압박 민족의 자유 쟁취 전쟁에서 중소 양국이 함께 협력하여 승리를 거두자는 소망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또 손문은 아내 송경령에게 자기 대신 소련을 방문하여 그가 생전에 이루지 못했던 염원을 실현시켜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손문의 유언에는 그의 반제 애국과 3대정책 견지라는 혁명정신이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