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世界史/[지구촌]中國

덩샤오핑 (鄧小平)과 중국의 개혁개방

好學 2009. 10. 27. 19:31

 

덩샤오핑 (鄧小平)과 중국의 개혁개방






















덩샤오핑의 연대기

출생/사망
:
1904년 08월 22일 / 1997년 2월

학력 : 고급중학, 모스크바 중산대학

경력 : 톈안먼사건 무력 진압(1989), 공산당 중앙군사위 주석(1981),
         국무원 부총리(1973), 중앙위원회 총서기(1956),
         정치국 위원(1955), 중앙인민정부 위원(1949),
         중국 공산당 입당(1924)

출생지 : 중국 사천성
◇1920년 `근공검학'으로 프랑스에 유학.

◇24년 중국공산당 유럽지부에 입당.

◇26년 소련의 동방대학 및 중산대학에 유학.

◇27년 모스크바에서 귀국해 국민당파 군벌 평위시앙 휘하에 들어감.
   국공합작 파기 뒤 베이징을 탈출해 광시에서 지하활동. 이때부터 본명인
  `부솅' 대신 `샤오핑'이란 가명 쓰기 시작.

◇29년 광시성에서 농민폭동 주도, 홍군 제7·8군 창설.

◇1931년 마오쩌둥의 홍군 제1군단에 합류, 홍군 총정치부 부주임 및 장시
   소비에트구 현위원회 서기 겸 기관지 <홍성보> 총편집인에 취임.

◇33년 `마오 일파'로 몰려 실각.

◇34~36년 `대장정' 참가, 당 중앙비서장에 선임.

◇37년 8로군 129사단 정치위원.

◇1949년 양쯔강 도하해 국민당 정부수도 난징 공략, `제2야전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 쓰촨·구이저우·윈난·시짱(티베트) 함락.

◇1952년 정무원 부총리 및 국가계획위원회 위원.

◇54년 부총리 겸 국방위원회 부주석에 피선.

◇56년 당 8기 8중전회 1차회의에서 당정치국 상임위원 겸 주앙위 총서기
   에 선출돼 집단지도체제의 핵심대열에 합류.

◇1967년 모든 공직에서 파면.(1차실각) ◇68년 장시성으로 추방. (2차실각) ◇1973년 국무원 부총리에 복귀.

◇75년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겸임.

◇76년 저우언라이 총리 추모인파로 빚어진 `천안문사건'의 책임자로 몰려
   직무박탈.(3차실각) ◇77년 당10기 3중전회에서 부총리·인민해방군 총참
   모장직 등 회복.

◇1981년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취임. 완전한 실권장악.

◇83년 6기전인대 1차회의에서 신걸된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

◇89년 `천안문 사태' 유혈진압.

◇1990년 7기 전안대 3차회의에서 국가중앙군사위 주석직 사임함으로써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남.

◇91년말~92년 2월 `남순강화' 통해 개혁·개방 촉구.

◇97년 2월19일 사망.



덩 샤오핑(鄧小平)의 일생

13억 중국 대륙을 개혁과 개방의 길로 이끈 덩샤오핑(93)의 생애는 `부도옹'(오뚝이)라는 그의 별명처럼 좌절과 재기가 반복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1904년 쓰촨성 파이팡 마을의 부유한 객가 집안에 태어난 덩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파리 유학생활이었다. 1920년 16살의 나이에 당시 근로장학제도인 `근공검학'을 통해 프랑스에 유학한 그는 파리에서 직공으로 어려운 고학생활을 하며 훗날 중국 총리에 오른 저우언라이 등 `근공검학' 출신 유학생들과 인연을 맺었다. 이들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은 그는 1922년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한 데 이어 2년 뒤에는 중국공산당 유럽지부에 입당함으로써 정식 당원이 된다.


덩은 이어 아시아지역 청년 공산당원들의 훈련소였던 모스크바의 중산대학과 동방대학 유학생으로 선발됐다.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 국공합작이 이뤄졌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동급생 가운데는 훗날 초대 대만총통이 된 장졔스의 아들 장징궈와 베이징 지역을 지배하던 군벌 펑위시앙의 아들 펑퍼눙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개월에 걸친 정치·군사 교육을 받은 덩은 중국공산당의 국공합작 노선에 따라 펑위시앙의 자문역으로 파견됨으로써 중국혁명에 첫 발을 내딛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본명인 `부셴'을 버리고 `샤오핑'이란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졔스의 정변으로 국공합작이 파기되면서 신변위협속에 구사일생으로 베이징을 탈출한 덩은 1929년 남서부 광시 지방에서 봉기를 주도하면서 인민해방군의 뿌리 중 하나인 홍군 제7군과 8군을 조직했다. 그뒤 국민당 정부군에 밀려 장시성으로 쫓겨간 그는 저 유명한 `징강산 근거지'에 합류해 마오쩌둥과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서 홍군 총부주임이란 요직에 오른 덩은 난산 끝에 사망한 첫번째 아내에 이어 동료당원인 진웨이잉을 두번째 아내로 맞았으나, 농촌을 근거지로 삼자는 마오의 노선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당중앙으로부터 숙청당했다. 마오는 이때를 잊지 못한 나머지 문화대혁명 기간중 덩을 숙청하면서도 공산당원으로서 그의 당적만은 빼앗지 않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정치경력 중 최초의 숙청을 맛본 그는 독방에 연금당한 가운데 자신을 숙청한 장본인인 당 조직국 비서 뤄마이에게 아내를 빼앗기는 아픔까지 겪었다. 뤄와 재혼한 덩의 전 부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리톄잉은 97년 현재 정치국내에서 국영기업을 담당하는 요직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금에서 풀려나 평당원으로 백의종군한 덩을 다시 일선으로 복직시킨 것은 대장정 기간중 벌어진 쭌이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은 국민당 토벌군에 대한 군사적 패배 책임을 물어 당지도부를 축출하고 공산당의 지도권을 잡게 됨에 따라 덩은 35년 1월 당 중앙비서장에 선임됐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덩은 8로군 129사단 정치위원으로 임명돼 사단장인 류바이청과 함께 눈부신 군사적 활약을 펼치면서 1940년 지금의 부인인 푸줘린을 만났다. `유덩 대군'이란 별명까지 얻은 이 군대는 2차대전 이후 국민당 정부군과의 내전에서도 `제2야전군'으로 확대개편된 뒤 맹활약하면서 쓰촨·윈난·구이저우·시짱(티베트) 4성을 함락시켰다. 화려한 전적으로 정치적 발판을 굳힌 그는 54년 국무원 부총리 및 국방위원회 부주석에 올랐다. 당시 총리는 저우언라이였고 국방위원회 주석은 마오쩌둥이었다.


부총리로 경제정책에 참여한 그는 일찌기 50~60년대부터 `대약진운동' 등 무모한 집산화를 시도한 마오의 정책을 거침없이 비판하곤 했다. 한 주요회의에서 마오가 “반대자는 기립하라”고 해 덩이 일어서자 “덩 동지는 키가 작아 앉은키와 같으므로 안건을 만장일치 통과시키겠다”고 했을 때, 덩이 책상을 딛고 올라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덩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지 1년 만인 67년 당시 국가주석인 류샤오치와 함께 `주자파'(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당권파)로 몰려 실각당했으며, 이때 그의 아들은 호위병으로부터 린치를 받아 불구자가 되고 말았다.


덩은 이때의 경험 때문에 전후세대인 청년이나 대학생들과 집단행동에 극도의 불신감을 갖게 됐으며, 지난 88년 천안문 사태 당시의 강경진압도 이때의 영향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고양이가 검든 희든 무슨 상관인가,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지."
중국 개혁ㆍ개방의 총설계사로 중국의 오늘을 있게한 덩샤오핑(鄧小平)의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에는 중국식 시장경제의 탄생을 잉태한 철학이 담겨있다.

투철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과감한 실용주의자였던 덩샤오핑은 1979년 미국 방문을 마친 뒤 "중국을 발전시키는 데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건 공산주의 경제체제건 관계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바로 흑묘백묘론의 깃발을 치켜든 것이다.



`선부론(先富論:부유할 수있는 사람부터 부유해져라)'과 함께 오늘날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중국을 있게한 흑묘백묘론은 원래 쓰촨(四川)지방의 속담인 `흑묘황묘(黑猫黃猫)'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공산혁명 성공 이후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덩샤오핑의 운명은 `흑묘백묘'와 함께 했다. 그는 1960년대초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류샤오치(劉少奇)와 함께 흑묘백묘를 거론하며 실용주의적 노선을 제시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된 문화혁명으로 인해 흑묘백묘는 실현되지 못하고, 덩샤오핑도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숙청을 당하게 된다. 이후 홍위병이 설치던 광풍 속에서 덩샤오핑은 남부 장시(江西)성에 있는 트랙터 수리공장으로 하방(下放)되는 시련의 시절을 보내야했다.

하지만 `오뚝이(不倒翁)'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사망 이후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새로운 중국의 미래를 다시 흑묘백묘론에 담아 설파했다.

덩샤오핑은 1987년 2월 중앙부서 책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왜 시장을 말하면 자본주의이고, 계획을 말하면 사회주의가 되는가. 계획과 시장은 모두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 단지 경제 발전을 위해서 좋다면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계획, 시장 이런 것들을 사회주의에 이용하면 사회주의인 것이고, 자본주의를 위해 이용하면 자본주의인 것이다"
흑묘백묘론에는 철저한 정경분리 원칙이 담겨있다. 다시 말해 정치와 경제체제를 분리한 채 경제분야에만 실리원칙을 적용한다는 것. 정치체제는 공산주의를 유지하고 경제분야에만 시장경제를 도입한 이른바 중국식 시장경제체제가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셈이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중국식 사회주의(혹은 자본주의)는 공산당의 철저한 계획과 배려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안전장치가 확실하게 마련된 개혁이라는 점에서 동유럽의 그것과 근본부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덩샤오핑은 1985년 8월 핵심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의 원칙은 마르크스주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중국만의 독특한 길을 가자는 것이고, 우리는 이것을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이라고 한다."
사회주의 중국 인민들에게 "부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실리적(또는 자본주의적) 인식을 심어준 그가 여전히 `죽은 뒤에도 중국을 통치한다'고 얘기되는 것은 현재의 중국이 그의 설계도면대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등소평의 개혁과 개방정책

 

 1. 개혁정책

  (1) 정치개혁

  중국과 같은 일당독재하에 있는 사회주의국가에서는 필연적으로 경제관계는 정치관계와 밀착되어 있다. 생산수단이 공유화되어 개인경영이 한정되어 있는 중국의 상황에서 모든 경제활동은 정치적인 측면 즉, 당에 종속될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당이 경제정책의 계획, 결정 및 집행에 대한 판정권과 해석권을 갖는다. 따라서 당정제도에 대한 개혁은 등소평체제가 추진하는 실용주의적 경제개혁정책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1) 경제개혁을 위한 당·정개혁의 필요성

 

  등소평체제가 수립된후 계급투쟁과 혁명정신을 강조했던 모택동시대와는 달리 당지도부가 4개현대화와 경제발전이 당과 국가의 최대의 과제라 선언하면서 과거의 좌파적 이데올로기와 정책에 대해서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고 있다. 1978년 12월에 개최된 당 제 11기 3중전회는 현정권이 화국봉 계열의 범시파로부터 권력을 장악한 회의이며, 이후 등소평체제가 시행하고 있는 모든 정책의 기본적 구상이 결정된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전당 공작의 중점을 1979년부터 사회주의 현대화건설로 전환한다" 고 밝히고, "4개 현대화를 실현하려면 생산력을 대규모로 제고시켜야 하며 또 필연적으로 많은 분야에서 생산력의 발전에 적응하지 않는 생산관계와 상부구조를 변경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이것은 광범위하고도 심각한 하나의 혁명이다"라고 표명하였다. 이는 등소평이 기존의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한 사실을 전제로, 생산력의 증대를 목표로 한 생산관계의 조정과 국가제도의 변경을 지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과 국가제도의 개편과 같은 당·정제도의 개혁이야 말로 새로운 실용주의적 경제개혁을 실현하는데 필요 불가결한 요소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등소평의 혁명적인 당·정제도의 개혁은 다음과 같은 필요성의 인식을 바탕으로 추진하였다. 첫째로, 뿌리깊은 좌파세력을 제거하고 개혁 지지세력을 확충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로, 간부의 노화와 우화문제가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추진하는데 장애요소로 되고 있기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은 전문적인 계층이 간부로 성장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셋째로, 사회주의정치제도와 간부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로 권력의 집중현상과 관료주의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즉, 등소평체제는 모택동시대와는 다른관점에서 관료주의적 폐단을 시정하고, 당과 국가기구의 합리화를 강조하면서 사회주의 민주화를 제도적으로 확립하고, 이로인한 간부의 세대교체를 실시하여 4개현대화와 경제발전을 이룩하려는 것이다.

 

   2) 간부의 4화 정책과 테크노크라트의 충원

  

  등소평체제는 새로운 체제의 확립과 경제발전을 추진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테크노크라트의 충원이 필요하였다. 그를 위해서는 간부들의 노령화, 지식과 전문기술의 부족 및 사상적 분파성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등소평체제는 새로운 간부충원정책을 실시하였는데 그 기본방향은 ①연경화(연소화), ②지식화, ③전업화(전문화), ④혁명화로 귀착되며 이것이 간부의 '4화정책'인 것이다. 등소평은 간부의 선발에는 반드시 그가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있는지를 주의해야하며, 비록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더라도 재능과 학문이 없다면, 4개현대화는 달성할수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紅과 專의 관계에 대하여도 專은 결코 紅과 같지는 않으나 紅은 반드시 專해야 하며 어느 한 분야에 종사하더라도 전문적이 아니고 일을 모르면 그릇되게 지휘하여 인민의 이익을 해치고 생산관계의 발전을 지연시킨다고 하면서 전업화를 강조했다.

  1982년 9월 당 제12기 전대회는 등소평체제가 실용주의체제 수립을 위하여 추진해 온 간부의 4화정책이 구체적으로 표명되는 계기가 되었다. 즉, 고위간부의 퇴진을 위한 자문위원회를 중앙과 성급단위에 설치하여 하부단위에서부터 점차 기술간부를 임용하여 이것을 상부단위까지 파급하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간부의 연소화와 전문화를 위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의사, 작가, 음악가, 과학자, 교육자 등이 중앙위원으로 선출된 것은 이번 대회가 처음이며, 11전대회에서 선출된 노동자, 농민, 군경대표 중 90% 이상이 제거되고 대신 대부분 젊고 유능한 간부로 대치되었다.

  그 뒤 계속적으로 이러한 정책이 강력하게 실시되었다. 특히 1985년 제 12기 5중전회에서는 새로운 정치국 중앙위원 64명(중앙위원 29명, 후보위원 35명)이 임명되었는데 그들의 평균연령이 50.1세로 나타나 연경화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는 점과 대학, 전문학교 정도의 학력소지자가 3분의 2 (48명)를 차지함으로써 지식화와 전업화도 강력하게 추진되었음을 알수 있다.

 

   3) 당정기구의 개편

 

  1982년 9월 당 제 12기 전대회와 11월 제 5기 전인대는 등소평, 호요방, 조자양체제의 구축에 정통성을 부여하기위한 당 및 정부의 정치적 행사였으며, 이에 따라 기구개편도 단행되었다. 모택동의 제도개혁이 조직간의 기능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음에 반하여 등소평체제의 그것은 조직간의 기능을 분화하고 개인의 독단과 대중의 직접적인 참여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기구개편에 관하여 12전대회에서 통과된 '당장정(黨章程)'을 중심으로 하여 집단지도체제의 확립, 당정기능의 분리, 간부의 연경화등의 측면에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집단지도체제의 확립이다. 등소평체제는 37년간 지속해 왔던 당주석제를 폐지하고 당총서기제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문화혁명때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던 당서기가 1980년 2월 제 11기 5중전회에서 부활되어 당·정·군간의 주요 정책협의를 담당하게 되었다. 총서기는 당주석과 달리 중앙정치국회의와 그 상무위원회 회의의 소집만을 책임지며 이 회의들의 다른 구성원보다 큰 영향역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당주석제를 없애고 당서기를 부활한 것은 의사결정과 지도면에서의 권력분산과 집단지도체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당·정 기능의 분리이다. 1967년 문화혁명때 설치되어 1979년까지 당의 기능과 지방정부의 기능을 겸해온 혁명위원회를 폐지하고 지방인민정부와 인민대회상무위원회가 부활되었다. 이러한 개편은 1979년 6월 제5기 전인대 2차회의에서 이에 관한 법령이 공포됨에 따라 이루어졌는데, 당시 당무위의 법제위원의 주임이었던 팽진은 보고에서 "혁명위원회가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혁명위원회는 지방정부와 성장, 시장, 자치구 주석 및 현장에 의하여 대표된다고 하였다. 이에따라 지방조직은 당과 정부의 2원화가 되었고, 지방수준에서 권력분담이 지방인민대회, 인민정부, 당위원회의 3자간의 분화되었다.

  그리고 1982년 12월 제5기 전인대 제 5차회의에서 새로 채택된 헌법에 따라 정부기구의 개혁이 있었는데, 가장 큰 특색은 1975년에 폐지되었던 국가주석제의 회복으로, 지도권의 다원화에 그 의도를 두었다는 면에서 의의가 크다. 그리고 중앙군사위원회를 두고 "전국의 무장력"이 이의 지배를 받도록 하였는데 국가권력이 어느 1인에게 집중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포석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또한 인민대표대회의 권한과 국무원의 기능을 강화한 것도 주용한 내용이다.

  이와같이 등소평체제는 당·정·군간의 책임을 분화하여 어느정도 권력의 분화를 시도하고 있다. 권력의 과다한 집중을 방지하기 위하여 당과 정부를 분리시키고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하면서 당은 사상교육과 영도를 맡고 정부는 정책집행을 전담하도록 개혁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2) 경제체의 개혁

-= IMAGE 1 =-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1978년 12월 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경제의 조정 및 개혁을 실시하기로 결정한 이래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위한 경제개혁조치들이 취해졌다. 이 글에서는 여려개혁조치들중 산업구조의 개혁과 경제운영기구와 제도의 개혁, 시장경제체제 도입, 소유권과 경영권의 분리등의 개혁조치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산업구조의 개혁

 

  중국은 4개현대화를 수행하는데 있어 구체적으로 경제구조의 개혁, 생산력 향상, 소비구조의 개편, 자원의 합리적인 활용, 기업단위의 기술혁신, 기술정책의 선별적 채용 및 고용창출등 경제체제 개혁을 실시해 나가고 있다. 이와 같은 정책이 구체적으로 실시된 것은 제 6차 5개년 계획기간(1981-1985)부터라고 할수 있다. 이 계획의 주요목표는 농업과 공업, 경공업과 중공업간의 균형발전을 도모하고, 자본축적과 소비사이에 합리적 비율을 유지하기 위하여 투자량을 조절하는 것이다. 우선 농업부문의 개혁에 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농업부문의 개혁은 주로 생산책임제의 확대실시와 상품생산의 확충 및 공동부유화를 위한 선 부유농민의 인정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 농업 현대화를 목표로 중국공산당 제 11기 3중전회는 중요정책을 제기하였다. 그것은 인민공사, 생산대대의 소유권 및 자유권은 국가법률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공·사 각급 경제조직은 반드시 접노분배(接勞分配)의 원칙을집행하며, 사원 자유지, 가정부업, 집시무역은 사회주의 경제의 필요 보충부분으로 누구도 간과할수 없다는 것 등이었다. 이것은 사적재산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서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상품생산 및 초보적 시장형성을 인정하여 생산력 발전을 도모하자는 정책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다음으로 공업체제의 개혁의 골간은 경영책임제를 도입하여 생산력 발전을 도모하고 국가·기업·직공 간의 이익을 제고한다는 것이다. 당시 총리 조자양이 6기 5차회의에서 행한 정부보고는 공작체제 개혁방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기업개혁을 더욱 심화시키기 위하여는 이미 규정하고 있는 기업의 권한을 견결히 보호하는 것 외에, 개혁의 중점을 기업의 경영기제 완비에 두어야 하며, 소유권과 경영권의 분리원칙에 근거해서 다종형식의 승포경영책임제를 실행하여 기업으로 하여금 상대적으로 독립된 자주경영의 경제실체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공업기업의 개혁은 소유권과 경영권의 분리를 통해, 공유제라는 사회주의의 대원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기업의 자율권 및 다종경영방식을 이용한 생산력 발전에 그 목표가 있다 하겠으며, 이는 농업체제 개혁과 동일한 목적추구라 하겠다.

 

   2) 경제운영기구와 제도의 개혁

 

  중국의 경제운영기구와 제도에 있어서의개혁은 모든 경제체제개혁 가운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며, 개혁의 목표도 대단히 중요하다. 중국은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개혁정책을 결정한 이래 당·국가와 기업, 계획과 시장간의 관계에서 시종 명확한 대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중국은 과거 장기간 전통적인 계획경제관리체제하에서 국가와 기업과의 관계를 유지해왔다.

 

   3) 시장경제체제의 도입

 

  가) 가격체제와 가격관리제도를 점진적으로 채택하는 것이 시장체제로 행하는 개혁의 핵심문제이다. 가격체제개혁의 주요한 내용을 보면, 첫 째, 가격관리기능을 지방정부와 기업에 많이 이양하는 것이고, 둘 째로 종전의 단일가격체제를 복수가격체제로 전환하는 것이며, 경제개혁 전에는 국가가 모든 상품가격을 결정하는 국가규정가격만이 있었으나, 개혁후에는 유동가격, 협의가격 및 자유시장가격 등이 나타났다. 중국은 정부의 가격통제의정도를 줄이고 시장기능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 유통체제도 시장경제체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다. 1983년 정부에서는 유통제체개혁을 실시해왔다. 우선 유통문제를 담당하는 부서를 단일화시킨 후 농민들이 시장에서 야채와 곡물을 판매할 수 있게 했고 또한 농촌의 말단 유통기구가 독자적으로 상품을 구입할 수 있게 했다. 도시의 유통체제에서도 국가나 집단이 주관하는 상업 이외에 개인이 관리할 수 있는 상업도 인정해 주었다. 특히 소매업은 임대를 통하여 개인경영으로 점차 전환시켰다.

  다) 금융제도개혁에서 많은 진전을 가져왔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 째, 중앙은행체제가 중심이 되고 여러 가지 다른 금융기관도 이에 상응하는 새로운 금융체제를 세웠으며, 둘 째, 저축의 증가, 자금의 흡수, 대출범위의 확대 등의 방법을 통하여 은행으로 하여금 자금을 모으는 중요한 통로가 되게 했으며, 셋 째, 증권시장을 세워서 자금조달을 촉진시켰으며, 넷 째, 다양한 신용방식과 기구를 통하여 결산방법을 개선하고 자금회전을 가속화시켰으며, 다섯 째, 국내보험업무를 부활시켜 경제보상제도를 세웠으며, 여섯 째, 신용대출자금공급제를 근본적으로 변경시켰고, 경제건설자금도 재정진로에서 신용통로로 전환했으며, 일곱 째, 대외금융의 왕래와 합작도 신속히 전개해 나갔으며, 여덟 째, 단순한 은행신용형성을 근본적으로 개선했고, 금융시장의 형성도 촉진했으며, 아홉 째 중앙은행은 거시적으로 그들에게 유리하게 관리해 나갔다.

 

   4) 소유권과 경영권의 분리

  

  경제체제개혁에 있어서 소유권과 경영권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1978년 7월 "국영기업의 관리체제개혁에 관한 규정"을 공포하여 기업자주권 확대에 관한 각종 조치를 취했는데, 이의 내용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통하여 노동자의 적극성과 창의력을 발휘케 하기 위한 물질적 인센티브를 준다는 것이다. 등소평체제는 경제체제개혁을 더욱 확대하기 위하여 1984년 10월 당 제12기 3중전회에서 "경제체제의 개혁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여 기업의 활성화를 중점과제로 다루었다. 개혁 기본방향은 정부와 기업의 기능을 분리하여 국가가 직접 경영하지 않고, 국가가 계획으로 통제하는 대상과 범위를 축소하며 유도적 계획을 확대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그동안 공장장이 장기계획, 연도계획, 기술개선계획, 기구변경, 부공장장의 인선 등에 있어 당위원회의 인도를 받아 왔는데, 1984년 10월의 3중전회 이래 공장장과 당위원회의 관계는 분리되어 공장장은 종업원의 승급, 장려금지급, 징계등 공장운영에 대한 전권을 이양받게 되었고 당위원회의 역할은 종업원의 사상교육에 한정되었다. 이는 중국건국 이래 기업활동의 큰 저해요인의 하나가 되었던 공장장과 당위원회간의 대립관계를 해소함으로써 중국기업의 활성화를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중국은 1986년 6월 당중앙위원회 국무원이 "전민소유제 공업기업에 관한 3가지 공작조례"를 공포하였는데, 이 조례의 규정에 의하면 당위원회 지도하의 공장장 책임제에서 전면적인 공장장 책임제로의 전환을 공식화하고 있다.

  이와같이 중국은 기업의 자주권확대를 통하여, 기업의 경영정책에 대한 소유자, 즉 국가의 개입을 감소시키고 있다. 그러나 소유자인 국가는 기본적으로 생산과정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지만, 국가의 생산수단의 소유권이 기업의 발전을 제약할 권리와 이익을 획득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권리를 국가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적소유로 인하여 발생하게 될 자본가계급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2. 개방정책

 

  중국의 개방정책은 1978년 12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 11기 3중전회가 효시가 된다. 이 회의에서 과거의 정치우선을 전면수정하고, 국가의 모든사업의 중점을 경제건설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등소평의 실용주의노선은 소련만이 유일한 모델이라는 관념을 배척하고 자국특성에 맞는 사회주의 건설의 전환을 재촉했다. 즉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건설'이다. 중국의 개혁정책은 일부지역이나 사회를 선택하여 시험적인 단계를 거친다. 맨처음 실시한 농촌개혁도 사천성의 일부 인민공사를 선택하여 집단생산책임제에서 농가생산책임제로 실시했다. 생산량이 증가하고 농가가 부유해지자 1984년 전국의 인민공사를 해체했다. 도시경제개혁도 소수의 국영기업을 선정하고 공장장 책임제를 실시하여 이윤상납제를 납세제로 고쳐 점차 국가의 간섭과 지원을 배제했다. 이 장에서 살펴볼 대외경제개방정책도 4개경제특구로부터 출발했다. 이를 바탕으로하여 이 글에서는 중국의 개방정책의전략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고 이후에 경제특구 및 개발구의 설치 및 내용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개방정책의 기본전략

 

  등소평을 중심으로하는 지도부는 경제발전을 국가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고, 빠른 경제성장을 위해 국내경제의 개혁과 대외개방을 요체로 하는 새로운 발전전략을 채택 추진해 오고 있다. 개방은 외국과의 적극적인 교류와 협력을 통해 중국이 경제발전에 필요로 하는 자본 및 기술을 도입하여 국내산업발전을 가속화하는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개혁개방 조치의 실제적 집행과 관련하여 중국은 이 모든 조치를 동시에 모든 지역 모든 부문에서 실시하는 것이 아니고, 순서를 정하여 '단계적'으로 실시해 오고 있다. 즉 특정부문과 지역에 사회적으로 실시한 다음 그 성과에 따라 대상을 확대하는 '실험후 확산' 방식을 택해오고 있다.

  중국이 새로운 전략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중요한 변화는 국가경제발전과 관련하여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지역이 이전의 내륙지방에서 연안지역으로 바뀐 것이다. 한 예로서 1970년 말까지 국가고정자산의 투자의 60% 이상이 내륙지방에 집중되어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개방정책의 실시와 함께 경제발전에 동원될 수 있는 국가의 자원을 내륙지방보다는 연안지역으로 몰아주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개방정책이 내포하고 있는 연안중심의 불균형성장 전략의 틀 속에서 설명될 수 있는데, 중국 정부는 이러한 불균형 성장전략의 당위성을 다음의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①지역적 균형성장을 이루는 정책을 포기함으로써 경제발전에 즉시 동원될 수 있는 자 원을 보유한 지역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궁극적으로 지역의 경제성장을 극 대화 시킬 것이다.

  ②비록 이러한 지역의 불균형 성장전략이 단기적으로 특정지역(즉, 내륙지역)의 경제성 장에 부정적 인 영향을 끼칠 수 있으나, 이러한 것은 국가의 장기적 이익 차원에 서 불가피하다.

  ③내륙지역의 교통부하시설 등이 매우 열악한 사정 등을 감안할 때 중국의 전지역을 동시에 고르게 발전시키기는 어렵다.

 

  요약하자면 새로운 발전전략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선부론"에 따라 중국이 앞으로 국가차원에서 경제적 효율성을 빠른 시일내에 제고하여 고도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이상 맹목적인 평등사회를 고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특정부분이나 특정지역이 먼저 경제적으로 발전하면 이러한 효과가 궁극적으로 국가전체에 파급될 것이기 때문에 성장의 가능성이 가장 큰 지역 즉 연안지역에 대한 발전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개방정책의 골자는 중국의 전통적인 농촌지역과 상대적으로 더 발전된 도시지역을 연계시키는 것으로서, 이를 위해 연안지역이 중국 내에서 이미 산업이 가장 발달하여, 외국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이는데 가장 적합한 지역이므로 이들 지역의 풍부한 노동력을 이용하여 외국으로부터 수입된 (또는 내륙지방으로부터 옮겨온) 원자재나 원료를 가공, 수출하여 중국경제발전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즉 연안지역을 대외개방지역으로 선포하고 이 지역에 노동집약형 수출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여 외화를 벌어들인 후 이를 국내중공업 발전과 내륙지방 개발에 활용하여 국가 전체의 경제발전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중국이 이러한 전략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국제대순환론'이 잡리잡고 있다. 이 이론의 골자는 그 당시 세계적으로 산업무역구조가 조정되고 있는 추세에 따라 중국이 대외무역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수 있다면, 연안지구의 과잉 잉여노동력 해소에 활로를 찾을수 있고, 경제발전에 필요한 외환을 획득할수 있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연안지역의 경제를 외향적으로 전환시키면, 이들 지역이 외국기업의 해외생산거점으로 부상하게 되어, 외국자본과 기술이 중국내로 유입됨으로써, 이들 개방도시 및 인접지역의 만성적인 실업, 자금과 외환부족이라는 중국경제의 만성적인 문제점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어 경제 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경제특구 및 경제개발구의 설치

 

   1) 경제특구의 설치

  

  경제특구란 외국기업에 직접투자하는 중국과의 합작사업을 추진하기위해 어떤 지역을 한정하고 특별한 경제제도를 적용할 수 있는 지역을 말한다. 또한 호혜평등의 원칙하에서 대외 경제협력과 기술교류를 추진하는 방식이다. 경제특구에서는 수출가공 뿐만아니라 농업, 상업, 주택, 관광, 기타 서비스 업종 및 공공사업에 이르는 광범위한 경제활동이 가능하다. 중국이 경제특구를 설치하게된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외국자본의 유치를 촉진하여 선진기술, 장비, 경영관리경험 및 노하우를 유입케된다. 둘째로는 특구내에서 생산된 제품의 수출로 중국의 외환보유액을 증대시킨다. 셋째로는 특구내에서 노동집약적인 기업을 유치함으로써 지역주민에게 직장을 제공하여 실업문제를 해소할수 있다는 점이다. 특구내에서 노동집약된 기업을 유치함으로써 합작기업, 공동생산기업, 그리고 원료공급과 보상무역의 세가지 형태를 취한다. 합작기업과 공동생간기업과의 차이점은 합작기업의 참여자는 이익 및 위험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며, 공동생산기업의 경우 참여자 중에서 한쪽은 자본과 장비를 대고 다른 한쪽은 토지와 인력을 제공하여 공동생산하여 이익은 약정된 조건에 따라 분배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원료공급과 보상무역방식은 중국측이 공장건설과 노동력을 제공하고 외국기업은 장비, 원료 및 모델 등을 제공하여 생산된 제품은 보상무역방식에 따라 처리하는 형태를 말한다.

  중국당국에 의해 경제특구로 지정된곳은 심천, 사구, 주해, 하문, 산두, 진강, 묘전 및 남기 등 8개 지역이었으나, 심천, 주해, 산두 및 하문 등 4개지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렇듯 사회주의 경제를 표방하고 있는 중국이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을 허용하면서 경제특구를 설치하는 목적은 해외로부터 자본과 선진기술을 도입하여 중국이 갖고 있는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과 자원을 활용함으로써 무역증진은 물론 기술교류와 경제협력을 앞당기는데 있다. 이를 위해 해외기업에 대한 조세 등 각종우대조치와 합법적 권익보장등 투자여건을 마련하여 기업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2) 경제개발구의 설치

 

  중국은 경제특구를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고 대외경제개방정책을 더욱 확대할 목적으로 1984년 4월 북경에서 "연해지역도시좌담회"를 개최하고 14개 연해도시에 단계적으로 경제개발구를 설치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들 14개도시는 북으로부터 대련, 진황도, 천진, 인태, 청도, 연운항, 남통, 상해, 영아, 온주, 복주, 광주, 신강, 북해 등이다. 이처럼 중국에서 주요지역에 위치한 도시를 개방하여 경제개발구를 설치한 이유는, 연해인접 도시들이 기술, 문화 및 교육수준이 높고 외자 및 선진기술의 도입과 그 소화능력이 크며 유리한 조건에 있기 때문이며, 또한 연해인접지역과 내륙지역에 효율적으로 경제건설을 수행할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기때문이다.중국은 1985년 1월에 다시 장강삼각주, 주강삼각주, 문남하문· 장주· 황주삼각주를 "연해경제개발구"를 개방했다. 즉 "4개경제특구 - 14개 연해개방도시와 해남도 - 3개연해경제 개발구" 로 확대되어 개방선을 형성했다. 그리고 1988년 3월에는 대외개방의 범위를 다시 광동성 전역, 복건성 전역과 양자강 삼각주 및 요동반도와 산동반도에까지 확대시켰다. 이와같은 경제특구 및 경제개발구를 개방, 설치하는 정책목표는 경제개발을 조속히 달성하여 4개현대화를 효율적으로 완성하려는데 있다고 볼 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