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世界史/[지구촌]中國

마오쩌둥(毛澤東)

好學 2009. 10. 27. 19:29

 

마오쩌둥(毛澤東)

마오쩌둥(毛澤東)의 일생

                              


자 룬즈[]. 후난성[] 샹탄현[] 사오산[] 출생.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8세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3세까지 《논어》와 《사서()》 등을 읽었다. 16세까지 아버지의 반대로 진학을 못하고 농사일을 도우며 틈틈이 책을 읽다가 1909년 둥산[]고등소학에 들어갔다. 그 뒤 창사[]의 샹샹[]중학으로 옮겼고, 동맹회 《민립보()》의 열렬한 독자가 되어 그 신문에 실린 반청론()이나 혁명론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하였다가 1912년 제대한 뒤 제1중학에 입학하였으며, 다시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이나 외국유학을 하지 못한 그는 이 학교에서, 영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의 봉건사상 비판에 힘썼던 교사 양창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재학 중인 1917년, 거의가 제1사범학교 학생들로 구성되고 후난성 혁명 지식인들의 본영이 된 신민학회()를 조직하였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한 뒤 베이징[]으로 가서 후난 청년들의 외국유학을 도왔다. 그해 10월 마오쩌둥은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하였고, 양창지의 소개로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인 리다자오[]의 조교로 일하면서 방청하였으며 철학회와 신문학연구회()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학생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다.

1919년 5·4운동 발발 후 후난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샹장평론[]》을 펴냈으나 곧 폐쇄당하고 베이징으로 도망쳤으며, 러시아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920년 상하이[]에서 천두슈[]를 만났으며 다시 창사로 돌아와 1924년까지 창사 제1사범학교의 부속소학교 교장 겸 사범부의 어문() 교사가 되었다. 1922년 양창지의 딸 양룬후이[]와 결혼하였고, 그해 7월 상하이의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후난성 대표로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였다.

1924년 국공합작()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26년 장제스[]의 숙청으로 상하이에 갔다가 1927년 우한[]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중앙농민부장이 되었고 국공분열() 뒤 농홍군() 3,000명을 조직하여 징강산[]에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주더[]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공농홍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0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1931년 장시성[西] 루이진[]의 중화 소비에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그 인민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34년 10월 루이진에서 산시성[西] 옌안[]까지의 1만 2,500km에 이르는 대서천(西)을 시작하였으며, 도중에 구이저우성[] 쭌이[]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시안사건[西]을 거쳐 국공합작에 성공하자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고, 홍군을 국민혁명 제8로군으로 개편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지구전론()》(1938) 《신단계론()》(1938) 《신민주주의론》(1940)을 발표하였는데, 마지막 것은 중국공산당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1945년 4월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보고로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고, 중앙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8월 충칭[]에서 장제스와 회담하여 화평건국의 제원칙에 합의하였으나 실행이 불가능하게 되자, 1946~1948년 내전을 벌여 승리하였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년 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년 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을 맺었다.

1957년 반우파() 투쟁과정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바로잡는 문제에 대하여》를 발표하였고, 1958년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이른바 3면홍기()운동을 폈다. 1959년 4월 국가주석을 사임하고 죽을 때까지 당주석으로만 있었다. 1964년 4월 《마오쩌둥어록[]》을 간행시켰고, 1965년 10월 이후에는 당내에서 완전 고립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으나 문화대혁명을 지휘하였으며, 1960년 이후의 중소논쟁과 문화대혁명 기간을 통하여 ‘마오쩌둥사상’을 높이 내걸었다.

1968년 10월, 1959년부터 국가주석으로 있던 류샤오치[]를 실각시켰다. 1969년 마오쩌둥-린뱌오[]체제가 확립되는 듯하였으나, 1971년 9월 린뱌오는 반()마오쩌둥운동에 실패하여 죽었다. 1970년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대중반란이라고도 할 천안문사건()이 일어나 위대한 영웅 ·독재자 마오쩌둥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전생애를 살펴볼 때,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외세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한 중국민들의 굴욕감을 씻어주며,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립을 강조한 그의 목표는 칭송할 만한 것이었으나, 2가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잘못된 것이었다.


모택동사상 (毛澤東思想)

중국공산당 전(前)주석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혁명사상.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중국적 발전형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사상은 전략과 전술, 세계인식 및 당면의 사회주의 건설이념 등을 포괄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적 이데올로기였다. <마오쩌둥사상>이라는 말은 1945년의 중국공산당 제7차전국인민대표자회의(7전대회)에서 당규약에 규정되었는데, 그 후 1958년의 8전대회에서는 스탈린 비판의 영향도 있어 당규약으로부터 삭제되었다. 그러나 1965년 후반부터 개시된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서는 중·소논쟁의 격화와 더불어 다시 마오쩌둥사상의 우위성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사상으로 일색화된 중국공산당의 재건과 마오쩌둥사상에 의한 권력지배의 일원화를 추구하여, 마오쩌둥 자신이 발동한 격렬한 당내투쟁이며 광범한 대중이 참가한 대중운동화된 권력투쟁이었다. 1969년 4월의 중국공산당 제9전대회에서 새로 채택된 당규약 총강에서는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마오쩌둥사상을 자기 사상을 지도하는 이론적 기초로 삼는다>라고 규정하였다. 종래의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표현에서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마오쩌둥사상>이라는 표현으로 변화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시대나 레닌시대와 다른 마오쩌둥시대의 도래가 역사적으로 구분되고 공식적으로 창도(唱導)된 것이다. 동시에 <마오쩌둥사상>은 제국주의가 전면적으로 붕괴되어가고 사회주의가 전세계적으로 승리해 가는 시대의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규정되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마오쩌둥사상이란 단순히 마오쩌둥의 혁명사상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오쩌둥적인 이론과 실천의 한 포괄적 체계로서 격상된 개념을 말하며, 확실히 마오쩌둥주의 (Maoism)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는 마오쩌둥사상을 유일한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나아가서 그 발전의 최고 형태로서 그것을 보편화시키고자 하는 원망(願望)과 집념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사상에는 중국민족의 재생과 통일을 갈구하는 강렬한 민족의식 아래, 반봉건·반식민지의 광대한 토양에서 농민 주체의 무장투쟁으로 전개되어 간 중국혁명의 특징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마오쩌둥사상의 기본적인 성격으로서 ① 농민, 특히 빈농·하층중농에 의거한 농민 주체적 혁명경험의 절대화 ② 대단히 독창적인 유격전의 전략·전술 및 <정권은 총구로부터 태어난다>라는 신념에서 볼 수 있는 마오쩌둥 군사사상의 전면적 발현 ③ 이러한 중국혁명의 경험을 중화사상(中華思想)의 확대재생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민족의식으로 지지하고 있는 강렬한 내셔널리즘 등을 들 수 있다.


마오쩌둥(毛澤東)과 문화대혁명

정식 명칭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Great Proletarian Cultural Revolution/GPCR),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중국공산당 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이 중국 혁명정신을 재건하기 위해 자신이 권좌에 있던 마지막 10년간(1966~76)에 걸쳐 추진한 대격변. 중국이 소련식 사회주의 건설노선을 따라 나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자신의 역사적 위치에 대한 우려 때문에 마오쩌둥은 역사의 흐름을 역류시키기 위해 사상 유례없는 노력을 기울여 중국의 여러 도시를 혼란상태로 몰아넣었다.

         

마오쩌둥은 1960년대초 중·소 간의 긴장관계를 겪으면서 소련의 혁명이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음을 확신했으며, 아울러 중국도 그와 같은 길을 따라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게 되었다. 또 대약진운동으로 야기된 경제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해가고 있던 자기 동료지도자들의 혁명에 대한 열정이 감소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함께 자신의 역할이 축소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는 중국이 전통적으로 정예주의(精銳主義)가 강한 사회인만큼 새로운 도시 사회계층이 형성되지 않을까 특히 우려했다. 그리하여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위한 다음 4가지 목표를 채택했다. ① 이미 지명된 그의 후계자들을 자신의 사상에 더욱 충실한 지도자로 대체한다. ② 중국공산당을 정화한다. ③ 중국의 청년들에게 혁명적 경험을 제공한다. ④ 교육·위생·문화 조직을 되도록 정예주의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특별한 정책변화를 이룬다.


그는 이러한 목표를 추진하기 위해 처음에는 도시 청년들을 대거 동원해 홍위병(紅衛兵)이라는 집단을 조직했고, 당과 군대로 하여금 이들의 운동을 막지 못하게 했다. 또한 측근동료들로 문화혁명을 수행할 중공중앙문혁소조(中共中央文革小組)를 조직했다. 그의 아내 장칭[江淸]은 문화계를 지배할 급진적인 지식인 집단을 동원했다. 국방장관 린뱌오[林彪]는 군부가 마오쩌둥 사상의 신봉자가 되도록 했다. 마오쩌둥의 오랜 조력자였던 천보다[陳伯達]는 캉성[康生]·왕둥싱[汪東興] 등 보안 관계자들과 함께 마오쩌둥의 이데올로기와 공안(公安)에 관한 지시를 수행했다. 주석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엄청난 혼란의 와중에서도 국무를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문화혁명 기간중 이들 조력자들 사이에 대립이 존재했으며, 문화혁명의 역사는 마오쩌둥의 독창성 못지 않게 이러한 대립들을 그대로 드러냈다.


마오쩌둥은 1966년 8월에 개최된 제8회 제1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十一中全會)에서 공식적으로 문화혁명을 개시했다. 학교를 폐쇄하고, 홍위병에게 모든 전통적인 가치와 '부르주아적'인 것을 공격하게 했으며, 당의 관료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혁명성을 점검했다. 마오쩌둥은 이 조치가 젊은 세대와 그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당 기관요원에게 모두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운동은 신속히 확대되었다. 수많은 노인들과 지식인들은 말로만의 공격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학대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다. 홍위병 내부에서는 내분이 발생해 파벌이 형성되었다. 각 파벌은 자신들이 마오쩌둥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운동을 고무시키기 위해 권장된 마오쩌둥에 대한 개인숭배는 종교적인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운동으로 초래된 무정부 상태와 테러, 사회적인 마비현상은 도시경제를 와해시켜 1968년의 산업생산량은 1966년에 비해 12%나 하락했다.


홍위병 활동 초기단계에 마오쩌둥의 공식적인 후계자였던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와 당 총서기 덩샤오핑[鄧小平] 등 중요한 정치국 지도자들이 권좌에서 제거되었다. 1967년 1월에 성(省) 당위원회를 실질적으로 타도하기 위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성 당위원회를 대신할 새로운 정치기구를 창출하기 위한 시도가 시작되었다. 1967년 2월에는 당의 권력핵심에 남아 있던 많은 당지도자들이 문화혁명의 중단을 촉구했다. 그러나 마오쩌둥과 그의 급진파 추종자들이 우세했으므로 운동은 더욱 고양되었다. 사실 1967년 여름경에는 무질서가 광범위하게 퍼지고, 홍위병간의 대규모 무력충돌이 전국 도시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1967년 홍위병 내부의 무력충돌이 격화되자 마오쩌둥은 린뱌오 휘하의 군대에게 홍위병 대신 문화혁명에 개입할 것을 지시했다. 홍위병으로부터 통일된 지지를 얻어내는 방법 대신에 취해진 이러한 정치·군사적 조치는 군부 내에 더욱 심각한 분열을 초래했다. 잠재해 있던 군부 내의 긴장은 1967년 여름에 우한 군구[武漢軍區] 사령원(司令員)이었던 천짜이다오[陳再道]가 급진적인 당 지도자 두 사람을 체포하면서 표면화되었다.


1968년 나라 전체가 급진주의와 비교적 온건한 경향의 반복적 엇갈림을 경험한 후, 마오쩌둥은 더 많은 통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공산당의 조직을 재정비하기로 결정했다. 군 장병들이 파견되어 학교·공장·정부기관 등을 접수했다. 동시에 군대는 수백만 명의 도시 홍위병을 깊숙한 산골로 쫓아보내 그들의 힘을 분산시키고 도시에 어느 정도의 질서를 회복했다. 이러한 조처는 홍위병이 분파주의적인 대립을 극복하지 못한 데 대한 마오쩌둥의 환멸을 반영했다. 혼란을 종결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1968년 8월 중국 내 안보상의 불안감을 증대시킨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2개월 후 제8회 12중전회가 개최되어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고 당기구를 재건하기로 했다. 이 시점부터 문화혁명이 수그러들었고, 그에 따라 권력을 누가 계승할 것의 문제가 정치의 핵심이 되었다.



1969년 4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9회 전국대표회의(九全代會)에서 국방장관 린뱌오가 공식적으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사회 전반에 걸친 군부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군부 인물들이 당 중앙위원회와 개조된 공산당을 지배했다. 린뱌오는 1969년 봄에 발생한 중·소 국경분쟁을 이용해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나아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후계구도에 대한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제거했다. 1966~68년에 숙청된 몇몇 지도자들은 1969년 계엄체제하에서 사망했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이 기간에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린뱌오는 곧 반대에 부딪혔다. 마오쩌둥은 너무 성급하게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는 린뱌오에게 경계심을 품고 그를 제거할 책략을 쓰기 시작했다. 주석 저우언라이도 마오쩌둥의 이러한 노력을 지원했고,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도 지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조력자인 천보다는 린뱌오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사회질서를 회복하고 정상화시키기 위해 1970~71년에 많은 조치가 취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점증하는 심각한 긴장으로 인해 최상위 지도층이 분열되고 있었다. 이러한 긴장이 처음으로 표면화된 것은 1970년 여름에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에서였다. 이 회의 후 마오쩌둥은 린뱌오에 대한 경고의 일환으로 천보다를 비판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천보다는 1970년 8월에 공식석상에서 사라졌다. 1971년 9월 린뱌오가 죽으면서 사태는 절정에 달했다. 중국 정부는 린뱌오가 마오쩌둥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소련으로 탈출다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린뱌오가 죽은 지 몇 주 만에 고위 군사령관들이 모두 숙청되었다.


린뱌오의 죽음은 문화혁명 기간에 마오쩌둥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환멸감을 느끼게 했다.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개인숭배를 추진한 최고위급 인물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린뱌오에 대한 '수정주의자들'의 도전을 물리치고 린뱌오를 후계자의 지위에 올려놓기 위해 고난에 찬 투쟁을 전개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존경받던 스승들을 공격하고 고문했으며, 나이 많은 시민들에게 잔혹하게 굴고 원로 혁명가들에게 모욕을 가했다. 그리고 이전의 친구들과 유혈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린뱌오가 암살을 계획했다가 탈출했다는 추악한 사실이 상세히 알려지자 문화혁명이 파렴치한 전형적인 권력투쟁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중국인들이 자기들은 그저 개인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교묘히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린뱌오의 사망으로 처음에는 저우언라이가 가장 큰 이득을 보았다. 그는 1971년 후반부터 1973년 중반까지 중국을 다시 안정된 상태로 되돌려놓기 위해 노력했다. 교육제도의 부활을 장려했고 쫓겨났던 수많은 사람들을 복귀시켰다. 중국의 무역이 다시 증가하고 외부세계와의 관계가 다시 증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9년부터 착수했던 경제의 전진이 계속되었다. 마오쩌둥은 개인적으로 이러한 총체적인 움직임에는 동의했지만, 이러한 움직임들로 인해 처음 문화혁명을 시작할 당시에 추구했던 근본적인 가치에 대해 이의가 제기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72년 내내 마오쩌둥은 심한 뇌일혈로 고생했고, 저우언라이는 그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러한 상황은 후계자 문제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음을 부각시켰다.


1973년초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권력에 복귀시켰다. 저우언라이는 그를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추천하고자 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문화혁명 기간에 급진파의 손에 숙청된 인물들 가운데 2번째로 고위직에 있던 희생자였다. 그가 다시 등장함으로써 장칭과 그의 추종자들은 필사적으로 더욱 급진적인 노선을 확립하려고 했다. 1973년 중반부터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죽을 때까지 장칭을 비롯한 그녀의 지지자들(장칭과 함께 훗날 4인방으로 불리게 된 왕훙원[王洪文]·장춘차오[張春橋]·야오원위안[姚文元])과 저우언라이·덩샤오핑 집단 사이에서 중국의 정치권력이 왔다갔다했다. 전자는 이데올로기, 정치 동원, 계급투쟁, 반(反)지성주의, 평등주의, 배외주의(排外主義)를 선호한 반면 후자는 경제성장, 교육개혁, 실용주의적 외교정책을 진척시켰다. 마오쩌둥은 양자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면서 양자를 절충한 후계자를 물색하려 애썼으나 실패했다. 1973년 중반부터 1974년 중반까지는 급진주의자들이 상승했다. 그들은 저우언라이와 그의 정책을 비판할 목적으로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을 전개했다.

       


그러나 1974년 7월이 되면서 경제침체와 점증하는 혼란으로 인해 마오쩌둥은 다시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을 지지했다. 저우언라이의 병세가 악화됨에 따라 1974년 여름부터 1975년 늦가을까지 덩샤오핑의 권력이 더욱 커졌다. 1975년 늦가을에 급진파는 덩샤오핑의 정책으로 인해 결국은 문화혁명과 마오쩌둥 자신이 거부당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마오쩌둥에게 심어주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대자보를 통해 이들의 정책을 비판할 수 있도록 재가했다. 대자보는 그후 급진파가 즐겨 이용하는 선전매체가 되었다. 1976년 1월에 저우언라이가 죽자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승인하에 4월에 공식적으로 숙청되었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죽고 그해 10월에 행정·경찰·군부 지도자들의 연합에 의해 4인방이 숙청되면서 1977년에 비로소 덩샤오핑이 복권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문화대혁명은 비록 농촌에 살던 수많은 인민들을 비켜가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중국 전체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경제정책이 끊임없이 변경되었기 때문에 경제성장이 더욱 늦어지고 상품과 용역을 분배하는 정부의 행정력이 저하되었다. 정부의 각급관리들은 정책이 변하면 그전의 정책을 열심히 추진했던 사람들은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결과 관료주의적인 소심성이 만연하게 되었다. 게다가 마오쩌둥의 죽음과 문화혁명의 종결(문화혁명은 공식적으로 1977년 8월에 개최된 11전대회에서 종결되었으나 실제적으로는 마오쩌둥의 죽음과 1976년 가을 4인방의 숙청과 함께 끝남)과 함께 300만 명에 가까운 당원들과 억울하게 숙청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복권되기를 기다렸다. 이러한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0년대 후반에 과감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그러나 문화혁명의 후유증은 계속 중국의 문젯거리가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심각한 세대간의 갈등이라는 문제가 있다. 10대와 20대 초반에 문화혁명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고, 불만이 있으면 거리로 뛰쳐나가는 법을 배웠다.

급진적인 혁명의 열정 대신에 교육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문화혁명 이후의 정책하에서는 이들 수백만의 사람들이 생산적인 일거리를 차지할 여지가 없었다. 사실 교육제도 자체의 모든 면에서 입은 손상이 복구되려면 몇 십 년은 걸릴 것이다. 또다른 심각한 문제는 당과 정부 내부의 부패였다. 문화혁명으로 공포와 상품의 부족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시금 전통적으로 행해졌던 사적인 인간관계와 뇌물, 기타 다른 형태의 방식에 의지해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바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와 아울러 수백만의 도시 주민들이 1970년대 중반까지 정치적 노선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명백한 권력놀음을 목격함에 따라, 문화혁명은 당 지도부와 당 체제 자체에 대한 일반적인 환멸감을 초래했다. 마오쩌둥이 죽은 뒤 문화혁명의 목적과 결과가 모두 부정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아예 정치를 외면하게 되었다.


인민들 속에도 심각한 파벌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 문화혁명 기간에 서로 반대 입장에 있던 사람들이 같은 작업장에서 함께 일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그런 일은 그들이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인류 역사상 자신이 만든 체제를 부수려고 그와 같이 엄청난 대중의 힘을 동원한 지도자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 체제에 가해졌던 폐해는 심각한 것이었으며 마오쩌둥이 궁극적으로 달성하려고 했던 목표는 실현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중국사회에 전에 없던 혼란을 야기시키고 실패로 끝났으므로, 1976년 마오쩌둥 사후에는 비마오쩌둥화(De-Maoization)가 추진되었다.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사상을 여전히 당규약에 명시하고는 있지만 <4개의 현대화> 정책의 추진과 함께 마오쩌둥사상의 의미는 급속히 퇴색하였다. 그러나 1989년 6월의 천안문사건 이후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다시 마오쩌둥사상을 강조하고 나서 그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