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明)의 창시자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명(明) 태조(太祖)는 이름이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이다. 아명은 중팔(重八)에서 흥종(興宗)으로 개명하였으며, 자는 국서(國瑞)이다. 31년간 재위하였으며, 71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장지는 응천효릉(應天孝陵: 지금의 강소성 남경시 교외 종산<鐘山> 남쪽)에 있다.
주원장(朱元璋)은 호주종리(濠州鐘離: 지금의 안휘성 봉양현<鳳陽縣> 동쪽) 사람으로, 가난한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소년 시절에는 지주 집에서 목동으로 생활하기도 하였다
1344년 가뭄과 역병으로 앞길이 막막해진 주원장은 황각사(皇覺寺)로 가서 승려가 되어 회서(淮西) 지방을 떠돌아다니기도 하였다. 당시에 홍건군(紅巾軍)의 봉기가 발발하자 1352년에 그는 호주(濠州) 곽자흥(郭子興)의 봉기군에 투신하였다. 곽자흥은 용감하면서도 지혜로운 주원장의 면모를 한눈에 알아보고 그를 호위병으로 발탁하였으며, 또 양녀 마씨(馬氏)를 그의 베필로 주기도 하였다. 그후 그는 군대를 확대 편성하여 남방으로 진격하였으며, 1356년에는 한림아(韓林兒)의 송(宋) 정권으로부터 좌부원수(左副元帥)에 임명되었다. 1356년 집경(集慶)을 점령한 후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강소성 남경시<南京市>)라 개명하고, 송(宋)으로부터 강남행성평장(江南行省平章)에 임명되어 자칭 오국공(吳國公)이라고도 하였다. 이후에 그는 진우량(陳友諒)을 격파하고 오왕(吳王)이라 일컬었다. 또 장사성(張士誠)을 제거하고 한림아를 죽인 후 중원 정벌에 주력하였다. 1368년 정월 초나흘 응천(應天) 봉천전(奉天殿)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명(大明),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으며, 응천을 수도로 삼았다.
1368년 8월 명나라 군대는 원의 수도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시)를 점령하고 원을 멸망시켰다. 그후 주원장은 다시 십 수년에 걸쳐 전국을 평정했다.
주원장은 재위 기간에 호구조사와 토지측량을 실시하여 어린도책(魚鱗圖冊: 남송 이후 중국의 토지대장)을 만들고, 수리사업과 둔전을 추진하는 등 농업을 장려하여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건국 초기의 명나라 조정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 그는 여러 아들들을 번왕(蕃王)에 봉하고 여러 가지 제도를 신설한 것 외에도, 백관들을 엄밀히 감시 감독하여 대형 옥사를 일으키면서 많은 문무공신들을 무참히 죽였다. 그는 많은 검교(檢校)를 파견하여 백관들의 언행을 감시하고, 금의위(錦衣衛)를 설립하여 죄인을 고문하였다. 한 번은 문신 전재(錢宰)가 퇴청하여 집으로 돌아간 후에 입에서 나오는대로 시를 한 수 읊었다.
四鼓??起着衣, 사방의 둥둥둥 북소리에 옷을 입고,
午門朝見尙嫌遲, 오문에서 알현하니 늦었다고 싫어하네,
何時遂得田園樂, 언제나 전원의 즐거움 누릴 수 있을까,
睡到人間飯熟時. 밥이 다 될 때까지 잠이나 자 둬야지.
이것을 검교가 몰래 엿듣고는 주원장에게 보고했다. 그 이튿날 주원장은 그에게 "그대가 어제 훌륭한 시를 한 수 지었다던데, 난 늦었다고 싫어한 적이 없으니 '걱정했다'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했다. 깜짝 놀란 전재는 전신에 식은땀을 흘리며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를 올렸다.
검교는 백관 가족들의 언행도 감시 감독하였다. 한 번은 검교가 한 여승이 화고(華高)와 호대해(胡大海)의 아내에게 서역의 승려를 믿어라고 유혹하면서 '금천교(金天敎)'법을 행하는 소리를 엿듣고 주원장에게 보고했다. 이에 주원장은 그 두 부인을 여승과 함께 강물에 집어던져 죽이라고 명령했다. 검교는 각 관청에 두루 배치되어 있었다.
주원장은 간혹 평민 복장으로 갈아입고 궁궐 밖으로 나가 관리들의 언행을 직접 염탐하기도 하였다. 어느날 그는 갑자기 홍문관(弘門館) 학사 나복인(羅復仁)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복인은 성밖 좁은 골목의 쓰러질 듯 남루한 헌집에 살고 있었다. 이때 마침 사다리에 올라가서 담장을 칠하고 있던 나복인은 황제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아내에게 작은 나무의자를 가져오게 하여 주원장에게 앉도록 권했다. 주원장은 그의 집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남루한 것을 보고, "그대처럼 훌륭한 수재가 어찌하여 이런 누추한 집에 산단 말인가!"라고 한 후 즉시 그에게 성밖의 큰 저택을 하나 하사하였다.
주원장은 역대 제왕들 중에서도 가장 참혹하게 공신들을 죽였다. 그는 여러 차례 대형 옥사를 일으켰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호유용(胡惟庸)과 남옥(藍玉) 사건이었다. 호유용은 좌승상을 역임하였으나 1380년에 권력남용과 역모죄로 체포되었다. 주원장은 그를 사형에 처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연루된 자들을 1만여명이나 죽였다. 주원장은 그 틈에 중서성(中書省)을 아예 폐지한 후 다시는 승상을 두지 않고 황제가 직접 정무를 관리하였다.
남옥은 공훈이 탁월한 장수로 양국공(凉國公)에 책봉되었다. 1393년에 금의위(錦衣衛) 관리가 그를 모반죄로 밀고하자 주원장은 그를 죽이고 연루된 자 1만 오천여명도 색출하여 함께 죽였다. 용맹한 장수들은 거의 대부분 이 사건에 연루되어 몰살당했다. 서달(徐達)은 제1등 개국공신으로 두문불출하면서 매사에 소심할 정도로 신중을 기하여 주원장이 그를 제거할 구실을 못찾도록 했다. 1385년 서달은 등에 악성 종기가 났다. 당시에는 이 병에 걸리면 거위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주원장은 이 틈을 이용하여 그에게 거위고기를 먹으라고 하사했다. 서달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그것을 먹었으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죽고 말았다. 주원장이 만년에 이르렀을 때 개국공신들은 거의 대부분 그에게 참살 당하고 남아있지 않았다.
주원장은 엄격한 형법으로 법을 위반한 관리들을 처벌했다. 1358년 주원장은 김화(金華)를 공격할 때 식량이 부족하여 금주령을 내렸다. 그런데 대장군 호대해(胡大海)의 아들이 금주령을 위반하고 술을 빚었다. 중원장은 즉시 그를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도사(都事: 도찰원, 오군도독부 등에서 문서출납 담당) 왕개(王愷)가 나서서, "호대해는 지금 병력을 거느리고 소흥(紹興)을 한창 포위 공격하고 있는데 그의 아들을 죽이는 것은 부당하오니 그를 용서해주소서!"라고 간청하였다. 이 말을 듣고 크게 진노한 주원장은 "호대해가 반발하더라도 내 명령을 취소하지 않겠다!"라고 한 후, 직접 칼을 뽑아 호대해의 아들을 죽였다.
주원장은 황제에 오른 후에 법규를 위반한 관리들을 더욱 엄격하게 처벌하여 이로써 죽은 사람이 수 만명에 달했으니, 그의 형법이 전례없이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알 수 있겠다. 형벌로는 일반적인 참수와 족주(族誅: 가문 몰살) 외에도, 추장(抽腸: 창자 꺼내기), 박피(剝皮: 껍질 벗기기), 알슬개(?膝蓋: 무릎 후벼파기), 잡사(?死: 압사시키기) 등이 있었다. 그는 관청 정문 앞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부정부패 등의 범죄를 저지른 관리를 사형에 처한 후 가죽을 통째로 벗겨내어 그 허수아비 위에 둘러씌워서 관청을 출입하는 관리들의 경계로 삼게 했다. 이런 잔혹한 형벌들은 조정내에서 극도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모두들 안절부절 마음을 졸여야만 했다. 조회 때 주원장이 옥대를 배 아래에 내려두고 있으면 그것은 사람을 많이 죽이겠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문무백관들은 얼굴빛이 창백해져 부들부들 떨었고, 옥대를 가슴 앞으로 들고 있으면 사람을 많이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관리들이 매일 집에서 출근하기 전에 제일 먼저 아내와 이별하면서 뒷일을 부탁하였으며, 만약 이 날 살아서 돌아가면 온집안이 잔치 분위기였다.
주원장은 자신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문인들을 진압하겠다는 것을 명분으로 문자옥(文字獄)을 크게 일으키기도 했다. 예를 들면, 절강부학교수(浙江府學敎授) 임원량(林元亮)이 어떤 사람 대신 사은표(謝恩表)를 지어주면서 "作則垂憲"이란 구를 썼는데 주원장은 "則"이 그를 "賊"이라 욕한 것이라 우겼다. 또 상주부학훈도(常州府學訓導) 장진(蔣鎭)이 하표(賀表: 조정 경사에 신하가 왕실에 올리는 축하의 글)를 지어주면서 "睿性生知"란 구를 썼는데 주원장은 "生"자를 "僧"자로 잘못 보고 자기를 중이 된적 있다고 고의로 욕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임원량과 장진을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주원장은 이렇게 잔혹한 수단으로 신하들을 통제하는 것이 초기에는 필요한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일시적인 방편일 뿐 지속적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방법을 본받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주원장은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황제에 오른 후에도 그는 소박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음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강남행성(江南行省)의 장관이 진우량(陳友諒)의 황금조각 침대를 그에게 주자 그는 화를 내면서, "이것이 맹창(孟昶)의 칠보 요강과 어떻게 다른가?"라고 말하고는 그것을 부숴 버리게 했다. 그는 신하들에게 상소문을 쓸 때도 문장을 간결하게 쓰도록 지시하였다. 형부주사(刑部主事) 여태소(茹太素)가 만 자에 이르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6370자까지 읽어도 모두 빈말 뿐 구체적인 건의 내용이 없자 주원장은 화를 크게 내며 여태소를 불러와 매질을 가하라 명했다. 그 다음날 저녁에 그가 다시 그 상소문을 계속 읽어내려가게 하였더니 16500자 이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제가 언급되면서 5개 항의 건의사항이 나왔다. 이 중 4개 항목은 취할만 하다고 여기고 즉시 시행토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상소문을 500여자로 줄여도 충분한데 너무 번잡하게 썼다고 지적하고는 번잡한 문장을 듣기 싫어 여태소를 때린 점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여태소를 충신이라 찬양하였다.
주원장은 어린 시절에 열심히 공부를 배우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정권 초기에는 이선장(李善長), 유기(劉基), 주승(朱升) 등과 같은 뛰어난 학자를 중용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자녀들의 교육도 매우 중시하여 유명한 학자를 스승으로 초빙, 자녀들의 학문과 인성을 잘 지도하도록 하였다. 주원장의 엄격한 교육으로 자제들은 성인이 된 후에 대체로 능력이 뛰어나 일을 잘 처리하였다.
주원장은 원대(元代) 전기에 태자를 책봉하지 않아 여러 차례 정변이 일어났던 점을 교훈으로 되새기며 오왕(吳王)에 올랐을 때 이미 장자 주표(朱標)를 세자에 책봉하였으며, 황제가 된 후에는 그를 태자로 책봉하여 유명한 문인과 조정 중신들을 그의 스승으로 초빙하였다. 태자가 성인이 된 후에는 정사를 처리하게 하고 치국의 법도를 익히게 하면서, 항상 인자함(仁), 현명함(明), 근면함(勤), 결단성(斷)을 갖추어야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태자 주표는 온화하고 얌전하여 마치 서생과 같았다. 그는 천성이 진실하고 온후하여 아버지 태조 주원장이 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죽이는 것에 찬동하지 않았다. 주원장이 공신을 죽이려 할 때마다 그는 항상 아버지를 만류하며 인자함을 근본으로 삼고 친척간의 정과 형제간의 우애를 생각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때문에 부자간에 자주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한번은 주원장이 태자의 스승 송렴(宋濂)을 처형하려 하자 주표는 울면서 용서를 구하였다. 화가 난 주원장은 "네가 황제가 되거든 그를 사면해주라!"고 하였고, 이 말을 들은 태자는 두려움과 불안에 떨다가 결국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으나 간신히 구출되었다.
또 한 번은 주표가 아버지 주원장에게 "폐하께서 사람을 너무 함부로 죽이시니 감정을 상하게 하실까 걱정됩니다."라고 하였으나 주원장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주원장은 일부러 가시나무 막대기를 땅위에 던져놓고 주표에게 주워오라고 했다. 주표가 막대기에 있는 가시 때문에 머뭇거리며 얼른 줍지를 못하자 주원장이 말했다.
"네가 가시가 무서워 얼른 줍지를 못하니 내가 가시를 뽑아 버리고 다시 네게 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자 주표는 "위로는 요임금과 순임금 같은 어진 임금이 계시고 아래로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백성 같은 훌륭한 백성들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크게 진노한 주원장이 의자를 집어들고 주표에게 던지니 깜짝 놀란 주표는 내실로 뛰어들어갔다. 이 때 놀란 것이 병이 되어 주표는 그 후로 우울증에 시달리다 죽었다.
주원장은 어린 시절에는 생활이 가난하였고, 중년에는 전쟁으로 고생했으며, 40세 이후에는 온종일 국사에 시달렸고, 50세에 이른 이후에는 몸은 따르지 못하는데 마음만 앞섰다. 또 자주 고열이 나면서 환상을 좋아하고 악몽을 꾸며 때로는 마음이 매우 변덕스러워졌다. 그런 상황에서 태자의 죽음으로 상심이 극도에 달한 그는 기력이 더욱 쇠약해져 머리카락과 수염이 모두 하얗게 샜다. 그는 주표의 장자, 16세의 주윤문(朱允?)을 태손(太孫)에 책봉하고, 태손이 중신과 노장들을 제압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다시 공신들을 주살하였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남아있던 부우덕(傅友德)과 풍승(馮勝) 등 몇몇 개국 원로들 마저도 죽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또 아들들이 태손과 황위 쟁탈을 벌일까 염려되어 특별히 <<영감록(永鑑錄)>>과 <<황명조훈(皇明祖訓)>>을 편찬하여 자손들에게 종법제를 준수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리고 누구든 이 제도를 고치는 자는 간신으로 간주하고 때려죽여도 무방하다고 규정함으로써, 모두가 어린 황제에게 복종하여 주씨 왕조가 오랫동안 평안무구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1398년 윤5월 주원장은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져 마침내 병으로 쓰러졌다. 계미일(癸未日) 병세가 잠시 호전된 그는 황제에 오른 31년간 "위기에 대한 근심 걱정으로 하루도 게으름을 피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다."는 유서를 남겼다. 이것은 그의 고난에 찬 일생과 통치계층 내부의 격렬한 투쟁 속에 처해 있던 그의 심경을 표출한 것이다. 이 유서 속에서 그는 태손 주윤문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여러 아들들은 상례를 치르기 위해 경성으로 달려올 필요 없이 각자의 영지를 지키라고 하여 변란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을유일(乙酉日)에 주원장은 경성의 서궁(西宮)에서 병사하였다.
주원장이 죽은 후에 그의 시호를 고황제(高皇帝)라 하고 묘호를 태조(太祖)라 하였다. 주원장은 생전에 많은 화가들을 물색하여 자신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그림이 모두 대단히 사실적이었다. 주원장은 용모가 잘 생기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그릴수록 그는 더 만족하지 못했다. 후에 어떤 화가가 그의 마음을 읽고 얼굴 윤곽은 비슷하게 그리고 안색은 매우 온화하고 인자하게 그렸다. 이것을 본 주원장은 대단히 흡족하여 여러 장 더 그리게 하여 자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래서 현재 명 태조 주원장의 상은 두 종류가 전해지고 있는데, 현재 본사이트의 상은 그의 미화된 상이다.
주원장의 무덤은 남경 종산(鐘山) 기슭의 완주봉(玩珠峰)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가 생전에 직접 묘지를 고르면서 이곳이 북으로는 종산의 주봉, 서로는 현무호(玄武湖)에 닿아 있는 것을 보고, 마치 큰용이 구슬을 안고 놀고 있는 비범한 기세 같아서 즉시 이곳을 묘지로 선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완주봉 남쪽에 손권(孫權)의 무덤이 있어 주원장의 무덤 앞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에 신하들은 풍수를 위해 손권의 무덤을 파내자고 건의하였지만 주원장은 오히려 "파내지 마라. 손권도 호걸 중의 한 사람인데 그가 나의 보초를 서도록 놔두어라."고 하였다. 그래서 현재 주원장의 무덤 앞 길은 정남 정동향이 아니고 동서향로 돌아나 있다.
'好學의 世界史 > [지구촌]中國'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오쩌둥(毛澤東) (0) | 2009.10.27 |
---|---|
중국 근대민주혁명의 선구자 - 손문(孫文) (0) | 2009.10.27 |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0) | 2009.10.25 |
청(淸)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乾隆帝) (0) | 2009.10.25 |
청(淸)나라 제5대 황제 옹정제 (雍正帝) (0) | 2009.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