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世界史/[지구촌]中國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好學 2009. 10. 25. 21:54

 

당(唐) 태종(太宗)은 이름이 이세민(李世民: 599 ~ 649),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차남이다. 태자를 죽인 후 고조를 협박하여 황위를 선양받았다. 23년간 재위하다가 이질에 걸려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지는 소릉(昭陵: 지금의 섬서성 예천현<醴泉縣> 동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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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민(李世民)은 서기 617년에 유문정(劉文靜) 등과 이연을 부추켜 거병을 하여 관중(關中)으로 진격하였다. 당왕조가 수립된 후 진왕(秦王)에 책봉되었으며 상서령(尙書令)을 역임하였다.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국 각지를 전전하며 전투에 임하여, 설인고(薛仁
?), 유무주(劉武周), 왕세충(王世充) 등의 할거세력을 소탕하고, 유흑달(劉黑?), 두건덕(竇建德) 등의 농민봉기군을 진압한 후, 점진적으로 전중국을 통일해 나갔다. 그는 바로 당나라의 실질적인 창업자였던 것이다.


이세민은 업적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인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무관으로는 울지경덕(尉遲敬德), 진숙보(秦叔寶), 서세적(徐世勣), 이정(李靖) 등과 같은 명장이 있었고, 문관으로는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등 18학사(十八學士)가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태자 이건성(李建成)과 치열한 황위 쟁탈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건성은 태자라는 합법적인 신분을 이용하여 많은 종친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관중(關中)을 지키면서 경성 장안(長安)에 튼튼한 기반을 마련하여 궁궐의 금위군(禁衛軍)까지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고조 이연이 그를 마음에 들어하였고, 고조의 애첩 장첩여(張??)와 윤덕비(尹德妃)도 그와 관계가 밀접하였다. 그는 이러한 이점을 이용하여 황위를 순조롭게 승계하기 위해 여러 차례 이세민을 제거하려 하였다.

어느날 저녁 그는 이세민을 집으로 청하여 술을 마시자 해놓고는 술에 독약을 탔다. 아무 것도 모른 이세민이 그대로 잔을 받아 마시자 갑자기 배가 꼬이는 듯 아파왔다. 그들의 숙부 회안왕(淮安王) 이신통(李神通)이 마침 마당에 있다가 이세민을 업고 서궁(西宮)으로 돌아갔다. 이세민은 한 바탕 구토를 하고 많은 피를 쏟아낸 다음에야 비로소 이건성이 술에 독을 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황급히 의원을 불러 치료를 받은 후 서서히 회복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이건성은 넷째 동생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과 합세하여 이세민 제거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는 거금을 들여 몰래 진왕부(秦王府)의 울지경덕 등의 장수를 매수하려 하였으나 거절 당했다. 그는 또 고조 이연에게 이세민의 심복 책사들이 진왕부를 떠나도록 종용하였다.


서기 626년 5월 돌궐족이 중원을 침입하였다. 이 때를 틈타 이건성은 고조에게 이원길을 돌궐족 토벌의 총사령관에 임명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으며, 고조는 그것을 윤허하였다. 이원길은 울지경덕과 진숙보, 정교금(程咬金) 등 세 명의 뛰어난 장수를 자신의 휘하에 두게 해달라고 건의하였다. 그리고는 진왕부의 정예병을 자기의 심복으로 만들어 이세민의 병권을 박탈한 후에 그를 죽일 계책을 꾸몄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여 이세민은 처남 장손무기(長孫無忌), 울지경덕 등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 두 사람이 이세민에게 선수를 치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자 이세민은 잠시 머뭇거리면서, "아무래도 형제끼리 서로 죽이는 것은 좋지 않소. 저들이 먼저 손을 쓰면 그때 우리가 다시 반격을 가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였다. 다급해진 두 사람은 만약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저들이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라 말하고, 이세민에게 선제 공격을 결심하도록 종용했다.


6월 3일 이세민은 고조 이연에게 이건성과 이원길의 죄상을 폭로하고, 그들이 후궁에서 못된 짓을 일삼으며 장첩여, 윤덕비와도 미심쩍은 관계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란 이연이 "그들이 감히 그런 짓을 해?" 라고 하자, 이세민은 "그들은 여러 차례 저를 해치려고도 하였습니다. 만약 소자가 곳곳에 방비를 해두지 않았더라면 벌써 부황을 뵐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이었다. 사안의 중대함을 인식한 고조는 시비를 분명히 가린 후에 처리하기 위해 그들 세 형제를 다음날 아침에 등청하여 대질하기로 하였다.


다음날 아침 이세민은 직접 장손무기 등을 데리고 현무문(玄武門) 주위에 매복해 있었다. 현무문의 수문장 상하원(常何原)은 이건성의 심복이었으나, 이 때 이세민은 이미 그를 거금으로 매수해 둔 터였다. 이 소문을 들은 장첩여는 급히 이건성에게 사람을 보내 그것을 알렸다. 이건성은 이원길과 상의를 하였다. 이원길이 말하였다.


"서둘러서 군사를 배치한 후 병을 핑계로 등청하지 말고 사태를 관망하다가 다시 의논합시다."

 

"걱정하지 마라. 궁안에서는 장비(장첩여)와 윤비(윤덕비)가 호응하고, 밖에서는 내 군대가 현무문을 지키고 있는데, 이세민이 나를 어쩌겠느냐?"라고 이건성은 대답하고 이원길에게 그와 함께 등청하자고 했다. 그의 부하들은 이건성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호위병을 데리고 등청할 것을 권했으나,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이원길과 함께 말을 타고 현무문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말을 타고 임하전(臨河殿)에 이르렀을 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급히 말머리를 돌려 돌아갔다. 갑자기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태자 전하, 제왕 마마! 어째서 등청하지 않으십니까?"

 

이원길이 머리를 돌려 보니 그는 이세민이었다. 이원길은 급히 활을 들고 연속으로 화살을 세 발 쏘았으나 맞히지 못했다. 그러나 이세민은 단 한 발에 이건성을 적중시켜 말에서 쓰러뜨렸으며, 화살에 맞은 이건성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이를 보고 깜짝 놀란 이원길은 서쪽으로 달아났으나 울지경덕이 이끄는 70여명의 기마병과 맞부딪혀 다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화살이 빗발치는 가운데 그는 말에서 굴러떨어져 숲속으로 숨었지만 바로 이세민에게 발각되었다. 치열한 격투 끝에 이원길이 이세민을 올라타고 활을 빼앗아 이세민의 목을 조였다. 절박한 순간에 이원길은 울지경덕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다시 황급히 달아났으나 울지경덕이 쏜 화살을 맞고 죽었다.


현무문에 변고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동궁(東宮)과 제왕부(齊王府)의 병사들은 2만여명이 즉시 출동하여 진왕부에 맹공을 가했다. 이세민은 한편으로는 부하들을 지위하여 방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울지경덕을 궁안으로 들여보냈다. 이때 고조는 마침 후궁, 대신들과 함께 호수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 울지경덕이 보고하였다.

"태자(이건성)와 제왕(齊王: 이원길)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진왕(秦王: 이세민)은 폐하께서 놀라실까 걱정되어 신을 보내어 호위하게 하셨습니다."

 

고조는 크게 놀라 물었다.

"태자와 제왕은 지금 어디 있느냐?"

 

"이미 진왕에게 처형되었습니다."라고 울지경덕이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매우 난감해진 고조는 그를 가까이 오라고 한 다음 신하들에게 어찌해야 좋을지 물었다. 이때 옆에 있던 재상 소우(蕭瑀)가 말하기를, "진왕의 공덕이 세상에 두루 미쳐 인심을 많이 얻고 있습니다. 지금 이건성과 이원길이 죽어 버렸으니, 마땅히 진왕을 태자로 삼으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울지경덕이 "아직 바깥이 완전히 평정되지는 않았으니, 폐하께서 각 부대에 진왕의 통제에 따르라는 성지를 내려주십시오."라고 하자, 고조는 그의 말에 따라 성지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3일 후 이세민은 정식으로 태자에 책봉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이라 일컫는다.


이 '현무문의 변'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 학자들도 있다. 특히 최근 TV극 <<진왕이세민(秦王李世民)>>의 방영으로 그들은 이연이 결코 멍청이가 아니며, 이건성도 몹쓸 악당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세민과 이건성의 쟁탈은 황위 승계를 놓고 벌인 황자들 간의 참극이다. 그들은 이 극을 비롯한 일반 문학작품들이 현무문의 변을 묘사하면서 이연과 이건성을 깎아 내리고 이세민을 치켜세운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던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의 치적]


 

서기 626년 8월 갑자일(甲子日) 이세민은 아버지 고조 이연에게서 강제로 황위를 선양받고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고쳤다.

황제에 즉위한 후 이세민은 역대 제왕 중 걸출한 정치가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이후의 봉건 통치자들에 의해 덕망을 갖춘 성군의 전형으로 받들어졌다. 그러한 그의 치적을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간언을 잘 받아들였다.

이세민은 신하들의 다양한 의견을 잘 듣고 시비를 분명히 판단한 후에 옳은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는 일찍이 대신 소우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어릴 적에 활을 좋아하여 좋은 활을 수십개나 손에 넣은 후에 더 이상 좋은 활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소. 그런데 근래에 그것을 장인에게 보였더니 그게 좋은 활이 아니라고 하더이다. 내가 그 까닭을 물으니 그 장인은 목심(木心)이 바르지 않으면 나뭇결이 비스듬해 활은 좋아도 화살이 똑바로 날아가지 않는다더군요. 활로써 천하를 평정한 내가 아직 활도 제대로 못 보는데 천하의 일을 어찌 알 수 있겠소."

한번은 그가 위징(魏徵)에게, "군왕이 어찌 해야 현명하다 할 수 있고, 어찌 해야 어리석다 할 수 있소?"라고 묻자, 위징은 "여러 쪽 이야기를 들으면 현명해지고, 한 쪽 이야기만 들으면 어리석어집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대단히 공감한 이세민은 대소신료들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서기 630년 이세민이 낙양궁(洛陽宮)에 놀러 가려고 복원 공사를 명하자, 급사중(給事中) 장현소(張玄素)가 간언을 올렸다.

"지금 전쟁이 막 끝나 사회가 아직 정상 회복을 하지 못했는데도 폐하께서 먼저 낙양궁을 복원하라 명하시니, 만약 그것을 중단하지 않으신다면, 수 양제, 하 걸왕, 상 주왕과 같은 종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세민은 이렇게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고 진지하게 검토하여 결국 낙양궁 복원을 중단하고 장현소에게 상을 내렸다.


간언을 하는 신하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위징이었다. 그는 자주 간언을 올리면서 자기 주장을 펴다가 이세민과 충돌하곤 하였는데, 설령 이세민이 크게 화를 내더라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서기 626년 이세민은 장병 징집 명령을 내리면서 10세가 안되어도 키가 큰 남자는 징집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위징은 이 조서를 거머쥐고 발송하지 않았으며, 이세민이 여러번 재촉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크게 노한 이세민은 당장 위징을 불러 그의 대담한 항명 행위를 꾸짖었다. 그러자 위징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렇게 말했다.


"신이 듣기에 연못의 물을 다 없애고 물고기를 잡으면 나중에 잡을 물고기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지금 18세도 안된 건장한 장정도 병사로 징집하시면 나중에는 어디에서 병사를 충당하시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국가의 조세를 누구에게 부담시키겠습니까? 또 폐하께서 그전에는 18세 이상의 남자를 징집한다고 선포하셔 놓고, 지금 다시 조서를 내리시면 천하의 신뢰를 잃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이세민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한참 지나서야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그 조서를 철회하였다. 그리고는 위징을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승진시켰다.


하루는 이세민이 매를 데리고 놀다가 위징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무랄까 봐서 그것을 품속에 감췄다. 위징은 그것을 못본 척 하고 태종에게 업무를 보고하면서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그가 돌아가고 나서 보니 매는 이미 숨이 막혀 죽어 있었다. 한번은 이세민이 조회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와서는 노기충천하여, "언젠간는 이 촌놈을 죽여 버리고 말테다!"라고 하였다. 장손황후(長孫皇后)가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고 묻자 이세민은, "위징이 항상 면전에서 나를 반박하며 난감하게 만드니 정말 짜증스럽소!"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장손황후가 잠시 물러났다가 예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들어와서 이세민에게, "군주가 현명해야 신하가 감히 직언을 올릴 수 있는데, 위징이 감히 면전에서 폐하를 반박하는 것은 폐하가 성군이라는 뜻이 아니옵니까!"라고 축하의 말을 올리자 이세민의 노기가 가라앉았다고 한다.


정관(貞觀: 627~649) 중기 이후에 태평성세가 지속되자 대신들 모두 이세민의 은덕을 극구 찬양하였지만, 오직 위징만은 맑은 정신을 잃지 않고 이세민의 열 가지 결점을 지적하여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하였다. 이세민은 그것을 정중하게 병풍에 옮겨적어 아침 저녁으로 읽어보며 좌우명으로 삼고 위징에게 말하였다.


"이제 나의 부족한 점을 알았으니 그것을 보완하고자 하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를 다시 볼 면목이 없겠소."

 

서기 643년 위징이 병사하자 이세민은 매우 비통해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면 의관이 똑바른지를 알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왕조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신의 잘잘못을 발견할 수 있다. 위징이 죽었으니 나는 거울을 잃어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이세민은 신하들의 간언을 아주 잘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의 재위 전기에 국정을 운영하면서 실책이 아주 적을 수 있었던 것이다.

 

2. 인재를 잘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였다.


이세민은 일찍이 위징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관리를 선택하는 일은 절대 대충대충 해서는 안됩니다. 선한 사람을 등용하면 다른 선한 사람들이 모두 몰려오고, 악한 사람을 등용하면 다른 악한 사람들이 모두 몰려오지요."

 

그가 대신 봉덕이(封德彛)에게 유능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하자 봉덕이는 "신이 세심하게 살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당대에는 정말로 뛰어난 인재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럴리 없다고 생각한 이세민이 말하였다.

"사람을 쓰는 것은 기물을 사용하는 것처럼 각자의 장점을 취해야 하오. 옛날에 태평한 시절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유능한 인재들을 다른 시대에서 빌어왔겠는가! 그대 자신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지, 어찌 당대에 뛰어난 인재가 없다고 단정하는가!"



 

그는 당시에도 인재가 많다는 것을 굳게 믿고 언제나 세심히 살피면서 새로운 인물이나 관계가 소원한 사람은 물론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들 속에서도 인재를 구했다.  그가 가장 신임한 맹장 울지경덕도 원래는 그의 적 유무주(劉武周)의 휘하에 있던 장수였는데, 그가 유무주를 물리쳤을 때 울지경덕은 수나라 장수 심상(尋相)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얼마 후 심상이 당나라를 배반하자 이세민 휘하의 장수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울지경덕도 잡아서 죽이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세민은 오히려 그를 석방하고 자기의 휘하에 들어오기를 청했다.


"대장부는 서로 의기가 투합하면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법이니 이런 사소한 일은 따질 필요가 없소이다. 나는 결코 남을 비방하는 말을 믿거나 함부로 선한 사람을 의심하지 않겠소."


 

이렇게 말하고는 울지경덕에게 수많은 금은보화를 선사하자, 울지경덕은 매우 감동하여 이세민에게 충성을 다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건성이 그를 거금으로 매수하려 하고, 자객을 보내 그를 암살하려고도 하였지만, 그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끝까지 이세민을 추종하여 그의 유능한 부하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현무문(玄武門)의 변'에서 큰 공을 세운 후 오국공(吳國公)에 책봉되었다.

 

위징도 원래는 이건성의 참모로 이건성에게 이세민을 죽이라고 건의했던 인물이다. '현무문의 변'이 있은 후에 누군가가 그 일을 폭로하였다. 이세민은 위징을 데려오게 한 다음 탄식하며, "그대는 어찌하여 우리 형제 사이를 이간질 하였는가?"라고 묻자 위징은 솔직하게 말하였다.

"그 당시에 저는 태자의 참모였으니 당연히 그 분을 위한 계책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태자는 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말로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세민이 한맺힌 적장을 사형에 처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모두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그의 솔직한 말을 들은 이세민은 그가 정직하고 담력과 식견이 있는 인재임을 알아보고 처벌은 커녕 오히려 그를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임명하였던 것이다.

 

서기 629년 이세민은 백관들에게 국가의 기본 방침에 대해 논의한 후 의견을 제출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에 중랑장(中郞將) 상하(常何)가 20개의 의견을 내놓았는데 구구절절 사리에 맞는 말 뿐이었다. 이세민은 상하가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무관임을 알고 그가 어떻게 이런 수준 높은 글을 쓸 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여겼다. 그래서 알아보니 그것은 상하의 친구 마주(馬周)가 대신 쓴 것이었다. 마주는 비천한 출신의 문인이었다. 이세민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고 즉시 그를 불러들였다. 마주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눠본 후에 이세민은 그가 유능한 인재임을 알아보고 곧장 그를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하였으며, 그 후에 다시 중서령(中書令)으로 승진시켜 조정의 대소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세민은 인재 등용 정책을 펴면서 친인척이나 연공서열을 배척하였다. 그는 항상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군주는 반드시 공평무사(公平無私)해야 천하의 인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관리는 고하를 막론하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해야지, 친분 관계나 자격 요건으로 관직의 고하를 결정해서는 안됩니다."

 

서기 627년 이세민이 논공행상을 하면서 방현령(房玄齡), 장손무기(長孫無忌), 두여회(杜如晦) 등 5명을 일등공신에 명하자, 그의 숙부 회안왕(淮安王) 이신통(李紳通)이 불복하며 따졌다.


"태원(太原)에서 거병했을 때 신이 제일 먼저 호응하였고, 수년 동안 물불을 가리지 않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방현령과 두여회는 글재주나 부리는 자들로 전쟁에 나가본 적도 없는데,  지금 그들의 공과 관직을 신보다 높게 책정하시는 것은 정말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이에 이세민이 "숙부께서는 나라의 지친이신데 제가 어찌 신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는 사사로운 이익 때문에 공공의 이익을 해쳐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자 이신통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원래 진왕부(秦王府)에서 이세민의 부하였는데 이세민이 황제에 등극한 후에 승진이 되지 않자, "우리는 수년 동안 생사를 무릅썼는데도 지금은 이건성의 휘하에 있던 사람보다도 지위가 낮다!"라고 원망하였다. 그러자 태종 이세민은 "인재 선발은 신구(新舊)나 선후를 따져서는 안된다. 신인이 현명하고 구관이 우둔하면 신인을 등용할 수밖에 없다. 내가 전에는 진왕(秦王)이었지만 지금은 일국의 군주이다. 그대들이 이렇게 원망하는 것이 나라의 장래를 생각해 보고 그러는 것인가?"라고 대답하였다. 오로지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이세민의 인재 등용 정책으로 각계의 우수한 인재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당왕조의 부강에 제각기 역량을 발휘하였다.


서기 643년 공신들을 표창하기 위하여 이세민은 장손무기와 두여회, 위징, 방현령 등 공신 24명의 화상을 능연각(凌煙閣)에 걸어두었다. 역사에서는 그것을 '능연각화상(凌煙閣畵像)'이라 일컫는다. 그는 자주 거기에 가서 화상을 감상하면서 공신들의 행적을 찬양하고 기념하였다.  

 

3. 백성들의 역량이 위대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세민은 직접 수나라 전복 전쟁에 참가하여  강대한 수왕조가 농민봉기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였다. 그래서 그는 황제에 등극한 후에 수왕조의 멸망을 거울로 삼아 세심하고 신중하게 국가를 경영하면서, 계층간의 갈등을 완화시켜 백성들의 봉기를 예방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존합니다. 백성들을 착취하여 군주를 섬기는 것은 자기 몸의 살을 도려내어 먹는 것과 같습니다. 배는 부를 지언정 육신은 망가져 버리듯이 군주는 부유해도 국가는 망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군주의 재앙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군주가 향락에 심하게 빠지면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가중한 세금을 거두어들이게 되어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는 위태로워지며 군주도 패망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항상 이러한 이치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결코 탐욕에 빠지지 않습니다."

"나는 조정에서 한 마디 말을 할 때마다 실수로 백성들을 해치게 될까 염려되어 몇 번이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감히 말을 많이 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주 태자 이치(李治)를 교육시켰다. 밥을 먹을 때 그는 "네가 농사의 어려움을 안다면 항상 밥을 가질 수 있다."라고 하였고, 말을 탈 때는 "네가 말의 부릴 때를 알고 말의 체력을 다 소진시키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을 탈 수 있다."라고 하였으며, 배를 탈 때는 "물은 배를 가게 할 수도 있고 가라앉힐 수도 있다. 백성은 물과 같고 군주는 배와 같다."라고 하였다. 또 "군주가 정도(正道)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 백성들이 그를 보호하고, 정도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그를 몰아낸다."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민본사상(民本思想)에 의거하여 이세민은 형벌과 법률 완화, 부역과 조세 경감, 균전제(均田制), 조용조법(租庸調法), 부병제(府兵制) 등을 추진하여 백성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줄였다. 대외정책에서도 그는 "중국이 안정되면 사방의 오랑캐가 스스로 복종한다"는 방침을 채용하여 가볍게 군사력을 동원하지는 않았지만, 소수민족의 침입에 대해서는 단호히 반격하였다. 서기 641년 그는 문성공주(文成公主)토번족(吐蕃族: 지금의 티벳족)의 제32대 찬보(贊普: 국왕) 송찬간포(松贊干布)에게 시집보내어 티벳족과 긴밀한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이세민이 취한 이러한 조치들로 당왕조는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여 국력이 막강해졌으며, 이로써 중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봉건국가가 되었으니, 이 시기를 역사에서는 '정관지치(貞觀之治: 정관 시기의 태평성세)'라 일컫는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이세민은 사치스런 생활에 빠져들었다. 대형 토목공사를 일으켜 조세와 부역을 가중시키고 해마다 군사력을 동원함으로써 계층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서기 649년 3월 이세민은 이질에 걸려 백방으로 치료해도 효험이 없자, 태자에게 금액문(金液門)에서 국정을 대신 처리토록 명했다. 그 해 5월 병세가 더욱 악화되자 이세민은 태자와 비빈, 장손무기와 저수량(?遂良)을 불러 고명(顧命: 왕이 임종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언)을 받아들이게 하고, 저수량에게 유서를 작성하라 명하였다. 기사일(己巳日) 장안궁(長安宮)의 함풍전(含風殿)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세민이 죽은 후에 그의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