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世界史/[지구촌]中國

청(淸)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乾隆帝)

好學 2009. 10. 25. 21:53

 

청(淸) 고종(高宗) 건륭황제(乾隆皇帝)는 이름이 홍력(弘曆: 1711~1799)이고 옹정황제(雍正皇帝)의 넷째 아들이다. 옹정황제가 죽은 후에 황위를 계승하여, 60년간 재위하다 89세에 병사하였다. 장지는 하북 유릉(裕陵: 지금의 하북성 준화현<遵化縣> 서북쪽 창서산<昌瑞山>)이다.


Portrait of the Qianlong Emperor in Court Dress.jpg

 

홍력(弘曆)은 옹정황제가 재위하고 있을 때 보친왕(寶親王)에 책봉되었다. 1735년 8월 옹정황제가 암살당한 뒤에 신하들은 내관에게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 쓰인 액자 뒷면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오게 하여 밀서를 펼쳐보니 거기에는 "넷째 황자 홍력을 황태자에 봉하노니 짐을 뒤이어 황위를 계승하라. "고 씌여 있었다. 이에 홍력은 그 달에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연호를 '건륭(乾隆)'으로 고쳤다.



원래 홍력의 모후는 옹친왕(雍親王: 즉 옹정)의 비였을 때 딸아이를 한 명 낳았는데, 같은 날 해녕(海寧)에 사는 진각로(陳閣老)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 옹친왕의 비는 딸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옹친왕의 환심을 살 수 없을까 염려되어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거짓말하였다. 그리고는 집안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진각로의 사내아이를 안고 궁중으로 들어오게 하여 자기가 낳은 딸아이와 바꿔치기를 했다. 진각로의 집안에서는 항변할 수도 없었고 사실을 외부에 알릴 수도 없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홍력이 강남으로 여섯 차례 내려갔을 때 해녕으로 가서 그의 친부모를 몰래 만났다고 한다.


옹정제가 제정한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에 따라 1735년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즉위하였는데 이것은 옹정제의 아들 중 만주족을 어머니로 한 아들은 건륭제 뿐이었기 때문이다. 조부 강희제(康熙帝)의 재위기간(61년)을 넘는 것을 꺼려 재위 60년에 퇴위하고 태상황제가 되었는데, 이 태상황제의 3년을 합하면 중국 역대황제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다.

  조부 때부터의 재정적 축적을 계승하여 안정되고 문화적으로도 난숙한 ‘강희 ·건륭 시대’라는 청나라 최성기를 이룩하였다. 초기에는 민중을 계도하고, 만인(滿人) ·한인(漢人) 간의 반목을 막고, 붕당의 싸움과 황족의 결당을 금하는 등 내치에 전념하였으며, 만년에는 중가르 평정 2회(1754 ·1757), 위구르 평정(1759), 대금천(大金川) 평정(1749), 대 ·소금천(大小金川) 평정(1776), 타이완(1788) ·미얀마(1778) ·베트남(1789) ·네팔(1790 ·1792) 등의 원정과 평정 등 10회에 걸친 무공을 세워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불렀다. 또 조부 강희제를 본떠 남순(南巡) 6회, 동순(東巡) 5회, 서순(西巡) 4회의 내지 순회도 하였다. 그러나 많은 외정(外征)과 내순(內巡), 천수연(千戒宴) 등의 사치로 막대한 경비를 낭비하여 만년에는 쇠운을 가져왔다. 정치적으로도 그가 총애하던 화신(和)의 전횡과 관리의 독직(瀆職), 만주인 ·무관들의 타락 등이 1796년 백련교(白蓮敎)의 난 때 표면화되었고,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자 1795년 가경제(嘉慶帝)에게 양위했다.

  문화적으로는 그의 개인적 자질이 풍부하여 절정에 달했으며, 예수교 전도사들을 통해 서양의 학문 ·기술이 전래되고, 중국이 유럽에 소개되는 등 국제적 교통이 열렸다. 예수회선교사들은 그를 태양왕 루이 14세와 비교하였다. 한편 고증학의 번영을 배경으로 《사고전서(四庫全書)》가 편집되고 《명사(明史)》가 완성되는 등 수사사업(修史事業)도 활발하였다. 그리고 티베트의 다라이 라마의 권력기관으로 ‘가샤(티베트 지방정부)’ 조직을 정하고 구루카족이 침략하자 군대를 파견, 이들을 물리쳤다

  한편, 그는 아름다운 물건에 대한 취미가 선임 황제들보다 각별하여 자금성의 남쪽에 있는 구월관 안에 만든 작업장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곤 했다. 또한 그는 강희제처럼 예수회의 신부들의 예술적인 재능과 과학적 지식만은 아낌없이 받아들였다. 이들 서양의 '조언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견륭제로부터 회화와 건축술의 재능을 높이 인정받았던 이탈리아 선교사 주세페카스틸리오네였다. 건륭제는 1747년부터 1759년까지 완벽함과 밝음을 뜻하는 여름 궁전인 원명원의 동북쪽에 서양식 궁정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그 설계도를 이 밀라노인과 수학자이자 수리학에 정통한 천문학자인 프랑스인 미셀브누아, 두 사람에게 맡겼다.

  건륭제의 긴 통치기간 중에 자금성 안에서 보수와 재건이 그의 취행에 따라 끊임없이 이루어졌지만, 특별히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장소가 한군데 있다. 영수궁이 그곳이다. 건륭제는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에서, 61년간 통치를 했던 할아버지보다 더 오래 권력을 유지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60년간의 통치기간이 끝나면 영수궁에 칩거하겠다는 뜻을 오래 전부터 밝혀왔다. 그에 따라 영수궁은 1772년에서 1776년 사이에 그의 취향에 맞게 성대하게 보수되었다.


홍력은 재위 기간에 즁갈부락을 평정하고 천산남로(天山南路)의 대소화탁목(大小和卓木)의 세력을 제거하여 변경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관리를 강화하였으며, 영국 특사 마카르니(George Macartney)가 건의한 침략적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전쟁에서 장수들이 잘난척하며 의시대면 그는 그들의 무공을 완벽하다 칭찬하고 자신은 완전히 늙었다고 낮추었다.

천산남로를 평정할 때 청나라 군은 소화탁목(小和卓木)의 비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절세의 미인으로 몸에는 항상 특이한 천연향이 풍겨나와 사람들은 그녀를 향비(香妃)라 불렀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에 현혹된 홍력은 그녀를 자기의 비로 맞이하고 싶은 마음에 그녀를 궁궐로 데리고 가라 명한 다음 특별히 회교도를 불러 그녀를 시중들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궁궐 안 서원(西苑)에 회족(回族)의 집과 교회를 지어놓게 하였다. 그러나 향비는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굳건히 절개를 지켰다. 하루는 홍력의 명을 받은 궁녀가 다시 찾아가서 향비를 설득하였지만 그녀가 칼날이 시퍼른 비수를 사납게 꺼내는 터에 깜짝 놀란 궁녀는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홍력이 예기치 못하게 불행한 일을 당할 것을 염려한 태후는 홍력이 교외로 제사 지내러 나간 틈을 이용하여 향비를 불러 그녀에게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향비가 "죽음으로 절개를 증명해 보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태후는 그것을 허락하였고 그녀는 바로 자살하였다. 홍력은 궁궐로 돌아온 후 그 사실을 알고 병을 얻어 드러누웠다. 그후 향비의 시신을 신강(新疆) 카슈(喀什)로 돌려보내 장사지내주고 향비의 무덩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최근 전문가들은 많은 고증을 거쳐 향비가 홍력의 용비(容妃)였으며, 신강 위구르족 출신으로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은 곽집점(?集占)의 반란 평정 전쟁에 참가하는 등 민족단결 촉진에 많은 공헌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궁궐에 들어온 후 홍력과 태후의 총애를 받아 귀인(貴人)에서 빈(嬪)으로 승진하였다가 다시 더 나아가서 용비가 되었고, 위구르족 전통 복장을 하고 회족 음식을 먹으며 홍력을 따라 각지를 주유하는 등, 궁궐에서 28년간 생활하다가 58세에 병으로 죽어 동릉(東陵)에 묻혔다는 것이다. 그녀의 관 위에는 아랍어로 된 코란경전이 씌여져 있고, 그녀의 이야기는 중화민족단결사의 미담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홍력은 여섯 차례나 강남으로 내려가 유명한 도시들을 두루 유람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사치와 낭비가 심하여 백성들에게 많은 피해를 끼쳤다.

홍력이 일으킨 문자옥은 청대 전체를 통털어 횟수가 가장 많았다. 한번은 문인 호중조(胡中藻)가 "한 줌의 심장으로 청탁을 논한다.(一把心腸論濁淸)"라는 시구를 썼는데, 홍력은 그것이 청나라 조정을 비방한 것이라 여기고 호중조와 그 일족을 모두 죽여 버렸다. 또 한번은 홍력이 심심해서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황조문헌통고(皇朝文獻通考)>> 등을 편찬한 오고전서관(五庫全書館)에 들어갔다. 그때 오고전서관의 책임자였던 기윤(紀?)은 몸집이 뚱뚱하여 더위를 많이 타는데다 날씨마저 찌는 듯 하여 상반신을 드러내놓고 변발을 머리 위에 올린채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홍력이 들어오는 것을 본 기윤은 옷을 입을 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탁자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홍력은 일부러 못본척 하고 기윤이 숨어있는 탁자 옆으로 다가가서 조용히 앉았다. 한참 지난 후 기윤은 땀에 축축히 젖었다. 그는 오고전서관 안에 소리없이 정적만 흐르자 "라오터우즈(老頭子: 영감)가 나가셨나?"라고 물으면서 밖으로 기어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는 옆에 앉아 있는 홍력을 보고 깜짝 놀라 황급히 옷을 걸쳐입고는 엎드려서 죄를 청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나를 '라오터우즈(老頭子)'라 불렀소? 이치에 맞으면 죽음을 면할 수 있겠지만 이치에 맞지 않으면 죽음을 면키 어려울 것이오."라는 홍력의 물음에 기윤은 "'라오터우즈(老頭子)'란 말은 경성에 사는 신하와 백성들이 보편적으로 황제를 칭하는 말이지 결코 신이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황제는 만세라 칭하니 어찌 '라오(老)'가 아니겠으며, 황제는 만백성의 위에 계시니 어찌 '터우(頭)'가 아니겠으며, 황제는 하늘의 아드님(天子)이시니 어찌 '즈(子)'가 아니겠습니까!"라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홍력은 화를 가라앉히고 웃으면서 "그대는 정말 달변이군. 내 그대의 죄를 사면하리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홍력은 기윤을 더욱 신임하게 되었으며, 그 덕에 기윤은 계속하여 승진을 이어갈 수 있었다.

홍력은 재위 후기에 화신(和?)을 20년간 임용하였다. 중국역사상 최대의 탐관오리인 화신이 고위 관직에 있었던 20년간 탐관오리가 극성하여 정치는 부패해지고 각처에서 농민봉기가 끊이지 않았다.


홍력은 일찍이 아홉 차례나 곡부(曲阜)로 순행을 나갔는데, 두 번째로 곡부에 갔을 때 풍경이 아름다운 고반지(古泮池: 곡부성 남쪽에 위치한 반원형의 연못) 북쪽에 새로 지은 행궁(行宮: 즉 반궁<泮宮>)에 머물렀다. 그는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천년의 고백성 푸르름을 더하고, 비온뒤 봄꽃이 물위에 붉게 비치네.(千年古栢城頭綠, 過雨春花水面紅)"라고 읆조렸다. 그는 눈앞의 곡부성이 명나라 때 동쪽 교외의 옛성을 옮겨온 것이라는 내용을 책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어찌 노(魯)나라 유적에 속하는 고반지이겠는가? 고반지는 당연히 옛성에 있었을 것이다. 이에 그는 붓을 들어 "십리 동쪽 교외의 옛 노나라성이 있는데, 새로 지은 성에 어찌 반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으리오(十里東郊舊魯城, 新城安得泮池名)"라는 시구를 써내려갔다. 이 시는 비석에 새겨져 고반지 옆에 세워져 있다. 홍력은 네 번째로 곡부에 갔을 때 사료를 폭넓게 조사한 결과, 곡부의 옛성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는데 송나라 때 동쪽 교외로 옮겼다가 명나라 때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가져 온 것이기 때문에 고반지가 바로 그 자리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래서 그는 지난 번 시에서 자신이 내린 결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한 나머지 다시 <주필고반지(駐?古泮池: 고반지에 머물며)>라는 시를 한 수 썼다.


 此地非常地         여기는 평범한 곳 아니고,

 新城卽故城         새 성이 옛 성인 곳이라네,

 館仍今日駐         오늘도 숙소에 머무노니,

 池是故時淸         연못이 옛날처럼 맑구나.

 

시를 다 쓴 후에 책을 덮고 깊은 생각에 잠긴 홍력은 앞에서 시를 잘못 지은 것은 자신이 책을 자세히 읽지 않아 하나만 알고 둘을 몰랐기 때문이며,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경솔하게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을 남겨주기 위해 그는 자신이 잘못 쓴 시에 대해 <고반지증의(古泮池證疑)>라는 글을 지어 비석에 새기게 한 후 고반지 옆에 세워두게 하였으니, 그 비석은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1795년말 홍력은 황위를 황태자에게 선양하기로 결심하고 조서를 내렸다.

"짐은 25세에 황위를 계승하여 당시에 하늘에 맹세하기를, 만약 60년간 재위한다면 반드시 스스로 황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감히 할바마마(강희제를 가리킴)와 같은 해 만큼 황위에 있지는 않겠다고 하였노라. 지금 짐이 재위한지가 만 60년이 되어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없으니 15번째 황자 옹염(?琰)에게 황위를 선양하기로 결정하였도다. 그가 정사를 처리하기 어려운 것은 당분간 내가 대신 처리할 것이니라."

 

화신 등의 대신들이 강력하게 만류하였지만 홍력은 그것을 듣지 않고 1796년 정월 초하루 태극전(太極殿)에서 선위의식을 거행한 후 자신은 태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조정의 실권은 여전히 그가 장악하고 있었다.

1799년 정월 홍력은 병이 나서 많은 명의들의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초사흘날 양심전(養心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홍력이 죽은 후 그의 묘호를 고종(高宗)이라 하였으며, 역사에서는 그를 건륭황제라 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