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世界史/[지구촌]中國

청나라의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

好學 2009. 10. 25. 21:49

 

강희제(康熙帝)

 

 

 

강희제(康熙帝, 순치(順治) 11년 음력 3월 18일 (1654년 5월 4일) ~ 강희(康熙) 61년 음력 11월 13일 (1722년 12월 20일))는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1661년 ~ 1722년)이자 1644년 숭정제의 자살 후 명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 청나라 군대의 입관(入關) 이후 중국을 다스리는 통일 황조로의 두 번째 청나라 황제이기도 하다. 애신각라(愛新覺羅), 현엽(玄燁)제3대 황제인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이자 순치제의 후궁 출신인 효강장황후 동가씨(孝康章皇后 ?佳氏)의 소생으로서 자금성(紫禁城)에서 태어난 최초의 청나라 황제이다.

1661년 부황 순치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라 1722년까지 재위하여 재위 기간이 61년으로 중국의 역대 300여 명의 황제 가운데 가장 길다. 황위에 오를 당시 정치적으로 매우 급변적이었던 상황과 8살이라는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가 악재로 작용하여 제왕학 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즉위하였으나 자신이 평생 황제로 살아야 할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틈틈이 제왕학 수업을 지속하면서 일찍 정치를 깨달아 각각 내란과 국가적 위기였던 오배의 난삼번의 난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고 정성공의 아들 정경이 다스리던 대만을 복속시켜 진정한 중국 통일을 달성하였다. 근대화의 발판을 서서히 마련하던 러시아와의 갈등도 있었으나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만주와 연해주 쪽의 국경을 확정하고, 청나라에 대항하던 북방의 몽골 오이라트 준가르의 칸 가르단의 군사를 자신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 격파하여 북방의 안정을 가져왔다. 모두 그에겐 만만치 않은 강적이어서 처음엔 크게 밀렸으나 최후에는 모두 승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에는 그의 탁월한 통솔력과 카리스마, 치밀한 군사 전략, 박식함 및 굴하지 않는 의지와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안목이 작용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강력한 절대 황제권을 수립하였다. 특히 그의 대만 수복은 현재 대만 문제가 이슈가 되는 상황에서 중국 본토를 다스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야심차게 기획해 대대적으로 선전중인 하나의 중국(一個中國) 정책에 큰 원동력이 되고 있다.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제왕이 갖춰야 할 덕목을 갖추려 노력하였고, 박학다식하고 매사에 빈틈이 없어 신하들과 백성들이 매우 존경하였다. 또한, 대편찬 사업을 시행하여 문화 발전에 공헌하고, 《강희자전》을 편찬하여 현대 중국어 어법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강경하고 단호했던 외정과 달리 백성들에게는 따뜻한 선정을 베풀었다. 이렇게 강과 유의 방법을 적절히 이용하였고, 지배층인 만주족과 피지배층인 한족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여 차별을 없앴으며, 한족 출신의 인재 역시 대신으로 삼아 정사를 의논하였다. 그러나 이들 인재들과 황족을 제외한 만주족 귀족 중에서는 재상으로 발탁된 사람이 별로 없었고, 강희제는 강화된 황권으로 거의 황제 중심의 독단적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 전제 독재의 가능성이 보일 수도 있었으나, 스스로 황권을 조절하고 정치의 일부는 재상들이나 대신들과 의논하였으며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정을 베풀었음에도 자식들의 훈육에 실패하여 자신의 황태자를 두 번 세우고 두 번 폐하였으며 강희제 말년의 피비린내나는 황위 쟁탈전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내외로 청나라의 국위를 튼튼히 세워 당시까지도 중국 최고의 제왕이자 성군으로 불리던 당 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보다 더 뛰어난 업적을 남겨 130년이 넘는 청나라의 전성기이며 중국 역대 황조 중 마지막 태평성대인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일으켜 아들인 옹정제(雍正帝), 손자인 건륭제(乾隆帝)까지 태평성대가 지속되었으며,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자 명군, 즉 천고일제(千古一帝, 천 년에 한 번 나올 만한 황제) 또는 연호를 따서 강희대제(康熙大帝)로 칭송받으며 또는 그의 지도력과 결정력, 통찰력, 박학다식함을 높이 사서 ‘최고경영책임자(CEO)가 갖춰야 할 덕목을 모두 갖춘 황제’로도 불리며 아직도 많은 중국인에게 크게 존경받는다. 그는 당시 서양에서 역시 절대 왕정을 수립한 루이 14세, 러시아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표트르 1세 등 업적이 많은 유럽의 여러 군주들과 더불어 당시 아시아를 대표하는 통치자였다. 또한, 황후 4명 등 총 64명의 후비(后妃)와 잉첩(?妾)을 거느려서 청나라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후궁을 둔 황제이며 아들 35명과 딸 20명을 두어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자녀를 둔 황제이기도 하다.

초기 생애

1654년(순치 11년) 5월 4일북경 자금성의 동쪽 후궁 동육궁(東六宮) 중 하나인 경인궁(景仁宮)에서 순치제의 후궁인 강비(康妃) 동가씨에게서 태어났다. 현엽은 강비 동가씨의 유일한 소생이라, 태어나면서부터 경인궁에서 어머니에게 금지옥엽처럼 키워졌다. 현엽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남달라 책을 읽으면 바로 암송하고 그 뜻을 능히 꿰뚫어 즉시 풀이하였고 궁술에 뛰어나 말을 타면서 토끼를 바로 쏘아 맞히는 등 문무를 겸전하여 부황 순치제와 조모인 효장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5살 때부터 제대로 황자들이 배우는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인시(새벽 4시)에 일찍 일어나 부황과, 조모 그리고 적모(嫡母)인 황후, 모비에게 문안을 올리고 진시(아침 8시)에 나가 밤늦은 술시(저녁 8시)까지 문연각에서 스승의 지도 아래 공부하였는데도 불평불만이 없었다고 한다.

7살 때인 1660년(순치 17년)에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순치제의 4남이 죽자 뒤이어 황태자 자리에 올랐는데 어머니 동가씨의 가문이 청나라 건국 때의 큰 공신 집안이자 명문가이어서 그녀가 다른 후궁에 비해서 위세가 대단하고 동가씨의 지위 역시 황귀비로 후궁 중 가장 높았으며,당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孝惠章皇后)가 아들이 없자 총명한 현엽을 눈여겨보던 순치제는 그를 황태자로 삼은 것이다. 순치제는 본래 효장태후의 조카딸을 황후로 맞아들였으나 행실을 이유로 폐위시켜 정비(靜妃)로 삼아 자금성 안의 영수궁(永壽宮)에 구금하였고 효장태후의 주선으로 효장태후의 조카손녀, 즉 순치제의 조카뻘을 황후로 삼으니 그녀가 효혜장황후였다. 하지만 억지로 결혼을 해서인지 순치제는 효혜장황후를 멀리하였고 오히려 궁녀 출신의 동악씨를 총애하여 현비(賢妃)로 삼아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가 사는 승건궁(承乾宮)을 찾았다.

하지만, 그 해 11월에 자금성 안에 천연두가 퍼지고 현비 동악씨가 천연두에 걸리자 순치제가 총애하던 현엽을 동악씨의 양자로 주려 했으나, 효장태후와 생모인 동가씨가 황위 계승자인 현엽이 천연두에 옮을 것을 염려하였기에 이에 완강히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그러나 현엽은 어찌 된 일인지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얼마 안 되어 다행히 나았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660년(순치 17년) 12월, 동악씨는 결국 차도가 보이지 않고 죽자 순치제는 즉시 동악씨를 효헌단경황후(孝獻端敬皇后)로 추서하고 태묘(太廟)에 그 신주를 모셨다. 그리하고 나서, 순치제는 이례적으로 자신이 총애하던 태감을 오대산에 있는 청량사(淸凉寺)에 보내어 동악씨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그러나 본래 출신이 높은 귀족 집안이 아니고 또한 죽은 황자, 그것도 서출 출신의 황자가 이례적으로 황태자의 작위를 받고 그 어미는 황후에 봉하자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반대가 매우 컸다. 반대가 심하자 순치제는 그에 대한 항의와 황태자였던 자신의 4남을 잃은 슬픔까지 겹쳐서 1661년(순치 18년) 1월 하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제위에서 물러나 승려가 되려고 이미 자신의 태감이 있는 오대산 청량사로 출가하고 주지 옥림수(玉林秀)에게서 행치(行痴)라는 법명을 받았다.

당시 대신들은 순치제에게 빨리 돌아오라 종용하였으나 순치제는 끝내 듣지 않고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렇게 황위를 버리고 떠나 승려 행치로 살게 된 순치제 복림은 51년 뒤인 1712년(강희 51년) 75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한다. 물론 순치제가 정말로 천연두로 붕어하였다고도 하였으나, 어찌 되었건 황위가 유고 상태인 것은 분명하였다. 당시 황궁에서 배분이 가장 높았던 황태후 효장태후는 아들인 순치제가 출가하자 매우 놀라며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조정의 최고 신료인 영시위내대신(領侍衛內大臣) 6인과 각지의 친왕·군왕들을 불러들였다. 그중 조정의 수장인 정황기 출신의 감국대신 겸 이부상서 색니(索尼), 양황기 출신의 병부상서 오배(鰲拜), 정백기 출신의 형부상서 소극살합(蘇克薩哈), 역시 양황기 출신의 호부상서 알필륭(?必隆)에게 일단 황궁을 봉쇄하고 궁인들에게 입단속을 시킨 뒤에 고명대신 겸 중당보정대신으로 임명하여 새 황제를 보필케 하였다.

조정은 1661년(순치 18년) 2월 7일에 순치제가 천연두로 붕어하였다고 사실을 숨겨 공식 발표하였고, 국상을 준비하였다. 2월 17일에 효장태후는 순치제에게 세조(世祖)라는 묘호와 장황제(章皇帝)의 시호를 올리고 빈 순치제의 관을 효릉(孝陵)에 안장하였다. 뒤이어 8살의 황태자 현엽을 청나라의 새 황제로 추대하니 이가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성조 강희인황제(聖祖 康熙仁皇帝)이고, 어머니 강비 동가씨를 황태후에, 당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 역시 황태후로 격상하고, 조모인 효장태후는 태황태후로 격상하였으며 이듬해인 1662년연호순치(順治)에서 강희(康熙)로 바뀌었다. 이 새로 정한 연호인 강희의 ‘강’(康) 자는 안녕과 평화, ‘희’(熙) 자는 조화와 흥성을 뜻하므로, 강희는 바로 평화로운 조화를 뜻한다.

만약 효장태후가 빨리 영시위내대신을 부르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면, 황궁에 보위를 놓고 쟁탈전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으나 효장태후는 이를 신속히 대처하고 황태자 현엽을 제위에 올려 이런 화를 막을 수 있었다. 1662년(강희 원년)에 중국 서남부 운남으로 쫓겨가 겨우 명맥만 유지한 남명(南明)의 황제 영력제(永曆帝)가 청군과 평서왕 오삼계(吳三桂)에게 처참히 죽임을 당해 명나라의 황통을 이어받아 청나라에 비협조적인 여러 한족에게 은밀히 지지받던 남명은 명나라 멸망 후 18년 만에 이렇게 멸망하였다.

오배의 난

강희제는 8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아직 친정은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보정대신들이 그를 보필하였다. 본래 어린 황제가 즉위하였으면 황태후태황태후수렴청정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미 황태후였던 자화황태후(慈和皇太后), 즉 강희제의 생모인 효강장황후 동가씨는 강희제가 등극한 지 얼마 안 되어 병에 걸리고 2년 만인 1663년(강희 2년)에 24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다른 황태후이며 강희제의 적모(嫡母)인 인헌황태후(仁憲皇太后), 즉 순치제의 황후인 효혜장황후는 황태후 서열로는 효강장황후보다 위였으나 엄연히 위에 시어머니인 효장태황태후가 있어서 수렴청정할 권한은 쥘 수 없었다. 대신들 사이에서 수렴청정할 것이라 예상하던 효장태황태후는 수렴청정을 직접 하는 대신 네 명의 보정대신들에게 정책 최고 의결권을 내렸다.

보정대신들은 어린 황제가 훗날 환관들에게 농락될까 봐 순치제 때 설치되었던 명나라의 동창(東廠, 환관의 수뇌부이며 황제 직속 정보기관)과 비슷한 기구인 십삼아문(十三衙門)을 폐지하여 환관들을 정무에서 축출하고 원래 순치제 때 폐지된 내무부(內務府)를 다시 설치하여 황제에게 충성스러운 만주족 충복들로 하여금 환관들을 대신하게 하였다. 보정대신은 모두 꽤 상당한 권력을 누렸으나, 그중에서도 병부상서 오배가 제일 권력이 막강하였다. 오배는 백성들의 땅을 불법으로 획책하는 등 갖은 전횡을 일삼았으나 병권을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친정의 권한이 없는 강희제와 오배의 세력에 비하여 매우 미약한 대신들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일단 강희제는 오배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일부러 장정들을 불러 몽골 씨름을 하도록 하였다. 또한, 틈틈이 제왕학 수업을 잊지 않고 배웠는데 그 스승이 바로 명나라의 마지막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한 제세(濟世)였다.

 

강희제는 오배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보정대신인 색니의 손녀를 황후로 맞아들이기도 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강희제의 정궁황후인 효성인황후(孝誠仁皇后) 혁사리씨이다. 1667년(강희 6년) 조상의 예법에 따라 14살이 된 강희제는 친정을 시작하였고 성인 의례와 함께 정식 즉위식을 치렀으나, 그 해에 자신을 보호해준 색니가 소극살합에게 강희제를 돌봐 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고, 소극살합이 권력을 잡으려 하였으나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오배는 소극살합에게 날조된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교수시키고 자신이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오배는 소극살합을 죽이는 과정 중 편전인 건청궁에서 강희제와 언쟁을 벌이다 심지어는 강희제의 용상에까지 가서 강희제를 협박하였다. 이는 분명 군주 기만죄(기군죄)였으나 아직 힘이 약한 강희제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다른 보정대신인 알필륭은 오배의 편에 붙었으나 오배의 전횡을 부추기지도 그렇다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선황 순치제의 유조를 받은 고명대신 소극살합을 죽이고도 계속 더 많은 횡포를 일삼는 오배를 보고 강희제는 군사를 이끌고 선수를 치려 했으나 조모인 효장태황태후가 이를 말리고 사태를 지켜보라 일렀다. 하루는 소극살합을 죽인 오배가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고 있었는데 강희제가 그를 문병 갔다. 오배는 강희제에게 위문을 받은 뒤 다시 자리에 누우려 할 때, 그의 품속에서 단도가 발견되었다. 강희제는 만주족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도를 찬 것은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전통이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으나, 분명 오배가 선수를 틈타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을 안 강희제는 치밀하게 오배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본격적으로 세웠다. 강희제는 오배에게 덫을 놓아 정치적으로 상의할 일이 있으니 오배를 자금성으로 들라 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1669년(강희 8년)에 오배는 결국 자신의 사병들과 휘하 장수들의 군사를 이끌고 자금성에 침입하여 강희제를 죽이려 하였으나, 오히려 강희제는 북경 내성을 지키는 구문제독(九門提督) 오육일(吳六一)의 내성·황성 방위군과 황궁 친위군으로 오배의 군사들을 포위하여 몰살시켰다. 오배는 군사가 몰살되었다는 소식에 분개하고 단신으로 건청궁으로 들어가 강희제를 위협하였으나 강희제는 몽골 씨름으로 단련된 젊은 무사들을 불러내어 오배를 추적하여 체포하였다. 강희제는 오배가 군주 기만죄인 기군죄 등 30개의 대죄로 30번 처형되어야 마땅하지만 선황인 태종세조를 전투에서 온몸으로 막은 공을 참작하여 가산을 적몰하고 목숨만 보전하게 하고 유배형을 내렸다. 그러나 언제 다시 반기를 들지 모른다는 색액도 등 대신들의 주장으로 귀양을 보내기도 전에 결국 사약을 받아 처형되었다. 이로써 강희제는 진정한 친정을 하게 되었으며, 신하들에게 막중한 권한을 맡기지 않았고 강력한 황권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삼번의 난

청년 시절의 강희제
 

오배를 축출한 이후, 강희제는 오배보다 더 큰 세력인 삼번(三藩)을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번(藩)은 청나라의 특수 행정구역으로 주로 변방에 설치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삼번은 중국 남쪽의 세력이 강대한 3명의 화북 출신 한족 번왕을 말하는 것으로 운남의 평서왕(平西王) 오삼계(吳三桂), 광동의 평남왕(平南王) 상가희, 복건의 정남왕(靖南王) 경중명의 아들 경계무였는데, 경계무는 작위를 받은 지 얼마 안 가 죽고, 그 작위는 그 아들인 경정충(耿精忠)이 승계하였다. 이들은 순치제 때, 청나라의 중국 통일을 크게 도와 번왕에 책봉됨과 동시에 막강한 군사권과 남해에서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축적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지방에서의 행정권, 사법권까지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 막강한 세력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 무기를 제조하고 은자를 함부로 찍어서 물가가 크게 올라갔다. 이 때문에 삼번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은 매우 컸다. 특히 오삼계는 홍타이지의 막내딸이자 강희제의 막내 고모 화석건녕공주(和碩建寧公主)를 며느리로 둔 황실 인척이어서 오삼계에게 함부로 해코지할 수 없었다.

또한, 매년 조정에서 3천만 냥의 많은 은자를 삼번에게 내려서 국고는 거의 동날 지경이었다. 삼번은 남쪽의 해적들과 서쪽의 야만족들을 토벌하는 명분으로 계속 막대한 돈을 요구하였다. 이를 참다못한 조정의 일부 신료들이 평남왕 상가희가 자신의 작위를 평남왕세자 상지신(尙之信)에게 물려주고 은퇴를 요청하자 즉시 삼번의 군대 철수령과 삼번 철폐에 관한 주청을 올리고 강희제는 이를 윤허하였으나, 그들은 듣지 않고 점점 조정을 장악한 자신들과 태생적으로 다른 만주족에 불만을 나타내어 1673년(강희 12년) 2월 2일에 같이 군사를 일으켜 조정을 위협하니 이것이 삼번의 난(三藩之亂)이다. 삼번은 자신들의 거병 명분으로 ‘반청복명’(反淸復明)을 내세웠으나 원래 그들은 청나라에 투항하여 명나라의 멸망에 큰 몫을 하였기 때문에, 다시 청나라를 저버리고 명나라를 부흥시키자는 이 명분은 매우 모순적이었다. 강희제는 오삼계에게 조정에 진출해 있던 오삼계의 장남이자 평서왕세자 오응웅(吳應熊)을 건네줄 테니 회군하라 권유하였으나 삼번 연합군은 이를 듣지 않고 계속 진군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오응웅과 그 아들 오세림은 체포되어 참수당하였다.

 

오삼계
 
 

3개월 내에 삼번 연합군은 중국 남부를 거의 점령하였고, 지금의 섬서성하남성까지 진군하였고 섬서와 하남 지역을 지키는 녹영의 장군들은 거의 삼번에게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삼번 연합군의 진군에 큰 저항은 없었다. 그 군세가 엄청나 몽골의 칸들이 반역자인 오삼계에 대항하기 위해 지원을 해주겠다 하였으나 강희제는 이를 거절하고 자신의 힘으로 국난을 헤쳐가려 하였다. 그러나 오삼계는 돌연 북경으로 향하는 군사들의 진군 속도를 늦췄는데 청나라 조정의 군사를 너무 만만히 봐서 거만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섬서성, 감숙성을 관장하던 제독인 왕보신은 오삼계의 삼번 연합군을 잘 막았으나, 오삼계를 물리쳤다는 자신을 역시 너무 과신하여 조정에 반대하고 독자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양기륭(楊起隆)이란 사람이 자신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의 셋째 아들인 주자형(朱慈炯), 즉 주삼태자(朱三太子)로 자칭하고 사람을 모아 북경을 몰래 기습하였고 강희제는 효장태황태후를 모시고 옛 수도 성경(盛京)으로 도망가려 하였다. 그러나 양기륭이 북경에 쳐들어올 것이란 정보를 알아챈 청군이 양기륭의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와해하였다. 삼번의 난 역시 곧 시간이 갈수록 물자가 많은 조정에 유리해져 갔고, 곳곳에서 도해(圖海)·주배공(周培功) 등 훌륭한 장수들과 팔기군의 활약 덕분에 나태해진 삼번의 군사들을 대파할 수 있었다. 강희제는 삼번의 군사들을 물리치는 데 한족 장수들을 대거 등용하였는데 이들 한족 장수들은 만주족이 잘 모르는 삼번의 약점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손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1676년(강희 15년)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은 겁을 먹고 자살하고 경정충이 관군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경정충은 곧 청군에게 끌려와 1681년(강희 20년)에 반역에 공모한 죄로 사형당한다.

1678년(강희 17년)에 삼번의 맹주 오삼계는 스스로 황제를 참칭하고 국호를 주(周), 연호를 소무(昭武)라고 하였으나 노환으로 그 해 8월에 죽었다. 이로 말미암아, 오삼계군의 군세는 크게 약해졌고, 1681년(강희 20년)에 오삼계의 손자이자 오씨의 주나라, 즉 오주(吳周)의 두 번째 황제인 오세번곤명(昆明)에서 자살을 하고 청군이 곤명을 함락시킴으로써 8년에 걸친 삼번의 난은 끝이 났다. 이 반란 이후에 강희제는 번 제도 자체를 폐지하고 친왕들과 군왕들에게 최소한의 사병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녹영이나 팔기군에 배속시켜 친왕들의 군 지휘권을 거의 뺏어 버렸다. 이 반란은 강희제의 황권과 군 통수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당시 베트남에서도 두 명가인 찐(鄭) 가문과 응우옌(院) 가문이 1572년 분란이 시작된 것이 1627년 찐-응우옌 전쟁으로 악화되어 46년 동안 쉬지 않고 싸워 베트남의 사정이 매우 피폐하였는데, 삼번의 난이 일어난 해인 1673년(강희 12년)에 강희제는 이 두 가문을 잘 중재하여 101년간이나 계속된 두 가문의 불화를 씻어주었다.

대만 수복

삼번의 난을 끝으로, 중국 본토는 일단 잠잠해졌다. 그러나 오직 대만, 팽호 제도, 금문, 하문 등 동남 36개 섬들이 아직 청나라의 소속이 아니고 대만 호족인 정성공(鄭成功)이 통치하고 있었다. 정성공은 남명융무제에게서 연평군왕(延平郡王)의 작위를 받고 명나라의 황실 성씨인 주(朱)씨의 성을 하사받고 국성야(國姓爺)로 불리다가 1662년(강희 원년)에 이미 죽고, 그 장남인 정경(鄭經)이 지배하고 있었다. 대만 군사들은 삼번의 난 때부터 때때로 본토로 쳐들어와 해안가 마을을 약탈하고 마을 백성들을 죽이는 등 피해가 났다. 청나라 수군이 여러 차례 대만 수군과 해전에서 싸웠으나 바다에서 노련하고 네덜란드의 기술을 받아들였으며 함선까지 빨랐던 대만 수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강희제는 이에 일단 대비책으로 대만과 가까운 광동, 복건, 강소, 절강 등 동남 4성의 주민들을 해안에서 30리 이상 떨어진 곳으로 옮기며 동남 4성과 대만의 무역을 금지하는 해상 금지령을 선포하여 대만의 숨통을 끊었다. 하지만, 이 해상 금지령도 청나라 쪽에 피해가 컸는데 당시 해안가 주민들은 대만과 무역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해안가 주민들을 내륙으로 옮길 때, 이들의 불만을 컸으나 강희제는 특별히 이들에게 세금을 3년간 전부 면제하고 게다가 내륙에서 살 돈까지 줘서 무마시킬 수 있었다.

강희제는 이어 과거 정경의 부하였던 시랑(施琅)을 수군 총제독으로, 중국 동남부와 대만 쪽 전문가인 요계성(姚啓聖)을 병부상서급의 권한을 주고 복건, 절강 총독으로 삼아 대만을 점령할 작전을 세웠다. 대만은 원래 정성공 사망 이후부터, 정경을 비롯한 정성공의 친족들이 후계자 쟁탈로 사정이 매우 피폐해져 있었다. 강희제는 잘 훈련된 팔기 수군과 서양 선교사로부터 자문을 구해 만든 최신식 대포를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대만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사이에 정경은 죽고 그의 아들들인 정극장(鄭克藏)과 정극상(鄭克?)이 연평군왕 자리를 놓고 싸워 결국 정극상이 왕위에 올랐으나, 청군의 대대적인 공격과 그에 따른 대만 상륙에 결국 정극상은 1683년(강희 22년) 7월에 변발과 호복 차림으로 청에 항복하여 강희제는 진정한 중국 통일을 달성하였다.

러시아와의 갈등

1680년대러시아 제국로마노프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고, 또한 강희제가 러시아와의 갈등이 있던 당시는 러시아의 근대화와 최전성기를 이루어낸 표트르 1세의 초기 시대였다. 이미 이전부터 러시아는 군대를 동원하여 만주로 내려왔다. 과거 순치제 때 러시아와의 국지적인 전쟁으로 청나라는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조선에 러시아와 싸울 군사를 요청하였고, 조선은 군사를 1654년(순치 11년)과 1658년(순치 15년)에 두 번 파병하여 러시아군과 싸웠는데, 이것이 조선의 나선 정벌이다. 그로부터 30여 년 뒤, 러시아는 표트르 1세가 강력한 개화 정책 아래 근대식으로 바뀐 군대로 계속 청나라의 동북쪽을 침략하였고 일부는 북만주에 주둔하여 심지어는 근처에 살던 만주인에게 보드카를 선물로 주어 취하게 한 다음 기습을 감행하여 그 부족의 거의 모든 장정을 죽이고 아녀자들을 겁탈하기도 하였다. 강희제는 이에 분노하여 러시아에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러시아는 그에게 선물을 보내고 통상 자유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가 계속 송화강까지 세력을 넓히려 하자, 강희제는 먼저 국경에 애혼성(愛琿城, 아이훈 성)을 쌓았으나 계속 러시아가 야욕을 드러내자 그에 강경책을 써서 러시아의 국경 요새인 아르바진을 공격하였다. 아르바진을 점령하였으나 러시아군은 물러나지 않고 뺏긴 아르바진 요새를 수복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청군과 러시아군이 흑룡강 부근에서 국지적으로 싸우고 휴전하기를 반복한 뒤에, 1689년(강희 28년)에 강희제는 영시위내대신이자 자신의 처숙(妻叔)인 색액도를 흠차대신으로 명하여 러시아와 협상을 보게 하였고 러시아와 청나라 대표가 네르친스크에서 만나 헤이룽강의 지류인 고르비트사 강스타노보이 산맥을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경으로 확정 지으니, 이것이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이 조약에서 청나라의 제안이 대부분 수용되어, 청나라는 동북쪽의 넓은 영토를 얻게 되었다. 또한, 청나라와 러시아 간의 무역에도 자유를 보장하였으나, 러시아에는 그다지 득을 볼 만한 조항은 많지 않아, 훗날 함풍제의 치세 때, 러시아가 애로호 전쟁에서 청나라의 원조를 빌미로 만주와 연해주의 많은 땅을 도로 가져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몽골과 티베트 원정

 

몽골 초원은 홍타이지 이후 청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조공을 올리고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이미 1675년(강희 14년) 차하르 부족이 당시 삼번의 난으로 청나라에 생긴 혼란을 틈타 중원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노한 강희제는 몽골을 내몽골외몽골로 나누어서 부족 간의 규합을 막으려 하였다. 몽골이 청나라에 복속된 지 수십 년이 지나고, 몽골의 여러 부족은 표면적으로나마 청나라에 충성을 바쳤으나, 그 중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 부족에 뿌리를 둔 초로스 칸가(汗家) 출신의 준가르(準喝爾) 부족의 칸인 가르단(喝爾丹)이 세력을 모아 몽골과 티베트를 통일하여 라마 제국을 건설할 포부를 품고 청나라에 대항할 조짐을 보였다. 이미 가르단은 1677년(강희 16년) 오이라트 부족을 통합하고 1682년(강희 21년)에는 타림 분지까지 점령하였다. 그런 다음 이들은 동투르키스탄을 침범하여 점령하였고 이제 청나라가 다스리는 중원을 노리기 시작하였다. 준가르는 자신들이 군사를 일으킨 명분으로 옛 원나라대칸만주인이 아닌 몽골인으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준가르는 청나라를 견제한 러시아와 티베트에 원조를 받기도 하였는데 심지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는 가르단에게 보슈그투 칸, 즉 대칸의 직함을 내렸다.

또한 1688년(강희 27년), 준가르는 몽골 초원의 다른 부족인 할하 부족의 땅을 점령하고 거의 모든 부족민을 죽였다. 살아남은 할하족은 고비 사막을 넘어 강희제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고 준가르의 군사들이 청나라의 영토를 침략하자, 1690년(강희 29년) 7월 강희제는 자신의 이복형이자 순치제의 차남 유친왕 복전(裕親王 福全)과 이복동생이며 순치제의 5남 공친왕 상녕(恭親王 常寧) 등을 대동하고 친히 팔기군을 이끌고 몽골로 원정길에 올랐다. 이것은 명나라의 영락제 이후 황제가 최초로 친히 고비 사막을 넘어 몽골 원정을 감행한 원정이었다. 이 원정에서 강희제는 칼카족의 공식적인 합병 서약을 받았다. 뒤이어 청군은 준가르군과 내몽골에서 맞붙었으나 전염병과 계속되는 패배로 군사를 물려 북경으로 환도하였다.

그러나 1696년(강희 35년)에 강희제는 8만의 팔기군 군사를 이끌고 몽골로 진입, 차오모도 전투에서 준가르군과 싸워 대승하였다. 패한 가르단은 이듬해인 1697년(강희 36년)에 알타이 산맥 기슭에서 음독자살하였다. 1712년(강희 51년), 강희제는 준가르 부족을 견제하기 위해 남러시아에서 살던 투르쿠트 족에 사절을 보냈다. 이러한 강희제의 강한 견제에도 준가르 부족은 여전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1717년(강희 56년)에 준가르 부족의 신임 칸이자 가르단의 조카 체왕 아랍단은 6천 명의 적은 군사를 이끌고 과거 동맹이었던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준가르군은 수장 달라이 라마라 칭하던 티베트의 왕 랍장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였고 1718년(강희 57년)에 청군을 격파하였다. 준가르군은 여전히 그 세력이 막강하였으나 1720년(강희 59년)에 강희제가 보낸 팔기군의 대대적인 원정에 준가르군은 결국 패퇴하였고 티베트에 원정 온 체왕 아랍단은 몽골로 돌아가 은둔하였다. 그 이듬해인 1721년(강희 60년)에 청군은 켈장 갸초를 모시고 와서 제7대 달라이 라마로 만들고 티베트를 청나라의 영토에 정식 편입시켜서 티베트는 이렇게 안정되었다. 하지만, 준가르 세력은 청군의 티베트 원정 이후 결정타를 맞았으나 완전히 멸하지는 않았고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 때에 위구르와 함께 청군에게 항복하여 그 세력이 완전히 와해되었다.

팔기군 개편과 군사 정책

이미 팔기군에 관한 정책은 조부인 숭덕제가 만주족 팔기군, 한족 팔기군, 몽골족 팔기군으로 나누고 아버지 순치제 때 비로소 완성이 되어 있었으나, 강희제를 이를 다시 개편하였다. 당시 팔기군 아래에 녹영(綠營)이라는 군단이 있었는데 이 휘하에 삼번의 난 때 활약한 주배공이나 대만 수복 때 정씨 휘하 군사들을 대파한 시랑 등 한족 장군들이 바로 여기에 속하였다. 강희제는 공을 세운 이들에게 군부에서 높은 자리를 주어 독려하였고 이들은 후대의 옹정, 건륭 시대에 장군들에 비하여 더 강력하고 군권 역시 막강하였으며 병사들에게 인정을 베풀며 주연을 자주 열어주어 그들에 대한 병사들의 신망 역시 높았다.

강희제는 전통적인 팔기군 체계에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는데 만약 장군이 병사들과 같이 돌아오지 않으면 장군을 참하고, 병졸이 자신의 부대와 같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 병졸 역시 참하도록 명하였다. 강희제는 장병이 모두 일심동체라 생각하여 책임 역시 같이 져야 한다 생각하였고 이런 엄격한 규율 덕분에 강희 시대의 팔기군은 후대인 옹정, 건륭 시대의 팔기군보다 더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용감하였다. 특히 강희 시대의 팔기군은 강희제의 여러 전쟁 때 큰 활약을 하며 승리를 안겨주었다. 후대에 가서는 팔기군의 기강이 많이 흐트러지게 되는데 이유는 강희 시대엔 통일을 위한 전쟁을 많이 하였으나, 후대에 들어가 전쟁이 별로 없고 군사들의 수도 갑자기 늘어나 통제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자연히 흐트러지게 되었던 것이다.

문화 발전과 기독교 전례 문제

예수회 선교사들과 함께 천문을 보고 있는 강희제
 

강희제는 소년 시절부터 많은 학문을 배웠는데, 그중에서도 유학, 즉 성리학을 좋아하였으며 그 자신이 훌륭한 유학자로서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를 노력하였다. 서예 역시 매우 달필이어서 소림사(少林寺)의 현판을 바로 강희제가 썼다. 어린 시절 강희제가 쌓은 학식은 그에게 크게 도움이 되어 경연이나 조회 등에서 신료와 유학자들과 논의를 펼치고 난 뒤에, 이들은 강희제에게 꼼짝도 하지 못하였다 한다. 심지어 강희제가 크게 병이 난 도중에도 결코 책을 멀리하지 않았다 한다. 강희제는 자신이 만주족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않았으나, 중국의 문화가 자신들의 문화보다 매우 월등한 것을 알고 그것을 만주족 대신들에게 융화시키려 하였다. 1677년(강희 16년) 강희제는 남서방(南書房)을 열어 경연장 겸 유학 토론장으로 썼다.

강희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신임하여 그들에게서 서양의 지리, 천문, 수학, 음악 등을 배웠고, 중국 황제 중 처음으로 피아노를 쳤으나 가톨릭교회의 교리는 전혀 배우려 하지 않았다 한다.이러한 이유로 선교사들의 중국 포교에 위기가 닥치기도 하였다.이미 아버지 순치제 때 중국에 와서 흠천감 장관을 재직했던 아담 샬 폰 벨을 시작으로 한때 러시아와의 전쟁 때 간접적으로 러시아를 돕기도 했던 서양의 선교사 조아생 부베·마테오 리파·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주세페 카스텔리오네·장 당빌 등이 계속 유럽에서 와서 새로운 학문을 강희제와 대소 신료들에게 전래하였다. 페르비스트는 아담 샬 폰 벨의 뒤를 이어 흠천감 장관을 역임하여 새로운 천문학을 중국에 전파하였고, 부베는 강희제에게 기하학을 가르쳐주었으며, 장 당빌은 정밀한 중국 지도인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를 만들었다. 또한, 마테오 리파는 12년간 궁정에 있으면서 강희제에게 서양화를 그려 주었다. 리파는 1723년에 그의 고향 나폴리로 돌아와 나폴리 동부 대학에 ‘중국 학회’를 세웠다. 이 학회는 유럽 최초의 중국학 학회였으며, 유럽인들에게 중국과 동양을 알려주는 총본산이 되었다. 다른 선교사들은 강희제의 통치와 학문에 대한 열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그를 ‘기독교만 믿으면 완전무결한 군주’라고 칭하였다.

 

 

강희제는 선교사들을 황실 천문대 등의 요직에 두는 한편 초기에는 청나라에서 가톨릭교회의 포교를 허가하였다. 1692년(강희 31년)에 청나라의 어느 곳에서도 포교를 허락하고 조정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를 엄금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몽골 원정 때 말라리아에서 걸렸다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강희제는 선교사들에게 더 많은 호의를 가지게 되었고, 북경 내성에 교회를 짓는 것을 허락하여 선교사들과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다. 그러나 그 뒤로 당시 예수회를 제외한 청나라에 들어간 종파들이 중국의 조상 숭배, 우상 숭배에 대해 비판적으로 변해갔고, 곧 이들 종파의 말을 들은 로마 교황청에서 중국의 전례(典禮)를 문제로 삼음으로서 중국의 전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1704년(강희 4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하느님을 상제(上帝)나 천주(天主)로 표기하는 것이 서양에서 뜻하는 조물주라는 말과 그 뜻이 서로 다르고, 또한 매년 봄과 가을마다 지내는 공자의 제사와 조상의 제사가 우상 숭배이므로 중국의 전례를 금지한다는 회칙을 발표하고 1715년(강희 54년) 이를 재확인하였다. 강희제는 이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여겼고 교황의 회칙을 가지고 온 특사인 교황청 소속 추기경을 체포하거나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였다. 1706년(강희 45년) 강희제는 예수회에 찬동적이지 않은 선교사들을 모두 국외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특단의 상응 조치로 1721년(강희 60년) 교황의 회칙 수렴을 거부하고 교황청이 더 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백성들에게 선교·선동해서 청나라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 한다며 교황의 회칙을 비판하였고,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허가하는 대신 포교는 불법화하였다. 그러나 강희제가 붕어하고 난 다음에 1724년(옹정 2년),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는 포교와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모두 불법화하고 예수회 선교사들 역시 당시 포르투갈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오문(澳門, 마카오)으로 추방하였다.

광희서국 판본 《강희자전》, 20세기

또한 강희제는 당나라·송나라 때의 과거의 일부분이었던 전시(殿試)를 발전시킨 박학홍유과(博學鴻儒科)를 실시하여, 많은 인재, 특히 강남의 한족 출신 학자들을 모아 박학홍유로 삼았고 이 중에서 뛰어난 이들은 한림원(翰林院) 학사로 삼았다. 그리고 이 인재들로 하여금 명나라 시기의 실록인 《명사》(明史)를 편찬하여 초기의 명 태조명 성조 때 번창하였으나 후에 여러 황제의 실정을 부각시켜서 청나라가 명나라의 정통성을 확실히 계승하였다는 것을 알리려 하였다. 또한, 박학홍유로 하여금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연감유함》(淵監類函), 《패문운부》(佩文韻府), 《역상고성》, 《수리정온》, 《전당시》 등을 편찬케 하였다. 여기서 가장 돋보이는 문화적 업적은 바로 1711년(강희 50년)에 시작하여 5년 뒤인 1716년(강희 55년)에 완성된 《강희자전》(康熙字典)인데, 이것은 박학홍유 수십 명과 대신 진정경(陳廷敬) 등이 수년 동안 공을 들여 만들었다. 4만 2천여 개의 한자가 수록된 《강희자전》의 출판은 현대 중국어의 어법과 단어를 확립시킨, 강희 시대 문화 사업의 완성이었다.

하지만, 강건성세 3대에 걸쳐 많은 한족 학자들을 숙청한 문자의 옥이 일어났는데, 이미 문자의 옥은 춘추 전국 시대 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문자의 옥은 오랜 세월을 거쳐 계속되었는데 청나라에 들어와서는 도르곤을 황숙(皇叔)이 아닌 왕숙(王叔)으로 써서 도르곤과 당시 황제인 순치제를 왕(王)으로 모독한 이유로 한족 학자가 교살되었다. 이들 학자는 만주족인 청나라의 중국 통치의 정통성을 강력히 부인하여 중국의 평화적이고 자애로운 통치를 지향하던 강희제의 분노를 샀다. 문자의 옥에 연루된 학자들은 대역죄로 다스려져 능지형을 받았다. 또한, 그 구족의 16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참수시키고 16세 이하의 남자와 모든 여자는 노비로 삼아 변방으로 보냈다. 실제로 1711년(강희 50년)에 대명세(戴名世)라는 한족 학자가 자신의 저서인 《남산집》(南山集)에 망한 명나라의 연호인 영력(永曆)을 사용하여, 대명세의 삼족이 모두 처형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는 옹정제와 건륭제를 거쳐 만주족에 비판적인 학자를 더욱 탄압하여 유배를 보내거나 처형하였고, 비판한 책들은 모두 불태워 버리거나 금서로 지정하였다.

안정의 내정

강희제의 순행 환궁 행렬
 

강희제는 중국 전통의 고유 내각인 상서방을 설치하였으며 전 황조인 명나라처럼 여러 명의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를 두어서 조정의 일을 의논하였다.이 내각대학사의 상서방은 훗날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 때에 군기처(軍機處)로 발전하게 된다. 황궁의 살림을 아끼려고 명나라 때에 10만 명이나 되던 환관과 궁녀의 수를 400명으로 대폭 줄였으며, 비용 역시 명나라 시절에 비해 40분의 1로 줄였다. 강희제 스스로 옷이 완전히 낡지 않은 이상 그 옷을 기워서라도 입을만큼 크게 검소하였고 자신의 침전에도 10명 안팎의 환관과 궁녀밖에 두지 않았다. 치수 공사에도 뜻이 있어 1677년(강희 16년)에 황하 치수 공사에 착수, 근보(?輔)를 그 책임자에 명하였으며 1684년(강희 23년)에 완성해 황하가 범람하지 않도록 하여 농민의 피해를 줄였다. 또한, 대운하 역시 보수·증축하여 많은 배가 물량을 대량 수송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로써 황하가 안정되어 많은 물자가 장강과 황하를 잇는 대운하를 타고 범람 걱정 없이 북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팔기군의 둔전지로 쓰던 권지(圈地)를 모두 몰수하고 그 땅을 모두 소작농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으며, 소작지와 소작농을 함께 매매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해 소작농들을 보호하였고, 백성이 지주의 수탈 없이 편안히 살 수 있게 하였다. 또한, 흉년이 들었을 때는 흉작의 정도에 따라 세금을 일부 감면, 또는 전원 감면하였다. 강희제는 재위 기간에 무려 6번이나 남쪽을 순행하여 이남의 많은 지역 유지들에게 신뢰를 얻었고, 이남의 학자들에게 학문을 사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남방 순행 때, 정해놓은 예산을 제외한 별도의 비용은 가져온 내탕금으로 모두 지출하여 남쪽 백성의 재산 착취를 막았다.

강희제는 세수입을 전시(戰時)에도 늘리지 않아 민생이 전시에도 평상시를 유지하도록 하였고, 치세가 지속할 때마다 세금을 올리기는커녕 점점 감면하여 백성의 존경과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1711년(강희 50년)에는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 제도를 공포하여 성인의 인두세를 당시의 값에서 영원히 동결시키고 그 값을 받는 장정의 수 또한 2,450만 명으로 한정하고 그 이상은 받지 않겠다고 천명하였다. 또한, 이 제도가 시행된 지 얼마 안 가 지정은제를 북경과 하북성 일대에서 시행하기도 하였다. 대만 수복 이후에는 4개의 항구를 열어 대외 무역업을 활성화하여 많은 은자를 국고에 가져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강희제의 선정은 청나라와 만주족에 대한 한족 백성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으며, 한족을 융화하기 위한 강희제의 피나는 노력에 자연히 한족 백성은 스스로 청나라를 따르게 되었다.

재정 정책 역시 기존에 비해 수정하여, 세금을 적게 하였어도 무역 등으로 이미 은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국고도 그다지 별문제가 없었다. 1668년(강희 7년)에 1,500만 냥, 1710년(강희 49년)에 5천만 냥이 넘는 은자가 있었으나, 강희제의 말년인 1722년(강희 61년)에는 은자가 7백만 냥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국고의 거의 모든 은자가 군비로 들어갔으며, 강희제 역시 정무를 보기에는 이미 너무 늙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강희제는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 재정에 재능을 가진 4남 옹친왕 윤진(胤?)에게 조언을 하고 새로운 정책을 찾으라 명하였으나, 강희제는 그 정책의 실현을 보지 못했다.

황태자 책봉 문제 [편집]

중년의 강희제
 

훌륭한 정치를 펼친 강희제였지만, 그의 자식들은 그다지 큰 그릇이 되지 못했다. 강희제는 황자들 모두를 자신의 경연 토론장인 남서방에서 교육시켜 유학의 사상이 몸에 밴 황자로 만들려 하였으나 대부분 그리 되지 못하였다. 황차자(皇次子)이며 강희제의 유일한 적자이자 적장남인 윤잉(胤?)은 첫 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의 소생으로, 효성인황후가 1674년(강희 13년)에 윤잉을 낳은 직후 난산으로 붕어하자 이를 슬퍼한 강희제가 이듬해인 1675년(강희 14년)에 바로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이것은 본래 가장 유능한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만주족의 전통을 깨고 한족의 전통을 도입하는 것이었기에 만주족 대신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으나, 유학을 숭상한 강희제는 이런 논의를 단호히 일축하였다. 이에 서장자이고 황장자의 작위를 받았으며 윤잉보다 두 살이 많은 윤시(胤?)가 대신들 사이에서 윤잉의 경쟁 상대로 떠올랐으나 강희제는 윤잉을 후계자로 천명하여, 제위는 윤잉이 승계받는 것으로 확정되어 갔다.

강희제는 윤잉의 거처를 과거 명나라 때 황태자들이 머물던 동궁인 종수궁(鍾粹宮)으로 선택하지 않고 역대 황제와 가문의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봉선전(奉先殿) 옆에 새로 궁을 지어 육경궁(毓慶宮)이라 이름짓고 이곳을 윤잉의 거처로 정하였다. 또한 강희제는 다른 어느 황자들보다 그 위상을 높였으며, 그리고 황제에게만 입히는 황포를 윤잉에게 특별히 입을 수 있도록 허락하고, 황궁 어디서든 가마나 말을 탈 수 있게하였다. 또한 당시 어느 친왕들보다 더 많은 봉토와 식읍을 받는 등 큰 특전을 베풀어 주었다. 강희제는 윤잉이 훗날 황자들에게 핍박받을지도 모를까봐 윤잉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의 작위를 올려주는 것을 꺼려하였고 실제로 1700년대까지 윤잉을 제외한 황자들은 모두 친왕에 오르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강희제는 윤잉에게 다른 황자들이 받는 교육보다 더 수준높고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 윤잉을 가르치는 사부 역시 당대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인 왕섬을 임명하여 윤잉을 완벽한 차기 황제로 만들려 하였다. 머리가 총명하던 윤잉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이미 4살 때 한문을 쓰기 시작하여 7살에는 사서오경을 다 떼었다 한다.그리고 강희제의 순행 때에도 황태자로서 조정을 장관, 대소사를 처리하여 정치 분야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백성들에겐 따뜻하던 강희제는 자식, 특히 자신이 가장 총애하고 아끼던 자식인 윤잉에겐 더없이 냉정하고 혹독하였다.

윤잉은 20대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였으나 30대가 넘어서부터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주색잡기를 좋아하였다. 속으로는 윤잉을 매우 아꼈으나 겉으로 내색을 하지 못한 아버지의 냉정함과 혹독함, 어머니를 태어나자마자 여읜 모정의 갈망, 그리고 형제들간의 암투 등으로 인해 점점 타락하기 시작한 윤잉에게 실망한 강희제는 3황자 윤지, 4황자 윤진, 8황자 윤사 등 다른 황자들에게 각기 부서를 책임지고 도맡게 하였다. 다른 황자들은 모두 육부를 관리하여 강희제의 신임을 얻고 군왕, 친왕으로 승승장구하였으나, 윤잉은 어떠한 부서도 맡지 않은 채, 부황의 눈밖에 나고 정신질환에 가까운 비행까지 일삼았다 한다. 그리고 이미 조정은 황자들과 신료들의 야심으로 인해 사분오열이 되었는데, 이 중 윤시는 자신이 장자인데 언제나 차남이며 황태자인 윤잉의 뒤에 서야 되고 윤잉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해야 했던 것이 큰 불만이라 반윤잉 세력에 적극 가담하였다. 윤잉이 황태자로 있을 당시 윤잉을 포함한 9명의 황자가 파벌에 참여하였는데 그 계보와 파벌에 참가한 주요 대신들을 보면 이러하다.

  • 황태자당(皇太子黨)
    • 차남 황태자 윤잉(皇太子 胤?)
    • 영시위내대신 색액도(領侍衛內大臣 索額圖)
  • 황장자당(皇長子黨)
    • 장남 직군왕 윤시(直郡王 胤?)
    • 영시위내대신 납란명주(領侍衛內大臣 納蘭明珠)
  • 황사자당(皇四子黨)
    • 4남 옹군왕 윤진(雍郡王 胤?)
    • 13남 패자 윤상(貝子 胤祥)
    • 사천순무 연갱요(四川巡撫 年羹堯)
  • 황팔자당(皇八子黨)
    • 8남 패륵 윤사(貝勒 胤?)
    • 9남 패자 윤당(貝子 胤?)
    • 10남 패자 윤아(貝子 胤?)
    • 14남 패자 윤제(貝子 胤?)
    • 영시위내대신 동국유(領侍衛內大臣 ?國維)
    • 보군통령 융과다(步軍統領 隆果多)
  • 중립파[26]
    • 3남 성군왕 윤지(誠郡王 胤祉)
    • 5남 항군왕 윤기(?郡王 胤祺)
    • 7남 순군왕 윤우(淳郡王 胤祐)
황태자 윤잉
 

그 중 이미 황태자 윤잉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아챈 윤잉의 작은외조부이자 이미 40여 년 전에 죽은 색니의 차남, 색액도(索額圖)는 자신을 위시로 한 태자당(太子黨)의 결성과 황장자인 직군왕 윤시와 그 외숙부 납란명주(納蘭明珠)를 위시로 한 황장자당의 결성으로 붕당이 시작되어 서로 조정의 주도권과 황위 후계권을 잡으려 하였고, 심지어는 태자당이 윤잉에게 알리지 않고 강희제를 암살하려 하자 진노한 강희제는 1703년(강희 42년)에 색액도를 사사하고 윤잉에게 엄중한 경고를 내렸으나, 여전히 윤잉은 달라지지 않고 나태하였으며 조회에도 참석치 않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1708년(강희 47년)에 강희제는 윤잉을 폐위시키고 서인으로 삼아 종인부(宗人府)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나 골육상쟁을 염려한 강희제는 이듬해인 1709년(강희 48년)에 윤잉이 대역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태자로 복위시키고 도리어 납란명주를 하옥시켰다. 색액도와 납란명주는 40년 동안 강희제의 곁에서 정치를 도와주던 조정의 수반들이자 영시위내대신이었으나 황위를 놓고 당쟁이 시작되자 강희제는 이들을 단호히 조정에서 혁파하여 당쟁의 불씨를 끄려 하였다. 하지만 윤잉이 복위되자 안심하였던 황장자당을 중심으로 황팔자당까지 합세한 반황태자파는 다시 윤잉을 폐위시킬 음모와 이간책을 꾸몄다. 황팔자당은 8황자 윤사가 주축이 되었고 이에 가담한 대신으로는 또다른 조정의 영수이며 강희제의 외삼촌이자 세 번째 장인인 동국유(?國維)와 그 아들인 융과다가 윤사를 도왔다.

그럼에도 윤잉이 반성을 하지 않고 다시 주색잡기를 좋아하였으나, 문제는 윤잉이 강희제의 후궁인 서비 정씨를 건드려 황실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1712년(강희 51년)에 강희제는 여섯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장강 이남으로 순행을 떠났는데 아직도 윤잉을 못미더워한 강희제가 윤잉이 북경에서 딴 마음을 품지 않나 관찰하기 위해 일부러 북경을 비운 것이다. 그리고 황제가 궁을 비웠으니 황태자였던 윤잉이 임시로 정무를 돌보았다. 그러나 윤잉은 음모를 꾸며 강희제가 북경으로 환도하면 강희제에게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자신이 찬위하겠다는 쿠데타를 기도하였는데, 이 사건은 확실히 윤잉이 주도한 역모였다. 이것을 눈치챈 북경의 대신들은 순행 중인 강희제에게 돌아올 것을 요청하였고 강희제는 북경으로 돌아오자마자 윤잉을 바로 황태자에서 폐위시켜 냉궁인 함안궁에 가두고 폐서인하여 영원히 서인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또한 두 번이나 폐태자시킨 이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할 것이라 엄중히 명하였다. 이 사건의 폐단을 계기로 청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죽은 황자를 황태자로 추서만 하였을 뿐, 생전에 어느 황자도 황태자로 지명받지 못했다. 강희제는 얼마 뒤 전위조서를 건청궁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보관토록 하고 자신이 붕어한 뒤에 열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저위비건법(儲位秘建法)이다.

이로 인해 형제들 간의 후계자 다툼이 발생하였다. 그 중 4남 옹친왕 윤진, 8남 염친왕 윤사(胤?), 14남 순군왕 윤제(胤?)가 가장 실력있는 아들들이었다. 장자인 직군왕 윤시는 과거 윤잉이 처음 폐위되었을 때 폐태자 윤잉을 저주하고 몰래 자객을 보냈으며, 윤잉의 방에다 칼이 꽂힌 윤잉의 인형을 숨겨놓기도 하였다. 심지어 윤시는 부황 강희제 앞에서 윤잉을 죽이겠다 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혼나고 윤잉처럼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당시 8남 윤사가 인정이 많고 공명정대하여 가장 많은 신료의 신망을 받았으나 실제로 윤사는 간교하였고 이간질에 뛰어나 황자들간의 분란을 부추겼다. 심지어 윤사는 심복을 시켜 점쟁이를 매수하여 자신이 다음 황제가 될 것이란 소문을 공공연히 내어 강희제의 분노를 사서 강희제 말기에 윤사는 조정에서 중책을 맞지 못하였다. 이들은 서로 공적을 다투고 부황인 강희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특히 강희제는 만년에 14남인 윤제를 총애하여 그에게 북방의 만리장성을 수호하는 중책인 무원대장군(撫遠大將軍)의 작위와 병부의 지휘권을 내리고 황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병권을 내려주면 황위를 물려주는 것으로 생각하던 황자들은, 이로 인해, 형제간의 암투는 더욱 격화되었고, 8남 윤사와 14남 윤제가 손을 잡고 파벌을 형성하자 4남 윤진 역시 파벌을 형성하여 조정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였다.

천수연과 성군의 붕어

강희제의 죽음 이후 공석인 황위 상태와 황위 집권 과정에 대해서는 옹정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노년의 강희제
 

1722년(강희 61년) 5월 4일 강희제는 자신의 68번째 생일을 맞는 것을 기념하여 65세 이상의 만주족, 한족, 몽골족, 회족 현직 관리들 및 퇴직 관리들 1천여 명을 자금성 건청궁(乾淸宮)에 초대하여 큰 주연을 베풀었다. 이것이 바로 천수연(千?宴)이다. 천수연에서 강희제는 이들 전직 재상들과 대신들, 원로 관리들과 함께 강희 시대의 성공과 완성을 자축하였다. 천수연을 베푼 강희제는 곧 병에 걸렸고, 황위를 노리는 황자들은 이를 호기로 삼아 점점 세력을 확장하였다. 얼마 뒤인 1722년(강희 61년) 12월 20일에 이궁인 창춘원(暢春園)에서 붕어하였는데 이 때 나이가 69세였다.

강희제의 정식 사인은 오한과 호흡 곤란이라 하나, 일설에 따르면 강희제의 병세는 그리 심하지 않았고 며칠 뒤에 돌연사했다 하여, 여전히 강희제의 죽음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강희제 붕어 당시 강희제를 모신 신하가 야심 많은 4남 윤진의 휘하이자 자신의 외사촌동생이며 자신의 세 번째 황후인 효의인황후의 동생 구문제독 겸 보군통령 융과다(隆科多)라는 점으로 강희제가 윤진의 사주로 융과다에게 독살당하였다는 설도 있다. 본래 융과다는 8남 윤사의 수하였으나 윤진의 설득과 매수로 결국 윤진의 수하로 들어갔다.

능호는 경릉(景陵)으로 부황 순치제의 황릉인 효릉(孝陵) 옆에 있으며, 청동릉(淸東陵)의 하나이다. 묘호는 성인의 뜻으로 국가를 다스려 진정으로 통일시킨 큰 업적이 있는 황제라 하여 성조(聖祖), 시호는 생전에 강희제가 인과 덕을 중시한 것을 따 인황제(仁皇帝)로 명명하였다. 정식 시호는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로 이 긴 시호에서도 그의 업적을 확인할 수 있다. ‘합천’(合天)은 분열된 천하를 다시 통일시켰다는 뜻이고 ‘홍운’(弘運)은 국운을 크게 넓혔다는 뜻이다. ‘문무’(文武) 역시 나라의 기틀을 잡고 문과 무를 고루 이용하여 전성기를 이룩한 황제에게 올리는 시호로 나라를 세운 개국 황제에게 올려지는 ‘고’(高) 자와 더불어 황제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호이며 그리고 ‘중화’(中和)와 ‘대성’(大成)은 청나라를 중흥시켜서 나라를 더욱 번창시키고 여러 민족을 하나로 모아 크게 이루었다는 뜻이 담겨 있다.

 

강희제가 묻힌 청동릉의 경릉 정자각
 

강희제의 붕어 이후에도, 황자들의 황위 다툼은 계속되었고 8남 윤사와 14남 윤제는 강희제의 붕어와는 상관없이 각기 자신이 황위에 오르려 하고 군대 동원을 명령하는 등 갖가지 수단을 부렸다. 강희제 붕어 당시, 강희제는 ‘4’자를 희미하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강희제 붕어 후, 8황자 염친왕 윤사, 9황자 혁군왕 윤당, 10황자 돈군왕 윤아 등은 훗날 목숨이 위태로울까 봐 그들의 넷째 형 윤진이 황위에 오르는 것에 절대 반대하여 그 대안으로 역시 ‘4’자가 붙어 있는 14황자 순군왕 윤제를 후계자로 우겼으나 강희제의 전위 조서에는 후계자가 4남 윤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당시 강희제의 유조의 내용 중 황위 승계에 대한 내용을 보면 이렇다.

제4황자 옹친왕 윤진은 인품이 귀중하고 사려가 깊으니 짐이 생각하건대 필히 대통을 이을 자격을 갖추었다. 고로 짐이 죽은 후 짐의 뒤를 이어 즉시 황제의 자리를 잇도록 하고 예법에 따라 상복을 입다가 27일에 평복으로 갈아입고 새 황제의 즉위를 만천하에 알려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알게 하라.

그리고 4황자 옹친왕 윤진은 유조에 쓰여 있는대로 황위에 오를 명분을 세우고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강희제의 13남 패륵 윤상에게 원래 윤사의 파가 장악하고 있는 북경 근교의 풍대병영의 군사를 포섭·동원하도록 명령하고 이 군사들을 동원해 반대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황위에 오르니, 이가 청의 제5대 황제인 옹정제이다. 그러나 옹정제가 황제에 오른 이유는 유조개위설, 개조찬위설, 무조탄위설 등 여러 설로 나뉘어져 있는데, 일단 당시 강희제는 황위를 물려주려면 당사자인 옹정제를 직접 불러서 황위를 넘긴다는 얘기를 했어야 하나 옹정제나 다른 황자들 및 중신들에게 말하지 않고 곁에 있던 융과다에게만 말을 하였다 한다. 또한 만약 옹정제를 후계자로 점찍었다면 옹정제에게 황위를 잘 부탁한다는 얘기를 하기는커녕 자신의 병세에 대해서만 얘기를 하였다. 다른 유명한 가설로는 옹정제의 명령으로 융과다가 강희제가 원래 점찍어 놓은 ‘14황자 윤제에게 물려준다’(傳位十四皇子) 대신 ‘4황자 윤진에게 물려준다’(傳位于四皇子)라고 교묘히 바꾸고 조작된 이 유조를 공포하여 황위에 올랐다는 설이다.[30] 그러나 이것은 단지 가설일 뿐이며 정확히 황제에 오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통치 철학과 사상

강희제는 유교적 사상으로 국가를 통치하려 하였다. 아버지 순치제와 아들 옹정제가 만주족이 믿던 불교, 즉 라마교를 중요시하였다면 강희제는 오히려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더욱 중시, 즉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국시로 삼았는데 그 방식은 청나라 이전에 중국을 다스린 한족 출신의 황제와 그 통치 이념이 비슷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도 불교를 믿어 불교를 그리 심하게 탄압하지는 않았다. 강희제는 군주가 모범을 보여야 백성이 군주를 믿고 따를 것이라 하여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이른바 ‘섬기는 리더십’을 자신의 통치 철학으로 삼았다. 삼국 시대촉한 승상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의 한 구절인 ‘국궁진력’(鞠窮盡力), 즉 ‘모든 것을 쏟아 붇는다’와 국궁진력한 후 ‘안거낙업’(安居樂業), 즉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해주고 즐겁게 일에 종사하게 해준다’를 자신의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 좋은 본보기이다. 유교적 사상을 중시한 강희제는 백성들에게 언제나 효를 중시하여 백성에게 유교 지침서를 내렸고 아버지 순치제와 어머니 효강장황후가 떠난 후 자신의 양육을 책임진 조모 효장태황태후를 모시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이 효도를 다하려 노력하였다. 또한 강희제는 인(仁), 덕(德), 예(禮) 중심의 인자한 정치를 펼치고 되도록 과격한 정치를 펴지 않으려 주력하였다. 강희제는 본래 명나라 홍무제가 만들고 순치제가 바꾼 〈육유(六諭)〉를 확대한 〈성유십육조(聖諭十六條)〉를 1667년(강희 6년)에 반포한 뒤 백성들에게 이 내용을 토론하고 실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강희제의 뒤를 이은 넷째 아들 옹정제는 성유십육조의 매 조마다 친히 설명을 붙이고 그 의의를 보다 알기 쉽게 해설한 〈성유광훈(聖諭廣訓)〉을 편찬하여 전국에 반포하여, 유교통치이념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이런 강희제의 인자한 정치는 한족이 만주족의 청나라를 지지하게 만드는 데에 크게 일조하였다. 1717년(강희 56년) 강희제는 〈고별상유〉(告別上諭), 즉 마지막으로 백성들에게 바치는 글을 남겼는데 강희제는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 순간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천추만대에 우환거리를 남긴다.”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제왕이 천하를 다스림에 능력이 있는 자를 가까이 두고, 백성들의 세금을 낮추어 주어야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위태로움이 생기기 전에 나라를 보호하며, 혼란이 있기 전에 이를 먼저 파악하여 잘 다스리고, 관대하고 엄격함의 조화를 이루어 나라를 위한 계책을 도모해야 한다.”라고 후대의 황제에게도 이를 훈계하였다. 강희제는 황제로서 자식과 같은 백성들에게 이런 당부의 말을 남겨 황제로서의 도리를 다하려 하였다.

강희제는 자신에게 올려지는 상소문과 보고서, 비망록 등 하루에 무려 300개에서 400개의 문서들을 모두 보고 그것을 결재하고 일일이 그 상소에 대한 비답도 적어주었는데, 심지어는 전시(戰時)에도 하루에 200개 이상에 문서들을 결재하였고 정무에 대한 엄청난 정력을 보여주었다. 삼번의 난 때에는 무려 하루에 500여 개의 문서들을 본 뒤 다 처리하고 때로는 밤을 새울 때도 많았다 한다. 학식이 높은 황제의 적절한 대안은 성지가 내려오는 즉시 수행되었고, 그로 인해 백성들은 살기 편안해졌다. 그의 학식은 경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는데 그의 학식과 논리정연한 질문을 듣고 경연에 참가한 재상들과 대신들이 모두 대답을 제대로 못하였다 하며, 수학 등 서양 학문까지 습득한 강희제는 더욱 학식이 풍부해져서 당시 그가 습득한 학식은 당시 루이 14세 치하 프랑스 왕족들의 평균 학식보다 훨씬 우월하였다 한다. 만주족과 한족의 구별을 없애려 하였듯이 선교사들에게도 큰 호의를 베풀어준 강희제는 남방 순행에도 선교사들을 대동하고 떠났다고 한다.

이렇게 만주족으로서 중국의 사상, 즉 한족의 사상인 유교에 적극적이었던 강희제였으나 만주족으로서의 근본도 잊지 않았다. 그는 유교를 숭상하였으나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엄청난 양의 정무의 스트레스를 타파하기 위해 자주 사냥에 나갔으며 대신들과 외국 사신들에게 자신의 사냥 솜씨를 마음껏 뽐내어 자신이 정무에만 시달리는 문약한 군주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그가 몽골에 친히 원정을 간 것 역시 그의 강건함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그는 노년기에 스스로 자신이 셀 수 없이 많은 사냥감을 잡았다 하였는데, 실제로 강희제는 강궁을 다룰 만큼 활의 명수였다. 강희제는 노년기에 자신이 평생동안 사냥해서 잡은 맹수들을 열거하기를 호랑이 135마리, 멧돼지 132마리, 늑대 96마리, 표범 25마리, 20마리, 그리고 원숭이 10마리를 잡았다 한다. 또한 하루에 토끼 310마리를 잡았으며 , 너구리, 사슴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았다고 전한다. 강희제는 문(文)과 무(武)를 모두 중시하고 한쪽에만 치우침이 없이 고루 그에 걸맞는 인재들을 등용하였기에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었다.

영향과 평가

사후의 영향과 업적

책을 읽는 강희제
 

현재 강희제는 역사학자들에게 대부분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강희제의 훌륭한 정치는 후대에게도 큰 본보기가 되었다. 아들인 옹정제는 부황 강희제가 이룩한 태평성대에서 내치를 더욱 다져서 청나라를 안정시켰으며, 강희제의 손자이자 옹정제의 아들인 건륭제는 조부인 강희제처럼 내정에 신경을 썼지만 역시 외정에도 적극적이어서 위구르와 준가르를 완전히 복속시켰다. 그러나 건륭제는 희대의 간신이자 탐관오리라 불리는 화신(和?)을 20여 년간 총애하고 화신은 조정을 장악하고 자신의 입에 맞는 정책으로 바꿈으로서 결국 100여 년간 지켜온 강건성세도 끝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러한 강희제의 정치는 백성들을 중심으로 그에 맞는 정치를 펼치면 역사 또한 그를 성군으로 평가하게 되는 좋은 예였다. 강희제의 붕어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당시 많은 백성들과 대신들이 부음을 접하자마자 바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였다 하는데, 이것도 바로 그가 성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정책 역시 강건성세 시기에는 대체로 변하지 않았으나, 점차 해외 열강들이 청나라의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강희제가 추진하고 이룩한 정책들은 결국 폐기되었다.

청나라 이전에 한족을 제외한 다른 유목 민족들이 중국을 통치할 때, 그들은 언제나 백성들에게 폭압을 가하였으나, 강희제는 오히려 방법을 달리하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보다는 공익이 먼저였고 자신의 재위 기간인 61년간의 기나긴 희생으로 당시 백성들의 삶은 그 뒤로 70여 년간 윤택해지고 안정되었다. 강희제는 당시 아직까지 중국 곳곳에서 반대가 심하였던 만주족의 황조를 굳건히 다졌고 만주족들에게 한족의 문화를 대거 소개함으로써 만주족의 지식과 예절 수준을 높였으나, 훗날 만주족들은 너무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어 자신의 정체성과 전통을 거의 잃어버리고 만다. 또한 청나라 멸망 때에는 강희제의 동화 정책 때문이었는지, 만주어를 잘 아는 만주인은 흔치 않았다 한다. 그는 평생 배움에 뜻을 두어 학식 역시 뛰어났다. 명나라의 역사서인 《명사》를 편찬하여 명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하였으며, 오배와 오삼계 등의 내부의 반대자를 처단하고 황제권을 강화하여 자신의 오랜 재위 기간 동안 신하들이 함부로 넘보지 못할 절대 황제권을 확립하였다.

강희제는 황하와 장강을 보수하여 근처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당시까지도 이 두 강은 여름에 계속 범람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그러나 재빨리 이에 대한 대처를 마련한 후 완성시키자 한 해에 범람 횟수가 아예 없거나 그 전에 비하여 현저히 줄어들었다. 또한 강희제는 자금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고 장강 이남으로 순행을 많이 떠나 북방과 남방의 교류를 활발히 만들었으며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청나라의 동북방에 있던 소요를 잠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강희제는 자신이 실정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겸허히 수렴하여 즉시 시행하였고 황제로서의 책임을 솔선수범하여 군주의 모범을 보였고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통치 환경을 조금씩 만들어나갔다.

비판

그러나 중국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인 강건성세를 만들면서 세금을 줄이고 백성들을 배부르게 하는 등 청나라를 너무 태평히 잘 완성시켰기 때문에, 후대에 가서 사람들이 점점 나태해지고, 군대 역시 소동에 관한 대처 능력이 떨어지게 되었다. 또한 강건성세 3대에 걸쳐 문자의 옥을 시작시켜서 한족 학자들을 대거 숙청함으로써 문화를 일시적으로 후퇴시켰고, 명나라의 수녀제(秀女制)를 따르라는 부황 순치제의 유명을 받들었고 그에 충실히 따라 많은 자식들을 두어 황실을 번성시키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교육에 실패하여 황태자를 자리에 놓고 황태자였던 윤잉과 쟁탈전을 벌이는 자식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편애까지 일삼아 훗날 강희제 말년과 옹정제 초기의 피비린내나는 골육상잔의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본래 유교를 숭상하던 강희제는 자식들에게 주입식 유교 교육을 시켰으나 완전히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황자들은 적장자가 황위를 갖는 것이 아닌 가장 유능한 아들이 황위를 갖는 것이라는 전통을 저버리지 않고 끝내 아버지의 교육에 순응하지 않았다.

처음 강희제는 윤잉에게 매우 큰 기대를 하며 자신의 뒤를 이을 현군이 되길 바랐으나 윤잉이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그 기대가 점차 작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강희제는 윤잉이 황태자로 있을 때, 많은 황자를 조정과 군의 요직에 임명하였다. 서자이며 능력있는 황자들에겐 요직을 내렸으나 정작 유일한 적자이며 황위를 계승할 한 명의 황자에게는 자신의 순행 때 대리청정을 맡겼으나 황자들 사이에 황위를 놓고 골이 맺혀 형제들은 윤잉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강희제의 비난은 언제나 총책임자인 윤잉에게 돌아갔고 바로 이것이 윤잉을 압박하여 윤잉의 비정상적인 기행을 낳았다. 자신도 나름대로 노력했던 윤잉도 자신의 뜻이 언제나 다른 형제들이나 적대시하는 대신들에게 좌절되자 우울증이 생기고 부황의 비빈을 건드리는 등의 기행으로 스스로를 달랬다.또한 평생 동안 너무 정무에 매진하였기에 자식들을 제대로 돌볼 여가가 없었고 강희제와 자식들간의 소통은 그리 원만치 않았다. 그로 인해 많은 학자들은 강희제를 수신(修身),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성공하였으나 제가(齊家)에서 실패한 군주라 말한다.

일부 학자들은 강희제가 펼친 선정에 대해 단지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정책을 채택한 것으로 백성을 ‘생각했다’는 것이지 결코 정책에 백성을 ‘사랑한다’는 애민(愛民)의 마음은 녹아 있지 않았다고 강희제의 정책을 깎아내리기도 한다.

현대의 영향과 평가

1991년 중국인민은행이 주조한 강희제 기념 주화
 

현재는 대만 문제와 맞물려서 ‘하나의 중국’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강희제의 대만 수복과 몽골 정복 등 그의 민족 융합 업적과 백성을 중히 여기는 이른바 ‘섬기는 리더십’을 높이 사 크게 추켜세우고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인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濤), 국무원 총리를 지낸 주룽지(朱鎔基) 역시 중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강희제에게서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과거 한족들이 오랑캐라 멸시하던 만주족 출신이고 그들의 지도자였던 강희제를 지금은 한족 중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치 스타일과 대만 수복 등에서 크게 추켜세우는 인물로 둔갑되었다며 이러한 열렬한 강희제 숭배 운동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적극적인 강희제 홍보는 문화·예술 방면에서도 나타났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의 작가 어유에허(이월하, 二月河)가 쓴 소설 《강희대제》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후속작들인 소설 《옹정황제》·《건륭황제》 등도 독자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였다. 2001년중국중앙방송에서 소설 《강희대제》를 원작으로 한 《강희왕조》(康熙王朝)가 방송되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사극 드라마 중 하나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이로 인해 강희제 역할을 맡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견 배우인 천다오밍(진도명, 陳道明)은 어린 나이에 즉위한 강희제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그의 리더십, 자식들로 인하여 골치를 앓는 모습 등을 잘 보여주었고 젊은이들에게 강희제의 모습과 그의 이름을 더욱 많이 각인시키게 되어, 중국의 스타 중견 배우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강희왕조》를 시작으로 강희제를 다룬 많은 작품들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 방송되었고, 이 작품들의 인기 역시 높았다. 《강희왕조》 전에 방송하였으나 강희제의 다음 세대인 옹정 시대를 시대적 배경을 다룬 드라마 《옹정왕조》(雍正王朝)에서도 강희제는 현명하지만 《강희왕조》 때보다 자식들의 일로 피곤한 삶을 산 황제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홍콩 무협 드라마 《군림천하》(君臨天下)에서는 차남인 윤잉과 14남 윤제만을 편애하다가 이것이 한번도 부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4남 윤진에게 자극제가 되어 결국 윤진에게 염주로 목졸려 살해당하는 비운의 군주로 나온다.

무협소설가 김용(金庸) 역시 강희제가 오배, 오삼계, 정경 등과 마찰을 빚을 때를 배경으로 한 무협소설 《녹정기》(鹿鼎記)를 썼는데, 여기에서 강희제는 매우 호방한 군주로 나온다. 이 소설은 여러 차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및 홍콩의 방송국에서 제작·방영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과거 iTV에서 방영되었던 《회옥공주》(懷玉公主)에서 명나라 영력제의 공주를 사랑하는 황제로 나왔으나 이 드라마에서 전개되는 내용은 거의 허구였다.아직도 강희제는 그의 손자 건륭제, 할머니인 효장문황후, 그리고 청나라의 문을 닫는 서태후와 함께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역사 예술 작품 중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인물이다.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 사에서 만든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에 나오는 문명 중 하나인 중국의 지도자가 강희제이기도 하며 게임 역사에 그의 대한 내용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 등 유럽 및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