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世界史/[지구촌]中國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공자

好學 2009. 10. 25. 21:36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공자

 

 

 

공자 (孔子 BC 552∼BC 479)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유교(儒敎)의 개조(開祖).
이름은 구(丘), 자(字)는 중니(仲尼).
공자(孔子)라고 할 때의 <자(子)>는 존칭이다.

생애
공자는 노(魯)나라의 창평향(昌平鄕) 추읍(현재의 山東省)에서 하급무사 숙량흘(叔梁紇)과 그의 내연(內緣)의 아내 안징재(顔徵在)와의 사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매우 힘이 세었으며 제(齊)나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러나 공자가 3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공자는 창고지기며 목부(牧夫) 노릇을 하면서 학문에 힘썼기 때문에 정해진 스승은 없었다.

당시의 천하(天下)는 하극상(下剋上)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제후(諸侯)들은 주(周)나라의 권위를 업신여겼고, 제후국(諸侯國)에서는 중신(重臣)이 주군(主君)을 능멸했다. 노나라에서는 대부(大夫)인 3환(三桓;季孫·叔孫·孟孫)이 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노나라의 임금 소공(昭公)은 3환의 전횡(專橫)에 분노하여 무력으로 이를 토벌하려 하였으나 실패, 제나라로 망명하였다.

36세에 공자는 제나라로 가서 여러 해 동안 머물렀다. 43세 때 정공(定公)이 즉위하자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 무렵부터 자로(子路)·민자건(閔子騫) 등의 제자들이 모여들어 그의 명성이 높아졌으며, 52세에 중도(中都)의 재(宰;守令)가 되었다. 53세 되던 해에 협곡(夾谷;山東省)에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화평회의가 있었는데, 제나라의 임금은 폭력으로 노나라 임금을 협박하려 하였다. 그러나 노나라 임금을 수행하고 있었던 공자가 제나라 임금을 질타하여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54세에 노나라의 대사구(大司寇;法務大臣)가 되었으며, 다음해 3환의 세력을 없애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14년간 조(曹)·위(衛)·송(宋)·정(鄭)·진(陳)·채(蔡)·초(楚) 등의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공자의 의도는 자신의 이상(理想)정치를 실시해 줄 군주(君主)를 찾는 것이었지만 어느 곳에 가도 채용되지 않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으로 오인되어 상해(傷害)를 당하고, 굶주리기도 하였다.

69세에 노나라로 돌아온 뒤 정계(政界)에의 기대를 버리고 제자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제자는 3000명에 이르며, 그 중 <6예(六藝;禮·樂·射·御·書·數)>에 통달한 사람이 72명이었다. 공자에 의하면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민자건·염백우·염중궁, 언어(言語)에는 재아(宰我)·자공(子貢), 정사(政事)에는 염유·계로(季路), 문학에는 자유(子游)·자하(子夏)가 뛰어났다. 이들을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 한다.

저작
공자는 6예 모두에 관계하였다고 생각된다. 즉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편찬하여 <예(禮)> <악(樂)>을 제정하였고, 《역경(易經)》을 주석(註釋)하였으며, 《춘추(春秋)》를 창작하였다. 오늘날에는 이 점이 의문시되고 있지만, 이들 경전(經典)이 과거에 중국(中國)에서 권위를 가졌던 것은 공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신앙(信仰) 때문이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제자 또는 재전(再傳)의 제자가 공자의 언행록(言行錄)을 편찬하였다. 《논어(論語, 20편)》가 그것으로, 공자의 사상을 알기 위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사상
공자는 난세(亂世)를 다스리려면 주(周)나라 초기의 제도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주나라는 두 왕조-夏·殷-를 본받아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였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라고 《논어》의 <팔일편(八佾篇)>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는 구체적으로 주나라 초기의 제도가 어떠한 것이었는가는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공자는 자신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통치형태를 과거를 통해 나타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위정자(爲政者)란 덕이 있어야 하며, 법령이나 정령(政令)에 의한 엄한 규제보다 도덕이나 예의(禮義)에 의한 교화(敎化)가 이상적인 지배방식이라고 생각하였다.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법령으로써 인도하고 형벌로써 다스린다면, 백성은 법망을 뚫고 형벌을 피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덕으로써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린다면, 백성은 수치를 알아 바른 길로 나아갈 것이다)>하였다(爲政篇). 공자는 최고의 도덕을 <인(仁)>이라 하고, 많은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로 설명하였다.

가장 명료한 것은 <樊遲問仁 子曰 愛人(樊遲가 인에 대하여 묻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 정의(定義)이다(顔淵篇). 그리스도교의 박애(博愛)나 불교의 자비(慈悲)와 비슷한 것 같지만, 부모에 대한 골육(骨肉)의 애정과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하여 원심적(遠心的)으로 타인에게까지 미친다는 점에서 조금은 이질적(異質的)이다.

공자가 말한 도덕에 의한 정치란, 효제에 의한 정치라고 말해도 괜찮다. 어떤 사람이 <선생께서는 어째서 정계(政界)에 나가시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書云 孝乎 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施亦政 政其爲爲政(《서경》에 이르기를 효도야말로 부모에게 孝順하고 형제끼리 우애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또한 정치를 하는 것이니, 어찌 일부러 정치를 하겠는가?)>라고 답하였다(爲政篇). 우원(迂遠)한 듯하지만 구중국의 지배형태는 저변(底邊)의 치안(治安)을 향당자치(鄕黨自治)에 맡김으로써 지배를 위한 노력을 절약하였다.

가족도덕 중심의 유교가 한(漢)나라부터 청(淸)나라까지 2000년 동안 지배의 이데올로기로서 채용되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공자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은 주술(呪術)로 신(神)의 뜻을 묻고, 이에 따라 행동하였다. 공자는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사람으로서의 도리에 힘쓰고 귀신을 경원하면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雍也篇). 인간은 양심의 명령과 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때문에 신을 존경하면서도 불가지(不可知)한 것으로서 생각하라는 것이다.

영향
공자는 자신을 성인(聖人)이라 칭하는것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100년 뒤 맹자(孟子)는 명료하게 공자를 성인이라고 하였다. 한(漢)나라 때 유교가 국교(國敎)가 되자(BC 136년), 공자는 점점 신비적인 예언자(豫言者)로 취급되었으며, 전한(前漢) 말에는 시호(諡號)가 추증되었다. 후한(後漢) 이후, 역대 왕조는 학교라든지 공자묘(孔子廟)에서 공자와 그의 고제(高弟)를 모시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그러나 신해혁명(辛亥革命, 1912) 뒤 우유[吳虞(오우)]와 루쉰[魯迅(노신)]은 공자를 중국의 봉건적 누습(陋習)의 근원이라고 하며 공격하였다. 그 논법(論法)은 1973년의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에서 정점(頂點)에 이르렀으나 4인방(四人幇)의 실각 이후 진정되고 있다.